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메타윤리학적 주제들
; 메타윤리학이란 결국 다음 세 가지로 구성된다. (a) 도덕적 발화가 "무슨 기능"을 하는가 (b) 이 기능과 연관된 형이상학적/자연적 대상 - 연관된 심적 능력이 어떠한 작용을 하기에 이게 우리의 행위로 이어지는가
(a) 의미론의 확장
(b) 범-규범성에 대한 이론
(c) 설명과 이에 대한 형이상학적 구분
(d) 인간의 심적 능력과 심적 구성 요소에 대한 구분
(B) 자유의지, 결정론, 선택, 운 등에 대한 형이상학적/자연학적 연구
; 우리는 이 세계가 인과적으로 결정되었다 생각한다. 여기서 자유의지를 구하려는 사람들은 자유의지란 인과적 결정론과 합치될 수 있다 주장한다. (적어도 이 주장은 내가 보기에 자유의지는 인과의 문제가 아닌 다른 문제로 보는 것이다. 이를 소스후드 논증으로 기억하는데, 이 방식은 결국 도덕적 책임은 구할지는 몰라도, 자유의지 자체를 구하지는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 양자역학의 "확률적 이론"을 해석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a) 인과적으로 결정된 세상에 대한 확률적 해석. (b) 인과적으로 결정되지 않은 세상에 대한 확률적 해석. (a)는 확률적 이론이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로 인해 성립한다 여긴다. 반대로 (b)는 세상의 형이상학적 본질이 확률적이라 여긴다.
;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우리는 굉장히 추상적인 관념들을 많이 상대해야 한다. 자유의지, 운, 결정, 확률, 무작위 등. (자유의지는 무작위적이지 않다. 그냥 우리가 아무런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어떠한 방식으로든 의도에 의한 심적 인과성이 성립해야 하는 문제다. 그렇다면 심적 인과성에는 동의하면서도, 심적 인과가 외부 세계의 인과성과 독립되었다는 주장이 성립해야, 우리는 직관적으로 아는 자유의지를 옹호할 수 있다.)
; 나는 오래전부터 말했지만, 이것이 계와 창발의 문제로 해석하는 편이다. 이 문제는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에 의해 오래전부터 잘못되어있었다. (그렇기에 양자역학 해석에 대해서 나는 (a)를 지지한다 볼 수 있겠다.)
; 우리는 모두 인과적으로 결정적인 사건과 결정적이지 않은 사건을 구분할 방법이 없다. (어떤 의미에서 이건 다수의 문제와 유사하다. 우리는 구름이 정확히 어디서부터 어디 범위인지 구분할 수 있는가? 직관적으로 이는 쉬운 문제처럼 보인다. 하얗게 보이는 것만 구름이라 여기면 되는 것 아닌가? 문제는 구름이란 결국 수증기의 밀도 문제라는 점이다. 하얗게 보이는 곳이 밀도가 높고, 푸른 색 하늘은 밀도가 낮은 곳이다. 하지만 중간 지점은? 우리는 명확히 경계를 지을 방법이 없다.
다수의 문제에 대해서 나는 니힐한 편이다. 우리는 구름의 경계를 지을 방법이 없다. 애당초 구름은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 속에서 성립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논리학의 이산적 구분과 확률의 연속적 구분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 속에서 나는 직관이 성립한다 여긴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구름이 무엇인지 알고 구름의 경계를 말할 수 있다. (다만 구름의 경계는 실제 세계에서는 모호하며,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니힐하다.)
우리가 자연 언어에서 쓰는 많은 표현이 그러하다. 많다, 대머리 등. (이런 점에서 나는 피터 웅거란 비슷한 회의주의적 입장인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 우리 몸을 관통하는 광자 하나하나를 신경쓰지 않는다. 또한 하나하나를 측정할 수 없다. (그렇기에 통계역학을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광자 하나하나가 미래에 치명적인 결과를 야기할지도 모른다.
하만이 말한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로 '제약된' 합리성 속에서 인간은 사는지 모른다. (결국 이 제약된 합리성 속에서 우리는 결코 형이상학적 문제인지 인식론적 한계인지 알 수가 없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