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자바라의 『분석철학의 해석학적 본성』을 읽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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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다가 몇 가지 흥미로운 내용이 있어서 올려봅니다.

"존재는 실제적인 술어(real predicate)가 아닌데 왜냐하면 '긍정의 보편적 현상은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투겐트하트는 '언어가 존재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아니라 '존재가 언어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질문함으로써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는데, 왜냐하면 그는 항상, 언어에 대한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강조점을 따라서, '우리가 이해하면서 살고 있는 보편적 차원이란 원초적으로 대상, 존재자, 사실의 세계가 아니라 문장의 세계'라고 사유하기 때문이다. 존재의 영역을 논의하기 위해 하이데거가 '개방성(openness)'이라는 개념을 사용했고 가다머가 '언어(language)'라는 개념을 사용한 곳에서, 투겐트하트는 '문장(sentence)'이라는 실천적 개념을 사용한다."(Santiago Zabala, The Hermeneutic Nature of Analytic Philosophy, Santiago Zabala & Michael Haskell (trans.),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8, p. 52.)

"투겐트하트는 하이데거가 전통적 개념들에 대해 급진적으로 물음을 제기하였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하이데거가] 그의 현상학적 기술의 방법을 통해 그렇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또한 그가 '분석철학보다 더 멀리 나아갔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의 기술적 방법은 검증 가능성의 기준을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아이디어들은 '직관적이며 증명되지 않은 논제들로 남겨졌다.' 하이데거의 철학에 대한 검증은 오직 언어 분석의 상호주관적이고 의미론적인 검토를 통해 일어날 수 있는데 왜냐하면 하이데거 자신이 '존재 이해의 언어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투겐트하트의 탐구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존재에 대한 이해, 그리고 특별히 우리 자신의 존재함(to-be)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문장 속에서 표현'되어야 한다는 필연적 결론으로부터 뒷걸음질 친다. 하이데거는 사실 철학의 주제가 '이해'라고, '현상학적 기술'이 해석이라고, 또한 그의 방법이 '해석학'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그는 후설을 넘어서 나아가기 위해 이러한 '해석학적 방법'을 위한 어떠한 기준도 만들고자 시도하지 않았다. 그의 철학의 의사소통적 특성을 '연상적(evocative)'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기준의 결여이다. 하지만 투겐트하트가 분석적 철학을 통해 채우고자 하는 것은 하이데거의 철학 속 바로 이러한 결점이다."(Santiago Zabala, The Hermeneutic Nature of Analytic Philosophy, Santiago Zabala & Michael Haskell (trans.),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8, p. 54.)

재미있는 포인트들

(1) 존재는 '실제적 술어'가 아니다. 즉, "~이다."에 대응하는 객관적 존재가 외부에 미리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2) 하이데거와 가다머는 우리의 세계가 '존재자(entity)'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문장(sentence)'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강조한다.

(3) 하이데거는 통찰력 있는 아이디어들을 많이 제시하였지만, 자신의 아이디어들을 명료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4) 존재에 대한 하이데거의 사유는 결국 문장에 대한 의미론적 분석을 통해 해명되어야 한다. 즉, 존재에 대한 논의는 우리가 "~이다."라는 술어를 사용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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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그 아이디어를 명료하게 풀어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죠! 그럼 저도 하이데거 세미나를 하면 한 마디 거들 수 있을 텐데..
그런데 인용하신 본문에서 영 와닿지 않는 점이 많네요.

존재는 실제적인 술어가 아닌데, 왜냐하면 '긍정적인 보편적 현상은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건 무슨 말인가요? "실제적인"인 술어가 아니면 "가상적인" 술어도 있는 것인지, 있다면 그 기준은 무엇인가요? 만일

술어 F가 실제적이다 iff 'F'에 대응하는 객관적인 대상이 세계에 있다

라면, 아마도 많은 유명론자들은 실제적 술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가 이해하면서 살고 있는 보편적 차원이란 원초적으로 대상, 존재자, 사실의 세계가 아니라 문장의 세계이다.

이건 글자 그대로 보면 굉장히 반직관적인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기서 말하는 '세계'는 무엇이고, '문장'은 무엇인가요? 정말로 물리적인 이 세계와 쓰거나 말할 수 있는 언어학의 대상인 문장을 말하는 것이 맞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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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 원래 "존재는 실제적 술어가 아니다."라는 말은 칸트가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신 증명을 비판하면서 제시한 논제에요. 칸트가 말하는 '실재적 술어(reale Praedikate)'란 결국 주어에 대해 새로운 정보를 줄 수 있는 술어라고 할 수 있어요. 칸트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자면, (a) 주어 개념 밖에 있고, (b) 주어 개념을 확장시키고, (c) 주어 개념 속에 포함되지 않는 술어가 '실제적 술어'에요. 그러니까, 칸트는 신의 존재를 사유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그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결론을 도출해 낼 수는 없다고 지적하면서, 어떤 판단에 "~이 존재한다(있다, ist)"라는 동사가 사용되었다는 사실로부터 그 문장이 현실에 실존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종합판단인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고 지적하는 거죠.

(2) 투겐트하트가 지적하고 있는 내용도 마찬가지에요. '존재'라는 개념에 대한 사유를 마치 외부세계의 대상 일반이 공유하고 있는 보편적 속성에 대한 사유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의미인 거죠. 모든 대상이 지닌 공통적 속성으로서의 '존재'라는 것은 애초에 없다는 거에요. 즉, '존재'에 대한 사유가 마치 (종합판단을 통해 표현될 수 있는 경험과학의 발견들처럼) 외부세계의 대상에 대한 사유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모든 대상이 공통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신비한 형이상학적 영역 따위를 허구적으로 상정하게 된다는 거죠.

(3) "긍정의 보편적 현상은 말해질 수 없다."라고 한 부분은, 저의 발번역 때문에 의미가 정확히 전달되지 못해서 그런 것인데, 원래 "the universal phenomenon of affirmation is wordless."라는 구절이에요. 그러니까, 풀어서 설명하면, "~이다."라는 형식을 지닌 '긍정문(affimative sentence)'에 대응하는 보편적 현상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런 현상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론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4) 어떤 의미에서 보면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입장은 '유명론'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실제로, 로티가 가다머의 해석학을 유명론이라고 설명하는데, 저는 로티의 설명에 상당 부분 동의해요.) 다만, 이때의 유명론이란 "보편자를 우리의 언어적 현상으로 남김 없이 환원할 수 있다."라는 이론을 적극적인 형태로 제시하는 입장이라기보다는, "'이데아', '신', '사물 자체', '실재' 같은 형이상학적 대상을 철학적 논의의 시작에서부터 무비판적으로 미리 상정하지 말라."라고 지적하는 소극적인 입장이라고 하는 게 더 좋을 거에요.

(5) 그리고 바로 이런 유명론적 관점에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하이데거), "이해될 수 있는 존재는 언어이다."(가다머), "나의 언어의 한계가 나의 세계의 한계다."(비트겐슈타인) 같은 논제들이 등장하는 거죠. 우리가 '참(true)'이라고 받아들이는 문장들의 영역이 우리가 '실제적(real)'이라고 받아들이는 세계의 외연을 결정한다는 의미에서요. 그래서, 놀랍도록 반직관적이지만, 투겐트하트는 문장이 존재자에 우선한다고 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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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 (2)의 설명으로 미루어볼 땐 1차 술어논리에서 기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림과 비슷해 보이는군요. 존재가 속성이 아니듯이 "존재하다"가 술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겠죠? "'존재'에 대한 사유가 마치 외부 세계의 대상에 대한 사유라고.."라는 부분은 정확히는 존재라는 것을 어떤 속성에 관한 것으로 읽으면 안 된다는 것이겠구요.

(4), (5)에 따르면 하이데거나 가다머 같은 입장은 반실재론적인 색깔을 띠는 것으로 보이네요. 투겐트하트도 그렇구요. 전반적으로 그런 그림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까요? 물론 하이데거-가다머 전통에서 언어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부터 (아마도 많이) 달라서 도식적으로 잘라내긴 어렵겠지만요.
(+) 생각해보니 아예 실재론-반실재론 논쟁을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선택지일 수도 있을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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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입장을 말씀하신 대로 이해하고 있어요. 투겐트하트가 강조하는 것도 바로 그 점이거든요. 비록 초창기 분석철학자들이 실증주의로 빠진 것은 비판받을 점이라고 하더라도, 이 사람들이 존재 술어에 대응하는 외부의 대상을 찾으려 하지 않고 존재를 양화사를 통해 분석하려 한 점은 근본적으로 옳다는 거죠. 하이데거도 결국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였는데, 아쉽게도 하이데거는 언어 분석에 익숙하지 않아서 번뜩이는 시적 통찰로만 자기 주장을 풀어놓았다는 거죠. 굳이 말하자면, 저는 콰인과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상당히 유사한 구석이 많다고 봐요. 존재를 변항의 값으로 설명하고, 그 값이 ‘담론의 우주(universe of discourse)’라고 일컬어지는 이론적 배경에 따라 상대적으로 결정된다는 논제가 바로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할 때 말하고자 한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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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보기로 하이데거는 logistik도 공부했다고 들었는데 영 자기 스타일이 아니었던 걸까요 ㅋㅋ 콰인의 존재론과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유사한 구석이 많다는 해석은 따져볼만할 것 같네요. 표면적으로 유사하게 여겨질 순 있는데, 정확히 어떤 맥락인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혹시 관심있으시면 쪼인트 할까여?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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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ㅋㅋㅋㅋ 어떤 쪼인트인지는 모르겠지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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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갑자기 생각난 건데, 하이데거와 콰인은 서로 잘 알지도 못했고, 알았다고 하더라도 서로 극혐(?)했겠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둘의 제자인 가다머와 데이비슨은 서로 굉장히 친했고 자기들의 철학이 유사성을 많이 지닌다는 사실에 공감을 했어요. 심지어, 데이비슨이 가다머의 플라톤 해석에 대해 논문을 쓰기도 했을 정도로요. 그래서 두 입장을 비교하는 연구는 굉장히 많아요. (대표적인 저서 제목도 비슷해서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이고 데이비슨은 “진리와 해석에 관한 탐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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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따라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의 관계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를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인 것 같습니다. (말씀 듣고 생각해 보니 가다머랑 데이비슨 둘 다 박사는 고대철학으로 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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