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내포성이 저 같이 얼치기로(...)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다룰 만한 주제가 아닌데, 후하게 평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따라가시기 벅찬 이유가 제대로 논리적으로 구성된 아이디어가 아니기 때문일 것것이지, @handak 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2)
우선 초내포성이 한 가지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지 분명하지 않아 보인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듯합니다. 수학적 명제의 초내포성과 확률 명제의 초내포성은 다른 방식으로 해결/설명해야 하는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또한 의미론(semantic)과 화용론(pragmatics)가 명확히 구분될 수 있는 영역인지도 논쟁적인 부분이지요. 통상 의미론은 '의미'를 다루는 것이고, 화용론은 언어의 '발화 상황'과 관련된 모든 언어적 현상을 다루는 것이기에, 둘 사이에는 접점이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관점에서 보자면, 의미론은 거의 형식 의미론이라는 점 역시 염두해 둬야 할 것 같습니다.) 예컨대, 화용론의 발화 수반 행위는 '의미'와는 구분되는 부가적인 것이라 여겨지기에, 의미론 학자들은 별 관심을 두지 않죠. 한편 발화 상황에서 의미가 바뀌는 여러 경우는 때에 따라 의미론의 영역으로 포함되기도 합니다. 예컨대, 지표사 같은 경우 (형식) 의미론에 완전히 통합되었죠.
한편 말하신 함축은 좀 애매한 지점입니다. 통상 화용론적 함축은 명제가 '일차적으로 드러내는 의미'와 다른 (명제로 재구성할 수 있는) '의미'를 가진다는 뜻인데, 이 경우, 의미론 학자들은 "우리의 할 일은 일차적으로 드러나는 의미뿐이다."라고 한정 짓기 때문입니다. (다만 화용론쪽에서 할 말도 있는게, 라이칸이 <현대 언어 철학>에서 지적하듯, 매우 길고 복잡한 비유 문장 같은 것들은 일차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선 함축 없이는 불가능해 보이는 듯한 경우가 있다는 점입니다. 즉 일차적 의미와 이차적 의미를 구분할 수 없는 경우이지요.)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의미에는 쓰임이 있다."를 통해 말하시려는 "화용론"이 정확히 어떤 영역의 문제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지표사 같은 맥락의존적 단어들은 일단 아닌 듯하니 배제하도록 하겠습니다. 화용론적 함축도 확률-초내포성에는 적절하지 않은 듯합니다. 통상 화용론적 함축은 명제가 '일차적으로 드러내는 의미'와 다른 (명제로 재구성할 수 있는) '의미'를 가진다는 뜻인데, 이 경우에는 해당 사항이 없는 듯합니다. (확률 문장을 굉장히 긴 비유 문장으로 보는 건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남아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인 듯합니다. 하나는 발화 수반 효과이지요. 확률-초내포적 문장은 같은 명제이지만 다른 발화 수반 효과를 지닌다 말할 수 있어 보입니다. 여기까지는 통상적인 언어철학의 영역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비트겐슈타인적 "쓰임"을 언어를 벗어난 "삶"의 영역으로 확장해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실용주의적 침범으로 보는 것이지요. 즉 문장이 의미하는 것이 폭넓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므로, 이 관계 속에서 다른 기능을 한다면 다른 의미를 가진다 봐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실 비트겐슈타인적 "쓰임"은 제 입장에서는 적어도 세 가지 각기 다른 전제를 모두 포괄하는 입장처럼 느껴집니다. (i) 하위 언어 단위 (문장, 단어 등)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 전체를 고려해야 한다는 일종의 전체론(holism), (ii) 언어 활동과 인간의 사회적 활동을 구분할 수 없다는 입장. 아마 이 두 입장을 결합해서 나온 입장이 (iii) 화용론의 차원으로 의미를 설명해야 한다. 일 겁니다.)
여기서 다시 복잡한 문제로 돌아옵니다. 초내포성 문장이 가진 인지적 차이가, 명제로 설명할 수 없는 '의미의 차이'인걸까요? 아니면 (구분이 가능하다면) 의미와 구분되는 부수적인 차이인걸까요? (예컨대, 확률 문장의 초내포성은 사실 의미의 문제가 아닌 발화 수반 효과의 차이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확률 문장에 있어서는) 발화 수반 효과에 따른 차이로 파악하는 것도 꽤 괜찮은 시도라 생각합니다. 다만 문제는 수학 문장의 초내포성은 이러한 발화 수반 효과로 이해하기에는 어려워 보입니다. (수학 문장이 '사실의 진실'이라는 발화 수반 효과 외에 다른 효과가 있을까요?)
제가 여기서 시도하려고 했던 것은 초내포성 일반에 대한 해결책이었습니다.
(3)
우선 초내포성을 여전히 의미론의 영역에서 해결하려는 시도들이 있습니다. 화용론의 영역으로 보이던 지표사를 형식 의미론으로 잘 소화했듯, 초내포성 역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제 기억으로는 차머스의 2차원 의미론이 이러한 시도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내용을 잘 몰라 이에 대한 평가는 할 수가 없네요.)
아니면 가능세계 중에 모순이 있는 세계를 허용하는 불가능세계를 도입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동그란 사각형과 빨간 파란색은 모순이므로 일반적인 가능 세계에서는 둘 다 그냥 거짓일뿐입니다. 하지만 불가능세계를 허용할 경우, 동그란 사각형은 불가능세계 A에서는 성립하고 B에서는 성립하지 않는 것과 같은 차이를 설명할 수 있겠죠.)(이 입장들은 그레이엄 프리스트의 초일관 논리 등의 영역과 결합되고 있는 듯합니다.)
이 두 입장은 어쨌든 지칭을 기반으로 발전한 고전적 의미론 중 가능 세계 의미론을 발전시키는 방향이지요.
(저는 여기에 별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잘 모르거든요.)
(4)
한편 명제보다 하위 단위인 단어/개념으로 내려가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게 제가 선택한 방법이죠. 크게 러셀식 명제-개념 구조를 옹호하는 입장(Soames의 방식입니다.)이나 프레게식(?)의 지향성을 옹호하는 방식(야블로의 방식이죠.)이 있습니다. (이 둘 역시 제대로 알지 못해 뭐라 설명을 드리지 못하겠네요.)
제가 선택한 방식도 이 둘와 (일단 겉보기에는) 동일한 방향입니다. 단어/개념 그리고 개념들이 만들어내는 구조 속에서 초내포적 명제의 차이가 발생한다 보는 것이죠.
그리고 저는 이 개념을 (다른 곳에서도 말했지만) 굳이 준-언어적인 것들만 허용할 필요는 없다 생각합니다. 비-언어적 형태의 개념으로 심적 심상 등이 있겠죠. (당장 눈을 감고 사과를 상상하면 떠오르는 사과처럼요.)
(5)
환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일단 저희가 의사소통을 하려면 명제, 즉 언어 단위로 하겠죠. 저희가 가지는 심적 심상이든 퀄리아든 뭐든 이걸 그 자체로 상대에게 전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가 뭘 지칭하려고 하는지 상대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명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