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모순율이 필연성을 지니는 근거를 찾기 위해 모순율을 정당화하는 법칙을 제시하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이러한 시도는 모순율을 정당화하는 법칙을 다시 정당화하기 위해 또 다른 법칙을 제시해야 한다. 더 나아가, 새롭게 등장한 법칙을 다시 정당화하기 위해 역시 또 다른 법칙을 제시해야 한다. 따라서 모순율을 정당화하기 위해 제시된 법칙의 계열은 무한퇴행에 빠지고 만다.
모순율이 필연성을 지니는 근거를 결단주의적으로 해명하려는 시도 역시 문제를 지니고 있다. 모순율이 일종의 선결정 행위를 바탕으로 필연성을 지니게 된다는 입장은 모순율에 대한 반대 역시 일종의 선결정 행위를 바탕으로 필연성을 지닐 수 있다는 입장을 인정해야 한다. 다만, 모순율에 반대하는 결단이 실제로 가능할 수 있는지가 논의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결단’에 호소하는 입장이 우리가 모순율을 받아들이는 이유에 대해 실질적으로 아무런 해명도 하고 있지 않다는 문제가 핵심이다. 결단주의는 우리가 모순율을 선택한 근거를 해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순율을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물어야 하는 사안은 “모순의 필연성이 ‘왜’ 정당화되는가?”가 아니라 “모순의 필연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즉, 모순율이 필연성을 지닌다는 주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순율을 필연성을 지닌 법칙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투겐트하트와 볼프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즉 우리의 물음 자체가 유의미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것은 모순율의 필연성이 무엇에 (어떤 다른 법칙에) 근거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필연성이란 어디에 근거하는가, 필연성의 본질은 무엇인가일 뿐이다.(투겐트하트 & 볼프, 1999: 53)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등장하는 해명
아리스토텔레스는 “a가 F이고 a가 F가 아님은 필연적으로 거짓이다.”라는 형식만으로 모순율을 정의하려는 시도가 한계를 지닌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가령, ‘a’라는 대상에 t1 시점에서는 “F이다.”라는 술어가 부과되고 t2 시점에서는 “F가 아니다.”라는 술어가 부과되는 상황에서는 “a가 F이고 a가 F가 아님은 필연적으로 거짓이다.”라는 형식이 부정된다. 즉, 모순율이 “a가 F이고 a가 F가 아님은 필연적으로 거짓이다.”라는 형식만으로 확정된다는 입장은 모순율의 필연성을 보장하지 못한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모순율에 대한 정의에 ‘a’라는 대상에 “F이다.”와 “F가 아니다.”라는 술어가 ‘동시에’ 주어질 수 없다는 부언이 요구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순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하나의 동일한 것(술어)이 하나의 동일한 것(주어)에 동일한 관점에 따라 동시에 주어지고 또한 주어지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부언을 통해 모순율의 필연성을 보장하려는 입장 역시 한계를 지닌다. 동일한 대상에 대해 상반되는 술어가 부과될 수 있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 가령, 우리는 대상을 서로 다른 위치에서 바라보는 방식으로 동일한 대상에 상반되는 술어를 부과할 수도 있다(“이 튤립은 [옆에서 보면] 원주형이지만 [위에서 보면] 원주형이 아니다.”). 우리는 대상의 서로 다른 부분에 주목하는 방식으로 동일한 대상에 상반되는 술어를 부과할 수도 있다(“이 튤립은 [꽃 부분은] 붉지만 [줄기 부분은] 붉지 않다.”). 우리는 대상이 지닌 모호성에 주목하는 방식으로 동일한 대상에 상반되는 술어를 부과할 수도 있다(“이 튤립은 [붉은 색에 가깝다고 보면] 붉지만 [보라색에 가깝다고 보면] 붉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모순율을 정립하려는 시도가 대단히 자의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는 모순율을 직접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가 성공할 수 없다고 본다. 다만, 모순율을 부정하고자 하는 시도를 부정하여 간접적인 방식으로 모순율을 증명하고자 할 뿐이다. 즉, 모순율을 부정하고자 하는 사람조차 “a가 F이고 a가 F가 아니다.”라는 진술을 통해 무엇인가를 말해야 한다. “a가 F이고 a가 F가 아니다.”라는 진술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그 말이 이해될 수 있는 어떤 특정한 것(horismenon)을 제공해야 한다. 문제는 하나의 술어가 어떤 특정한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 반대를 의미하는 상황에서는 그 술어가 아무런 특정한 것도 의미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a가 F이고 a가 F가 아니다.”라는 진술을 말하고 있는 사람은 사실 아무런 말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투겐트하트와 볼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주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우리는 이미 제1장에서 모순율의 필연성이──그리고 이에 근거하고 있는 논리적인 것의 필연성 일반이──존재의 (현실의) 본질에 또는 사유의 본질에 또는 언어의 본질에 근거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한 바 있다. 이 물음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명백한 해답을 제시한다: 말한다는 것의, 그리고 바로 이해할 무엇을 제공한다는 것의 가능 조건은 어떤 특정한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어떻게 모순율이 도출되는가는 아직도 완벽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그 다음 문맥에서 보여주려고 시도한다(1006a 31 계속): 우리는 술어 문장에서, 술어가 어떤 특정한 것을 의미한다면, 어떤 특정한 것만을 말할 수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제 그의 사유 과정을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1006a 28-34) : 술어(예를 들면 “사람”)가 어떤 일정한 것을 의미한다면 이것은 동시에 그 반대(예를 들면, “사람이 아님”)를 의미할 수 없다. 즉 어떤 것에 그것이 사람이라고 진실에 맞게 말할 수 있다면, 동시에 역시 진실에 맞게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투겐트하트 & 볼프, 1999: 57-58)
스트로슨의 『논리적 이론 입문』에 등장하는 해명
스트로슨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모순율에 대해 주장한 내용을 더 분명하게 만들어주는 논의를 제시한다. 그는 술어의 의미가 술어의 기능을 바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술어는 대상을 분류하는 기능을 지닌다. 특정한 술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술어가 대상을 어떠한 방식으로 분류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술어의 의미란 분류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성립할 수 없다. 투겐트하트와 볼프는 스트로슨이 제시한 논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한 술어의 사용의 의미는──그것의 기능은──스트로슨에 의하면 술어를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대상을 분류한다는(비교하고 구별한다는) 것이다. 즉, “그러하지 않다”에 대한 “그러하다”의 대립화는 처음부터 술어의 의미에 속하는데, 그 술어를 우리는 모든 술어적 진술에서 표현되는 서술의 행위로부터 독립해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투겐트하트 & 볼프, 1999: 59-60)
대상을 분류하는 활동은 경계선을 긋는 활동에 비유될 수 있다. 우리는 술어를 통해 세계에 경계선을 긋는다. 분류란 경계선으로 나누어진 각각의 영역 중 어느 특정한 영역에 대상을 포함시키는 작업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술어가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그 술어가 대상을 어느 쪽에 포함시키는지가 분명해야 한다. 분류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술어는 자신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무의미한 술어일 뿐이다.
스트로슨은 모순율에 대한 부정이 술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술어의 기능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지적한다. 즉, “F이다.” 혹은 “F가 아니다.”는 애초에 대상 a를 어느 한쪽 영역에 분류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술어이다. 그러나 “a가 F이고 a가 F가 아니다.”라는 진술은 대상 a를 서로 다른 두 영역에 동시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술어를 사용하고자 하는 시도는 술어의 기능을 무시한다. 여기서 우리는 대상 a가 어떻게 분류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제공받지 못한다. 따라서 a를 “F이다.”와 “F가 아니다.”라는 영역에 동시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발화는 진술로서 의미를 지닐 수조차 없다. 투겐트하트와 볼프는 스트로슨이 제시한 논의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모순율에 대한 결과를 이제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술어적 서술의 정보치가 그 술어적 서술을 통해서 대상이 한 경계선의 어떤 측면이 아니라 다른 측면에 자리잡게 되는 점이 본질이라면, 대상을 선의 두 측면 모두에 자리잡을 경우 그 정보치가 바로 영(無)임이 직접적으로 도출된다. 그렇다면 바로 이 점에서 엄밀히 말해 이해할 어떤 것도 제공하지 않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이 정확하게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장기놀이에서 한 수를 두고 곧바로 그것을 되돌리는 것과 같은 태도다.(투겐트하트 & 볼프, 1999: 60)
이러한 논의는 모순율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정교하게 다루지 못한 문제를 해명하는 작업에도 유익하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의 대상에 두 가지 이상의 서로 상이한 술어가 동시에 부여되는 상황에서 모순이 발생한다고 본다. 그러나 “붉다”라는 술어와 “뾰족하다.”라는 술어가 서로 상이하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은 붉고 또한 뾰족하다.”라는 진술이 무의미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의 대상이 두 가지 이상의 서로 배제하는 영역으로 동시에 분류되는 상황에서 모순이 발생한다고 지적해야 한다. 즉, 두 가지 이상의 서로 상이한 술어가 하나의 진술에서 동시에 사용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진술이 모순에 빠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것은 붉다.”라는 진술로 특정한 경계선을 그은 이후에 “그것은 또한 뾰족하다.”라는 진술로 그 경계선 안에서 다시 경계선을 긋는 방식으로 말하고자 하는 영역을 모순 없이 더욱 세분화할 수 있다. 다만, 대상을 ‘붉은’, ‘푸른’, ‘노란’처럼 서로 배제하는 ‘비양립적 영역(incompatible-range)’에 동시에 포함시키려고 하는 시도에서는 모순이 발생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각각의 술어가 완전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더라도 모순율이 성립한다는 사실 역시 술어의 기능에 대한 논의를 통해 드러난다. 가령, 우리는 붉은색과 보라색 사이에 있는 모호한 대상에 대해 “그것은 붉고 또한 붉지 않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이 가능하다는 사실로부터 모순율이 부정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모순율은 “그것은 붉고 또한 붉지 않다.”라는 진술을 더 세분화하여 규정하라는 요구로서 의미를 지닌다. 모순율을 고수하는 사람은 “그것은 붉고 또한 붉지 않다.”라는 진술이 어떤 측면에서는 정당한 대답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측면에서는 여전히 더 해명되어야 하는 대답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투겐트하트와 볼프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 모순율은 우리가 완벽하게 규정된 술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결코 전제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모순율은(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해 서술의 의미는) 특정한 상황에서는 술어를 좀 더 정확히 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함축하고 있다. 좀 더 정확하게 규정되어 있다고 함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모순율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우리가 보았듯이 모순율의 정형적인 표현에서 요구되는 모든 제한적 관점들을 미리 열거할 수 없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제 왜 모순율을 고수하는 사람이 계속적으로 새로운 가상적 모순을 지적하는 사람에 대해 어떤 방식에서 항상 뒤쫓아가야만 하는지도 이해된다. 여기에서의 긴장 관계는 “예 또는 아니오”의 의미에서 규정화를 요구하는 술어적 서술의 의미와 항상 어느 정도만 규정되어 있으면서 실제로 사용되는 술어 사이의 긴장 관계다. (투겐트하트 & 볼프, 1999: 63)
따라서 모순율이란 실재를 구성하는 형이상학적 법칙이나 언어를 정초하는 통사론적 규칙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발화하는 진술이 의미를 지닐 수 있도록 술어를 통해 대상을 적절하게 분류해달라는 의미론적 요구이다. 즉, 모순율을 정당화하거나 부정하는 사실이란 실재 속에서도 언어 속에서도 미리 존재하고 있지 않다. 진술이 지닌 의미가 문제되는 상황에서 술어를 더욱 세분화하여야 할 필요성 생겨날 때에야 비로소 모순율을 준수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시될 뿐이다. 투겐트하트와 볼프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분석 문장이 타당하다는, 즉 다른 것일 수 없다는 말은 단지 그렇지 않으면 모순이 결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이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아니다. 그리고 모순율이 자체적으로 타당하다는 말은 단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는 말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말함 자체가 중지되어야 한다는 말이다──이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아니다.(투겐트하트 & 볼프, 1999: 64-65)
비판적 평가
(1) 모순율을 준수해야 할 필요성을 술어의 기능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해명하고자 하는 입장은 매우 설득력 있어 보인다. 이러한 입장은 모순율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사유를 원천적으로 해소한다. 즉, 우리는 모순율을 정초하는 이론적 토대를 상정하기 위해 형이상학적 독단주의를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순을 정초하는 이론적 토대를 부정하기 위해 논리적 회의주의에 빠져야 할 필요 역시 없다. “a가 F이고 a가 F가 아니다.”라는 진술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지 않은 상태로 모순을 정초하거나 부정하고자 하는 입장은 사실 자신들이 도대체 무엇을 시도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2) 우리는 모순율이 우리의 이해 가능성에 따라 상대적으로 성립한다고 지적할 수 있다. “a가 F이고 a가 F가 아니다.”라는 통사론적 형식을 지닌 모든 진술이 모순율을 위반하는 것은 아니다. 특정한 진술이 모순율을 위반하는지는 그 진술이 우리의 이해 가능성을 벗어나는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즉, “a가 F이고 a가 F가 아니다.”라는 통사론적 형식을 지닌 진술이 서로 다른 두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진술이 두 사람 모두에게 모순율을 위반한 진술로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해당 진술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 진술이 대화에서 제대로 기능할 수 없는 무의미한 방식으로 술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해당 진술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사람에게는 그 진술이 대상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유의미한 방식으로 술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3) 이러한 논의는 모순이 해소되는 과정을 정신이 운동하는 과정이라고 파악한 헤겔의 철학을 해명하는 작업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가령, 변증법의 각 단계에서 정신은 자신의 이해 가능성을 벗어난 문제와 직면하여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경험한다. 모순은 정신을 딜레마 속에 빠뜨리는 방식으로 정신이 자신의 이해 가능성에 내재된 한계를 자각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모순을 통해 발생한 딜레마는 정신이 자신의 이해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상황에서는 해소된다. 따라서 끊임없이 기존 모순을 해소하고 새로운 모순과 직면하게 되는 과정이란 정신이 자신의 이해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과정이다. 헤겔의 철학은 정신이 자신의 이해 가능성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이전까지 모순이라고 받아들여진 문제를 점점 더 많이 해소하게 되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
투겐트하트, 에른스트 & 볼프, 우슬라., 『논리-의미론적 예비학』, 하병학 옮김, 철학과현실사, 1999, 제4장.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