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일을하기위해서 삶을 살아간다해도
그 일이 어떤의미를 갖는가? 그럼 전부 허망한일처럼 느껴지고
그럼 난 뭘 위해서 살아가고있는걸까
이게 사르트르가 말한 '구토감'인가 싶습니다.
회원님들은 이런 기분을 느껴보신적 있으신지 그리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쭈어봅니다.
어떤일을하기위해서 삶을 살아간다해도
그 일이 어떤의미를 갖는가? 그럼 전부 허망한일처럼 느껴지고
그럼 난 뭘 위해서 살아가고있는걸까
이게 사르트르가 말한 '구토감'인가 싶습니다.
회원님들은 이런 기분을 느껴보신적 있으신지 그리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쭈어봅니다.
삶이 진짜 무의미한지 철학적으로 따져보는 문제와, 그런 기분을 내가 실제로 느낀다는 문제는 서로 다른 케이스입니다. 다시 말해 철학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으로 해결을 보아야 할 문제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모쪼록 삶에 대해 이러한 기분을 찾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개인적으로 궁금한게 있어서 여쭙니다
제가 최근 토마스 네이글의 부조리론에 관련한 책을 읽고 거기서 벗어나지못하고있는데
그 글의 논지는 결국 모든 일은 정당화되지못한다입니다.
글을 좀 인용해보자면
어떤학문을 연구하는 연구자에게 질문하는 대화입니다.
질문자: “당신의 연구가 왜 중요한가요?”
갑골 문자 연구자: “중국 한자가 어떻게 탄생하였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갑골문자에 대한 제 연구가 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질문자: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중국 한자의 탄생을 이해하는 것은 왜 중
요한가요?”
갑골 문자 연구자: “한자의 탄생을 이해하는 것은 인류의 문자 문명이 어
떻게 형성되는지를 파악함에 있어서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질문자: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인류의 문자 문명이 어떻게 형성되었는
지 파악하는 것은 왜 중요한가요?”
이런식으로 모든 일에 이유를 파고들다보면 이유를 찾을수없는 무한퇴행에 빠지게된다는논리인데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전에 이미 질문하셨던 것들과 똑같은 질문이네요. 이미 저 위의 글에서 @YOUN 님께서 답을 하셨듯이, 그 '정당화'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인식론이라는 분과의 이론들이 여러 가지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그에 대해 정리되어 있는 자료도 서강올빼미에 존재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질문하신 내용에 인식론적 관심과 실존적 관심이 뒤엉켜 있어서 하나로만 답변을 드리기가 어려운 듯합니다.
(1) 인식론적 관심의 측면에서
일단, 적어주신 내용 중
이 내용은 인식론의 아주 고전적인 문제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하나의 합의된 결론이 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모든 종류의 인식론들은 이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 꽤나 설득력 있는 대답들을 제시합니다. 만약 질문자 님께서 단순히 각각의 철학적 입장들이 이 질문에 대해 어떤 대답을 내놓고 있는지에 관심이 있으신 것이라면, 인식론 교과서들을 공부해 보시는 것만으로도 의문이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제가 지지하는 입장은 소위 알빈 골드만이 제시한 '신빙주의(reliabilism)'라는 입장인데, 쉽게 말해 참을 생산하는 신빙성 있는 반응 성향들은 그 자체로 정당화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정당화의 마지막 토대에는 반응 성향에 근거한 믿음들이 놓여 있고, 이 믿음들은 적어도 다른 부정될 만한 이유가 없는 이상은 일종의 '디폴트 값'으로서 우리의 다른 믿음들을 떠받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버트 브랜덤이 바로 이런 식의 인식론을 수용하여 '보류와 도전의 구조default and challenge structure'라는 모델을 통해 우리의 추론 그물망이 변화하는 역동적 과정을 설명합니다.)
(2) 실존적 관심의 측면에서
하지만 질문자 님께서 단순히 이런 인식론 모델이 궁금하여서 물음을 던지고 계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질문자 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 줄 만한 구체적인 '토대 믿음'을 가지고 계시지 않기 때문에 회의를 느끼시는 것이겠죠. 즉, 수많은 믿음들 중 무엇을 질문자 님의 디폴트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확신할 수 없어서 계속 유사한 글들을 남기시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는 '철학(philosophy)'의 영역이 아니라 '신앙(faith)'의 영역이 시작될 수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아카데믹한 철학은 우리가 삶에서 토대로 받아들일 만한 신앙의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습니다. 이 점은 실존주의나 생의 철학이라고 해도 동일합니다. 그 철학들은 우리 삶이 어떻게 '구조화'될 수 있는지를 기술하고 있을 뿐, 그렇게 구조화된 삶의 가장 마지막 층위에 무엇이 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질문자 님의 문제는 철학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종교에서 대답이 찾아져야 합니다. 농담이 아니라, 저는 아카데믹한 철학에서 삶의 의미나 목적이나 비밀에 관해 무엇인가를 알고자 갈망하는 분들을 볼 때마다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철학에서 삶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아 보려고 하는 태도는, 사실 근대 이후로 기성의 종교 전통들이 더 이상 일반인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게 되면서 나타난 일종의 기현상입니다. 사람들의 실존적 문제를 치료해 주어야 하는 종교 전통들이 마치 돌팔이인 것마냥 폄훼되었기 때문에, 종교에서 치료받아야 하는 분들이 철학을 기웃거리다가 결국 회의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너무나 많이 봐서 항상 답답하게 생각합니다.)
정말로 실존적 문제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종교 전통에서 대답을 찾아보시길 권유해 드립니다. 특별히, 오랜 세월동안 검증되고 학문적으로도 자기 비판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는 기독교, 불교, 이슬람, 힌두교 등의 전통을 탐구해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단순히 예배나 기도나 수행이나 명상만이 종교 전통의 전부가 아닙니다. 종교 바깥에 있는 분들은 잘 모르시는 경우가 많지만, 이 종교들에는 '신학'이나 '종교철학' 등의 이름으로 수행되고 있는 대단히 깊은 학문 전통들이 있습니다. 이런 학문 전통들이야말로 질문자 님이 고민하시는 인생의 의미, 삶의 이유, 존재의 목적 등에 대한 매우 인상적인 대답들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허무주의에 빠진 경험이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오히려 저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자의식이 생기고 신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삶이 결코 허무하지 않다는 확신에 사로잡힌 경험은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삶의 의미 일반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그다지 적절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제 개인 블로그에 기독교 신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를 쓴 것이 있기는 합니다.
신앙주의: 신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한 가지 답변
https://blog.naver.com/1019milk/222565644898
신앙은 철학에게 무엇을 말해주었는가?: 키르케고르의 기독교 강화 네 편에 대한 철학적 해설
https://blog.naver.com/1019milk/222647653127
문학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실존주의와 문학은 떼놓을 수 없는 관계니깐요. 카프카, 사르트르, 카뮤 정도가 있을 것 같네요.
말씀하신 네이글의 부조리론대로 끝까지 간다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당연히 없습니다.
중요하다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작성하신 다른 글들을 읽고 왔는데, 네이글이 말한 객관적 관점이 없다는 것에 동의하시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요? 거꾸로 우주 멸망의 문제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삶을 살아간다는 것에 있어 객관적 관점에서의 당위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