[신간] 이승종, 『역사적 분석철학』 출간

연세대 철학과 이승종 교수님의 『역사적 분석철학』이 출간되었습니다. 작년부터 이 책이 출간될 것이라는 소식을 이승종 교수님께 들었고, 올해 1월에 이 책의 원고를 미리 읽어보았는데, 드디어 책이 정식으로 서점에 유통되었네요. 아주 놀라운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는 책인 데다, 책의 몇몇 부분에 제가 참여하기도 하여서, 이 책이 출간되기를 오랫동안 고대하였습니다.

"철학은 철학사이다."라는 헤겔의 유명한 주장과는 달리, 분석철학자들은 대체로 철학사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으로 악명 높습니다. 가령, 대표적인 미국의 분석철학자인 콰인은 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정말로 '철학' 자체에 관심 있는 사람들과 단순히 '철학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로 나누어진다고 농담을 던지기도 하였습니다.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진정한 철학자들이고, 철학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단순히 고전 애호가들일 뿐이라는 것이 콰인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책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칸트를 지나 데이빗슨과 맥도웰에 이르는 철학사의 흐름을 분석철학의 논의와 기법들을 사용하여 가로지릅니다. 오늘날 영미권 논리철학, 수학철학, 언어철학, 과학철학, 기술철학을 발생시킨 철학사적 맥락에 대한 비판적 논평이 이 책의 주된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 책이 제시하는 철학사 해석은 놀라울 만큼 참신하고 독특합니다. 철학사에 대한 백과사전식의 정보 나열을 넘어,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오늘날 정보통신기술 및 컴퓨터 과학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수학철학이 수학적 실재론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는지, 칸트의 비판철학이 현대의 양자역학과 과학철학의 관점에서 어떻게 평가될 수 있는지 등, 철학사의 고전적 논의들이 분석철학의 최첨단 담론들을 통해 재해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 책의 가장 놀라운 점은 이와 같은 철학사적 재해석과 논평을 통해 결국 '분석철학'이라는 분야 자체를 비판적으로 성찰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 책은 결코 분석철학이 철학사적으로 정통성이 있는 사유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또한 분석철학의 기법들이 철학사 해석 작업에서 얼마나 탁월한지를 강조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 책은 플라톤으로부터 오늘날 분석철학에 이르기까지의 역사가 철학을 단순히 '능력치 업(up)' 게임 정도로 만든 것이 아닌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철학이 형식화된 언어와 논리적 테크닉을 극도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결국 획일화된 기준에 따라 이루어지는 단순한 문제풀이 활동으로 전락해버린 것이 아닌지 고민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의 에필로그인 '탈분석철학'의 가장 마지막 문단은 곱씹어볼 만합니다.

소크라테스가 입안하고 데카르트가 뼈대를 세운 근대성은 민주주의를 지향한다. 민주주의는 상대가 누구이건 공평하게 합리적으로 다룬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Dostoevsky 1880, Book V)에서 예수를 심문한 대심문관이 그랬던 것처럼 현대철학에서는 합리성이 언어를 심문한다. "개폼 잡지 말고 말로 해보라"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의 말이건 어린애의 말이건 누가 한 말인지 혹은 해보고 하는 말인지는 상관이 없다. 그런 것을 따지는 것 자체가 권위에의 '오류'로 비난받는다. 그것은 각자의 말이라는 점에서 같고 오직 그 말이 얼마나 논증적인지에서만 다르다. 그런 점에서 프레게와 러셀과 타르스키는 분명 탁월하다. 요샛말로 그들은 각성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각성은 깨달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능력치의 업(up)을 의미하는 게임 용어이다. 그들은 논증으로 재정의된 철학이라는 게임의 고수이다. 여기서 의미가 변모한 것은 철학이나 각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합리성의 심문 대상인 언어 자체에 대한 개념이 달라졌다. 언어는 명석 판명함이라는 데카르트의 이념을 구현하고 있어야 하며, 형식화에 최적화된 수학적 인공언어를 지향한다. 대심문관의 닦달에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고전적 의미의 언어는 합리성의 닦달에 침묵한다. 합리성의 대화 상대자가 더 이상 자신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한 것이다. (이승종, 『역사적 분석철학』, 서강대학교출판부, 2024, 254-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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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을 부연해 주실 수 있나요? 저 문장에서의 '획일화된 기준'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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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구체적인 사례로는 하이데거의 '무' 개념에 대한 카르납의 냉소나, 케임브리지 대학이 데리다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하려고 했을 때 분석철학자들이 반발했던 사건 등이 생각나네요. "너희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따르는 표준적인 글쓰기 방식에 맞지 않는다. 그러니 그런 이야기는 애초에 진지하게 들을 가치가 없다."라는 식의 태도들을 염두에 두시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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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보건대, '철학이 형식화된 언어와 논리적 테크닉을 극도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벌어질 법한 일은 대규모의 형식 철학 라이브러리가 컴퓨터 언어로 개발되는 것입니다. 이는 형식화되지 않은 철학 이론을 무시하는 태도와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아마 기존의 철학 이론은 거의 다 형식화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형식화자(形式化者, formalizer)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으므로 무시하면 안 됩니다. 비록 형식화가 어려운 철학 이론에서 영감을 얻어 새로 만들어진 형식 철학 이론은 원래의 이론과 동떨어질 가능성이 높지만, 어쨌든 그런 작업도 의미 있는 학술 활동입니다.

미래에 철학계에서도 형식화자가 많아지더라도, 아마 그런 유행과 거리를 두며 비형식적으로 철학 이론을 세우는 학자들도 여전히 존재할 것입니다. 이야말로 바람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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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철학자 이상욱 교수님도 자기는 형식인식론 같이 문제풀이에 집중하는 철학 분야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신 적이 있습니다. 당대의 문제에 대해 통찰을 주는 것이 철학이 할 일이라고도 말하셨습니다. 형식적 접근이 통찰을 놓치게 되는 것에 대해 경계하신 것 같아요.

다른 한편으로 그레이엄 하먼은 브뤼노 라투르를 소개하는 네트워크의 군주(Prince of Networks)에서 분석철학자들은 글을 참 명료하게 쓰지만 재미없게 쓴다고도 말했죠.

두 사람 다 대륙철학적 전통에 있는 철학자(라투르, 육휘 등)에 호의적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쓰고 보니 이런 구분이 유구한 것이란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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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합니다. 아마 이승종 교수님의 입장도 이야기해주신 내용과 거의 유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승종 교수님이 ‘분석철학’, ‘형식화’, ‘문제풀이’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시긴 하시지만, 이런 것들은 완전히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거나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저 책의 초고를 읽을 때 모든 논증 가능한 경우의 수를 이승종 교수님이 알고리듬 형태로 도표화하신 부분들을 보면서 ‘텍스트를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분석하는 것은 과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특별히, 아리스토텔레스를 다루는 부분에서는 정말 집요할 정도로 분석을 수행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승종 교수님의 요지는 철학이 지나치게 협소해져서는 안 된다는 데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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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문제 풀이'로 당대의 문제에 대한 통찰을 주는 일이 (무진장 어렵겠지만)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아직 좋은 실례(實例)가 없네요.

중세 신학자들이나 괴델의 신 존재 증명을 형식화하는 것은 제게 몸풀기 훈련과 같습니다. 저한테 진짜 흥미로운 일은 응용 윤리학의 특정 주제에 관한 어느 한 주장을 형식화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린(Lean)으로 형식화한 사회 선택 이론 같은 기존 라이브러리를 먼저 정독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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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에 대해 퍽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풀이" 혹은 형식화의 다른 말은 "구체화" 같습니다. 그리고 구체화에는 (i) 현실에서의 응용 가능성이라는 이점이 있죠.

예컨대 (a) 어떠한 때 믿음 개변이 이루어진다는 논의보다는 (b) x, y, z 같은 사례에서 기준 I에 따라 신빙성이 더 높은 증거가 들어올수록 믿음 개변이 이루어진다는, 보다 "형식화된" 논의가 구체적 현실에서 더 응용할 가능성이 높다 전 여깁니다.

그리고 이는 철학이 할 수 있는 "다른 역할" 같기도 하고요. 굳이 철학의 범위를 "새로운 통찰"을 주는 예언자와 같은 지위로 제한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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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좀 오해할만하게 쓴 것 같습니다

이상욱 교수님이 형식화의 무용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애시당초에 물리학으로 석사학위까지 받으셨고 영미철학 전통에서 수학하서서 이 부분에 대해 충분한 경험을 겪으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상욱 교수님의 논지는 연구전통에서 생겨나는 근원성에의 정향과 지엽성에의 정향 같습니다. 문제풀이에 집중하다보면 지엽적인 문제를 주로 풀게 된다는 것이죠. 철학이 할 일은 그것이 아니고 근원적인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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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논리적 테크닉을 고도로 추구하는 게, 철학을 문제 풀이 활동으로 전락시킨 원인이 어떻게 되는지 의문이 들긴하네요. 전자의 추구와 후자의 발현이 어떻게 연관되는지가 궁금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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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이유를 설명할 수 있지만, 우리의 일상 언어가 지닐 수 있는 의미의 폭이 결코 특정한 체계나 형식에 가두어질 수 없을 만큼 무한히 넓고 다원적이라는 점이 이승종 교수님께서 '형식화'와 '문제풀이'에 반대하시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굉장히 비트겐슈타인적인 입장인 거죠.

가령,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시적 언어가 "내 마음은 H2O요."라는 말로 번역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에서 유의미하게 사용되는 언어들은 결코 단일한 기준에 따라 의미가 환원될 수가 없죠. 설령 형식화가 우리 일상 언어의 '특정한' 면모를 포착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될 수는 있다고 해도, 일상 언어의 '전체적' 면모를 포착하지는 못하고요.

바로 이 점에서, 몇몇 제한된 기준들만으로 언어를 형식화하여 의미와 진리치를 평가하려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는 게 이승종 교수님이 주장하시는 바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과학에서 인정되는 아주 협소한 언어 위에 철학을 성립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런 입장은 (반드시 이승종 교수님만의 입장이라기보다는) '시적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 대해 강조하는 하이데거, 가다머, 데리다, 리쾨르 등에게서도 폭넓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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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해지는 게 예시로 드신 시적언어(사실 굳이 시적언어에 국한하지 않는 일상언어)는 고전 논리와는 다른 논리를 따르는건가요?(즉 여전히 어떠한 체계 위에 있는것인가) 아니면 더 나아가 그 어떤 체계도 따르지 않는데 의미가 있고 우리가 탐구할 가치가 있는 언어의 면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걸까요?
첫번째라면 새로운 논리학의 탐구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이 지향되어야 할 거 같고, 후자는 그것이 연구의 대상인지 아니면 흔히 말하는 "횡성수설"인지 의심이 들 거 같습니다.

논리학 자체보다는, 일종의 논리철학적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는 고전 논리를 비롯한 논리학의 체계들이 결국 일상의 암묵적 실천을 명시화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브랜덤이 이런 입장을 제시하는 대표적인 철학자인데, 예전에 댓글에서 브랜덤의 입장을 간략히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입장에 따르면, 논리학조차도 결국 일상 언어에 의존합니다. 일상 언어가 논리학의 기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학이 일상 언어의 기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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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pseudo-철학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현실에는 무수히 많은 도사(?)들이 철학을 빙자해있는 듯합니다. 그들에게 대항하고 그들을 철학과 구분하는데에 그들의 말에서 모순을 찾아내거나 일관적이지 않음을 지적하는 방법이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이나 개똥철학(?)도 일상언어에는 속할 거 같은데, 논리학을 쓰지 않고 그들을 pseudo-철학이라고 평가하는게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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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아주 중요한 문제제기라고 생각해요. 여기에 대해서 이승종 교수님은 뮐러-라이어 착시를 예시로 사용해서 일상 언어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발견하고 해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세요. 뮐러-라이어 착시가 단순히 ‘착시’일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굳이 눈을 갈아끼우지 않고서도 자각할 수 있듯이, 일상 언어도 자신이 빠지는 문제들이 ‘사이비적’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자각할 능력을 지닌다는 거죠. 아래 강의의 44:10 이후에 관련 내용이 있습니다.

다만, 저는 이승종 교수님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이런 문제를 발견하고 해소하는 데 있어 논리학의 역할이 유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때의 ‘논리학’은 일상 언어와 전혀 다른 메타 언어로서의 논리학이 아니라, 일상 언어에 내재된 규범을 명료화한 담론으로서의 논리학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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