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철학의 학풍? 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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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버니님/라쿤님이 같이 번역해주시고 있는 이 글을 읽고 위키피디아를 뒤져보니 흥미로운 사실을 찾았네요.

더밋이 옥스퍼드대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제자였던 사람들이 크리스핀 라이트, 티모시 윌리엄슨 등이었네요. 크리스핀 라이트의 제자로는 폴 보고시안이랑 이치가와, 던칸 프리처드 등이 있고요.

생각해보면 이들은 논리학과 수리철학의 강한 영향 아래 있으면서도, 이들 분야의 통찰을 인식론이나 형이상학으로 팽창시키려고 했다는 공통점이 있어 보입니다.

반대로 미국에서 활동하던 학자들은 같은 분석철학적 기반에도 그 방향성이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타르스키 제자였던 몬태규도 그렇고, 솔 크립키, 데이빗 루이스, 로버트 스탤라이커 같은 사람들은 인간의 자연 언어적 표현 밑바닥에 있는 것들을 논리화하려고 했던 시도에 더 끌렸던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몬태규 의미론이나 엄격한 양상 논리들이 생겨난 것이죠. 그리고 이 형식적 도구로 철학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한 것이죠.
(살펴보니 데이빗 루이스는 양상 논리뿐 아니라, 메레올로지, 결정 이론-게임 이론 등의 형식적 도구를 활용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 적극적이었네요. 박사 학위 논문이라는 <(사회적) 관습>도 게임 이론으로 사회적 관습을 설명하려는 시도였다고 SEP에 나오네요.)

그래서 루이스의 제자들이 다양한 분야에 퍼져있는 것 같습니다. 브랜덤이나 테드 사이더 같은 언어철학/인식론/논리학 영역도 있지만 데이빗 벨만이나 LA 폴처럼 윤리학/행위철학으로 간 제자들도 있으니깐요.

이런 자연 언어의 논리학화를 추구하는 그룹은 네덜란드와 북유럽에도 있어 보입니다. 형식 인식론 연구자들은 보면 대부분 영미권이 아닌 북유럽 출신이더라고요. 네덜란드에는 비형식 논리와 관련해서 꾸준히 연구되는 전통이 있고요. (핀란드 철학자인 힌티카라던가,

한편 제 3의 그룹으로는 호주-미국을 넘나들며 강한 자연주의적 프로그램과 인지과학을 옹호하던 심리철학자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데이빗 차머스도 호주 출신이고, D M 암스트롱도 호주, JJC 스마트도 호주. 프랭크 잭슨도 호주 출신입니다. 그 외에도 마이클 테이, 윌리엄 라이칸, 김재권 등 의식 문제를 주로 다루던 학자들은 다 미국에서 활동했네요.

이렇게 보면 학풍이라는 게 참 무시 못한다는 생각이 듭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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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동의합니다. 다만, 같은 루이스에게서 배웠는데도 브랜덤과 사이더처럼 전혀 다른 성향의 인물들이 나온 걸 보면,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띠용할 때도 있네요. 그냥 브랜덤이 이상한 인간인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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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티 제자이기도 했다고 적혀있으니 로티 영향이 더 강한 걸로 하죠 ㅎㅎ.

(2) 보면 브랜덤은 당시 시대 조류 한복판에 있었으면서도 살짝 거기서 물러서서 자기가 하고 싶은거 했던거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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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덤이 루이스의 지도를 받았다는건 전혀 몰랐던 일이네요. 궁금해서 한 인터뷰를 검색해 읽어보니 브랜덤 본인은 스스로가 로티와 루이스의 두 영향을 동시에 계승해나가고 있다고 인식을 하는 모양입니다.

With these two powerful thinkers as teachers – Rorty, thinking about linguistic practices, and Lewis, thinking about meaning in these mathematical terms –, I formed the intention of understanding how the kinds of meanings that Lewis had taught us to think about could be connected with what people were doing when engaged in that kind of practices that Rorty was thinking about. 링크

그리고 "학풍"은 지역도 지역이지만, 결국 대학이나 학과별 차이가 좀더 결정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결국엔 정치가 끼는거다보니 어쩔 수 없습니다만, 누구랑 매일 일터에서 보는지가 (그리고 누구를 임용하는지가) 또 결정적이니까요.

관련하여 뚜렷한 학풍을 띠는 전남대 철학과를 두고 예전에 김영건 선생님께서 "강한 매력을 준다"고 말씀하셨던 점이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한국 대학의 여러 현실적 사정을 생각해보면 전남대 철학과가 대단한거지, "백화점식" 철학과로 가는걸 피하는게 쉽지 않은 일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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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브랜덤의 저 인터뷰 말고, 다른 인터뷰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브랜덤은 루이스한테서 분석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루이스가 쓴 분석철학 논문들이 너무나 완벽해서 "보석 같다(gemlike)"고 하더군요. 브랜덤은 자신이 논리적으로 욕 먹거나 트집 잡히지 않는 글을 쓸 수 있었던 건 모두 루이스 덕분이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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