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철학사 연구의 주된 의의 중 하나는 철학사의 '거인' 을 깊게 탐독함으로써 통찰을 얻고 새로운 철학을 펼쳐나갈 기반으로 삼는 것이었다고 봅니다. 이건 본 포럼에서 번역되었던 질 들뢰즈의 견해에서도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전세계의 뭇 철학적 전통에서 많은 실질적인 "철학적 작업"이 그 앞서 살았던 '거인'들의 문헌에 대한 주석 및 해석 작업을 통해 이뤄졌다는 점은 이를 잘 방증하는 것 같습니다. 들뢰즈 본인의 철학사가로서의 커리어 또한 그러했구요.
그런데 이런 전통적인 '의의'가 2020년대 지금의 철학사 연구와는 궤가 점점 달리하게 된다는 인상을 받게 된 바 있습니다. 최근 아래 글을 보면서 오랜만에 다시 떠오르게 된 생각인데요.
플라톤, 맹자, 데카르트, 칸트 등 '거인'들에 대한 켜켜히 쌓인 해석사에 또 한 줄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 속에 '잊혀졌던 인물'들을 재발견해내는 것으로서의 의의가 철학사 연구에서 점점 부각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고 있습니다.
대중적인 시도로는 전세계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철학사를 소개하는 팟캐스트인 History of Philosophy without any gaps, 서양 근대 여성 철학자들에 대한 조명을 시작으로 점점 범위를 확장해나가는 Project Vox 같은 사례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흐름은 학술지 공간에서도 확인되는 것 같은데요. 2018년에 창간 25주년을 기념하여 British Journal for the History of Philosophy의 편집장 Michael Beaney가 쓴 논평문 "Twenty-five years of the British Journal for the History of Philosophy"에서 이를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본 학술지에서 첫 20년간 출판된 논문 주제들을 살펴보니] 거의 반에 달하는 논문들이 소위 근대 철학의 '7대장(big seven)'에 집중되어 있었고 [데카르트, 칸트, 흄, 로크, 라이프니츠, 버클리, 스피노자: 역주], 2분의 3에 달하는 논문이 고작 16명 정도 철학자에 할애되어 있었다 [+ 홉스, 아리스토텔레스, 말브랑슈, 리드, 플라톤, 헤겔, 밀, 키에르케고르, 니체: 역주]. 따라서 우리의 핵심 목표는 명확했다: 다른 철학자들에 대한 출판 비중을 늘리기.
[본 학술지에서는] 지난 오 년간 그전까지 다뤄지지 않았던 82명의 철학자, 전통 및 주제에 대한 논문이 출판되었다. 덕분에 '7대장'에 관한 논문은 49%에서 20%로 줄어들었고, 기존의 '16대장'에 대한 논문은 67%에서 40%로 줄어들었다.
저자는 본 학술지에서 "지난 오 년간 이룩해낸 결과물에 대한 흡족감"을 표시하며, 다음과 같이 논평합니다.
첫째, 근대 철학 '7대장' 및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연구는 이미 충분히 기름칠이 잘 되어있는 기계라고 봅니다. 이미 그 저작들에 대한 훌륭한 철학적 해석들, 거기에 풍부한 맥락적 연구는 충분히 많이 쌓였습니다. 만약 하고 싶기만 하다면 신진 학자는 얼마든 다른 이들의 어깨 위에 서서 공헌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게 그냥 기존 논쟁에 주전원(epicycle)을 하나 더 덧붙이는 것일뿐일지라도요.
둘째, 이들 아홉 명 (혹은 열여섯명) 철학자에 대한 전공자들은 철학 정규직 취직이나 승진 등을 두고 봤을 때 현대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학, 언어철학 같은 분야 전공자들에 비해 그 기회가 딸리지 않는 반면, 예컨대 중세철학이나 신칸트주의 전공자들은 '그 급이 같지 않다(not in the same league)'는 편견이 팽배해 있습니다. 저희는 이런 편견이 얼마나 깊게 잘못된 것인지를 보이고자 합니다.
물론 이러한 흐름은 어쩌면 기존의 철학사 연구에 대한 견해와 충돌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저 이제까지 놓치고 있었던, 새로운 '거인'을 찾는 시도로 현재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을수도 있으니까요.
다만 저의 인상이 맞다면, 어쩌면 이러한 흐름은 그저 그 어깨 위에 설 '거인'을 찾는 주석가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아예 거인이 아닌 '틈새'를 발굴해내는, @Mandala 님의 표현을 빌어 "빅토리아 모험가"로서 철학사가의 임무가 재정립되어가는 흐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들 이런 흐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