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는 A부터 Z까지 각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키워드를 하나씩 정해서 그걸 주제로 인터뷰를 촬영한 적이 있습니다. 옛날에 한 번 언급된 적도 있었죠.
('W'에 대응하는 키워드로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이 채택됐고, 비트겐슈타인은 들뢰즈와 큰 상관이 없으니 그냥 짧게 끝낸 것 같습니다.)
그 중 'H'에 해당하는 항목인 철학사(histoire de la philsophie)에 관한 들뢰즈의 대담이 있는데, 그 중 인상 깊은 대목이 있어서 그 일부를 공유해봅니다(1:04~7:20).
(불어를 할 줄 몰라서 영어 자막을 보고 중역을 했으니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복잡한 문제야. 철학사는 철학 자체를 포괄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철학을 추상적이고 전문가들에게 맡겨진 무언가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내가 생각하기에 철학은 전문가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 철학은 전문 분야가 아니든가, 아니면 음악이나 그림이 전문 분야인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전문 분야인 거지.
문제를 다르게 설정해보자. 사람들이 철학이 추상적이라고 생각할 때, 철학사는 이차적인 의미에서 추상적이야. 왜냐하면 철학사는 그저 추상적인 관념들에 대한 이야기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라 추상적인 관념에 대한 추상적인 관념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사안이 있어. 철학사란 나한테 항상 다른 걸 의미했지. 그림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나는 초상화나 풍경화에 관해 반 고흐와 고갱의 서신에서 오고 간 논의들을 생각하곤 해. “초상화를 그려야 할까? 초상화를 그려야 해.” 이들은 대화에서, 편지에서 이런 사안에 굉장한 중요성을 부여해. 초상화냐 풍경화냐… 이런 문제들은 아무래도 좋은 게 아니야. 철학사는 일종의 초상화 같은 거야. 철학자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철학적 초상화인 거지. 정신적인 초상화라고도 할 수 있지. 영혼의 아니면 정신의 초상화, 정신의 초상화라고 할 수 있지. 그건 철학 자체에 속하는 활동이야. 초상화가 그림에 속하듯 말이야.
화가들을 언급함으로써 이야기에 진전이 좀 보이는 것 같네.
반 고흐나 고갱 같은 화가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이들의 작업에서 뭔가가 나한테 굉장한 영향을 줬거든. 그것은 일종의 엄청난 존경, 아니면 심지어는 공포와 두려움이지. 단순한 존경이 아니라, 이 화가들이 색깔을 대할 때, 색깔을 다룰 때 나타내는 두려움 말이야. 내가 국한해서 거론하고 논의하고 있는 이 두 화가가 가장 훌륭한 색채의 대가들 중 하나라는 점을 알고 있다면 특히나 재밌는 일이야.
하지만 이들의 작품의 역사를 언급하자면, 이들은 두려움에 찬 망설임만을 품고서 색깔을 사용했어. 색깔이 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지. 화가로서 경력을 시작했을 때 이들은 보통 우리가 감자색이라고 말하는 흙빛 색을 썼어. 놀라운 일은 아닌데, 그건 이들이 색깔에 흥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감히 색을 다룰 수가 없다고 생각해서였어.
이보다 감동적인 일이 뭐가 있겠나? 마치 자신들이 아직 색을 다룰 자격이 없다고, 색깔을 다루면서 정말로 그림을 그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말이야.
이들이 드디어 색을 다루기까지는 수년이 걸렸어. 스스로 색을 다룰 준비가 됐다고 느꼈을 때 이 화가들이 작품에 색을 사용하자, 그 결과는 우리 모두 아는 대로지. 이 화가들이 성취한 바를 이해한다면, 이들의 엄청난 존경을, 이들의 천천함을 돌아봐야 해. 화가에게 색과 같은 것은 이들을 광기로 몰아넣을 수도 있고 미치게 만들 수도 있어. 그러니까 굉장히 어려운 일이고, 여기에 접근하게 되기까지는 수년이 걸리는 거야.
내가 여기서 특별히 겸손을 떨려는 건 아닌데, 단순히 이런 식으로 말할 철학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이 나한테 굉장히 충격으로 다가오고는 해. “이제 내가 철학을 할 건데, 나 자신의 철학을 할 거야! 그래, 내 철학이 여기 있다!” 이런 말들은 얼간이들이나 하는 말이지. 자기 철학을 하겠다는 거. 왜냐하면 철학은 색깔과 같거든. 철학에 들어서기 이전에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데, 철학의 색깔을 장악하기 전에─철학의 색깔이라는 건 개념이지─, 그러니까 개념을 발명하고, 발명하는 데 성공하는 법을 알기 전에, 굉장한 양의 작업이 요구되는 거야. 철학사라는 건 이런 느린 겸손함이고, 초상화를 그리는 데 오랜 시간을 쓰는 거지. 초상화를 그려야 해.
그건 이런 거랑 마찬가지야. 만약 어떤 소설가가 이렇게 말한다고 쳐보자. “네, 전 소설을 쓰죠. 하지만 있잖아요, 내 영감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소설을 읽지는 않아요. 도스토예프스키? 아뇨, 읽어본 적 없어요!” 젊은 소설가들이 이런 무서운 말들을 입에 담는 걸 들은 적이 있네. 이건 연습할 필요가 없다는 거랑 똑같은 말이야.
누가 어떤 일을 하든 간에, 그 일을 온전하게 해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을 연습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철학사는 예비적인 역할뿐만 아니라 자족적이기도 한 그런 역할을 하는 거지. 무언가를 다룰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하나의 초상화 그리기인 거야.
인터뷰 초반부에도 나오지만, 들뢰즈는 칸트나 스피노자, 니체 등등에 관한 수많은 저서를 냈고, 들뢰즈의 저작에서는 스피노자, 흄, 베르그손, 니체, 칸트, 라이프니츠, 고대 원자론, 둔스 스코투스 등등 철학사 속 인물들이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들뢰즈가 철학사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인데, 이 인터뷰에서는 들뢰즈가 철학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철학사를 왜 이렇게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네요.
들뢰즈의 말은 우리가 철학사를 공부하는 의미를 되새겨보는 중요한 교훈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사에 등장하는 위대한 철학자들이 각자 자기의 철학을 하나씩 갖고 있는 걸 보고 "나도 내 철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종종 "내 철학을 만들었다, 이전의 그 어떤 철학자들도 생각하지 못한 나만의 고유한 철학이다" 같은 터무니없는 선언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특히 인터넷에 좀 많은 것 같습니다).
반면 이런 사람들은 대학의 철학 전공자들을 보고 실망합니다. "칸트의 철학", "헤겔의 철학", "니체의 철학", "하이데거의 철학" 같은 말들을 입에 달고 사는 고전철학이나 대륙철학 전공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분석철학 전공자들도 특정한 주제를 다루기 위해 해당 분야의 고전적이고 유명한 논문들을 읽으면서 선행연구들을 천천히 파악해나가죠. 이런 모습에 실망한 사람들은 소위 "강단철학자"들이 독창적인 자기의 철학을 할 생각은 안 하고 남의 철학에 주석만 단다, 주체성이 없다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철학사에 등장하는 위대한 '철학 창조자'들은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철학 주석가'들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명실상부하게 자기의 철학을 갖고 있는, "들뢰즈의 철학"이라는 명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철학자인 들뢰즈가 이에 대해 답을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저 철학 주석가로서의 경험과 역량이 지극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철학 창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철학을 한다는 것, 다시 말해 자기 고유의 독창적인 개념을 발명하고 남들이 미처 생각 못한 창조적인 입장을 내놓는다는 것은 그 이전에 출현한 수많은 개념들과 입장들을 철저히 소화해서 "이제 내 입장을 개진할 능력이 있다"는 확신이 섰을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마치 화가가 오랜 시간의 수련 끝에 색을 다루는 법을 터득하듯, 굉장히 오랜 시간을 거쳐 이전의 연구들을 습득하고 그것을 자유롭게 응용할 수 있을 만큼 숙달했을 때 "자기의 철학"이라는 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들뢰즈의 인터뷰는 이 점을 명쾌하게 짚어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