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학-수학, 철학의 관계

안녕하세요, 올빼미 여러분. 3달 전쯤부터 철학과 논리학에 입문한 뉴비 철학도입니다. 글을 올리는 것은 처음이네요. 부족한 소양이 들킬까봐 조금은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저는 현재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있어 수학적 기호에 많이 노출되다 보니, 수학을 공부할 때마다 수리논리학이 겹쳐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즘 제가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이 수학과 논리학의 관계입니다.

사실 전 러셀 식 논리주의는 한계가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전 집합론의 사고 방식이 인간 이성의 본연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는 하지만, 주어-술어(주어들-관계들)의 문장적 표현이 가지는 명제 표상의 한계는 명확했기에, 그 부분이 러셀의 논리주의가 무너진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자연 언어의 구문으로 표현되는 명제의 표상은 그 한계가 크기에, 그 구문적인, 구조적인 한계를 넘기 위한 대안으로써 보다 폭넓은 기호들과 그들의 규칙(공리)의 집합이 수학이 아니었을까요?

결론적으로 저는 논리학과 수학이 바라보는 곳은 완벽히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둘 다 명제 표상을 인간이 표현하기 위한 '언어'라는 점에서 공통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좀 더 정교하고, 폭넓은 공리 표현의 도구로써 수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물리학과 수학의 관계와, 존재론과 논리학의 관계는 동치라고 생각합니다. 수학은 우주라는 계의 공리로써, 우주의 실재를 지시하는 물리학의 질서를 또한 지시하게 됩니다. 논리학은 존재라는 철학의 근원의 논리적 공간(logical space,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을 빌리겠습니다)에서 그의 공리를 지시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보편적 실재'의 절대적 질서와 공리의 지시체로써의 논리학과 수학에서, 그 의미론을 찾습니다. 덧붙여 존재와 우주는 가장 보편적인(universal) 개념이라는 점에서 결이 비슷합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가장 보편적인 개념 안에서 성립하는 질서의 지시체를 확인하고 인식하는 작업이 수학과 논리학이고, 이의 의미론을 따지는 작업이 철학이 아닐까요?

제가 생각라는 논리학과 수학, 그리고 철학의 삼각관계는 이와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한지 궁금합다.

이상, 어리석은 자의 작문이었습니다,,,

5개의 좋아요

수학적 대상에 대해 이들을 어떠한 존재론적 지위로 바라볼 것인가 하는 다양한 논의도 있지만..수학적 공리가 기본적으로 물리계를 지시하게 된다는건 좀 의견이 많이 갈릴 것 같긴 하네요.

수학의 기초론인 집합론을 시작할때 여러 공리가 있긴하지만, 존재론적으로 구체적인 대상이 직접적으로 제시되는건 공집합 하나뿐인데 이게 우주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어떠한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할 수 있을지 전 잘 모르겠습니다

5개의 좋아요

아주 다양하고 섬세한 쟁점들이 얽혀 있기에 모든 지점에 대해서 충분한 답을 나누기는 쉽지 않을 것 같기에,

수학과 논리학의 관계

에 대해서만 간략히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논리학과 수학 각각에 대한 (상세사항을 지극히 생략한 형태의) '전통적인' 규정부터 살펴보는게 유용할 것 같습니다. 논리학의 '전통적인' 탐구 대상은

어떻게 추론하는 것이 옳은가?

입니다. 이런 규정 하에서 따라나오는 논리학의 대표적인 전통적 특징은 바로 주제-중립성입니다. 참된 논리학적 법칙은 대지의 현상이 되었건, 도덕의 영역이 되었던, 천상의 조화가 되었건 그 어떤 주제든 보편적으로 성립해야한다는 것이 논리학에 대한 한가지 전통적 시각입니다.

그런데 전통적 관점에서 수학은 결코 주제-중립적인 학문이 아닙니다. 왜냐면 수학은

수, 기하학적 대상 등 "수학적 대상"들 간에 성립하는 법칙은 무엇인가?

를 탐구하는 학문이며, 곧 '수, 기하학적 대상 등 "수학적 대상들"'이라는 매우 구체적이며 '실재적인' 주제를 갖는다는게 전통적인 시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전통적 시각에서 논리학과 수학의 관계는 예컨대 논리학과 법학의 관계와 크게 다르다고 보기 힘듭니다. 그리고 이런 전통적 시각을 배경사항으로 고려할 때에만 비로소 19세기 말 시작된 논리주의 프로그램이 왜 그토록 충격적이며 도발적인 입장으로 여겨졌는지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8개의 좋아요

좀더 자세한 설명이 주어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엄밀하게 가자면 사정이 복잡해지겠습니다만) 프레게-러셀 등이 개척한 현대 논리학이 갖는 의의는 다름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내려온 "주어-술어"틀에 입각한 논리학의 한계를 극복해낸 것이라고 말하고들 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집합론'인지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위와 마찬가지로 심히 엄밀치 못한 말을 뻥뻥 던지는 것 같아 찔립니다만) 소위 Naive set theory는 러셀의 역설을 비롯해서 원리적인 문제에 부딪히는 것 같습니다. ZF는 "무한집합이 있다"는, 대단히 중대한 명제를 그냥 공리로 삼습니다. 이런 사항들을 고려할 때, 집합론과 "인간 이성의 본연"을 연결시키기 위해선 대단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 언어의 구문으로 표현되는 명제의 표상에는 한계가 크기에, 그 구문적인, 구조적인 한계를 넘기 위한 보다 폭넓은 기호들과 그들의 규칙(공리)의 집합이 수학이 아니었을까요?

걸리는 부분들이 여럿 있기는 합니다만 (예. 수학에 있어서 "기호"는 필연적이지는 않습니다), 큰 틀에서 맞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규정은 꼭 논리학에 한정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수리물리학, 수리경제학 ... 등 각종 분야에서도 수학을 '도구'로서 유용하게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많이 인용되는 좋은 '은유'라고 생각합니다만, 사실 "철학"이라는 따분한 맥락 하에서는 엄밀하지 못하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인 것 같습니다. 왜냐면 논리학과 수학은 다 (증명이라는 과정을 통해 ) 특정한 '참'을 밝혀내고자 하는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언어는 논리학, 수학 ... 을 위시한 뭇 '참'을 밝히는 활동에 있어서 불가결한 역할을 합니다만, 그 자체로 무언가 '참'을 밝혀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고리타분한 관점에서 말하자면, 이는 범주 오류에 해당될 우려가 있습니다.

7개의 좋아요

굉장히 커다란 문제를 던져주셨네요. 몇 가지 주제로 세분화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1) 자연 언어가 한계나 결함을 지니고 있는가?

어떤 점에서 자연 언어 구문으로 명제를 표현하는 활동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20세기 초반의 수많은 분석철학자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2차적 담론을 논리적으로 더 근본적인 1차적 담론으로 환원하길 시도하였죠. 초기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 초기 에이어(A. J. Ayer), 초기 카르납(R. Carnap)이 바로 요소 명제들의 집합과 논리 구문론을 바탕으로 이 세계를 형식화된 언어 속에 완벽하게 표상할 수 있다고 믿었던 대표적인 인물들이고요.

그런데 (약간 오도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인공 언어(artificial language)'를 통해 자연 언어의 애매성이나 모호성을 극복하고서 세계의 구조를 완벽하게 표상하려고 한 이런 기획들은 철학사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오늘날에는 대개 평가받고 있어요. 특별히, 경험주의의 두 독단에 대한 콰인(W. V. O. Quine)의 비판이 이런 기획들을 무너뜨리는 게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었죠. 또한, 콰인 이외에도, 반증 가능성에 대한 포퍼의 논의, 언어 게임에 대한 후기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의 사유, 소여의 신화에 대한 셀라스(W. Sellars)의 비판, 도식/내용 이분법에 대한 데이비슨(D. Davidson)의 비판 등이 초기 분석철학의 인공 언어 기획이 지닌 한계를 광범위하게 지적하였기도 하고요.

그래서 오늘날에는 자연 언어의 결함을 강조한다거나 인공 언어로 자연 언어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을 찾기는 어려워요. 세계의 구조를 탐구하고자 하는 사이더 같은 형이상학자들조차도 굳이 자연 언어를 넘어서서 다른 인공 언어로 철학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는 않고요. 물론, 오늘날의 학술적 철학에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논리학적 능력이 거의 필수적인 것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과거처럼 논리학의 언어가 자연 언어보다 더욱 근본적이라거나 우월하다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아요. 오히려 다니엘 데넷 같은 최정상급의 분석철학자조차도 때로는 분석철학자들이 너무 쓸데 없이 논리 기호를 남발하여서 단순한 논의를 복잡한 것처럼 꾸민다고 불평을 하는 걸요. 이렇게요.

찰턴(1991: 5면)에 따르면, 분석철학자들 사이에서는 '당신의 논문에 논리적 기호를 뿌려 대는 것은 … 세련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조망에 대한 패스모어의 견해는 시야가 덜 좁은 편이다. 그는 '논리적 기호들은 증식하며', '철학적으로 도출할 때 필요한 요소가 아니라 종종 장식용 약어임'을 지적한다(1985: 6~7면). 예컨대 맥귄(1991)의 '인지적 폐쇄'(cognitive closure)라는 관념은 단지 어떤 현상이 우리 같은 생물의 인지 능력을 초월한다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그 관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정신 유형 M은, 만일 M의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개념 형성 절차가 속성 P를 파악하는(또는 T를 이해하는) 데까지 확장될 수 없다면,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속성 P나 이론 T에 대하여 닫혀 있다.' 데넷은 다음과 같이 평한다. '이 정의의 외견상의 엄밀성 때문에 오도되지 말라. 필자 A는 임의의 형식적 명제 D를 도출할 때 결코 어떠한 용도로도 U를 이용하지 않는다'(1991: 10면). (한스요한 글로크, 『분석철학이란 무엇인가?』, 한상기 옮김, 서광사, 2009, 322)

(2) 논리학은 '보편적 실재'의 절대적 질서와 공리의 지시체인가?

종종 형이상학자들 중에는 논리학이 보편적 실재의 구조를 반영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긴 해요. 하지만 이조차도 오늘날의 합의된 견해라기보다는, 논리학이 과연 어떠한 학문인지에 대한 한 가지 철학적 견해일 뿐이라고 할 수 있죠. 공학도이신 만큼 잘 아시겠지만, 사실 논리학은 단순히 전제와 결론이 맺고 있는 관계를 나타내는 학문이라서, 그 자체로는 아무런 형이상학적 함의를 지니고 있지 않아요. 논리학에서 성립하는 명제들 사이의 타당성 관계가 실재의 구조에 대응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논리학의 논의거리가 아니라 논리철학의 논의거리에요.

논리철학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논리학을 반드시 실재의 구조에 대한 학문으로 보지 않는 여러 가지 견해들이 존재하죠.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견해에요. 비트겐슈타인이 『수학의 기초에 관한 강의』에서 튜링을 비롯한 자신의 제자들과 논쟁하면서 강조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모순율'이라는 논리학적 법칙이 아무런 형이상학적 함의도 지니지 않는다는 점이었거든요. 튜링은 모순율을 무시하고서 다리를 지으면 그 다리는 무너진다고 말하면서 '모순율'과 현실 세계 사이에 모종의 형이상학적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였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튜링의 주장이 논리적 비약을 범하고 있다고 지적하죠.

가령, 머그컵으로는 고층 빌딩을 건설할 수 없다고 해서, 머그컵에 어떤 형이상학적 결함이 있는 게 아니잖아요. 단지, 머그컵은 고층 빌딩을 건설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도구이거나 적절하지 않은 재료일 뿐인 거죠. 마찬가지로, 모순을 포함하는 이론으로 다리를 건설할 수 없다고 해서, 모순을 포함하는 이론 자체에 어떤 형이상학적 결함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이야기에요. 모순율을 위반하는 이론이 공학에서 사용되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사실로부터, 모순율을 위반하는 이론은 세계의 구조를 그려내고 있지 않다는 결론이 곧바로 도출되지는 않는다는 거죠.

그리고 이런 식의 주장은 스트로슨(P. Strawson)이나 투겐트하트(E. Tugendhat) 같은 이후의 다른 철학자들도 받아들이고 있죠. 이들도, 비트겐슈타인과 매우 유사하게, 모순율이란 단지 우리가 술어를 사용하는 방식 때문에 생겨나는 법칙이라고 지적하거든요. 가령, "이 장미는 붉고, 이 장미는 붉지 않다."처럼 "a가 F이고 a가 F가 아니다."라는 형태의 논리적 구조를 지닌 문장이 제시된다면, 모순율은 이 문장의 술어가 더욱 세부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요구일 뿐이라는 거죠. "이 장미의 꽃잎은 붉고, 이 장미의 줄기는 붉지 않다."처럼 말이에요.

이런 견해를 좀 더 일반화하면, 브랜덤(R. Brandom)처럼 논리학을 우리의 암묵적 실천(implicit practice)으로부터 해명하는 추론주의적 입장이 나오기도 하죠. 논리학이라는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말하거나 행동할 때 따르는 규범을 반영하고 있는 학문일 뿐이지, 아무런 형이상학적 실재와도 대응하지 않는다는 거죠. 브랜덤은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올바른 추론(materially correct inference)'과 '형식적으로 타당한 추론(formally valid inference)'을 구분하거든요. 가령,

추론 1

피츠버그는 프린스턴의 서쪽에 있다.
따라서 프린스턴은 피츠버그의 동쪽에 있다.

이 추론은 '실질적으로' 올바른 추론이에요. 전제를 받아들이면 결론도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니까요. 그렇지만 이 추론이 '형식적으로' 타당한 추론인 것은 아니에요. 명제논리나 술어논리의 형식적 추론 규칙을 준수하지 않고 있으니까요. 만약 이 추론을 형식적으로 타당한 추론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이 해야겠죠.

추론 2

피츠버그는 프린스턴의 서쪽에 있다.
피츠버그는 프린스턴의 서쪽에 있다면, 프린스턴은 피츠버그의 동쪽에 있다.
따라서 프린스턴은 피츠버그의 동쪽에 있다.

그렇지만 추론 1이 추론 2의 축약형이라고 주장하는 건 사실 매우 이상한 생각이죠. 우리가 추론 2와 같은 형태의 엄격한 형식화된 추론을 먼저 배우고난 다음에야 추론 1과 같은 형태의 일상적 추론을 할 수 있게 되는 게 아니니까요. 오히려 실상은 정반대라는 게 브랜덤의 지적이에요. 우리의 일상적 말하기와 행동하기의 방식들에서는 추론 1이 이미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우리는 그 추론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 활동이 무엇인지를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하려는 과정에서 추론 2와 같은 형식화된 논증을 구성한다는 거죠.

그래서 논리학이란 우리가 일상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암묵적(implicit)' 규범을 '명시적(explicit)' 규칙의 형태로 표현한 학문이라는 게 브랜덤의 주장이에요. 세계의 구조나 이성의 구조가 먼저 주어져 있는 게 아닌 거죠. 단지 일상인들의 말하기 방식과 행동하기 방식이 존재하고 있고, 그 일상 언어 게임을 지배하는 문화적 규범이 존재하고 있고, 그 규범을 '규칙'이라는 성문화된 형식으로 다시 나타낸 결과물이 논리학이라는 거에요.

이렇게 본다면 논리학을 굳이 형이상학과 연결시킬 필요는 전혀 없어지죠. 물론,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비트겐슈타인, 스트로슨, 투겐트하트, 브랜덤의 논리철학을 지지하는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이 입장이 오늘날의 논리철학에서 합의된 사안이라거나 주류라고 보기는 힘들어요. 다만, 제가 강조하고 싶은 건, 논리학이 "'보편적 실재'의 절대적 질서와 공리"를 지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그 자체로 자명하지는 않다는 점이에요. 논리철학의 영역 안에서는 논리학의 함의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가 존재할 수 있어요. 논리학이 형이상학적 실재를 반영한다는 생각은 그 중 한 가지 철학적 견해일 뿐이지, 결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입장은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11개의 좋아요

마지막 글귀에 대한 반론은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언어가 항상 명제로써의 본분을 다하는 형태인 것도 아니고, 그러기 위해서 발명된 것도 아니니까요. 좋은 글과 의견 감사합니다 :)

제가 생각하는 인간 이성의 본연은

'범주적 사고를 통한, 가장 상위 개념(보편)으로의 필연적 흐름 및 사유'

입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말하는 '이성'의 종착지와 맥이 비슷합니다. 다만 그 종착지가 신/우주/영혼, 3가지 범주로 귀결되고 그 너머는 인식 불가능의 영역이지만, 그를 향한 인간 이성의 사유의 권리는 보호된다, 라는 명제에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저는 논리학이 수학과 비교되는 특징중 하나로 권위에 호소하는등의 비형식적인 오류들을 다룰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철학은 형이상학이나 인식/존재론을 다룰수 있어 수학과는 차이가 어느정도 있다고 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