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철학을 공부하면서 이런저런 사례들을 보니, 철학에 관심을 갖고 진입할 때에는 그처럼 혼자서 던지는 물음들이 아무래도 적지 않은 동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나는 누구일까?",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 "내가 뭔가 진짜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같은 물음들은 전문적인 철학을 접하지 않아본 이라도 누구나 한 번씩 던져볼 법한 의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혼자 머리를 싸매고 골몰하는 일은 좋든 싫든 철학이 계속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큰 유인 중 하나인 듯합니다.
그런데 철학을 학문으로서 진지하게 공부하겠다고 하면 이 큰 유인이 되었던 혼자 골몰하는 사색은 그 무엇보다도 경계해야 할 습관인 것 같습니다. 역사 속의 위대한 철학들은 항상 종래의 철학들로부터 배워오면서 출현했습니다. 설령 그것이 기존 이론들과의 비판적 대결의 형태를 띠더라도 말입니다. 철학이 다른 분과들과 더불어 하나의 학제로서 정립된 이후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아주 넓은 의미의 철학사, 그러니까 기존의 철학 이론들을 공부한다는 것은 철학이라는 게임에 진정 참여자로서 참여하기에 충분조건은 아닐지라도 필요조건에 해당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Bleeding 님께서 아주 잘 말씀해주신 것 같습니다.
철학이 그저 쓸모없고 지리멸렬한 사색이 아니라 제대로 된 문제를 설정하고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는 학문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기존 학자들의 이론을 단순히 무시하거나, 있으면 좋고 없어도 상관없는 영감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스승으로 삼아야 합니다. 기존 철학자들의 사유와 구별되는 나 자신의 독창적인 사유를 개진하기 위해서조차 그렇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저는 다음과 같은 들뢰즈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내가 여기서 특별히 겸손을 떨려는 건 아닌데, 단순히 이런 식으로 말할 철학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이 나한테 굉장히 충격으로 다가오고는 해. “이제 내가 철학을 할 건데, 나 자신의 철학을 할 거야! 그래, 내 철학이 여기 있다!” 이런 말들은 얼간이들이나 하는 말이지. 자기 철학을 하겠다는 거. 왜냐하면 철학은 색깔과 같거든. 철학에 들어서기 이전에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데, 철학의 색깔을 장악하기 전에─철학의 색깔이라는 건 개념이지─, 그러니까 개념을 발명하고, 발명하는 데 성공하는 법을 알기 전에, 굉장한 양의 작업이 요구되는 거야. 철학사라는 건 이런 느린 겸손함이고, 초상화를 그리는 데 오랜 시간을 쓰는 거지. 초상화를 그려야 해.
그건 이런 거랑 마찬가지야. 만약 어떤 소설가가 이렇게 말한다고 쳐보자. “네, 전 소설을 쓰죠. 하지만 있잖아요, 내 영감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소설을 읽지는 않아요. 도스토예프스키? 아뇨, 읽어본 적 없어요!” 젊은 소설가들이 이런 무서운 말들을 입에 담는 걸 들은 적이 있네. 이건 연습할 필요가 없다는 거랑 똑같은 말이야.
누가 어떤 일을 하든 간에, 그 일을 온전하게 해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을 연습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철학사는 예비적인 역할뿐만 아니라 자족적이기도 한 그런 역할을 하는 거지. 무언가를 다룰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하나의 초상화 그리기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