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오늘 며칠에 걸쳐서, 열심히 딴짓(...)을 한 결과인 <생물학의 철학> 번역이 완료되었습니다.
(2) 사실 (과학철학이 아닌) 과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영역입니다.
요근래 이러한 논의들이 올빼미에 언급된 김에 번역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3) 이제 철학에서 과학은 무시하거나, (과학철학에서처럼) 메타적으로 다룰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섰다는 것이 현실로 보입니다. 예컨대, 인식론에 았어서 지각(perception) 이론, 윤리학에서의 도덕 심리학(moral psychology), 감정 (emotion) 같은 주제들은 이제 과학 논문을 피해서는 절대로 읽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확장을 단순히 시류라 말하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철학이 어디까지나 "보편적인 것"에 대해 다루고 있는 학문이라면, 탐구의 범위가 인간에게만 한정되는 것은 문제가 있으니깐요. 인간만이 어떠한 심적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라 판명된 이상, (인간에게 한정된 것이 아닌 보편적인) 심적 기능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다른 유기체의 경우를 염두할 필요가 있습니다. @YOUN 이 말하듯, 일상적 상식을 깨는 어떠한 경계에 있는 사례로 말이지요.
(4) 물론 생물학의 철학은 그 자체로 "유기적인" 학문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심리철학이나 언어철학 교재들을 보면, 그 교재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마음이란 무엇인가" "의미란 무엇인가")가 있고,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엎치락 뒤치락 하는 여러 거대 이론들이 있습니다.
그에 비해 생물학의 철학은 여러 생물학적 관심사에 따라 중구난방이고, 이러한 관심사는 전통적 철학 문제에 별 다른 기여를 하지 않아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생물학의 철학을, (여러) 전통적 철학 문제를 다루는 도구상자(toolkit)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제가 관심 있는 부분들을 몇 가지 소개해보겠습니다.
아주 예전에 쓴 글입니다. 이 글은 "때문에"(because)라는 문장으로 제시되는 내용이 인과적일 때와 목적론적일 때, 두 가지가 있고 과학적 설명이 인과적이지만도, 규범학적 설명이 목적론적이지만도 않다는 내용입니다.
특히 과학적 설명에서 목적론적 요소가 강한 학문은 생물학입니다.
만일 우리가 생물학에서 드러나는 목적론적 설명을 정교하게 다룬다면, 이 설명들을 다른 영역에도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근대 철학이 과학(특히, 물리학)의 성공에 힘입어서, 여러 논제들을 발전시킨 것처럼 말이죠.
(4-2) 이와 연관된 주제로 인과론의 문제가 있습니다. 전 항상 인과의 문제가 지나치게 단순하게 다루어진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도 제 몸을 관통하며 광자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 광자는 지금 저한테는 아무런 인과적 영향을 안 미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상적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관찰되지 않으니깐요.) 하지만 제가 10년 후에 피부암에 걸린다고 해봅시다. 광자는 제 몸을 지나가면서, 피부에 있는 세포를 변형시켜 암세포로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광자는 일종의 인과적 역할을 한 셈입니다. 이와 같은 여러 다른 단위의 계를 넘나드는 인과적 설명에 대해서, 우리는 생물학에서 보다 많은 아이디어를 가져올 수 있다 생각합니다.
도 도움이 되겠지요.
(4-3)
사실, 이 당시 이 주제는 굉장히 비판적으로 다루어졌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생물학의 철학에서는 이와 연관된 주제가 진지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화석처럼, 실험으로 재현되지 않는 이미 지나간 역사적 대상을 다루는 과학을 역사적 과학(historical science)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이 과학의 신빙성/정합성을 어떻게 확증할 수 있을까요? 이는 9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연구된 증언(Testimony)의 인식론적 문제와도 연관이 깊습니다. ( Epistemological Problems of Testimony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증언이 인식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저희가 가진 많은 지식은 지각이나 추론이 아닌, 누군가의 증언에 의해 얻었으며 증언을 통해 "얻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죠.
역사적 과학은 이러한 증언에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이처럼 생물학은 기존 철학 연구의 영감을 주는 도구상자 역할을 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4-3)이 재미있네요. 저는 여전히 메이야수처럼 '원화석'에 호소하여 실재론을 다시 부흥시키려는 노력이 정당화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긴 한데, (a) 메이야수가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잘못 규정하였다 보니, '실재론'이라는 이름으로 그 두 사람을 비판하려는 시도는 애초에 허수아비 논증이라는 점 때문이고, (b) 메이야수의 입장이 칸트 이후에 제기된 '사물 자체의 아포리아'에 대해 그다지 설득력 있는 대답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해서요. 다만, 이와는 별개로, '화석'에 대한 연구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과학철학적 문제들(가령, '불완전한 화석 기록만으로 과거 생물에 대해 추론하려는 시도가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을까?' 등)에 대한 논의는 유의미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다만, 생물학자들이 자신들이 연구하는 대상의 관계성을 ‘목적론적’이라고 생각할지는 확실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전에 언급한 마이어 같은 경우는 인과관계를 ‘근접인과’와 ‘궁극인과’로 나누며 전자를 생리학적 설명으로 후자를 진화적 설명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제겐 생물학자들이 ‘목적론적 설명’을 추구하기보단 위와 같은 ‘다양한 인과성’(여러 층위에서의 원인과 결과)을 파악하는 것에 보다 관심을 가질 것 같습니다.
(1) 음. 사실 생물학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그 자체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생물학자들이 자신들이 사용하는 '개념'을 명료하게 하지 않은 채 사용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깐요.
사실 마이어가 정확히 무슨 맥락에서 그러한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제 해석이 옳은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마이어가 말하는 "궁극 인과"란 결국 제 입장에서는 "목적론적 설명"과 동의어로 보입니다. (따라서 저에게는 "다양한 인과성"이 아닌 인과적 설명과 목적론적 설명을 파악하는 것으로 @lazy 님의 결론은 수정되겠네요.)
(2) 사실 인과(causation)은 명료하게 하기 굉장히 어려운 개념입니다. 그렇지만 최소한의 정의를 제시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겁니다.
(a) 최소한 둘 이상의 물리적 개체가 (b) 서로 접촉했을 때 (c) 일어나는 일.
생물학에서도 이러한 형태의 설명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마이어의 용어를 빌리자면, "근접인과"겠지요.) 예컨대, 빛이 엽록소에 부딪혀서 어찌저찌 여러 과정을 거쳐서 에너지를 만드는 광합성이 있을 겁니다.
(3) 자, 그럼 이 광합성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궁극인과)를 해보도록 하죠.
진화론 역시 명확히 정의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선 최소한으로 다음과 같이 정의해보겠습니다.
(a) 유기체 중에서 (b)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c) 생존에 적합한 특성을 가진 개체가 (d) 살아남아서 그 특징을 후손에게 전해준다. 이 과정을 진화라 한다.
여기서 앞서 정의한 인과로 설명하기 굉장히 어려운 부분이 저는 (c)라 생각되고, 이 (c)는 어떤 의미에서 진화론의 핵심이라 여겨집니다. 광합성 역시 "생존에 적합한 특성"이기에 유전되고 살아남았을겁니다. 그렇지만 "생존에 적합하다는 것"은 (개별 유기체가 사는) 환경이라는 전체에 비추어서, 광합성에 하는 '기능', 즉 '목적성에 있는 동작'이 적절했기 때문이라는 뜻 아닌가요?
저는 이러한 설명을 앞서 (2)에서 살펴본, 두 물리적 개체의 접근으로 일어나는 현상으로 환원시켜 설명할 방법을 쉽게 찾긴 어려워 보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어떤 해석을 가했냐에 따라 언급한 진화론적 설명에 대한 성질이 달러질 것 같습니다.
저는 목적론적이라고 한다면 ‘목적의 선재성’이 핵심이 되는 요소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수나라는 반란군에 의한 양제 교살로 멸망했다
수나라는 고구려 원정 등으로 인한 지나친 국력 낭비로 인해 멸망했다
국가는 멸망을 향하는 목적을 갖고 있고 수나라는 국가였으므로 멸망했다
이러한 3가지 설명이 있을 때 (1)은 근접인과 (2)는 궁극인과 (3)은 목적론적 설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2)는 수나라가 기능적인 목표를 수행하지 못했음을 은연 중에 드러내긴 하나 적어도 그 어떠한 목적인이 선행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는 (3)과 비교했을 때 명백한 차이를 보입니다.
(3)은 데닛에 설명에 의하자면 허공에 존재하는 크레인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지지 기반도 없이 허공에서 ‘멸망’이라는 결과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2)는 제대로 된 크레인으로 지금까지의 작업을 지지대로서 가지고 있습니다. 이 속에는 우연적인 과정과 절차들이 담겨 있으므로 ‘역사적’일 수는 있으나 이를 ‘목적론적’이라고 하기엔 두 설명방식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과정에 선재하는 목적인이 존재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위 얘기와는 별개로, 마이어나 그 논의를 이어받은학자들이 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근접,궁극 인과‘라는 개념을 실제 과학자들이 엄밀하게 사용하고 탐구한다는 것이 아니고 생물학이란 규범적으로 위 두 인과 방식의 설명을 요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제가 잘 못 전달해 드린 것 같습니다.
(1) '목적의 선재성'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3 - 국가) 예시와 '목적인'이라는 표현에서 볼 때, lazy님은 '목적'이 "어떠한 개체가 본질적으로(혹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성/속성"으로 이해하시는듯합니다.
(2) 제가 볼 때, 이러한 형이상학적 가정은 굳이 도입될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제가 '기능'에 있어서 목적을 말한 이유는, 기능을 한다는 것은 (주어진 맥락/환경 속에서) 어떠한 목표된 행위를 한다는 의미와 동일하다는 뜻에서 쓴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굳이 어떠한 내재한 목적인이나 혹은 의식적인 결심은 도입될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예컨대, 화장실 상하수도관이라는 "환경/맥락" 속에서 상수도관은 "깨끗한 물을 옮긴다"라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이러지 못할 경우,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평가하죠.
(만약 상수도관이 미술관이라는 맥락 속에 존재한다면, 이제 화장실이라는 맥락/환경 속에 있던 기능은 중요하지 않을겁니다.)
따라서 무엇이 어떠한 기능을 가진다는 주장은, 그 기능이 특정한 환경/맥락 속에서 어떠한 목표/목적을 위해 움직인다는 내용을 함축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3) 제 주장에 대해, 어떻게 특정한 것의 기능을 결정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고 주장하실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수나라의 예시처럼 국가는 정확히 그 기능이 무엇인지 특정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문제는 이 기능이라는 개념은, "진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도입한 개념이라는 점입니다.
진화론은 결국 유기체와 유기체의 부분이 이 세계라는 맥락/환경 속에서 "생존"이라는 목표에 적합한 기능을 한며, 그때에만 생존하여 그 특성이 유전된다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일 어떠한 개체의 기능을 특정하기 어렵다고 주장하신다면, 이는 (적어도) 진화론에 대한 논의에서만큼은 자기논박적이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어떠한 의미에서 lazy님은 진화론자, 즉 마이어의 논리를 공격하고 있는 테제처럼 전 느껴집니다.
제가 볼 때 이 두 주장은 우선 (a) 인과의 대상이 "물리적 개체"가 아닙니다. (즉, 두 당구공이 부딪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튕겨져 나갔다, 라는 제가 정의한 인과 정의와는 다른 케이스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원인은 "반란군에 의한 양제의 교살""고구려 원정으로 인한 지나친 국력 낭비"라는 사건(event)이고, 결과 역시 "수나라의 멸망"이라는 사건입니다.
(물론 사건과 개체를 형이상학적으로 엄밀히 구분하는 일과 인과론에서 사건/개체를 어떻게 이해할지에는 다양한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이를 편의를 위한 단순화라는 점을 밝힙니다.)
나아가 두 주장의 차이 역시, (b) 맥락? 시점?의 차이라고 할까요, 그 정도의 차이라고 느껴지지 다른 형태의 "인과"라고 느껴지진 않습니다.
극히 단순화하자면, 고구려 원정 등으로 인한 국력 낭비 -) 반란군의 양제 교살 -) 수나라 멸망으로 이 두 주장은 결합될 수 있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근접/궁극 인과의 차이는 인과 사슬에서 어떤게 더 가깝고 어떤게 더 먼가의 차이에 불과한듯 합니다.
이를 물리적 개체로 전환하자면, 당구채로 당구공을 친 것이 궁극인과이고, 그로 인해 당구공들이 부딪친 것이 근접인과이며, 그 결과 홀 안에 들어간게 결과인 셈입니다.
(2)
정리하자면, 궁극인과에 대해 (제 개체 인과론과) 두 가지 차이가 있다고 보실 수 있어 보입니다. 하나는 사건인과론(사건의 인과관계)이거나 다른 하나는 결과에 대한 시간적 차이로 보입니다.
우선 후자의 경우, (만약 여전히 개체인과론이면서 시간의 차이만 있는 것이라면) 여전히 이러한 형태의 인과 설명으로 진화론을 환원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3) 이제 전자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궁극인과란 개체 인과론이 아닌, 사건 인과론에 대한 탐구라 주장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건의 선후 관계로, "생존에 적합함"이라는 특징을 설명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즉 "왜 기관이 유전되었는가? 그건 생존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생존에 적합한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생존에 적합함"이라는 사건에 시간적으로 선행하는 사건을 원인으로 언급하는 것은 기이해 보입니다.
원활한 대답은 "이 기관은 X한 환경에서 Y하게 할 수 있게 해주고, 그 결과 생존에 적합한거야."가 맞아 보입니다. (여기서 Y가 제가 말하는 기능이고요.)
를 과연 '목적'이라는 개념 없이 순전히 인과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가 쟁점인 것 같네요. 설령, '기능'만으로 생존 적합성을 설명하려고 한다고 해도,
라고 쓰신 것처럼 이미 '기능'이라는 개념이 '목적'이라는 개념에 개입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가 의심스럽다는 거고요.
재미있는 논의인 것 같으면서도, 애초에 '기능'이라는 개념에 의존하지 않고서 진화를 설명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러니까, 제시해주신
를 조금 변형 시켜서
(a) 유기체 중에서 (b)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c') 살아남은 개체가 (d) 자신의 특징을 후손에게 전해준다. (e) 이 과정을 '진화'라 한다. (f) 이때 살아남은 개체는 '생존에 적합한 특성'을 가진다고 한다.
라고 하면, 아무런 '목적'이나 '기능'을 언급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생존에 적합한 특성'으로 '살아남은 개체'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개체'로 '생존에 적합한 특성'을 설명하는 거죠. 제가 생물학을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아마 이런 식의 주장이 진화생물학에서 더 일반적으로 제시되는 설명이 아닐까 하네요.
"기능을 한다는 것은 (주어진 맥락/환경 속에서) 어떠한 목표된 행위를 한다는 의미와 동일"하다고 하셨는데, 아마 마이어 같은 사람들이 여기에 동의를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떤 기능을 한다는 것이 언어적 형식으로서는 목적론적일 수는 있어도 그것은 실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비유적인 것일 뿐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을 목적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냥 언어적 혼동일 뿐이라는 것이죠.
예를 들면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이라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이 표현은 자연이 실제로 "목적"을 가지고 생존에 적합한 개체를 선택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표현은 "자연 선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언어적인 표현으로는 어떤 목적이 있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으나 실제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물의 어떤 기능을 설명하기 위해 "목적"을 끌어다 쓰지 않았다는 점. 마이어 같은 사람들이 다윈에게 부여하는 의의가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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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는 조금 다른 얘기이기는 한데, 저는 마이어나 헐, 그래고 대중적으로는 도킨스나 데닛에게서 보이는 "다윈 영웅 만들기"가 실제 생물학사와는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 따르면, 다윈의 중요한 공로는 위와 같은 자연 선택이라는 설명을 제시해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이어진 생물학의 본질주의(essentialism), (그러니까 종에 대한 "기능", "본질"을 강조하는 경향)에 대한 위대한 과학혁명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이 본질주의의 개념은 마이어가 포퍼에게서 빌려서 쓴 개념입니다. 포퍼에 따르면, 이러한 본질주의의 시초 격으로 플라톤을 꼽고, 플라톤을 매우 비판합니다.)
과학사가들또는 역사학적 마인드를 가진 철학자들이런 식의 역사적 내러티브에 대해 의구심 표명을 합니다. 이 내러티브와 그 비판에 대해서는 Richards, Richard A. The species problem: A philosophical analysi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의 Chap. 2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생물학자들의 myth-story는 한국어로 잘 출판되는데 비해, 과학사학자들의 이야기는 제대로 한국어로 출판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제가 잘 이해한 것인지 모르겠는데, "자연 선택"을 물리학적인 인과 설명으로 환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는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에른스트 마이어는 그런 가능성에는 회의적일 것 같습니다. 그것 때문에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와 논쟁도 했었으니까요. 마이어가 직접 "no principle of historical evolutionary theory can ever be reduced to the laws of physics or chemistry" (역사적 진화론의 어떤 원리도 물리나 화학의 법칙으로 환원될 수 없다.)라고 말한 바 있으니 그럴 것입니다.
다만, 마이어는 "자연 선택"도 그냥 물리학적으로 환원되지는 않지만 일종의 인과적 설명이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즉, 마이어는 인과를
"(a) 최소한 둘 이상의 물리적 개체가 (b) 서로 접촉했을 때 (c) 일어나는 일."
로 정의하는 것 자체가 인과를 지나치게 좁게 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마이어가 말하는 "궁극 인과"는 Mandala님의 "목적론적 설명"과 비슷한 개념이겠지만, 마이어에게는 "목적론적 설명"이라는 용어가 자연 선택을 모종의 지적 설계(Intelligent design)로 오도하게 하는 용어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진화생물학자들은 이런 오도될 수 있는 용어에 일종의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아서...
굳이 그러한 설명을 "목적론적 설명"이라고 부른다면, 마이어는 자연 선택이 목적론적 설명이라는 것에 동의할 것 같기는 합니다. (물론 그런 용어가 misleading한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조금 다른 얘기이기는 한데" 이후로 얘기한
운운한 것은 그냥 Mandala님과는 상관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과학사학자들의 이야기가 한국에 잘 안 퍼지고, 다윈을 지나치게 "철학적 영웅"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좀 그래서 해 본 그냥 한탄이었습니다. Mandala님이 진화론 혹은 자연선택이 본질주의라 생각하고 있었다는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혹시 그렇게 제가 생각하고 있다고 여기셨다면, 제가 잘못 쓴 탓이니 죄송할 뿐입니다.
(1) 아닙니다. 저도 진화론이라는 악명 높은 개념을 쓰면서도, 명료하게 쓰지 않아 GOYS님의 혼란을 부추긴 것 같습니다.
(2)
제가 인과 개념을 굉장히 좁게 정의하고 논의를 시작한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 논의가 인과론이라는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주장도, (물리학적인 인과론은 아니지만) 일종의 인과론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 경우, 원인이 되는 것/결과가 되는 것 모두 물리적 개체가 아닌 일종의 사건(event)이므로, 사건 인과론이라 (대충) 명명해볼 수 있겠죠.
(2)
정확히 말하자면, (1) 진화론이 '적합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대상/현상을 '설명'하려는 이론이라면, (2) 이 이론은 '완전히' (물리적 인과론이든 사건 인과론이든) 인과론이라는 설명의 형태로 환원할 수 없다. 가 제가 주장하려는 요지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계속 말했듯) '적합성'이라는 개념은 '기능'과 떼어놓을 수 없고, 이 기능을 통한 설명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신학적 가정이 없는, 순수한 자연주의적 입장의) 목적론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화장실에서 상수도관의 기능은 '깨끗한 물을 잘 전달하는 것'이겠죠. 누군가가 "왜 상수도관이 화장실에 있어?"라고 묻는다면, 적절한 대답은 "깨끗한 물을 잘 전달하려고."일겁니다. 혹은 "이 상수도관이 적합해?"라는 질문이 온다면, "응. 상수도관의 기능이 잘 작동하네."라고 대답할 겁니다.)
(2-1) 인과론의 정의를 조금 넓혀 보겠습니다.
(a) 시간적으로 선행하는 (물리적 개체든 아니면 사건이든) 원인이 있고, (b) 이에 야기된다고 추정되는 (물리적 개체든 사건이든) 결과가 있다.
저는 이러한 확장에도, 여전히 '적합성'이 무엇인지 인과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 적합한 특성이 어떤 환경적 조건에서 성립하였고 그러한 이야기는 인과론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그 환경에 어떠하였길래, 그 특성이 적합한데?"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다시 기능, 즉 목적론적 설명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어 보입니다.
(이게 어쩌면 @YOUN 님의 질문에 대한 부분적인 제 답이 될 듯 합니다.)
(3)
(이 내용이 제 입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지만, 일단 적어 보겠습니다.)
저는 '이유'라는 것에는 인과적 설명, 목적론적 설명 외에도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 생각합니다. 즉, 누군가가 "왜 X한거야?"라는 질문에 대해서, "Y하기 때문인거야."라는 답을 줄 때, X-Y의 관계를 '이유'라 정의하겠습니다. 이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또한 한 가지 X-Y 쌍이라도, 다양한 형태의 설명이 가능하겠죠.)
인과적, 목적론적 설명 외에도 가령 다음과 같은 설명 역시 성립할 겁니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그는 비트겐슈타인 가문에 속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성을 가짐'(X) - '비트겐슈타인 가문에 속함'(Y)는 이유의 관계이지만, 이 관계가 목적론도 아니며 인과론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일종의 형이상학적 포함 관계겠지요. (예컨대, '숫자 2는 짝수에 포함된다.'처럼요.)(첨언하자면, 이러한 것들을 연구하는 분야를 요즘은 metaphysical grounding이라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생물학이 던지는 질문, 즉 이유가 모두 인과론적 설명이라는 데 반대하며, 부분적으로 목적론적 설명을 추구한다 생각합니다.
일단 제가 면밀히 모두 읽지는 않았는데, (c)부분이 아무래도 의문스러워 원문을 보았더니 전체적으초 오역이네요. 의역하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원뜻과는 다른 뜻으로 번역하신 게 아닌가 두렵습니다.
According to the “selected effects” theory of function, the functions of a trait are those activities in virtue of which the trait was selected.
특히 이 부분이 오역되는 바람에 혹은 오해를 바탕으로 의역하신 관계로 다소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 반복되는 것 같아요.
다른 논점들은 차치히고 저는 기능주의적 설명이 목적론적 설명을 함축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렵네요. 기능을 분석하는 여러 이론들 중에 위에 언급된 the “selected effects” theory는 정확히 그런 생각을 해체하는 주장이잖아요.
진화론을 다룰 때 GOYS님이 잘 지적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이 이론이 담고 있는 설명 모델이 일상 언어의 목적론적인 용어를 사용하니 착각하기 쉬운데요. 엄연히 전문용어들이고, 일상적 수준의 목적론적 설명과 동일하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진화론이 말하는 적합성은 오늘날 수학적으로 해명되었다고 받아들여져요. 특히 윌리엄 해밀턴, 조지 윌리암스같은 사람들이 포괄 적합도라는 개념을 성립발전시키고 사회진화론이 과학적으로 탄생했잖아요. 8-90년대부터는 게임이론을 떼놓고 진화론을 말하기도 어려워졌지요.
물론 제가 가장 좋아하던 생물학자인 스티브 제이 굴드가 일부 진화학자들의 과도한 기능주의적 설명과 목적론적 설명의 혼동에 대해 질타하기도 했지만 그건 이 글타래의 논지와는 많이 달랐던 것 같아요.
Teleological language is frequently used in biology in order to make statements about the functions of organs, about physiological processes, and about the behavior and actions of species and individuals. [...] In spite of the long-standing misgivings of physical scientists, philosophers, and logicians, many biologists have continued to insist not only that such teleological statements are objective and free of metaphysical content, but also that they express something important which is lost when teleological language is eliminated from such statements.
"목적론"과 "인과"라는 말이 그 자체로 학계에서 반드시 가치중립적으로 쓰이는 용어가 아니라는 점, 나아가 이들 모두 다양한 의미로 쓰인다는 점을 주지하는 것 또한 생산적 논의를 이어나가는데 유용할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현대 생물학에서 나타나는 목적지향적 설명을 두고 (원 글에서도 간략히 언급이 되었습니다만) 20세기 후반에 "Teleology"와 "Teleonomy"라는 말을 굳이 구분하여 쓰는 관례가 나타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시겠죠.
관련된 근래 과학철학계의 큰 흐름 중 하나는
현역 과학자들의 말 및 실천 양식을 (웬만하면) 그대로 받아들이자
인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위 Mayr의 인용구에서 나타나듯 현역 생물학자들의 (그게 'teleology'가 되었든, 'teleonomic'이 되었든) "목적론적" 언어 사용은 교과서나 논문에 버젓이 나와있는 사실입니다. 큰 하자가 없는한, 이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철학적 덕목으로 이해되는거죠.
Mayr가 활동할 때만해도 상황은 달랐습니다. 위 인용구에서 나타나듯 1970년대만 해도 생물학의 철학자들은 물상과학자들 및 (물상과학을 과학의 범례로 둔) 과학철학자들의 삐딱한 시선에 맞서 생물학의 정당성을 방어해야하는 입장이었죠. 그러다보니 '야, 그거 목적론 좀 수상한데?'라는 시선에 맞서 그 정당성을 방어해야 했구요. 하지만 21세기 현재는 생물학의 철학의 위상이 아예 달라졌고, 그 입장 또한 달라진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이젠 도리어 생물학의 철학자들이
생물학자들이 "목적론적" 언어로 성공적인 과학 활동을 하는데 너희가 어쩔건데?
라고 (만약 필요하다면) 당당히 반격을 할 수 있는 입장에 선 것 같습니다.
물론 이대로 '"목적론적" 언어'을 두고 그대로 끝내버린다면 그건 그 자체로 철학적 탐구를 종료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니만큼, '"목적론적" 언어'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한 철학적 분석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SEP의 '생물학에서의 목적론적 개념' 항목 역시 유용할 듯 합니다.)
하지만 20세기와 21세기 논쟁 양상에 차이가 있다면, 과거에는 생물학의 철학의 주제를 논의할 때에 생물학 '바깥'에서의 사례 및 개념을 원용하는데 초점을 두었다면, 현재의 논쟁은 생물학 '안'에서의 사례와 개념에 더욱 초점을 기울인다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현재의 생물학, 현재의 생물학의 철학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더욱 생산적인 논의가 될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보다 상세한 해명이 있어야 제가 답변 드리기 수월할 것 같습니다. (우선 제 번역의 오역은 차치하더라도), "기능에 대한 설명"과 (제가 제시한) "기능주의적 설명"은 구분되어야 할 듯합니다.
언급하신 "selected effect theory"는 기능에 대한 "인과적 설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YOUN 이 댓글로 정식화 해주신 적 있습니다.
이 설명에 따르면, "생존에 적합한 특성"은 인과적으로 "생존"했기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설명을 기능에 대한 설명 중 하나로 충분히 납득할 수 있습니다.
(3)
문제는 여기서 "그렇다면 왜 그 특성이 생존에 적합했는데?"라고 묻는다면, 인과론적 설명은 아무런 것도 제시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살아남았으니 그런거지, 그거에 설명이 더 필요해?"가 아마 예상되는 답변입니다.
하지만 생물학자들은 여기서 설명을 멈추려고 하지 않는 듯 해보입니다. 제가 보기에, 그들은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 목적론적/기능론적 설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단순화하자면) 이렇게 말입니다.
제가 기능주의적 설명을 목적론적 설명으로 이해하는 까닭은, (이미 @GOYS 에 대한 답변에서도 언급했지만) 그것이 (i) 어떠한 형이상학적 본질이라던가 (ii) 본질 혹은 자신의 의지에 따른 의도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ㄱ) "X의 기능은 Y함이다."라는 표현에서도 드러나듯, 기능에는 언제나 Y라는 목표/목적(target)이 있기 때문입니다.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우리는 그 목표를 X가 제대로 이루지 못할 때,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다 평가하곤 합니다.
(4)
따라서 @alektryon 님의 (오역에 대한 지적을 제외한) 반박은 저로서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우선 이 부분은 제가 볼때 목적론적 설명에 대한 반박으로 성립하지 않을 듯합니다. 목적론적 설명 역시 수학이라는 도구를 통해 표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죠. ("해명"이라는 용어가 제가 볼 때는 수학과 생물학에 대한 강한 가정들을 포함하는 것 같아서, 조금 다르게 옮겼습니다.)
이 부분은 자세한 설명이 있지 않은 이상 받아드리기 어려울 듯합니다. (i) 제가 정의한 기능주의적/목적론적 설명이라는 틀을 유지하면서도, 기능주의적 설명과 목적론적 설명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셔야 할 듯합니다.
(ii) 또한 제가 정의한 목적론적 설명과 일상 언어의 목적론적 용어/설명이 같고 다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저는 생물학에서 기능-목적론적 설명이 [일상 언어의 목적론적 설명을 포괄하는] 광의의 목적론적 설명 중 하나로 이해하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이 논의는 여기서 부차적이라 여겨집니다.
(1) 제가 볼 때에는 이렇게 말이 나오는 이유가 "목적론적"이라는 표현이 다소 "본질 혹은 자신의 의지에 따른 의도가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좋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Mandala님께서는 아니라고 확실히 밝히셨지만 말입니다. 특히, "목적"이라고 할 때에 그렇습니다. (만약 "목적" 대신에 "경향", "경향성"이 있다는 식으로 표현되었으면 별 말이 안 나오지 않았을까 합니다.)
(2)
이 인용문에서 사용된 기능은 누군가의 의지 또는 의도에 연결된 것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물리학이나 화학 분야도 목적론적으로 바꾸어 서술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촉매의 기능은 반응 속도를 빠르게 하는 것이다."라는 표현을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여기에서 Mandala님의 목적 표현에 따르면, 여기의 목적은 "반응 속도를 빠르게 하는 것"이 되겠죠. 화학 반응과 관련된 분야는 thermodynamics나 chemical kinetics이고, 만약 생물학이 "기능"의 용어를 사용하였다고 해서 목적론적이라면, 이 분야들도 마찬가지로 다 목적론적이 될 것입니다. 사실 Principle of least action을 쓰면 이것 외에도 다양한 분야를 목적론적으로 서술할 수 있습니다.
(3) 아마 위의 점 때문에 목적론적이라는 표현을 맘에 들어하시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1) "목적론적"이라는 표현이 너무 의지에 관한 것처럼 느껴지거나 2) 그렇지 않다면, "목적론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 분야가 생물학 외에도 많아지게 된다는 점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누군가의 의지 또는 의도에 연결되지 않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목적론적"으로 부를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헤겔의 역사철학은 "목적론적"일까요? 어떤 개인의 직접적인 의지 또는 의도와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이성의 간지" 같은 표현에서도 보이듯 "목적론적"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이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댓글들이 달려 있네요. 철학에서는 인과 관계도 인접 인과, 궁극 인과라는 익숙하지 않은 용어를 사용하는 군요. 저는 과거에 쟈크모노의 우연과 필연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화이트헤드는 목적론을 배제하는 우연론에 대해서 극렬하게 반박을 하지만, 쟈크모노의 대장균이 우연적인 유전자 변이가 발생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번영하는 사례를 들면서 생명진화가 목적론적인 필연성이 아니라 우연의 결과라는 주장을 하더군요. 저는 역사적 설명에서 인과라는 것은 자연 과학과 같은 엄밀한 인과가 아니라 높은 개연성과 설명력을 갖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