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장히 커다란 문제를 던져주셨네요. 몇 가지 주제로 세분화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1) 자연 언어가 한계나 결함을 지니고 있는가?
어떤 점에서 자연 언어 구문으로 명제를 표현하는 활동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20세기 초반의 수많은 분석철학자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2차적 담론을 논리적으로 더 근본적인 1차적 담론으로 환원하길 시도하였죠. 초기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 초기 에이어(A. J. Ayer), 초기 카르납(R. Carnap)이 바로 요소 명제들의 집합과 논리 구문론을 바탕으로 이 세계를 형식화된 언어 속에 완벽하게 표상할 수 있다고 믿었던 대표적인 인물들이고요.
그런데 (약간 오도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인공 언어(artificial language)'를 통해 자연 언어의 애매성이나 모호성을 극복하고서 세계의 구조를 완벽하게 표상하려고 한 이런 기획들은 철학사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오늘날에는 대개 평가받고 있어요. 특별히, 경험주의의 두 독단에 대한 콰인(W. V. O. Quine)의 비판이 이런 기획들을 무너뜨리는 게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었죠. 또한, 콰인 이외에도, 반증 가능성에 대한 포퍼의 논의, 언어 게임에 대한 후기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의 사유, 소여의 신화에 대한 셀라스(W. Sellars)의 비판, 도식/내용 이분법에 대한 데이비슨(D. Davidson)의 비판 등이 초기 분석철학의 인공 언어 기획이 지닌 한계를 광범위하게 지적하였기도 하고요.
그래서 오늘날에는 자연 언어의 결함을 강조한다거나 인공 언어로 자연 언어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을 찾기는 어려워요. 세계의 구조를 탐구하고자 하는 사이더 같은 형이상학자들조차도 굳이 자연 언어를 넘어서서 다른 인공 언어로 철학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는 않고요. 물론, 오늘날의 학술적 철학에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논리학적 능력이 거의 필수적인 것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과거처럼 논리학의 언어가 자연 언어보다 더욱 근본적이라거나 우월하다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아요. 오히려 다니엘 데넷 같은 최정상급의 분석철학자조차도 때로는 분석철학자들이 너무 쓸데 없이 논리 기호를 남발하여서 단순한 논의를 복잡한 것처럼 꾸민다고 불평을 하는 걸요. 이렇게요.
찰턴(1991: 5면)에 따르면, 분석철학자들 사이에서는 '당신의 논문에 논리적 기호를 뿌려 대는 것은 … 세련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조망에 대한 패스모어의 견해는 시야가 덜 좁은 편이다. 그는 '논리적 기호들은 증식하며', '철학적으로 도출할 때 필요한 요소가 아니라 종종 장식용 약어임'을 지적한다(1985: 6~7면). 예컨대 맥귄(1991)의 '인지적 폐쇄'(cognitive closure)라는 관념은 단지 어떤 현상이 우리 같은 생물의 인지 능력을 초월한다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그 관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정신 유형 M은, 만일 M의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개념 형성 절차가 속성 P를 파악하는(또는 T를 이해하는) 데까지 확장될 수 없다면,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속성 P나 이론 T에 대하여 닫혀 있다.' 데넷은 다음과 같이 평한다. '이 정의의 외견상의 엄밀성 때문에 오도되지 말라. 필자 A는 임의의 형식적 명제 D를 도출할 때 결코 어떠한 용도로도 U를 이용하지 않는다'(1991: 10면). (한스요한 글로크, 『분석철학이란 무엇인가?』, 한상기 옮김, 서광사, 2009, 322)
(2) 논리학은 '보편적 실재'의 절대적 질서와 공리의 지시체인가?
종종 형이상학자들 중에는 논리학이 보편적 실재의 구조를 반영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긴 해요. 하지만 이조차도 오늘날의 합의된 견해라기보다는, 논리학이 과연 어떠한 학문인지에 대한 한 가지 철학적 견해일 뿐이라고 할 수 있죠. 공학도이신 만큼 잘 아시겠지만, 사실 논리학은 단순히 전제와 결론이 맺고 있는 관계를 나타내는 학문이라서, 그 자체로는 아무런 형이상학적 함의를 지니고 있지 않아요. 논리학에서 성립하는 명제들 사이의 타당성 관계가 실재의 구조에 대응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논리학의 논의거리가 아니라 논리철학의 논의거리에요.
논리철학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논리학을 반드시 실재의 구조에 대한 학문으로 보지 않는 여러 가지 견해들이 존재하죠.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견해에요. 비트겐슈타인이 『수학의 기초에 관한 강의』에서 튜링을 비롯한 자신의 제자들과 논쟁하면서 강조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모순율'이라는 논리학적 법칙이 아무런 형이상학적 함의도 지니지 않는다는 점이었거든요. 튜링은 모순율을 무시하고서 다리를 지으면 그 다리는 무너진다고 말하면서 '모순율'과 현실 세계 사이에 모종의 형이상학적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였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튜링의 주장이 논리적 비약을 범하고 있다고 지적하죠.
가령, 머그컵으로는 고층 빌딩을 건설할 수 없다고 해서, 머그컵에 어떤 형이상학적 결함이 있는 게 아니잖아요. 단지, 머그컵은 고층 빌딩을 건설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도구이거나 적절하지 않은 재료일 뿐인 거죠. 마찬가지로, 모순을 포함하는 이론으로 다리를 건설할 수 없다고 해서, 모순을 포함하는 이론 자체에 어떤 형이상학적 결함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이야기에요. 모순율을 위반하는 이론이 공학에서 사용되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사실로부터, 모순율을 위반하는 이론은 세계의 구조를 그려내고 있지 않다는 결론이 곧바로 도출되지는 않는다는 거죠.
그리고 이런 식의 주장은 스트로슨(P. Strawson)이나 투겐트하트(E. Tugendhat) 같은 이후의 다른 철학자들도 받아들이고 있죠. 이들도, 비트겐슈타인과 매우 유사하게, 모순율이란 단지 우리가 술어를 사용하는 방식 때문에 생겨나는 법칙이라고 지적하거든요. 가령, "이 장미는 붉고, 이 장미는 붉지 않다."처럼 "a가 F이고 a가 F가 아니다."라는 형태의 논리적 구조를 지닌 문장이 제시된다면, 모순율은 이 문장의 술어가 더욱 세부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요구일 뿐이라는 거죠. "이 장미의 꽃잎은 붉고, 이 장미의 줄기는 붉지 않다."처럼 말이에요.
이런 견해를 좀 더 일반화하면, 브랜덤(R. Brandom)처럼 논리학을 우리의 암묵적 실천(implicit practice)으로부터 해명하는 추론주의적 입장이 나오기도 하죠. 논리학이라는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말하거나 행동할 때 따르는 규범을 반영하고 있는 학문일 뿐이지, 아무런 형이상학적 실재와도 대응하지 않는다는 거죠. 브랜덤은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올바른 추론(materially correct inference)'과 '형식적으로 타당한 추론(formally valid inference)'을 구분하거든요. 가령,
추론 1
피츠버그는 프린스턴의 서쪽에 있다.
따라서 프린스턴은 피츠버그의 동쪽에 있다.
이 추론은 '실질적으로' 올바른 추론이에요. 전제를 받아들이면 결론도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니까요. 그렇지만 이 추론이 '형식적으로' 타당한 추론인 것은 아니에요. 명제논리나 술어논리의 형식적 추론 규칙을 준수하지 않고 있으니까요. 만약 이 추론을 형식적으로 타당한 추론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이 해야겠죠.
추론 2
피츠버그는 프린스턴의 서쪽에 있다.
피츠버그는 프린스턴의 서쪽에 있다면, 프린스턴은 피츠버그의 동쪽에 있다.
따라서 프린스턴은 피츠버그의 동쪽에 있다.
그렇지만 추론 1이 추론 2의 축약형이라고 주장하는 건 사실 매우 이상한 생각이죠. 우리가 추론 2와 같은 형태의 엄격한 형식화된 추론을 먼저 배우고난 다음에야 추론 1과 같은 형태의 일상적 추론을 할 수 있게 되는 게 아니니까요. 오히려 실상은 정반대라는 게 브랜덤의 지적이에요. 우리의 일상적 말하기와 행동하기의 방식들에서는 추론 1이 이미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우리는 그 추론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 활동이 무엇인지를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하려는 과정에서 추론 2와 같은 형식화된 논증을 구성한다는 거죠.
그래서 논리학이란 우리가 일상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암묵적(implicit)' 규범을 '명시적(explicit)' 규칙의 형태로 표현한 학문이라는 게 브랜덤의 주장이에요. 세계의 구조나 이성의 구조가 먼저 주어져 있는 게 아닌 거죠. 단지 일상인들의 말하기 방식과 행동하기 방식이 존재하고 있고, 그 일상 언어 게임을 지배하는 문화적 규범이 존재하고 있고, 그 규범을 '규칙'이라는 성문화된 형식으로 다시 나타낸 결과물이 논리학이라는 거에요.
이렇게 본다면 논리학을 굳이 형이상학과 연결시킬 필요는 전혀 없어지죠. 물론,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비트겐슈타인, 스트로슨, 투겐트하트, 브랜덤의 논리철학을 지지하는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이 입장이 오늘날의 논리철학에서 합의된 사안이라거나 주류라고 보기는 힘들어요. 다만, 제가 강조하고 싶은 건, 논리학이 "'보편적 실재'의 절대적 질서와 공리"를 지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그 자체로 자명하지는 않다는 점이에요. 논리철학의 영역 안에서는 논리학의 함의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가 존재할 수 있어요. 논리학이 형이상학적 실재를 반영한다는 생각은 그 중 한 가지 철학적 견해일 뿐이지, 결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입장은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