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론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

(1) 고전적 의미론은 몇 가지 전제 위에 성립한다. (a) 의미란 단어/명제와 세계 간의 관계다. (b) 의미론은 이 관계가 어떻게 짝지워지는지 설명하는 것이다. 또 명시적으로 언급하진 않지만, 이 두 전제를 따르면 (c) 의미의 옮고 그름, 즉 참이란 진리 대응적이다, 이라는 전제도 포함시킬만하다.

강한 형이상학적 용어를 도입하지 않고 간단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과는 빨강이다."(A)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세계 속의 어떠한 것이 A에 해당하고, A에 해당하지 않는지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전적 의미론에 포함되는 세 가지 이론은 프레게 의미론, 러셀 의미론, 가능 세계 의미론이다.

(2) 이 전제들을 싫어하고 부숴보려고 했던 여러 시도들이 있었다. 데이비슨 의미론, 추론주의 의미론 등이 여기에 속한다. 아마 이들의 동기는, 고전적 의미론이 전제하는 "강한 형이상학적 가정과 도입물"들을 거부하고 싶었던 듯하다.
문제는 이런 방식의 문제제기는, 고전적 의미론 학자들이 이를 '수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2-1) 구조화된 명제 혹은 가능 세계 같은 것들을 수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강점일 수 있지만, 반대로 이들을 수용한다면 더 잘 설명 가능한 것을 굳이 수용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상하다는 반론에 직면한다. (달리 말해, 지금 이 상황에서 참-거짓을 구분할 정보가 부족하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최선으로서의 추론, 즉 주어진 현상에 대한 설명을 잘 하는 이론이다.)

주어진 현상에 대한 최선의 설명으로서, 가능 세계 이론이나 구조화된 명제(러셀 의미론)을 제시한다 하면, 형이상학적인 무언가를 도입하거나 도입하지 않는다는 문제는 부차적으로 여겨진다.

(2-2) 또 이와 같은 태도는 무언가 순환적인 것이 있다. 주어진 '현상'의 범위는 무엇인가? 이 문제는 화용론과 의미론의 구분 문제에서 첨예하게 들어난다.

"씻지마!" 같은 명령법이 대표적이다.

'씻지마'는 단순히 세상에서 어떠한 것을 구분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여러 가지 있는데, 가장 단순한 방법은 이 차이는 '의미'의 차이가 아니라 주장하는 것이다.

즉, '씻지 않다'와 '씻지마'의 명제는 동일하지만, 둘의 발화 수반 효과가 차이가 나는 것이라 주장할 수 있다. (이러면 고전적 의미론의 영역 + 알파의 형태로 이론이 만들어져야 하는 셈이다.)

우리는 초내포성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2-3) 언어, 특히 문장에 존재하는 의지적 차이 중 무엇이 '의미'의 차이이고, 무엇이 의미 외의 것에 의한 차이인가? 이는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 정의함으로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그렇지만 이 문제를 명시적으로 언급한 문헌은 드문듯하다.

(3) 이와 같은 '최선의 설명으로서의 이론'이라는 입장은 비판자 입장에서는 꽤 까다로운 상대다. 우선 비판자와 피-비판자가 다른 '전제' 위에 서 있을 경우, 그리고 이 전제가 '모두가 동의 가능하게' 합의할 수 없는 경우, 전제에 대한 비판은 무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론이 설명하지 못하는 '현상'을 가져와서 이론을 부수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문제가 있는데, 이 현상이 '결정적인지 아닌지' 납득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4)

일단 나는 고전적 의미론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는 입장이다. 초내포성의 문제도 있고, 명령법 같은 다른 형태의 화행 문제도 있고, 긴 비유 문장 같은 문제도 존재한다.

일단 명령법 같은 화행의 문제가 '의미론'의 영역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둘이 같은 '발화 수반 효과'를 가지더라도, 명백히 다른 명제의 형태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i) 문을 닫아라.
(ii) (문을 열고 들어온 학생에게) 바람이 들어온다.

이 둘은 결국 최종적으로 '문을 닫으라'는 발화 수반 효과를 가져온다. 그렇지만 표면적 의미는 명백히 다르다. (ii)는 사실의 서법이고 (i)은 명령법이다.

우리는 (i)의 문장을 다르게 해석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의미론/화용론의 가장 흔한 구분인 1차적 의미와 2차적 의미 사이의 구분은 여기에 적용할 수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i)을 발화 수반 효과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의미론의 차원에서도 발화 수반 효과가 발생한다 주장해야 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다시 돌아온다. 왜 (i)에는 특정한 발화 수반 효과가 생기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문장이 명령문이라 그렇다는 말뿐이다. 왜 명령분인가? 의미론-구문론에 따라서 우리는 명령문으로 인식한다.

(무언가 꼬였다.)

(의무 논리나 가정법 같은 경우는, 단순히 하나의 가능 세계가 아니라, 가능 세계 간의 연결성을 보여주는 듯한다.)

(5) 재미있는 경우는, 의미론적 패러독스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는 듯하다.

언어적 현상, 즉 의미론적 현상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어 보인다.
(i) 무의미한 경우. (다만 화용론적으로는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냥 뿌아아아아라는 말은 별 다른 의미가 없지만, 야구를 보고 흥분해서 저 말을 할 경우, 일종의 감탄사로 이해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ii) 의미가 있으며 기존 의미론으로 잘 설명되는 경우
(iii) 인지적 차이가 있지만, 그게 의미론의 영역인지 애매한 경우.
(iv) 의미가 있지만, 고전적 의미론으로는 문제가 생기는 경우. (의미론적 패러독스, 특히 거짓말쟁이의 역설이 있다.)

(6) 용어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분을 해야할지도 모른다.

(a) 의미론은 문자 그대로의 문장이 가진 '인지적 효과/차이'에 대해 논의하는 영역이다. 화용론은 화행 상황에서 바뀌는 '인지적 효과'에 대한 논의이다.
(b) 인지적 효과/차이란 지칭의 차이, 내포의 차이, 초내포적 문장이 가진 차이 등 모든 형태의 인지적 차이를 포괄한다. ('A는 60프로 확률로 일어난다.'와 'A는 40프로 확률로 일어난다.'는 내포의 차이든 의미의 차이든, 어떠한 인지적 차이를 가진다는 점을 명확해 보인다.)
(c) 특정 단어가 맥락의존적이라는 것은 의미론의 최소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이 특정 단어는 '가족 유사성'을 가진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이 가족 유사성에는 유사-언어 의미론적 유사성은 가질 수 없더라도, 어떠한 인지적 유사성을 가진다 말할 수 있다. (개념에 대한 프로토타입 이론이 주장하는 바이다. 즉 선(line)은 물리적 선을 가리킬뿐 아니라, 윤리적/인간 관계에서의 선 등의 의미를 모두 가지는 것은, 이들이 인지적으로 유사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의미론을 (a)에 따라 인지적 효과의 차이로 본다면, 가족 유사성을 가진 개념에 의한 맥락의존성은 (사소하지 않은) 의미론적 차이를 가진다 보긴 어려울 것이다.

(7) 추론주의 의미론에 대해서 내가 미심쩍어하는 것은 (a) 모든 문장의 의미가 다른 문장과의 연결성, 즉 추론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문장들은 부분적으로 자명한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 사실 진술일 경우, 우리는 거기서 논리적으로 함축된 명제를 찾을 수 있다. 명령법일 경우, 그 명령법에 합당한 대답을, 질문을 경우 그에 합당한 대답을 한다.

그러면, 차라리 어떠한 법(mood)가 특정한 대답을 요구한다는 형태의 "약화된 추론주의"를 옹호하는게 더 낫지 않는가?

(하만이 지적하듯, 어떤 사실 진술에 함축된 모든 결론들을 인지자가 파악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어떠한 추론을 요구할 경우에만, 인지자는 이에 해당하는 함축을 파악한다.)

(8)

어떤 의미에서 언어에 대한 정확한 이론을 만든다는 것은 세 가지 측면에서 언어를 잘 설명해야 한다.
(i) 사실 진술 - 명제의 단위 (ii) 양상 표현 - 서법의 차이 (iii) 표현의 차이 - 감탄사, 부사, 의성어/의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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