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설의 현상학의 직관 개념에 대한 단상

후설의 현상학이 얼핏 복잡해 보여도 그 밑바탕에는 사실 정말 소박한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즉, 우리가 순수한 '직관', '체험', '경험', '봄'을 통해 인식의 초월론적 조건을 기술할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후설은 판단중지를 수행하여 모든 선입견을 벗어버리고 나면 대상이 우리 의식에 주어지는 순수한 방식이, 말 그대로, 명료하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초월론적 현상학이란 이렇게 보이게 된 인식의 조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체계적으로 적어보려는 시도일 뿐이다. 가령, "판단중지를 수행하고 나니 대상과 의식이 맺고 있는 지향적 관계가 보이더라.", "대상은 의식의 태도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로 주어지더라.", "대상을 지각할 때에는 언제나 인식 주체의 지평이 전제되더라.", "우리는 주어진 대상의 전면만을 바라보면서도 그 후면을 능동적으로 구성해내더라." 등이 초월론적 현상학에서 기술되는 내용이다.

현상학에 대해 후대 철학자들이 제기하는 비판의 핵심은 이 '소박한 생각'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한 마디로, "인식의 초월론적 조건을 니가 순수하게 보고 있다는 건 결국 그냥 니 생각이고, 그게 정말 제대로 된 기술이라는 근거가 뭐냐?"는 비판이다. 따라서 리쾨르는 '순수 자아'에 대한 직접적 기술은 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하며 주체는 해석의 '우회로'를 통해 자기 자신을 간접적으로 기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데리다는 현상학이 지금 우리의 눈앞에 대상이 고정된 형태로 서 있다는 가정을 독단적으로 전제한 채 성립한 '현전의 형이상학'이라고 비판하고, 바티모는 현상학이 주장하는 인식의 초월론적 조건조차 결국 인식에 대한 우리 시대의 '해석' 중 하나일 뿐이라고 이야기하고, 투겐트하트는 후설의 '직관' 개념이 일종의 '망상'일 뿐이며 현상학이 언어적 분석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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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원리 가운데 원리, 즉 모든 원본적으로 부여하는 직관은 인식의 권리원천이라는 원리에서, '직관' 속에 우리에게 원본적으로 (이른바 그 생생한 실제성에서) 제시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주어진 그대로──그러나 또한 그것이 거기에 주어지는 제한들 속에서만──단순히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원리에서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어떠한 이론도 오류를 일으킬 수는 없다."(에드문트 후설, 「이념들I」, 107쪽.)

"사실 현상학의 <원리 중의 원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의미와 명증의 원천으로서, 선험 중의 선험으로서 직관에의 근원적 현전이라는 가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이 우선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모든 경험(Erlebenis[(살이)체험])의, 따라서 또한 모든 생의 보편적 형식은 언제나 현재였고 또 언제나 현재일 것이라는, 그 자체로 이념적이고 절대적인 확실성이다."(자끄 데리다, 「목소리와 현상」, 83쪽.)

"나는 후설의 발달된 방법을 이루고 있는 두 가지 근본적 가정이 비판을 견뎌낼 수 없다는 점에 대해 페팃(Pettit)에게 동의한다. (a) 후설이 '행위'라고 부르는 것을 우리가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내적 감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직 아무도 내적 의식의 수수께끼를 해결하지 못했지만, 그만큼 우리는 그것이 내적 경험이 아니라고는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b) 형상적 직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편자를 ('본다'라는 단어의 매우 부자연스러운 의미에서) '볼' 수 있다는 후설의 가정은 증명될 수도 없고 망상처럼 보인다."(Ernst Tugendhat, "Description as the Method of Philosophy", Linguistic Analysis and Phenomenology, p.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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