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 에른스트 투겐트하트(1930-2023)

(1) 에른스트 투겐트하트가 며칠 전인 3월 13일에 93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네요. 국내에는 많이 소개되지 않았지만, 저는 투겐트하트가 가다머 이후 지금까지의 철학적 해석학에서 가장 중요하고 독창적인 철학자였다고 생각합니다. 투겐트하트는 현상학적 해석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언어 분석의 방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인물이거든요. 소위 '이해의 가능 조건(conditions of the possibility of understanding)'을 찾고자 하는 해석학의 탐구가 결코 후설이 제시한 '현상학적 봄(phenomenological seeing)'으로는 성취될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요. 이와 관련해서 예전에 썼던 몇 가지 글들을 올려봅니다.

(2) 그리고 이렇듯 현상학적 해석학을 언어 분석의 방법을 통해 넘어서고자 한다는 점에서, 투겐트하트는 아주 이른 시기부터 대륙철학과 분석철학 사이에 가교를 놓고자 한 선구자적 인물들 중 한 명이었죠. 실제로, 투겐트하트는 본래 하이데거의 제자였지만, 이후 분석철학자로 전향하여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연구와 의식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것으로도 유명하고요. 그렇지만 이런 전향이 단순히 자신이 본래 소속되어 있던 대륙철학 전통에 대한 거부의 결과라고 하기는 어려워요. 오히려 투겐트하트는 대륙철학의 가장 중요한 통찰들이 분석철학의 방법을 통해 더 세련되게 다듬어질 수 있다고 보았거든요. 그래서 투겐트하트의 언어철학 교재의 서두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죠.

이러한 목표는 하이데거로부터 시작하여 언어-분석적 철학으로 인도된 나 자신의 성장에 대한 숙고이기도 하다. 나는 '존재'의 이해에 대한 하이데거의 물음이 오직 언어-분석적 철학의 틀 속에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의미를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비록 이 강의들에는 하이데거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지만, 나는 내가 분석철학의 문제에 다가가는 구체적인 접근 방식에서 그에게 빚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은 그에게 헌정된다. (Ernst Tugendhat, Traditional and Analytic Philosophy: Lectures on the Philosophy of Langua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2, p. x.)

경험적 개념과 선험적 개념의 사이에서: 에른스트 투겐트하트,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철학의 주제와 방법」
https://blog.naver.com/1019milk/221478225486

하이데거와 분석철학
https://blog.naver.com/1019milk/memo/220960216527

(3) 그밖에도, 투겐트하트는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고 하더라고요. 얼마 전 대학원 아리스토텔레스 수업에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나오는 '알레테이아(진리)' 개념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이 주제로 논의되었는데, 그때 제가 투겐트하트를 언급했거든요. 투겐트하트는 하이데거의 진리 개념에 굉장히 비판적인 입장이어서요. 그런데 고대철학 교수님께서 '투겐트하트'라는 이름을 들으시더니, 투겐트하트가 본래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로 커리어를 출발했고, 박사 학위 논문으로 쓴 Ti kata tinos가 대단히 훌륭한 책이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저는 투겐트하트가 쓴 교수자격 논문인 Der Wahrheitsbegriff bei Husserl und Heidegger가 현상학에서 권위 있는 연구서라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이미 박사학위 논문부터 주목을 받았다는 건 처음 알았네요. 역시 대가는 싹수부터가 다른 걸까요.

(4) 데일리누스에 있는 부고 중 일부를 올려봅니다.

Trained by Heidegger in the Aristotelian and phenomenological traditions, he offered original arguments to show that analytic philosophy of language is the culmination of Aristotle’s ontological project. In his systematic, historically-oriented treatise on (analytic) philosophy of language (Traditional and Analytical Philosophy , P.A. Gorner trans., 1982), he bridges the gap between continental and analytic ways of philosophizing.

아리스토텔레스와 현상학 전통에서 하이데거에게 훈련을 받아, 그[투겐트하트]는 언어 분석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적 기획의 최정점이라는 고유한 논증을 제시하였다. 언어철학에 대한 그의 체계적이고, 역사적으로 방향 잡힌 논고(Traditional and Analytical Philosophy , P.A. Gorner trans., 1982)에서, 그는 철학함에 대한 대륙과 분석의 방법 사이의 간극에 교량을 놓는다.

In response to the tradition of the so-called philosophy of consciousness, Tugendhat applies linguistic analysis to explain the problem of consciousness of the self (Self-Consciousness and Self-Determination, P. Stern trans.,1986). He argues that Wittgenstein’s view of self-knowledge and Heidegger’s account of practical self-understanding are intrinsically connected, because one is only conscious of oneself when one asks what kind of human being one aspires to be.

소위 의식철학의 전통에 대한 반응으로, 투겐트하트는 언어분석을 자기에 대한 의식의 문제를 설명하는 데 적용한다(Self-Consciousness and Self-Determination, P. Stern trans.,1986). 그는 자기 지식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관점과 실천적 자기 이해에 대한 하이데거의 설명이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논증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어떠한 인간이 되길 열망하는지 질문할 때 오직 우리 자신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5) 개인적으로, 제가 투겐트하트와 굉장히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철학을 공부하고 있어서 그런지, 그가 타계하였다는 소식에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게 되네요. 몇 가지 아쉬운 건, 투겐트하트가 상당히 독창적이고 뛰어난 철학자인데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이에요. 또, 제가 독일어에 능숙하지 못해서 투겐트하트의 글들 중 영어로 번역된 매우 일부분의 논문만 읽었다 보니, 저조차도 투겐트하트의 철학이 지닌 중요성을 강조한 것에 비해서는 그를 깊이 공부하지 못한 게 부끄럽고요. 여하튼, 투겐트하트가 우리에게 남겨준 철학적 과제들이 오랜 시간동안 잘 계승되고 발전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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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우연하게도 이번 학기에 투겐트하트의 Selbstbewusstsein und Selbstbestimmung 세미나를 들을 예정으로 책을 샀는데 제가 책을 산 날에 돌아가셨다니 묘한 느낌이 듭니다.. 뭔가 더 집중해서 읽게 될 것 같네요. 학기 중이나 끝에 무언가 나눌 수 있을 만큼 이해를 갖출 수 있기를 바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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