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 현상학적 해석학에서 분석적 해석학으로: 초월론적 현상학을 넘어서

오늘 한국분석철학회 대학원 분과 제12회 워크샵에서 발표했던 내용입니다. 발표하면서 제한 시간이 계속 의식되었던 데다, 제가 발표 끝나자마자 곧바로 병원 야간 근무 때문에 출근을 해야 해서, 도대체 저 스스로도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허둥지둥 발표해버렸네요. 특히, 질의응답 시간에 좀 더 꼼꼼하게 대답을 했다면 좋았을 텐데 하고 아쉬움이 남습니다. 아직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아이디어들을 발표하게 되어서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그래도 여하튼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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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해석학과 분석철학

20세기 이후 현대철학은 유럽의 ‘해석학적 철학(hermeneutic philosophy)’과 영미의 ‘분석철학(analytic philosophy)’이라는 서로 다른 두 사조로 구분되었다. 다만, 2000년대 이후로 두 전통 사이의 갈등은 이전보다 훨씬 완화되어 이제 과거처럼 한쪽 진영에서 반대쪽 진영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모습을 찾기는 어려워졌다. 지난 20년 동안 꾸준히 누적된 해석학적 철학과 분석철학 사이의 교차적 연구는 두 진영이 굳이 엄격하게 대립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기도 하였다.

본고 역시 해석학적 철학과 분석철학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성찰하고자 하는 시도 중 하나이다. 특별히, 여기서 수행되는 작업은 체코 출신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투겐트하트(Ernst Tugendhat)가 제시한 철학적 입장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 투겐트하트는 현상학자로 자신의 철학적 커리어를 시작하여 이후에 분석철학자로 전향한 매우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후설과 하이데거에서의 진리 개념(Der Wahrheitsbegriff bei Husserl und Heidegger)』이라는 논문을 쓴 것으로 현상학과 해석학 진영에서 상당히 권위를 지니고 있는 동시에, 프레게와 비트겐슈타인 등의 언어철학에 대한 연구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바로 그 투겐트하트가 후설의 현상학을 비판하는 논문인 「현상학과 언어 분석(Phenomenology and Linguistic Analysis)」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방법면에서 해석학은, 현상학에 있는 자신의 기원에도 불구하고, 언어분석에 더 가깝다. 언어분석은 환원된 해석학, 1층위의 해석학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Tugendhat, 2005: 49)

투겐트하트는 『전통철학과 분석철학(Traditional and Analytic Philosophy)』이라는 언어철학 교재에서도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언어 분석을 통해 제대로 해명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자신의 언어철학 교재를 다음과 같은 말로 하이데거에게 헌정한다.

이러한 목표는 하이데거로부터 시작하여 언어 분석적 철학으로 인도된 나 자신의 성장에 대한 숙고이기도 하다. 나는 ‘존재’의 이해에 대한 하이데거의 물음이 오직 언어 분석적 철학의 틀 속에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의미를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비록 이 강의들에는 하이데거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지만, 나는 내가 분석철학의 문제에 다가가는 구체적인 접근 방식에서 그에게 빚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은 그에게 헌정된다.(Tugendhat, 1982: x)

투겐트하트에게 해석학이란 분석철학을 통해 완성되어야 하는 사조이다. 그는 기존 해석학이 후설의 현상학을 바탕으로 성립하였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현상학이 ‘반성’ 혹은 ‘직관’ 같은 주관적 방법을 바탕으로 제시한 통찰들이 오늘날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 몇 가지 키워드만으로 문제를 도식화해보자. 투겐트하트가 제시하는 논증은 다음과 같다.

1. 해석학은 이해의 조건을 탐구하는 철학의 분야이다.
2. 이해의 조건에 대한 탐구는 대개 현상학이 제시하는 ‘반성’ 혹은 ‘직관’이라는 방법에 의존한다.
3. ‘반성’ 혹은 ‘직관’은 철학적 방법으로 수용되기에는 근거가 의심스럽다.
∴ 4. 현상학에 의존하고 있는 해석학은 근거가 의심스럽다.

여기서 ‘현상학적 해석학(phenomenological hermeneutics)’을 극복하기 위해 소위 ‘분석적 해석학(analytic hermeneutics)’이 새롭게 등장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현상학이 주장하는 ‘반성’ 혹은 ‘직관’이라는 방법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해석학이 주장하는 ‘선입견’, ‘지평 융합’, ‘상호주관성’, ‘역사성’과 같은 개념의 의의를 부각시켜줄 수 있는 논의가 분석철학 속에서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가령, 투겐트하트 자신은 비트겐슈타인이 ‘규칙 따르기’ 논의에서 제시한 통찰을 바탕으로 해석학을 정당화하고자 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어지는 내용에서 투겐트하트가 지적한 문제를 발판삼아 현상학과 해석학이 서로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Ⅱ), 현상학적 해석학에 어떠한 모순이 있는지(Ⅲ), 분석철학이 해석학에 어떠한 통찰을 제시할 수 있는지(Ⅳ), 분석적 해석학이 어떠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지(Ⅴ)를 간략히 다루고자 한다.

Ⅱ. 현상학적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Ⅱ. 1. 후설의 현상학

현상학은 16-17세기 이후 근대 유럽에서 확산된 실증주의에 반대하여 ‘사태 자체(Sache selbst)’를 선입견 없이 기술하고자 한 20세기의 철학적 운동이다. 가령, 현상학의 창시자인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은 세계를 객관적으로 법칙화하고자 한 실증주의조차 자신들이 상정한 ‘수리물리학적’ 선입견을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지적한다. 실증주의는 수리물리학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사태만을 학문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과정에서 그 자체만으로 고유한 의미를 지닌 수많은 대상 영역을 무시하고 말았다. 예술, 종교, 도덕 같은 대상 영역에서 제시되는 진술은 수리물리적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 것으로 여겨졌다. 수리물리학적이지 않은 진리에 대한 평가절하는 애초에 수리물리학적 진리만이 학문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선입견을 무비판적으로 전제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따라서 현상학에서는 각각의 사태마다 그에 맞는 탐구 방식이 있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예술, 종교, 도덕과 같은 대상 영역은 수리물리학적 기준과 무관하게 자신의 고유한 내재적 기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가령,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시 구절은 ‘내 마음’이라고 일컬어지는 심리현상이 H2O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거짓’이라고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 시적 사태를 다루기 위해 수리물리학적 사태에서 사용되는 탐구 방식을 도입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엄밀하지 않다.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각각의 사태에 아무런 선입견 없이 접근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사태 자체로(Zu den Sachen selbst)!”라는 현상학의 유명한 구호는 대상 영역을 특정한 선입견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태도가 극복되어야 한다는 통찰을 담고 있다.

이러한 통찰을 정당화하기 위해 도입되는 것이 바로 ‘초월론적 자아(transzendentale Ego)’에 대한 반성이다. 현상학은 우리에게 자아와 대상이 맺고 있는 관계를 아무런 선입견 없이 바라볼 것을 요청한다. 우리가 ‘판단중지(Epoche)’를 통해 모든 선입견을 벗어날 경우 서로 다른 자아의 태도에 따라 서로 다른 대상 영역이 개시된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눈앞의 참나무를 예술적 태도로 바라볼 경우 참나무는 색감, 질감, 구도를 지닌 예술적 대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리가 눈앞의 참나무를 종교적 태도로 바라볼 경우 참나무는 보이지 않는 신적 존재의 권능과 영광을 나타내고 있는 종교적 대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리가 눈앞의 참나무를 윤리적 태도로 바라볼 경우 참나무는 보존되어야 할 생태계의 한 구성원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각각의 태도에 따라 개시되는 각각의 대상 영역은 서로 어느 한쪽으로 환원될 수 없다.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이란 각각의 대상 영역을 각각의 고유한 방식으로 탐구하고자 해야 한다.

여기서 수행되고 있는 반성은 ‘이중적’이다. 우리는 (a) 참나무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각각의 방식을 ‘보는’ 동시에, (b) 각각의 방식으로 참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다시 ‘보기’ 때문이다. 즉, 현상학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 취하는 태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강조한다. 각각의 태도 속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각각의 태도 밖에서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다시 바라보는 것 역시 가능하다. 한 마디로, 현상학에서 ‘초월론적 자아’란 각각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자아이다. 이러한 자아는 각각의 태도에 전제된 학문적 선입견을 벗어나 순수하게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직관(Anschauung)’에 도달한 것으로 상정된다. 자아가 자신이 취하고 있는 태도들을 반성적으로 순수하게 직관할 수 있다는 생각이야 말로 현상학을 성립시키는 근본 원리이다. 따라서 후설은 직관을 ‘모든 원리 가운데 원리(Prinzip aller Prinzipien)’라고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만약 우리가 어떤 대상을 완전한 명석함 속에서 본다면, 만약 우리가 순수하게 봄에 근거하여 또 실제로 보고 있는 파악된 것의 테두리 속에서 해명과 개념적 파악을 수행했다면, 만약 이때 우리가 (‘봄’의 한 새로운 방식으로서) 대상이 어떤 상태인지를 본다면, [이것을] 충실하게 표현하는 진술은 자신의 권리를 갖는다.(후설, 2009: 97)

모든 원리 가운데 원리 , 즉 모든 원본적으로 부여하는 직관은 인식의 권리원천이라는 원리 에서, ‘ 직관 ’ 속에 우리에게 원본적으로 (이른바 그 생생한 실제성에서) 제시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주어진 그대로 ──그러나 또한 그것이 거기에 주어지는 제한들 속에서만 ── 단순히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원리 에서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어떠한 이론도 오류를 일으킬 수는 없다.(후설, 2009: 107)

Ⅱ. 2.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현상학적 해석학

해석학은 ‘이해의 조건’을 탐구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우리가 대상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요소들이 전제되고, 어떠한 사건이 벌어지고, 어떠한 결과가 나타나는지가 해석학이 다루고자 하는 주된 문제이다. 이러한 논의 역시 현상학처럼 실증주의에 대한 반발로부터 생겨났다. 모든 학문을 수리물리학적 기준에 맞추어 재단하려는 근대 유럽 학문의 사조에 반대하여 소위 ‘정신과학(Geistwissenschaft)’이라고 일컬어지는 영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해석학이 지향하고 있는 중요한 탐구의 목표 중 하나이다. 가령, 대상에 대한 ‘이해(Verstehen)’가 대상에 대한 수리물리학적 ‘설명(Erklärung)’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해석학에서 실증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의존하는 주된 근거이다. 현상학이 수리물리학적 태도의 의의를 제한된 영역에서만 인정한 것처럼 해석학 역시 수리물리학적 설명의 의의를 제한된 영역에서만 인정한다. 따라서 현상학과 해석학은 둘 사이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20세기 초중반에 실증주의에 맞서 공동전선을 형성하고서 함께 발전하였다.

현상학적 해석학은 초월론적 자아에 대해 현상학이 제시한 통찰을 수용하여 이해의 조건을 성찰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흔히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와 한스게오르크 가다머(Hans-Georg Gadamer)의 해석학이 ‘현상학적 해석학’이라고 일컬어진다. 즉, 두 입장은 수리물리학적 이론이 결코 세계를 있는 그대로 표상해내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수리물리학적 이론 역시 특정한 태도를 취한 상태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하나의 해석이다. 무균상태의 실험실에서 대상을 수리물리학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조차 연구를 위한 가설을 세우는 과정에서 다양한 ‘선입견(Vorurteil)’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수리물리학적 선입견을 바탕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입장만큼은 모든 선입견에서 벗어나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은 독단에 빠져있을 뿐이라고 비판받는다.

현상학적 해석학에서 우리는 결코 선입견을 넘어설 수 없는 존재로 강조된다. 세계를 기술하고자 하는 모든 이론은 자신의 선입견을 전제로 세계를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지평 융합’, ‘상호주관성’, ‘역사성’ 같은 개념이 현상학적 해석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즉, (a) 우리는 선입견을 지평으로 삼지 않고서는 어떠한 이해도 시도할 수 없다. 모든 이해는 특정한 선입견을 전제한 상태에서 새로운 선입견을 받아들이는 지평 융합의 사건이다. (b) 두 선입견의 만남이란 주체와 주체 사이의 언어적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머릿속에 그려내는 주관적 표상의 과정보다는 타자에게 물음을 던지고 대답하는 상호주관적 대화의 과정이 지평 융합의 사건을 기술하기 위한 모델로 더욱 적절하다. (c) 이러한 대화의 과정은 세계에 대한 완전한 표상 따위의 종착점을 상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해 속에서 이루어지는 지평 융합의 사건은 시간의 진행에 따라 매 순간 갱신되는 특성인 역사성을 지닌다.

따라서 현상학적 해석학은 현상학에 비해 ‘선입견’이 지닌 중요성을 더욱 강조한다. 두 학문 사이의 차이는 두 학문이 지향하는 목표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성립시키고자 하는 현상학은 사태 자체를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기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상학에서 선입견이란 판단중지를 통해 배제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해의 조건’을 탐구하고자 하는 현상학적 해석학은 수리물리학적 이해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이해에서 선입견이 전제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현상학적 해석학에서 선입견이란 이해를 위해 결코 배제될 수 없는 지평으로 여겨진다. 현상학과 현상학적 해석학은 수많은 주제들에 대해 일치된 입장을 공유하면서도 선입견에 대해서는 서로 상반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Ⅲ. 현상학적 해석학의 모순

여기서 선입견을 바라보는 현상학적 해석학 내부의 모순적 입장이 발견된다. 선입견을 판단중지를 통해 배제하고자 하는 현상학으로부터 선입견을 이해의 조건으로 격상시키고자 하는 현상학적 해석학이 도출되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역설이다. 현상학적 해석학에는 태생적으로 갈등이 내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현상학적 해석학은 ‘현상학’의 방법을 따라 선입견 없이 이해의 조건을 기술하고자 한다. 현상학적 해석학이 근거를 얻기 위해서는 이해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선입견 없이 반성적으로 직관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현상학적 해석학은 ‘해석학’의 입장을 따라 어떠한 사유도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지적하고자 한다. 현상학적 해석학이 일관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현상학이 수행하는 직관조차 선입견 없는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인정될 수 있어야 한다.

현상학적 해석학에 함의된 모순적 입장은 수많은 철학자들에게 오랫동안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해석학적 철학 내부에는 현상학적 해석학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를 둘러싼 다양한 층위의 논의가 존재한다. 여기서 우리는 폴 리쾨르(Paul Ricoeur),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잔니 바티모(Gianni Vattimo), 에른스트 투겐트하트(Ernst Tugendhat)의 비판을 중심으로 현상학적 해석학에 대해 제시된 기존 논의를 간략하게 요약해보려 한다.

─ 리쾨르는 현상학이 선입견 없는 주관의 반성 위에 과학성을 정초하고자 하는 ‘관념론적’ 면모를 지닌다는 사실만으로 현상학과 해석학이 대립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현상학을 바탕으로 해석학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시도는 불가능하더라도 해석학을 바탕으로 현상학을 갱신하고자 하는 시도는 가능하다고 평가한다. 소위 ‘해석학적 현상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입장은 선입견에 의존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해석’으로부터 시작하여 초월론적 자아를 탐구하는 과정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우주 상징, 꿈의 상징, 시의 상징 같은 우리 자신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기술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 현상학은 해석학이 넘어설 수 없는 해석학의 전제로 남아 있다 . 다른 한편으로, 현상학은 ‘해석학적 전제’ 없이 스스로 성립될 수 없다.”(리쾨르, 2003: 182)

─ 데리다는 소위 ‘해석학의 보편성 주장’이라고 일컬어지는 논제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모든 종류의 이해가 선입견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지평 융합의 과정이라는 주장이 일종의 독단적 형이상학을 감추고 있다고 평가한다. 즉, 현상학이 반성 속에서 주어지는 ‘직관’을 무비판적으로 절대화하는 것처럼 해석학 역시 이해를 향한 ‘생생한 경험’을 무비판적으로 절대화한다. 해석학은 다른 종류의 독단적 형이상학을 비판하기 위해 끊임없는 이해에 대한 독단적 형이상학을 구축해버리고 말았다. 우리의 이해가 해석학이 주장하는 방식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증하는 근거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해석학을 통해 실증주의를 비판하고자 하는 시도는 독단적 형이상학으로 독단적 형이상학을 대체하고자 하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가다머 교수는 끊임없이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경험’을, 그 자체로는 형이상학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험에 대한 기술을 언급한다. 그러나 보통, 그리고 아마도 항상, 형이상학은 자신을 경험과 같은 것에 대한 기술로서, 현재화와 같은 것에 대한 기술로서 제시한다. 더 나아가, 나는 가다머 교수가 기술한 이러한 경험을, 곧 대화에서 우리가 완벽하게 이해되거나 입증이 성공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경험을 우리가 정말로 가지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Derrida, 1989: 53-54)

─ 바티모는 해석학이 현상학을 통해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해석학 역시 세계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그는 니체를 통해 제시된 철저한 니힐리즘의 입장을 따라 해석학을 근대 이후의 세계 해석 방식 중 하나로 긍정하고자 한다. 즉, 해석학은 이해의 과정에 대한 메타이론 따위를 성립시키고자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해석학은 계속되는 해석의 역사 속에서 ‘이해’, ‘진리’, ‘경험’,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자 한다. 여기서 해석학이 제시하는 해석이 과연 객관적으로 정당한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우리가 이전과는 달리 해석학이 제시하는 해석을 따라 우리 자신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실제로, 만일 해석학이 해석적 현상의 보편성에 대한 편안한 메타이론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면, [……] (내가 믿기에 유일한) 대안은 해석의 철학을 일련의 사건에서 최종 단계로서, 우리가 니체에게서 처음으로 발견한 니힐리즘의 용어를 제외하고서는 말하는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역사의 결론으로서 생각하는 것이다.”(Vattimo, 1997: 8)

─ 투겐트하트는 해석학이 현상학을 벗어나 분석철학을 통해 완성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단어나 문장은 주관의 반성과 상관없이 언어놀이 속에서 의미를 얻는다. 주관의 반성으로부터 언어의 의미를 정당화하려는 현상학의 의미론은 오늘날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다. 오히려 예술, 종교, 윤리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어떻게 자신만의 고유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해명하고자 하는 기획은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한 분석철학의 의미론에서 더욱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있다. 따라서 정신과학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해석학의 시도는 ‘주관의 반성’에 집착하는 현상학의 의미론과 결별하여 ‘언어의 규칙’을 탐구하고자 하는 분석철학의 의미론과 손을 잡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투겐트하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형이상학 일반에 대한, 또한 현상학 대한 해석학의 비판은, 그리고 그 중에서도 하이데거의 비판은, 단지 [해석학] 자신의 한계 위에 놓여 있을 뿐이다. 즉, [현상학으로부터] 상속받은 기저 층위는 기념물처럼 보호되며 해석학이라는 대리인에 의해 쌓아올려지거나 파헤쳐진다. 언어 분석은 지금까지 결코 강조된 적이 없다. 그렇지만 언어 분석은 [‘해석학’이라는] 건축물을 실증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무너뜨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언어 분석은 자신이 더 많은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재건축을 위한 새로운 도구와 방법을 지닌다고 믿는다.(Tugendhat, 2005: 50)

Ⅳ. 분석적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Ⅳ. 1. 언어 분석의 세 가지 의미

우리는 투겐트하트를 따라 해석학이 분석철학을 통해 갱신될 수 있다고 강조하고자 한다. 다만, 이러한 논의를 위해서는 소위 ‘분석철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전통 속에서도 어떠한 요소들이 해석학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지가 해명되어야 한다. 오늘날 분석철학은 매우 광범위한 영역을 포괄하는 사조가 되었다. 분석철학을 특징짓는 하나의 주제나 방법을 제시하는 일이란 대단히 어려워졌다. 따라서 분석철학이 수행하는 작업 중에서도 해석학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사안이 무엇인지가 정확히 규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가령, ‘언어 분석(linguistic analysis)’이라는 개념은 적어도 다음 세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에서 요약되는 내용은 로마노스의 『콰인과 분석철학』 제2장을 상당 부분 참조한 것이다.)

환원적(reductive) : 초창기 분석철학에서 언어 분석은 대개 자연언어를 통해 형성된 이차적 담론을 인공언어를 통해 조직된 일차적 담론으로 환원하는 작업을 의미하였다. 가장 기초적인 의미의 요소를 상정한 상태에서 복합적인 의미의 집합을 해설하고자 하는 작업이 초창기 분석철학을 특징지었다. 가령, 수학적 개념을 논리학적 진리로 환원하고자 한 프레게와 러셀의 논리주의가 언어 분석의 환원적 측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치유적(therapeutic) : 언어 분석은 자연언어에서 흔히 발생하는 무의미한 문장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도 제시되었다. 가령, 러셀의 유형 이론(theory of types)은 “집합 R은 자기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 모든 집합들의 집합이다.”처럼 자연언어에서 별다른 이상 없이 사용되는 문장이 사실 집합 사이의 위계적 유형 구분을 어기고 있는 무의미한 문장이라고 지적한다. 논리실증주의 역시 전통적 형이상학에서 제시된 수많은 주장들이 언어의 통사론적 규칙을 어기고 있는 ‘사이비 신조’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명시적(explicit) : 언어 분석은 문장 속에 숨겨진 논리적 구조를 보여주는 활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령, 러셀의 한정 기술 이론(theory of definite description)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지칭을 포함하는 문장이 사실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문장들 사이의 연언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하였다. 전기 비트겐슈타인 역시 『논리-철학 논고』에서 유의미한 모든 명제를 이루고 있는 명제의 일반 형식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마찬가지로, 카르납은 『세계의 논리적 구조』에서 자연과학을 통해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문장들로부터 다른 모든 문장들이 어떻게 구조화되는지를 논의하였다.

언어 분석이 지닌 ‘환원적’ 측면이 오늘날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자연언어를 정초하는 가장 기초적인 의미 요소를 찾고자 하는 시도는 완전히 실패한 것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언어 그림 이론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비판, 검증주의에 대한 포퍼의 비판, 경험주의의 두 독단에 대한 콰인의 비판, 소여의 신화에 대한 셀라스의 비판, 도식/내용 이분법에 대한 데이비슨의 비판 이후로 자연언어를 환원하고자 하는 작업을 지향하는 철학자는 거의 사라졌다.

해석학이 주목해야 하는 것은 언어 분석이 지닌 ‘치유적’ 측면과 ‘명시적’ 측면이다. 즉, 언어 분석은 독단적 형이상학이 언어에 내재된 통사론적 규칙을 위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방식으로 독단적 형이상학을 무너뜨린다. 마찬가지로 언어 분석은 독단적 형이상학을 통사론적 규칙에 따라 재해석하여 독단적 형이상학에 은폐된 이해의 조건을 드러낸다. 따라서 언어 분석은 (a) 독단적 형이상학을 비판하기 위해 독단적 형이상학에 다시 의존하는 모순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b) 이해의 조건을 제시하고자 하는 기획 역시 성취한다.

Ⅳ. 2. 해소하기와 보여주기

우리는 언어 분석 개념이 지닌 ‘치유적’ 측면과 ‘명시적’ 측면을 따라 성립된 해석학을 ‘분석적 해석학’이라고 명명한다. 분석적 해석학은 언어 분석 개념이 지닌 두 가지 측면을 계승하기 위해 ‘해소하기’와 ‘보여주기’라는 방법을 사용한다. 즉, 분석적 해석학은 세계를 특정한 이론을 통해 있는 그대로 완벽하게 표상할 수 있다는 주장이 ‘사이비 신조’라는 사실을 폭로하여 실증주의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독단적 형이상학을 해소한다. 마찬가지로, 분석적 해석학은 실재가 언제나 이미 ‘선입견’에 매개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여 언어적으로 분절화된 세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해소하기(dissolving) : 실증주의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독단적 형이상학은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전제를 동시에 받아들이고 있다. 한편으로, 이러한 형이상학은 사유하는 주체와 사유되는 객체를 이분법적으로 분리하여 주체에게 주어지는 ‘현상’이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형이상학은 사유하는 주체와 사유되는 객체 사이의 간격을 뛰어넘을 수 있는 ‘표상’이라는 방법을 상정하여 주체에게 주어지는 현상이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 자체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고도 주장한다. 여기서 분석적 해석학은 독단적 형이상학이 받아들이고 있는 두 전제가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폭로하여 독단적 형이상학을 자신의 내부에서 붕괴시키고자 한다. 즉, 사유하는 주체와 사유되는 객체가 서로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일 경우 표상을 통해 둘 사이를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표상을 통해 둘 사이를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가능하다는 전제를 받아들일 경우 사유하는 주체와 사유되는 객체가 서로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가정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결국,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독단적 형이상학은 자신의 주장을 크게 약화시켜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a) 사유하는 주체가 사유되는 대상을 언제나 이미 잘 표상한다고 인정해야 하거나, (b) 수많은 사유의 방식 중에서 ‘표상’이라는 지위를 차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유의 방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정해야 하거나, (c) 그 두 가지를 모두 인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다.

보여주기(showing) : 독단적 형이상학이 자신의 내부에서 붕괴될 때에야 비로소 사유하는 주체와 사유되는 객체가 맺고 있는 관계가 제대로 조명될 수 있다. 이제 세계를 이해하는 활동은 더 이상 세계를 있는 그대로 머릿속에 그려내는 활동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a’) 우리는 선입견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세계를 이미 잘 표상하고 있거나, (b’) 선입견을 완전히 벗어나서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표상할 수 없거나, (c’) 그 두 가지 모두가 참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석적 해석학은 독단적 형이상학에서 상정된 인식론적 구도가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는 상황에서 세계가 우리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파악되는지를 기술하고자 한다. 즉, ‘경험’이란 세계로부터 주어지는 소여를 직접적으로 획득하는 과정이 아니라, 우리가 전제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선입견을 매 순간 갱신하는 과정으로 기술된다. ‘지식’이란 세계를 완성된 형태로 표상하는 것으로 예상되는 믿음의 체계가 아니라, 우리가 지닌 선입견을 바탕으로 구성된 세계에 대한 한 가지 해석으로 기술된다. ‘진리’란 믿음과 대상이 일치하는 상태가 아니라, 세계가 새로운 선입견 속에서 우리에게 개시되는 사건으로 기술된다. ‘존재’란 우리 자신과 상관없이 눈앞에 놓여 있는 사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손안에 주어지고 있는 도구를 의미하는 것으로 기술된다. 독단적 형이상학을 바탕으로 규정된 모든 요소들은 독단적 형이상학의 붕괴에 따라 새로운 철학적 패러다임 속에서 조명되어야 할 필요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Ⅴ. 분석적 해석학의 의의

분석적 해석학은 다양한 철학적 사조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기 위한 기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지배적 세력을 얻고 있는 네 가지 종류의 철학적 사조들을 분석적 해석학의 관점에서 간략하게 논평하고자 한다. 각각의 사조는 ‘플라톤’, ‘칸트’, ‘니체’, ‘헤겔’이라는 철학사적 대표자들의 이름으로 요약될 것이다.

플라톤적 형이상학 : 인간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실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시도는 플라톤 이래로 철학사 속에서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가령, 20세기 후반 영미권에서는 데이비드 루이스(David Lewis)와 솔 크립키(Saul Kripke)가 ‘분석적 형이상학’을 대표하는 철학자로서 부각되었다. 2010년대 이후에는 그레이엄 하먼(Graham Harman)이 소위 ‘객체지향 존재론’이라고 일컬어지는 운동을 주도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분석적 해석학은 실재가 인간의 외부에, 인간과 독립적으로, 인간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을 의심스럽게 바라본다. 플라톤적 형이상학은 우리가 모든 종류의 선입견을 벗어나 실재에 대해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가정을 무비판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이야기되는 실재가 정말 ‘인간의 얼굴을 하지 않은’ 실재인지를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는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애초에 ‘인간의 얼굴을 하지 않은’ 실재를 이야기하기 위해 ‘인간의 얼굴을 한’ 언어를 도입하려는 시도는 자기모순일 뿐이다.

칸트적 초월철학 : 몇몇 철학자들은 플라톤적 형이상학과 같은 독단적 형이상학을 비판하기 위해 초월론적 작업을 수행하고자 한다. 가령,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칼-오토 아펠(Karl-Otto Apel), 힐러리 퍼트남(Hilary Putnam) 등은 이상적 인식상황을 연구하거나, 이성의 초월론적 구조를 해명하거나, 토의를 위한 화용론적 조건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타당성 주장의 범위와 한계를 규정한다. 이러한 입장은 이성의 영역을 넘어서고자 하는 독단적 형이상학의 월권을 비판하는 동시에, 이성의 영역을 간과하고자 하는 상대주의의 회의 역시 비판하고자 한다. 그러나 분석적 해석학은 메타 이론을 통해 ‘이성의 영역’을 명확하게 정의하고자 하는 시도가 새로운 독단적 형이상학을 또 다시 도입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문을 제기한다. 즉, 모든 타당성 주장이 이성의 영역 내부에서 성립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일종의 타당성 주장이다. 그러나 이성의 영역에 대한 타당성 주장은 정작 자신을 이성의 영역 외부에 위치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이성의 영역’을 바탕으로 독단적 형이상학과 상대주의를 비판하고자 하는 시도는 자기모순에 빠지고 만다.

니체적 유물론 : 독단적 형이상학을 비판하기 위해 결코 개념화될 수 없는 원초적 감각, 생, 차이, 체험, 욕망, 물질 등에 호소하고자 하는 입장도 존재한다. 가령, 이러한 입장을 대표하는 인물로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Pierre-Félix Guattari)를 들 수 있다. 최근에는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가 소위 ‘신유물론’이라는 이름으로 두 인물을 계승하기도 한다. 여기서 세계는 독단적 형이상학이 상정하고 있는 고정적, 정형적, 분절적 개념으로는 파악될 수 없는 유동적, 역동적, 비분절적인 흐름이라고 강조된다. 그러나 분석적 해석학은 개념 이전의 세계를 묘사하고자 하는 시도 역시 또 하나의 독단적 형이상학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플라톤적 형이상학을 주장하는 철학자들처럼 니체적 유물론을 옹호하는 철학자들 역시 자신들이 실재를 순수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무비판적으로 가정한다. 실재를 ‘고정적/유동적’, ‘정형적/역동적’, ‘분절적/비분절적’이라는 개념쌍 중에서 어느 쪽으로 파악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독단적 형이상학 내부에서 일어나는 의견 차이를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헤겔적 관념론 : 헤겔을 지지하는 철학자들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개념에 매개되어 있다는 관념론적 논제를 바탕으로 독단적 형이상학을 비판한다. 이러한 입장은 세계에 존재하는 ‘실재’와 우리가 지닌 ‘개념’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즉, 우리는 언제나 이미 선입견 속에서 세계를 바라볼 수밖에 없고, 선입견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또 다시 선입견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선입견을 통해 주어진 세계를 실재로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가령, 대륙철학에서는 자크 라캉(Jacques Lacan),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 등이 세계가 개념의 매개 속에서만 주어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1990년대 이후 영미철학에서는 존 맥도웰(John McDowell)과 로버트 브랜덤(Robert Brandom)이 이끄는 소위 ‘피츠버그 학파’가 헤겔의 관념론을 현대적으로 갱신하고 있다. 분석적 해석학은 바로 헤겔적 관념론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 ‘해소하기’와 ‘보여주기’라는 방법은 독단적 형이상학이 자기모순에 빠져 붕괴된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모든 이해가 개념에 매개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참고 자료

Derrida, Jacques, “Three Questions to Hans-Georg Gadamer”, Diane Michelfelder and Richard Palmer (trans.), Dialogue and Deconstruction: The Gadamer-Derrida Encounter, Diane Michelfelder and Richard Palmer (eds.), Albany: State Unjversity· of New York Press, 1989, 52-54.
Tugendhat, Ernst., Traditional and Analytic Philosophy: Lectures on the Philosophy of Langua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2.
Tugendhat, Ernst., “Phenomenology and Linguistic Analysis”, Peter McCormick and Frederick A. Elliston (trans.), Edmund Husserl: Critical Assessments of Leading Philosophers, Vol. 4, Bernet Rudolf, Welton Donn, Zavota Gina (eds.), Routledge, 2005, 49-70.
Vattimo, Gianni., Beyond Interpretation: The Meaning of Hermeneutics for Philosophy, David Webb (trans.), Stanford, California: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7.

로마노스, 조지., 『콰인과 분석철학: 언어에 관한 언어』, 곽강제 옮김, 한국문화사, 2002.
리쾨르, 폴., 「현상학과 해석학」, 『해석학과 인문사회과학: 언어, 행동, 그리고 해석에 관한 논고』, 윤철호 옮김, 서광사, 2003, 181-228.
후설, 에드문트., 『순수현상학과 철학적 현상학의 이념들』, 제1권, 이종훈 옮김, 한길사, 2009.

원문

https://blog.naver.com/1019milk/222249505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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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있는 주제에 관한 멋진 글 감사합니다. 시간내어 꼼꼼하게 읽고 공부해보겠습니다.
레퍼런스에 있는 투겐트하트의 글이 눈에 띄네요. 시간을 내어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인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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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아직 충분하게 정리되지는 않은 내용인데, 언젠가 완성된 논문 형태로 글을 써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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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학 글들을 찾아보다 글이 너무 좋아서 읽고 또 읽는 중입니다.. 논문 혹시 나오게 되면 꼭 읽고싶습니다!!

제 나름대로의 이해로 끌어들이기위해 내용의 글을 쉽게 바꿔보려는 중인데, 한 줄로 요약해보면

"해석이란 주체가 발견하는 것이 아닌, 주체와 객체의 관계속에서 발명되는 것" 이라고 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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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저 주제로 학위논문을 쓰는 중인데, 죽을 맛입니다ㅠㅠ

저는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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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언어 분석이 지닌 세 가지 측면에 대한 설명을 보고 뭔가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이 조금은 더 선명하게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다만 읽다가 '언어 분석'이라는 입장에 대해 궁금한 점이 생겨 질문을 드려 봅니다. 일단 다음 인용구에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이와 관련된 질문은 세가지 입니다!)

혹시 1) 다음 진술도 '언어 분석'이 주장하는 바에 포함이 될까요? 추가적으로, 2) 양화사를 '모든'이라고 바꾸게 되면 해당 진술은 더 이상 '언어 분석'의 주장은 아니게 되나요?

언어 분석을 시도하는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어떤(또는 모든?) 형이상학적 주장이 언어에 내재된 통사론적 규칙을 위반한다면, 그 주장은 잘못이다.

3 ) 세번째로는, 혹시 통사론적 규칙에 따라 재해석되지 않는 형이상학적 주장이 있을까요? 말하자면, 이해의 조건이 은폐되어 드러나있지 않은데 그 은폐를 걷어낼 수 없는 그러한 주장 말이에요. 당장 언뜻 떠오르는 건 파르메니데스의 비존재 논증인데, 이 경우 통사론적 규칙 뿐만 아니라 모종의(?) 의미론적 규칙도 동원해야 재구성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한번 여쭈어 봅니다.

4 ) 마지막으로 요부분은 <진리와 해석에 대한 탐구>에 수록된 "On the Very Idead of a Conceptual Scheme"이 전거인가요? 아직 데이빗슨을 공부해보진 못 했는데 나중을 위해 미리 메모를 해두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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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증주의의 반동으로 나타난 현상학을 모순을 언급하고 있군요. 판단중지하는 방법은 올바른 철학방법은 아니라고 저도 봅니다. 현상학적 해석학 대신에 분석적 해석학을 대안으로 여기는군요. 정확한 의미를 포착하지 못했지만 모든 학문의 방법인 분석과 종합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종합도 좀 강조하여 줄 수 있을 듯 합니다. 저는 분석과 종합을 환원과 창발이라고 바라보지만
모든 철학자는 문제를 분석하여 기본 단위로 니눈 후에 참거짓을 얻고 다시 분석의 역방향으로 종합합니다. 데카르트 방법이지만 다른 모든 철학자의 방법이지요. 종합은 단순합일 경우도 있지만 곱셈 일 수도 있고 정신과학의 경우에는 상상 창작일 수도 있지요. 이 다양한 종합의 유형을 고려하면 창발이라는 용어가 적절합니다. 선입견에 의한 종합도 창발이라고 보지요.
분석과 환원은 누구라도 잘 이해하면서 창발에 대한 논의는 좀 미진한 듯 합니다. 해석학도 창발을 좀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정신과학 예술을 이해하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