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율을 왜 준수해야 하는가?: 에른스트 투겐트하트 & 우슬라 볼프, 『논리-의미론적 예비학』 제4장

필연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모순율이 필연성을 지니는 근거를 찾기 위해 모순율을 정당화하는 법칙을 제시하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이러한 시도는 모순율을 정당화하는 법칙을 다시 정당화하기 위해 또 다른 법칙을 제시해야 한다. 더 나아가, 새롭게 등장한 법칙을 다시 정당화하기 위해 역시 또 다른 법칙을 제시해야 한다. 따라서 모순율을 정당화하기 위해 제시된 법칙의 계열은 무한퇴행에 빠지고 만다.

모순율이 필연성을 지니는 근거를 결단주의적으로 해명하려는 시도 역시 문제를 지니고 있다. 모순율이 일종의 선결정 행위를 바탕으로 필연성을 지니게 된다는 입장은 모순율에 대한 반대 역시 일종의 선결정 행위를 바탕으로 필연성을 지닐 수 있다는 입장을 인정해야 한다. 다만, 모순율에 반대하는 결단이 실제로 가능할 수 있는지가 논의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결단’에 호소하는 입장이 우리가 모순율을 받아들이는 이유에 대해 실질적으로 아무런 해명도 하고 있지 않다는 문제가 핵심이다. 결단주의는 우리가 모순율을 선택한 근거를 해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순율을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물어야 하는 사안은 “모순의 필연성이 ‘왜’ 정당화되는가?”가 아니라 “모순의 필연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즉, 모순율이 필연성을 지닌다는 주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순율을 필연성을 지닌 법칙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투겐트하트와 볼프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즉 우리의 물음 자체가 유의미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것은 모순율의 필연성이 무엇에 (어떤 다른 법칙에) 근거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필연성이란 어디에 근거하는가, 필연성의 본질은 무엇인가일 뿐이다.(투겐트하트 & 볼프, 1999: 53)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등장하는 해명

아리스토텔레스는 “a가 F이고 a가 F가 아님은 필연적으로 거짓이다.”라는 형식만으로 모순율을 정의하려는 시도가 한계를 지닌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가령, ‘a’라는 대상에 t1 시점에서는 “F이다.”라는 술어가 부과되고 t2 시점에서는 “F가 아니다.”라는 술어가 부과되는 상황에서는 “a가 F이고 a가 F가 아님은 필연적으로 거짓이다.”라는 형식이 부정된다. 즉, 모순율이 “a가 F이고 a가 F가 아님은 필연적으로 거짓이다.”라는 형식만으로 확정된다는 입장은 모순율의 필연성을 보장하지 못한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모순율에 대한 정의에 ‘a’라는 대상에 “F이다.”와 “F가 아니다.”라는 술어가 ‘동시에’ 주어질 수 없다는 부언이 요구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순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하나의 동일한 것(술어)이 하나의 동일한 것(주어)에 동일한 관점에 따라 동시에 주어지고 또한 주어지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부언을 통해 모순율의 필연성을 보장하려는 입장 역시 한계를 지닌다. 동일한 대상에 대해 상반되는 술어가 부과될 수 있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 가령, 우리는 대상을 서로 다른 위치에서 바라보는 방식으로 동일한 대상에 상반되는 술어를 부과할 수도 있다(“이 튤립은 [옆에서 보면] 원주형이지만 [위에서 보면] 원주형이 아니다.”). 우리는 대상의 서로 다른 부분에 주목하는 방식으로 동일한 대상에 상반되는 술어를 부과할 수도 있다(“이 튤립은 [꽃 부분은] 붉지만 [줄기 부분은] 붉지 않다.”). 우리는 대상이 지닌 모호성에 주목하는 방식으로 동일한 대상에 상반되는 술어를 부과할 수도 있다(“이 튤립은 [붉은 색에 가깝다고 보면] 붉지만 [보라색에 가깝다고 보면] 붉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모순율을 정립하려는 시도가 대단히 자의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는 모순율을 직접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가 성공할 수 없다고 본다. 다만, 모순율을 부정하고자 하는 시도를 부정하여 간접적인 방식으로 모순율을 증명하고자 할 뿐이다. 즉, 모순율을 부정하고자 하는 사람조차 “a가 F이고 a가 F가 아니다.”라는 진술을 통해 무엇인가를 말해야 한다. “a가 F이고 a가 F가 아니다.”라는 진술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그 말이 이해될 수 있는 어떤 특정한 것(horismenon)을 제공해야 한다. 문제는 하나의 술어가 어떤 특정한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 반대를 의미하는 상황에서는 그 술어가 아무런 특정한 것도 의미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a가 F이고 a가 F가 아니다.”라는 진술을 말하고 있는 사람은 사실 아무런 말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투겐트하트와 볼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주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우리는 이미 제1장에서 모순율의 필연성이──그리고 이에 근거하고 있는 논리적인 것의 필연성 일반이──존재의 (현실의) 본질에 또는 사유의 본질에 또는 언어의 본질에 근거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한 바 있다. 이 물음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명백한 해답을 제시한다: 말한다는 것의, 그리고 바로 이해할 무엇을 제공한다는 것의 가능 조건은 어떤 특정한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어떻게 모순율이 도출되는가는 아직도 완벽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그 다음 문맥에서 보여주려고 시도한다(1006a 31 계속): 우리는 술어 문장에서, 술어가 어떤 특정한 것을 의미한다면, 어떤 특정한 것만을 말할 수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제 그의 사유 과정을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1006a 28-34) : 술어(예를 들면 “사람”)가 어떤 일정한 것을 의미한다면 이것은 동시에 그 반대(예를 들면, “사람이 아님”)를 의미할 수 없다. 즉 어떤 것에 그것이 사람이라고 진실에 맞게 말할 수 있다면, 동시에 역시 진실에 맞게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투겐트하트 & 볼프, 1999: 57-58)

스트로슨의 『논리적 이론 입문』에 등장하는 해명

스트로슨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모순율에 대해 주장한 내용을 더 분명하게 만들어주는 논의를 제시한다. 그는 술어의 의미가 술어의 기능을 바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술어는 대상을 분류하는 기능을 지닌다. 특정한 술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술어가 대상을 어떠한 방식으로 분류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술어의 의미란 분류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성립할 수 없다. 투겐트하트와 볼프는 스트로슨이 제시한 논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한 술어의 사용의 의미는──그것의 기능은──스트로슨에 의하면 술어를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대상을 분류한다는(비교하고 구별한다는) 것이다. 즉, “그러하지 않다”에 대한 “그러하다”의 대립화는 처음부터 술어의 의미에 속하는데, 그 술어를 우리는 모든 술어적 진술에서 표현되는 서술의 행위로부터 독립해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투겐트하트 & 볼프, 1999: 59-60)

대상을 분류하는 활동은 경계선을 긋는 활동에 비유될 수 있다. 우리는 술어를 통해 세계에 경계선을 긋는다. 분류란 경계선으로 나누어진 각각의 영역 중 어느 특정한 영역에 대상을 포함시키는 작업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술어가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그 술어가 대상을 어느 쪽에 포함시키는지가 분명해야 한다. 분류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술어는 자신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무의미한 술어일 뿐이다.

스트로슨은 모순율에 대한 부정이 술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술어의 기능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지적한다. 즉, “F이다.” 혹은 “F가 아니다.”는 애초에 대상 a를 어느 한쪽 영역에 분류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술어이다. 그러나 “a가 F이고 a가 F가 아니다.”라는 진술은 대상 a를 서로 다른 두 영역에 동시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술어를 사용하고자 하는 시도는 술어의 기능을 무시한다. 여기서 우리는 대상 a가 어떻게 분류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제공받지 못한다. 따라서 a를 “F이다.”와 “F가 아니다.”라는 영역에 동시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발화는 진술로서 의미를 지닐 수조차 없다. 투겐트하트와 볼프는 스트로슨이 제시한 논의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모순율에 대한 결과를 이제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술어적 서술의 정보치가 그 술어적 서술을 통해서 대상이 한 경계선의 어떤 측면이 아니라 다른 측면에 자리잡게 되는 점이 본질이라면, 대상을 선의 두 측면 모두에 자리잡을 경우 그 정보치가 바로 영(無)임이 직접적으로 도출된다. 그렇다면 바로 이 점에서 엄밀히 말해 이해할 어떤 것도 제공하지 않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이 정확하게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장기놀이에서 한 수를 두고 곧바로 그것을 되돌리는 것과 같은 태도다.(투겐트하트 & 볼프, 1999: 60)

이러한 논의는 모순율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정교하게 다루지 못한 문제를 해명하는 작업에도 유익하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의 대상에 두 가지 이상의 서로 상이한 술어가 동시에 부여되는 상황에서 모순이 발생한다고 본다. 그러나 “붉다”라는 술어와 “뾰족하다.”라는 술어가 서로 상이하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은 붉고 또한 뾰족하다.”라는 진술이 무의미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의 대상이 두 가지 이상의 서로 배제하는 영역으로 동시에 분류되는 상황에서 모순이 발생한다고 지적해야 한다. 즉, 두 가지 이상의 서로 상이한 술어가 하나의 진술에서 동시에 사용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진술이 모순에 빠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것은 붉다.”라는 진술로 특정한 경계선을 그은 이후에 “그것은 또한 뾰족하다.”라는 진술로 그 경계선 안에서 다시 경계선을 긋는 방식으로 말하고자 하는 영역을 모순 없이 더욱 세분화할 수 있다. 다만, 대상을 ‘붉은’, ‘푸른’, ‘노란’처럼 서로 배제하는 ‘비양립적 영역(incompatible-range)’에 동시에 포함시키려고 하는 시도에서는 모순이 발생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각각의 술어가 완전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더라도 모순율이 성립한다는 사실 역시 술어의 기능에 대한 논의를 통해 드러난다. 가령, 우리는 붉은색과 보라색 사이에 있는 모호한 대상에 대해 “그것은 붉고 또한 붉지 않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이 가능하다는 사실로부터 모순율이 부정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모순율은 “그것은 붉고 또한 붉지 않다.”라는 진술을 더 세분화하여 규정하라는 요구로서 의미를 지닌다. 모순율을 고수하는 사람은 “그것은 붉고 또한 붉지 않다.”라는 진술이 어떤 측면에서는 정당한 대답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측면에서는 여전히 더 해명되어야 하는 대답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투겐트하트와 볼프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 모순율은 우리가 완벽하게 규정된 술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결코 전제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모순율은(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해 서술의 의미는) 특정한 상황에서는 술어를 좀 더 정확히 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함축하고 있다. 좀 더 정확하게 규정되어 있다고 함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모순율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우리가 보았듯이 모순율의 정형적인 표현에서 요구되는 모든 제한적 관점들을 미리 열거할 수 없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제 왜 모순율을 고수하는 사람이 계속적으로 새로운 가상적 모순을 지적하는 사람에 대해 어떤 방식에서 항상 뒤쫓아가야만 하는지도 이해된다. 여기에서의 긴장 관계는 “예 또는 아니오”의 의미에서 규정화를 요구하는 술어적 서술의 의미와 항상 어느 정도만 규정되어 있으면서 실제로 사용되는 술어 사이의 긴장 관계다. (투겐트하트 & 볼프, 1999: 63)

따라서 모순율이란 실재를 구성하는 형이상학적 법칙이나 언어를 정초하는 통사론적 규칙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발화하는 진술이 의미를 지닐 수 있도록 술어를 통해 대상을 적절하게 분류해달라는 의미론적 요구이다. 즉, 모순율을 정당화하거나 부정하는 사실이란 실재 속에서도 언어 속에서도 미리 존재하고 있지 않다. 진술이 지닌 의미가 문제되는 상황에서 술어를 더욱 세분화하여야 할 필요성 생겨날 때에야 비로소 모순율을 준수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시될 뿐이다. 투겐트하트와 볼프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분석 문장이 타당하다는, 즉 다른 것일 수 없다는 말은 단지 그렇지 않으면 모순이 결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이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아니다. 그리고 모순율이 자체적으로 타당하다는 말은 단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는 말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말함 자체가 중지되어야 한다는 말이다──이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아니다.(투겐트하트 & 볼프, 1999: 64-65)

비판적 평가

(1) 모순율을 준수해야 할 필요성을 술어의 기능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해명하고자 하는 입장은 매우 설득력 있어 보인다. 이러한 입장은 모순율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사유를 원천적으로 해소한다. 즉, 우리는 모순율을 정초하는 이론적 토대를 상정하기 위해 형이상학적 독단주의를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순을 정초하는 이론적 토대를 부정하기 위해 논리적 회의주의에 빠져야 할 필요 역시 없다. “a가 F이고 a가 F가 아니다.”라는 진술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지 않은 상태로 모순을 정초하거나 부정하고자 하는 입장은 사실 자신들이 도대체 무엇을 시도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2) 우리는 모순율이 우리의 이해 가능성에 따라 상대적으로 성립한다고 지적할 수 있다. “a가 F이고 a가 F가 아니다.”라는 통사론적 형식을 지닌 모든 진술이 모순율을 위반하는 것은 아니다. 특정한 진술이 모순율을 위반하는지는 그 진술이 우리의 이해 가능성을 벗어나는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즉, “a가 F이고 a가 F가 아니다.”라는 통사론적 형식을 지닌 진술이 서로 다른 두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진술이 두 사람 모두에게 모순율을 위반한 진술로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해당 진술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 진술이 대화에서 제대로 기능할 수 없는 무의미한 방식으로 술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해당 진술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사람에게는 그 진술이 대상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유의미한 방식으로 술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3) 이러한 논의는 모순이 해소되는 과정을 정신이 운동하는 과정이라고 파악한 헤겔의 철학을 해명하는 작업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가령, 변증법의 각 단계에서 정신은 자신의 이해 가능성을 벗어난 문제와 직면하여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경험한다. 모순은 정신을 딜레마 속에 빠뜨리는 방식으로 정신이 자신의 이해 가능성에 내재된 한계를 자각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모순을 통해 발생한 딜레마는 정신이 자신의 이해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상황에서는 해소된다. 따라서 끊임없이 기존 모순을 해소하고 새로운 모순과 직면하게 되는 과정이란 정신이 자신의 이해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과정이다. 헤겔의 철학은 정신이 자신의 이해 가능성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이전까지 모순이라고 받아들여진 문제를 점점 더 많이 해소하게 되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

투겐트하트, 에른스트 & 볼프, 우슬라., 『논리-의미론적 예비학』, 하병학 옮김, 철학과현실사, 1999, 제4장.

원문

https://blog.naver.com/1019milk/222358755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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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비평 3을 읽으면서 기본적인 논지에 대해 큰 공감을 했습니다. 모순의 해소라는 표현으로 의미하시는 것은 이제 그 모순이 더이상 무의미한 술어가 아니고, 그 모순 자체가 이제는 유의미한 술어로 작동한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계신거라면, 모순의 해소가 결국 모순의 내재화로 이어지는 헤겔철학에 대한 유용한 해명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소하게 한 문장의 표현이 마음에 걸립니다. 헤겔의 철학이 이전까지 모순이라고 받아들여진 문제를 점점 더 많이 해소하게 되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헤겔의 기술 이전에 헤겔이 다루는 논리적 범주들은 그것을 묻지 않는 오성에게는 언제나 자명하고, 절대적인 타당성을 지니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정신현상학의 현상지도 그 자체가 언제나 진리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이구요. 오히려 제 생각에 헤겔철학은 이전까지는 물어지지 않은 채 참으로 여겨지던 명제들을 모순으로 이끌고, 그리고 그 모순을 내재화시키는 것을 통해 생동하는 정신으로 이끄는 철학으로 보입니다. 의식의 각 단계는 자신이 모순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합니다. 물론 이 과정 역시 모순의 상대성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렇게 지양된 단계와 지양되지 않은 단계 사이의 두 단계 사이의 모순의 해소(모순의 유의미화와 모순이 모순으로 드러나지 않음)는 어떤 차이를 가지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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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헤겔 철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정말 중요한 지적이군요! 말씀하신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1) 이전까지는 모순이라고 여겨지지초자 못했던 양 극을 지적하면서, (2) 그 두 가지가 사실은 모순이었다는 점을 밝히고, (3) 그걸 다시 내재화시키는 과정. 제가 모순을 너무 자명하게 전제해버려서 (1)의 중요성을 놓치고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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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후 좀더 고민해봤는데요. (1)이 모순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모순되는 요소들의 양 극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고 각자 독립적으로 병렬적으로 나열한 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본다면, (1)부터 (3)으로 나아가는 대략적인 길에 대한 상이 얻어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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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생각을 좀 정리해 봤는데, 전통적 철학이 모순을 모순으로 여기지 못한 이유는 자신들이 상정하고 있는 철학적 '전제'에 대해 성찰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가령, 도널드 데이비슨 같은 철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사실 실재론과 개념 상대주의는 '도식/내용 이분법'이라는 동일한 전제에서 자라나온 두 가지 대립하는 귀결이죠. 또한, 맥도웰이 지적하는 것처럼, 소여의 신화와 정합주의는 모두 세계가 이유의 논리적 공간 바깥에 위치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비롯된 두 가지 상반되는 입장이고요.

그러니까, 대립하는 양 극단의 입장들이 사실 하나의 철학적 전제(P)에서 출발하는 두 가지 모순되는 결론(C)들인 거죠. 즉,

P ⊃ C & -C

가 전통적 철학이 다루어온 문제들의 논리적 구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하나의 동일한 전제가 모순되는 두 입장들을 모두 출현시킨다는 게 간과되다 보니, 두 극단들이 서로 아무 관련 없이 단순히

C ∨ -C

처럼 병렬적으로 나열될 수 있는 것처럼 상정되고 마는 거죠.

저는 헤겔이 『정신현상학』 서문에 나오는 아래 구절에서 이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영문판과 비교해 보니 임석진 교수님이 이 부분에서 의역을 좀 많이 하신 것 같지만, 그래도 일단 한국어 번역본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무엇보다 우선 명심해야 할 일은, 인식은 절대적인 것을 획득하기 위한 도구라거나 또는 진리를 모사하는 매체라는 등의 부질없는 생각을 떨쳐버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인식과 절대적 진리가 서로 분리될 수 있다고 보는 생각이야말로 문제 해결을 불가능하게 하는 불씨가 된다. 그런 전제 아래 학문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단정하며 학문하는 노고를 떨쳐내버리려고 하면서도 역시 진지하고 열의에 찬 노력을 기울이는 듯한 모양새만을 갖추어나갈 속셈으로 학문하기에 어울리지도 않는 사람이 그런 전제에서 이러저러한 궁리를 짜내곤 하는데, 정말 그런 작태는 드러내지 않았으면 한다. 또한 이제는 그런 전제에서 생겨나는 의문에 답하는 일도 그만두어야만 하겠다."(헤겔, 『정신현상학』, 116쪽 인용자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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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투겐트하트의 언어철학에 대한 강의를 엮은 독일어 원서를 저는 갖고 있는데, 독일어가 익숙해지면 한 번 읽어봐야겠다 하고 있습니다. 하이데거의 영향도 받고 분석철학의 영향도 받은 학자의 관점은 어떨까하는 마음에서 말입니다 ㅎㅎ

몇 가지 반대의견을 남깁니다.

  1. 논리적 근본원리를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무용해보인다는 점은 동의합니다. 이에 관해서 읽어볼만한 글을 두 가지 소개해드립니다. Lewis Carroll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저자가 맞습니다)이 쓴 "What The Tortoise Said to Achilies"라는 논문과 Nelson Goodman의 "A New Riddle of Induction"의 1,2장을 보시면 연역의 기본원리의 정당화에 관한 생각거리를 얻으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2. 모순율과 관련해서 시간과 관련된 예시나 관점에 따른 예시는 제가 보기엔 부적절해 보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둘은 다른 명제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괄호를 쳐서 같아보이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명제가 아니라 문장일 것이고, 문장은 서로 다른 시간에 서로 다른 명제를 표현할 수 있지만 모순율의 (적어도 한 가지) 핵심은 동일한 명제와 그것의 부정이 모두 참이 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3. 모호성의 문제는 제가 보기엔 모순율의 문제보다 이가원리(Principle of Bivalence)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확실히 산인 것과 확실히 산이 아닌 것이 있는데 그 가운데 있는 모호한 것들에 대해서 산이라고 한다면 그 진릿값이 어떻게 부여되어야 하는가가 모호성 논의의 주제인 것으로 대략 알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산이면서 산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덧붙여, 저는 모순율(Law of Non-Contradiction), 배중률(Law of Excluded Middle), 이가원리(Principle of Bivalence)는 모두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다른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모순율은 p와 ~p가 모두 참인 경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원리이고 배중률은 p와 ~p가 모두 거짓인 경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원리이며 이가원리는 하나의 명제가 정확히 참 또는 거짓 두 진릿값 중 하나만을 가진다는 원리입니다.
    이 원리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여러가지 논리체계의 다양성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가령 초평가주의(supervaluationism)는 PB를 거부하는 반면 LEM, LNC는 모두 수용합니다. 3치논리의 경우 PB를 거부하고 LEM도 거부할 것이고, 직관주의의 경우 LEM은 거부하지만 PB는 수용합니다.

  4. 스트로슨의 입장은 언어의 사용측면에서 문제를 해소하는 측면이 있긴 한 것 같습니다. (<논리적 이론 입문>의 앞부분은 저도 재밌게 읽긴 했습니다. 특히 스트로슨은 "비일관성" 개념을 중심으로 잡아서 다른 개념들을 정의한다는 게 좀 재밌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설명이 모순율이 형이상학적 원리가 아니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주진 않는 것 같습니다.
    (a) 우리가 임의의 F라는 술어를 사용하는 것이 무언가 분류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스트로슨의 주장은 일견 그럴듯하지만 그것만이 가능한 대답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태도는 모든 문제를 언어적 문제로 다루려는 시도에 가깝다고 보여지며, 만일 속성 실재론자라면 F라는 술어는 단순히 대상을 분류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b) 나아가, 1차 술어논리 체계에서는 술어(혹은 열린 문장)가 존재론적 개입을 하지 않고 대상들의 집합을 외연으로 갖는데 이는 한 편으로는 보편자에 대한 유명론적 관점이 개입되어 있는 체계라 할 수 있습니다. 술어 변항을 갖는 2차 술어논리에서도 스트로슨의 설명이 정확히 맞아떨어질 지 따져볼 문제이긴 하겠으나 저는 일단은 약간 회의적입니다.
    (c) 이건 그냥 생각거리인데, 가령 "="을 포함하는 1차 술어논리에서 "∀x∀y(x=y ∨ x≠y)"는 배중률을 표현하는 논리적 참입니다. 저한테는 이것이 굉장히 존재론적인 진술로 보입니다. 또 한 편으로 이것이 우리가 언어를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와는 독립된 문제로 보입니다.

  5. 조금 다른 모티브에서 LNC를 부정하는 철학자들이 있습니다. 가령 초일관 논리(paraconsistent logic)는 모순으로부터 모든 것이 따라나온다(Ex Contradictione Quodiblet)는 추론을 부당하게 만드려는 시스템인데, 이에 따르면 p, ~p ㅏ q 꼴의 추론은 (초일관적으로는) 부당한 추론입니다. 그렇다면 타당성의 정의에 따라 (p∧~p)가 참이고 q가 거짓인 경우가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 경우를 해석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참인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을 "Dialethism"이라 하는데 이 이상으로는 저도 모릅니다 ㅎㅎ) 흥미로운 점은 dialethist 인 철학자이자 논리학자인 J.C. Beall은 이런 논리체계를 바탕으로 삼위일체의 논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책을 최근에 썼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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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지적들 감사합니다! 몇 가지 제 견해를 말씀드리면,

(1) 스트로슨의 태도가 단순히 "모든 문제를 언어적 문제로 다루려는 시도"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투겐트하트가 스트로슨을 통해 말하려고 하는 것은,

"F라는 술어는 이러이러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라는 적극적인 이론이라기보다는, 모순율을 부정하는 사람을 향해

"나는 당신이 F라는 술어로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라고 지적하는 소극적인 비판인 것으로 보여요.

그러니까, 스트로슨이나 투겐트하트 본인들이 직접 F라는 술어에 대한 실재론적이거나 유명론적인 의미론을 제시한다기보다는, 모순율을 부정하려는 사람에게 F라는 술어의 의미를 설명해야 할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고 해석하는 게 더 좋다고 보아요. 이렇게 하면, 어떠한 존재론적 개입도 하지 않으면서, 상대가 모순율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상대가 무의미한 진술을 하고 있다고 비판할 수 있는 거죠. (물론, 이건 "스트로슨의 입장에 대한 투겐트하트의 설명에 대한 저의 해석"이라 실제 스트로슨이나 투겐트하트가 이런 '책임 전가 전략'을 의도했는지는 다시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겠지만요.)

(2) 형이상학적 양진주의(dialetheism)에 대한 논의에서는 '모순'이라는 현상을 도대체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황당해 보이기도 하지만, 머리카락이 조금 남은 대머리의 사례가 "x는 대머리이고 동시에 대머리가 아니다."라는 문장이 참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양진 문장의 사례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이런 논쟁이 사이비 문제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이런 논쟁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애초에 '무엇이 모순의 예시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철학자들 사이에 합의된 결론이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투겐트하트와 볼프의 지적이 더 유의미해질 수 있는 거죠.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모순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모순의 예시가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된 결론은 없다. 그러니, 당신이 모순의 예시라고 생각하는 내용을 나에게 더 세부적으로 설명해 달라."

(3) 위와 같은 맥락에서, 저는 시간과 관점에 따라 참인 모순 문장을 다양하게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 단순히 문장과 명제를 구분한다고 해서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저는 프레게식의 문장/명제 구분이 보편자 실재론 같은 플라톤적 형이상학을 암묵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게 아닌지 의문스러워요. 서로 다른 구체적인 문장들이 표현하고 있는 공통의 '의미(Sinn)'로서 명제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서로 다른 개별자들이 예화하는 공통의 '실재(Reality)'로서 이데아가 존재한다는 생각과 굉장히 유사해 보여요.

(4) 제가 보기에는, 굳이 문장/명제 구별을 도입하지 않고서도, 시간과 관점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모순 문장들의 문제를 충분히 지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것은 빨갛고 빨갛지 않다.”라는 모순 문장을 “그것은 오른쪽에서 보면 빨갛고 왼쪽에서 보면 빨갛지 않다.”라고 더 세분화된 문장으로 분석하면 얼핏 형식적 모순으로 보이는 문장이 모순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거죠. 그리고 이런 분석은 투겐트하트와 볼프의 입장을 더 지지해준다고 생각해요. 모순이 문장과 동떨어져서 명제 차원에서 그 자체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을 우리가 얼마나 세분화할 수 있느냐에 따라 상대적으로 성립한다는 생각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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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ㅡ본에 관한 논쟁은 언제나 흥미롭군요!

(1) 투겐트하트와 볼프가 어떤 맥락에서 이를 도입하는지는 정확치 않은데, 적어도 제가 아는바 스트로슨은 <논리적 이론 입문>에서 “비일관성(inconsistency)이란 무엇인가? 왜 그것을 피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면서

“중요한 것은 발화의 표준적인 목적인 무언가에 대해 소통하려는 의도가 자기-모순에 의해 좌절된다는 것이다. 자기모순을 범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쓰고 동시에 지우는 것이다. 모순은 그 자신을 취소시키고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다. 따라서 모순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단순히 특정한 단어의 형식을 가리킴으로써 설명할 수 없다. (...) 누군가는 모순이란 단지 ”X이면서 X가 아니다.“라는 형식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것은 설명이 되지 못한다. 만일 누군가가 당신에게 기쁘냐고 물었을 때 당신은 ”글쎄, 그러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라고 대답할 수 있으며, 당신은 완벽히 정상적인 의사소통을 한 것일 테다.”

라고 말합니다. 즉, 스트로슨의 설명은 모순의 본성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제시하는 맥락에서 이와 같은 설명을 제시한 것이지, 모순을 부정하는 사람에게 증명의 부담을 전가하는 설명이라고 보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양진주의가 말하는 모순이 무엇이냐는 논점에는 증명 부담을 넘길 수 있다는 것에는 매우 동의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는 스트로슨의 설명을 논리적 개념에 대한 화용론적 설명이라고 파악했고, 이것이 하나의 측면을 보여주기는 하겠지만 모순율이 형이상학적 원리일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2) “그것은 빨갛고 빨갛지 않다”에 관한 예시는 이 점에서 스트로슨의 견해를 따르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스트로슨의 논지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것은 빨갛고 빨갛지 않다”는 모순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오른쪽에서 보면 빨갛고 왼쪽에서 보면 빨갛지 않다”라고 보면 모순이 해소된다. 따라서 “p이고 ~p이다”라는 형식으로 모순을 정의할 수 없다는 논변일 텐데, 이는 화용론적인 차원과 논리적 차원을 (아마도 의도적으로) 구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좋지 못한 논증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그것은 빨갛고 빨갛지 않다”라든지 위에서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합리적인 대화의 기대 상 자기모순을 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가정하기 때문에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즉 논리적 모순이 아닌 진술을 한 것으로 합리적인 해석을 이끌어내기 때문입니다. (cf. Gricean Implicature)
그런 의미에서 제 주장은 “그것은 빨갛고 빨갛지 않다”가 정말로 그대로 진술된 것이라면 논리적으로 자기모순이 맞습니다. 형식적으로도 “p이고 ~p이다”는 자기모순인 명제입니다. 다만 우리가 일상 언어에서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 이유는 대화의 합리적 기대 상 자기모순적인 명제를 발화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대화의 맥락 등을 고려하여 발화자의 의도, 예컨대 “그것은 오른쪽에서 보면 빨갛고 왼쪽에서 보면 빨갛지 않다” 같은 이해할 수 있는 진술로 읽어내려 하는 것일 뿐입니다.

(3) 명제라는 추상적 존재자를 부정하는 것은 제가 보기에 상당한 이론적 부담을 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명제라는 것을 정확히 프레게의 의미로 읽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언어에서 쓰인 문장 간에 공통되는 의미 차원이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명제는 수와 같은 추상적 존재자로 다뤄집니다. 서로 다른 숫자가 같은 수를 가리킬 수 있듯이 서로 다른 문장이 같은 명제를 가리킬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과 같은 명제 태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도 명제는 좋은 설명을 제공합니다. 일종의 최선의 설명으로서의 추론이라 할 수 있겠군요(어떤 존재자를 이론 안으로 도입하는 것이 현상에 대한 (존재론적 경제성을 포함한)최선의 설명을 제공한다면 저는 얼마든지 받아들일 용의가 있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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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님의 입장에 완전 동의합니다. 헤겔은 엔치클로페디 재판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는데, 이것도 좋은 구절이 될 것 같습니다.

저 무비판적 오성은 마찬가지로 어떤 표명된 관념의 얉은 이해 안에서 스스로를 증명한다. 그는 그가 가지고 있는 확고한 전제들에 대한 악의나 의심을 거의 가지지 않기 때문에, 철학적 관념들의 이미 드러난 사태들을 되풀이해 말하는 것조차 하지 못한다. 오성은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다음의 두가지 것들을 자신 안에 통일시킨다. 즉 자신의 관념에서 자신의 범주의 사용에 완전히 이탈하고 심지어 분명히 모순되는 것이 그에게 드러나지만, 그는 동시에 자신과는 다른 사유방식이 존재하고 수행될 수 있고 따라서 자신이 사유해왔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여기서 행위해야만 한다는 의심을 하지 못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변철학의 관념은 자신의 추상적인 규정에, 그리고 자신의 규정이 자신에게 명백하고 완전하게 나타날 것이 틀림 없고 오진 자신이 전제한 표상들에서 자신의 조정자와 시금석을 가진다는 입장에 사로잡힌다(...). (17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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