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사란 무엇인가? 그리고 철학에 도움이 될...까?

(0) 지성사(intellectual history)는 50년대에 구미권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어서, 이제는 완전히 학계에 편입된 영역입니다.
철학과 동일한 '사상'을 다룬다는 점에서, 영역이 겹치지만 두 분야 간의 면밀한 이해는 부족해보여 짧게나마 글을 적게되었습니다.
(이들은 리처드 왓모어의 "지성사란 무엇인가"을 기반으로, 제 맘대로 이것저것 덧붙인 글입니다.)

(1) "지성사"라는 학문 영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성사가 나오기 전 사학계 상황을 간략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a) 전통적인 역사관인 헤겔적 역사관이 있습니다. 헤겔적 역사관은 a) 인류의 역사는 진보하고 있고 b) 이 진보는 각 시대라는 명확한 구분을 통해서 알 수 있으며 c) 이 시대는 각기 공유하는 '시대 정신'을 가지고 있고, 이 시대정신을 명확히 드러내주는 '영웅'(과 같은 인물)이 있다.
이러한 헤겔적 역사관에 대한 공격으로 (b)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이 대두합니다. 이들은 헤겔적 역사관이 가지는 엘리트-관념 위주의 발전 단계('상부구조')를 거부하고, 이들이 드러나게 된 사회적/경제적 토대('하부구조')에 집중을 합니다.

(2) 이렇게 마르크스주의가 휩쓸던 시기에, 학자들인 한 가지 의문에 빠집니다. 과연 '하부구조'가 역사의 발전의 모든 것일까? 그래도 '사상'(관념)이 인간의 행동에 어느정도 영향을 미친다고 봐야하지 않는가?

이렇듯, 관념과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동시에, 헤겔적 역사관에 대한 반성 역시 지속됩니다. 헤겔적 역사관에 대한 반성은 크게 (a-a) 정말 인류의 역사는 '목적론적으로 발전하는' 역사인가? 달리 말해, A-B-C라는 변화에서, B는 단순히 C를 위한 예비 단계에 불과한가? (a-c) 그리고 한 시대를 온전히 정의할 수 있는 '시대정신'이라는게 진정 존재하는가? 이들은 그저 학자들이 구성물에 불과하지 않는가?
[헤겔적 역사관에 대한 이 두 가지 반성은 꼭 명심할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여타 시간적 변화를 다루는 다른 학문들 역시 이 두 가지 반성을 통해서, 많은 변화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생물 진화론에서도 더 이상 목적론적 해석을 사용하기를 꺼려합니다.
리처드 프럼의 [아름다움의 진화]에서 나온 예시인데, 새의 깃털에 있습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새의 깃털로의 진화는 날기 위한 '목적'을 위해 차근차근 진화해온 것처럼 보입니다. 허나 이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과거를 투영한 것에 불과합니다. A-B-깃털이라는 단계가 있다고 가정합니다. 과연 A가 한 B로의 변화는, 깃털이라는 최종 결과물을 염두한 변화일까요? 이것이 가능할려면, A가 예언을 해야했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이 변화는 '깃털'과 무관한, 당대 환경에 대한 적응으로 해석하는 게 훨씬 타당해보입니다. 실제로 깃털의 전 단계인 솜털은, 단순한 보온과 방수의 목적으로 인해 털에서 진화한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또한 시대정신 역시 많은 비판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인과가 역전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개별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서 '시대정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구성할'뿐이지, 역으로 시대정신이 존재해서 그게 '개별 작가들을 꼭두각시마냥' 조종해 자신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해 보입니다. 이와 같은 지적은 미술사/영화 이론에서 주로 나왔습니다.]

(3) 지성사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다른 여타 역사학들의 변화와 함께 등장합니다. 간략하게 이 시기에 나타난 '광의의 사상사'들과 함께, 지성사'들'의 흐름을 개괄하겠습니다.
(3-1) 우선 '망탈리테'(심성사), 특정 집단의 문화(혹은 사고방식)을 다루는 역사학이 대두됩니다. 특히 프랑스 2세대 아날 학파에 의해서 주도되는데, 자크 르 고프, 에마뉘엘 르루아 라뒤리 등이 있습니다.
(3-2) 그리고 이들의 영향을 받은 미셸 푸코가 있습니다. 푸코는 모두 알다시피, 실제로 개념/심성이 어떻게 제도를 통해서 실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그 영향력을 탐구했습니다.
(3-3) 영미권 문화사학자들이 또 있습니다. 이들은 관념이 어떠한 방식으로 생성되고, 전달되는지 그 밑바닥에 있는 물리적 조건들과 관념의 관계를 다룹니다. (예컨대, 학교나 출판물, 번역 등이 이들의 연구 대상입니다.) 대표적으로 피터 버크, 로버트 단턴 등이 있습니다.
(3-4) 이제 협의의 지성사'들'에 대해서 논의합시다. 이들은 앞의 흐름들보다는, 보다 '명확하고' '잘 정의된' 개념들의 역사를 추적합니다. 그 중 한 흐름은 독일의 개념사입니다. 코젤렉으로 대표되는데, 이들은 사전이나 옛 문헌들을 중심으로, 단어의 의미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탐구합니다.
(3-5) 그리고 대망에, 우리가 여기서 다루는 '지성사'를 의미하는 케임브리지 학파가 등장합니다. 대표자로는 퀜틴 스키너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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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케임브리지 학파는 J. 오스틴의 발화 개념을 자신들의 연구에 적용합니다. 이들은 (a) 단순히 책만 읽는 것도 (b) 책을 둘러싼 당대의 경제적, 시대적 배경을 아는 것만으로는 '완전한' 연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코젤렉의 개념사는 이들에게 불완전합니다.] 이들은 (c) '책을 쓴다는 것'은 명백히 저자가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쓴 발화 행위'이기 때문에, 그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책이 참여한 논쟁을 재구성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케임브리지 학파는 대다수가 정치철학/정치 사상을 다룬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기존 철학사가들이 하는 정치 철학 연구에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1) 이들은 당대 철학자들이 알리가 없는 개념들을 그 철학자에 적용해서, '~의 선구자'라는 식의 과잉 해석을 한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로크가 오늘날의 민주주의에 해당하는 개념을 알리가 없고, 따라서 그런 목적을 전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로크를 민주주의의 선구자라 취급하는 해석에 반대합니다.)
(2) 또한 철학사가들은 지나치게 철학자들의 저자를 취사선택해서, 이들의 본래 의도를 왜곡한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토마스 홉스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홉스의 기독교 왕국 등의 신학적 내용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는데, 대다수의 철학자들인 이 부분을 무시한 채, '만인 대 만인'의 투쟁만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지나치게 철학사가들이 '협소한' 정전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철학사가들은 '중요하다고 공인된' 학자들만을 연구해, 당대에 있었던 다른 마이너한 흐름들을 무시한다는 지적입니다.


(4) 이와 같은 케임브리지 학파의 주장은 지나치게 과대한 지점이 존재합니다. 특히 (a) 왜 과거 철학자들에 대한 재해석이 '의미가 없는 해석'이라는 평가를 받아야하는지 입니다. 이에 대해서 스키너는 자신은 '철학자에 대한 재해석'에는 별 불만이 없지만, 그 재해석을 '그 철학자에 대한 진짜 해석'이라고 주장하는 행태를 비판한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이는 꽤 타당한 구분이라고 봅니다. 리처드 로티 역시 이를 구분해야한다고 동의했고요.)
또한 이 방법론은 (b) 지나치게 정치사상/경제사상 등에만 한정된 문제로 보입니다. 예컨대, 홉스나 로크 등의 정치 사상은 '당대의 특정한 사건에 대한 반응'이라는 맥락에서 나왔기에, 이 맥락을 찾아서 '복원하는게' 이들의 진의를 찾는 옳은 방법일 수 있습니다. 허나 인식론이나 형이상학처럼, '보편적인 진리를 찾기 위한 담론'을 의식하고 연구하는 행위에 있어서, 이 연구 방법이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c) 이들은 발화자의 맥락'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실제로 책이 어떻게 수용되었고 전승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효과적인 답을 내놓지 못합니다. 논쟁의 맥락에서 벗어난, 시공간적 다른 맥락에서 이 사상이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는 '추가적인 방법'이 필요합니다. (다만 이 문제를 지성사가들이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지성사가들은 이 맥락'들'을 동시에 보여줌으로서 [한 마디로, 개노가다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John Robertson의 The Case of the Enlightenment, Scotland and Naples 1680-1760은 스코틀랜드와 나폴리에서 유사하게 전개된 계몽주의를, 두 나라의 맥락을 동시에 보여줌으로서, 이러한 문제를 피해갑니다.)


(5) 그렇다면 지성사의 효용은 무엇일까요? 왓모어가 책에서 주장하는 점은 지나치게 상식적입니다. 이들은 (a) 철학자들이 안 만드는 비판본을 만들어주고 (b) 철학자들이 안 연구하는 마이너한 학자들을 발굴해주고 (c) 기존 대가들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준다고 합니다.

내가 보기에, 지성사가 주는 효용은 두 가지 정도 있어보입니다. (a) 철학자/철학사가들에게 경고를 준다는 점입니다. 때론 철학 연구자들은 A의 진의와 A에 대한 재해석을 구분하지 않고 논문을 쓰곤 합니다. 저는 이 같은 혼동은 별로 좋지 못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스키너의 지적마냥 이 둘은 명백히 구분할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게다가, 명확한 해석이란 당대의 논쟁을 중심으로 정리하는게 '제일 유용한 방법' 중 하나라는 점을 명심하는 것도 좋아 보입니다.
(b) 두번째는 철학사와 당대의 다른 사상들 간의 교류와 충돌들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토마스 홉스와 과학자 로버트 보일은, 보일이 한 과학적 실험의 타당성에 대해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토마스 홉스와 로버트 보일의 논쟁은 단순한 어불성술로 보이고, 심지어 홉스의 오류라고만 단순히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성사가들은 이들 논쟁을 보다 깊은 차원의 문제와 연관시켜 연구를 했습니다. ( Leviathan and the Air-Pump: Hobbes, Boyle, and the Experimental Life, 라는 책입니다.)
또 다른 예로는, 프랜시스 예이츠(Francis Yeats)가 있습니다. 예이츠는 당대 영국에서 헤르메스주의와 카발라가, 당대 철학자들 (로크 등)과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연구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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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적인 자료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가 지식이 짧아 그저 내용만 줍줍해갑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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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사를 알면 철학의 텍스트를 공부하는 데 도움이야 될 것 같기는 하지만, 솔직히 이게 철학적으로 얼마나 신선한 통찰을 줄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가령, 홉스의 텍스트를 당대의 맥락에서 정확하게 읽어내는 것과 홉스의 텍스트를 오늘날의 맥락에서 참신한 방식으로 적용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니까요. 더군다나, 텍스트가 참여한 "논쟁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지성사의 시도가 과연 얼마나 성공적일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습니다. 저는 역사를 재구성하려는 시도에는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역사가의 관점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고 보거든요. 예전에 지성사의 중요성에 대해 대단히 강조하시는 분과 대화한 적이 있었지만, 저로서는 지성사가 과연 기존 역사 연구나 철학사 연구에 비해 얼마만큼 참신한 것인지 아직 그다지 공감하기가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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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고민 많이하며 지켜보는 분야에 대해서, 정리글을 읽으니 반갑군요.
이 방법론 적용하여 근대 한국의 정치/법 체계 내 여러 서구 (특히, 근대 독일의) 개념, 법률, 사상의 수용 및 변화를 추적하는 분의 발표를 옆에서 지켜 봤는데, 정말 매력적이더군요. 말씀하신 대로 적어도 이 방법론이 많이 쓰이는 정치사상 혹은 역사학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흐름으로 보이더군요. 현실적인 정치적/사회적 문제들에 있어서도, 해당 문제들이 어쩌면 발원했을지도 모르는 흐름들을 보여줌으로서, 어느 정도 통찰을 주기도 하고요.
사실 이 방법론을 적용하여서, 기존의 통설과는 조금이라도 다른 철학사를 구성해낼 수 있다면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10년 후에 대학의 근대철학사 수업에서 가르치는 것이 10년 전에 가르치던 것하고는 달라질수도 있으니까요.
다만, 한국인이 서구 철학자/사상가에 대해서 이 방법론을 사용하여서 정리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불가능하지는 않아도, 언어에 집중하고, 방대한 당대의 수많은 문헌 자료를 정리하고, 엄청난 노가다를 할 다짐이 있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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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사에 관한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학문으로서의 지성사/지성사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은 1)철학 및 그와 연관되는 영역에서 사용되는 단어의 의미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고 2)이것은 때로 단순히 단어의 이해/번역 문제를 넘어선 함의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철학적 술어의 의미는 한 시대에도 사용하는 학자들마다 다를 수 있고, 한 학자의 저작들에 있어서도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긴 시간을 두고 철학사/지성사를 보았을 때, 철학적 술어의 의미는 현저하게 크게 변화할 수 있고 이러한 술어가 쓰이는 범주와 맥락을 우리는 이를 간과하기 쉽습니다.

중세 시대를 보죠. 이 시대에 철학이란 신학과 명백하게 분리된 범주가 아니었고, '종교', '마법', '과학' 역시 서로 완전히 분리된 범주가 아니었습니다. 중세에 사용된 '자연철학'이란 개념은 자연과학이라고 해야 할지, 철학 또는 신학의 일부라고 해야할지는 무척 어려운 문제입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를 이해하기가 까다롭고, 종종 오늘날의 시각에서 왜곡될 수도 있는 것은 이러한 인식틀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Francis Yates를 잠시 언급하셨는데, 그녀의 '예이츠 테제'는 바로 이런 중세지성사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중요한 주장입니다. 우리는 철학사/과학철학사 서술에 있어서 현대의 관점에서 과거를 재구성하기 쉬운데, 이는 현재의 관점을 그대로 과거에 투영시켜 해석/평가하는 오류를 저지르는 결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예이츠는 그런 방법이 아니라 과거를 그 시대의 맥락에서 보는 방법을 취했고, 이로써 현대의 시각이 놓치거나 은폐해버린 지점들을 발견해 낼 수 있었지요. 물론 예이츠 테제에 대하여도 여러 논의가 있긴 합니다.

중세철학의 연구에 있어, 단어의 의미에 대한 오독가능성 이외에도(예를 들어 scientia의 의미는 오늘날 우리의 것과 같은 '과학'인가?), 더 심각한 범주의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점이 인식되어야 합니다. 중세 학자들은 그들만의 논의의 틀(범주)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내적 논리가 있었습나다. 어떤 이들은 과거의 미진보된 상태에서 오늘날의 과학시대로 학문과 철학 또한 발전하였다고 함으로써 일종의 '목적론적 사관'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중세인들이 오늘날의 우리들보다 열등하거나 어리석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점 등을 명백히 밝히는데 기여함으로써 지성사의 연구는 철학/철학사의 연구에 정확성을 더해줄 수 있고, 오늘날 우리가 빠지기 쉬운 오류를 방지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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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구 철학자/사상가에 대해 한국인이 지성사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저는 낙관적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언어의 장벽만 넘으면, 아카이빙의 측면에서도 선행 연구의 측면에서나 서구권을 연구하는게 압도적으로 쉽고 유리합니다.

(당장 중국이나 일본, 한국 사상사에서 저런 짓을 할려고하면, 교정본 편집부터 시작해야하고 그것부터 이미 학자 인생 평생이 날아갈 겁니다.)

(2) 반대로 지성사 연구로 우리가 배우는 근대 철학사가 바뀔까는 좀 의문스럽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철학사라는 것도, 사실 헤겔 정도 기점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명단인데, 그 명단이 바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아서요.
가끔 케임브리지/옥스퍼드 출판사에서 나오는 16, 17세기 영국 철학사 책들을 보지만, 홉스나 로크, 흄을 넘어서서 굳이 배워야하는 대가들이 있냐고 물어보면, 글쎄,,,,,라는게 제 솔직한 대답입니다.

다만, 주류가 되지 못한 실패한 시도들이 새롭게 나올 수는 있겠죠. 특히 요즘 덕 인식론이나 상식 문제 관련해서, 자주 유령처럼 살아나고 있는 토마스 리드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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