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일이 많으니 챕터를 끝내는 속도도 점점 느려지네요. 슈토이프의 견해에 동의가 안 되는 부분이나 덧붙이고 싶은 말이 여럿 있어서 각주가 많아졌습니다.
- 노이라트의 은유
정합론자들은 믿음체계의 토대를 이루는 기초믿음을 부정하고, 믿음은 언제나 다른 믿음에 의해서만 정당화된다고 주장한다. 정합론자는 따라서 어떤 토대 없이 믿음들이 서로를 정당화한다는 생각을 설득력 있게 만들어야 한다.
노이라트(O. Neurath)는 이 생각을 망망대해에 떠 있는 배에 비유했다. 토대론적 입장을 취했을 때 우리의 믿음체계는 건선거에 정박한 배와 같다. 우리는 체계 외부에서 체계를 지지할 기반을 마련하며, 바깥의 규준에 비추어 믿음체계 내 믿음들의 옳고 그름을 검사할 수 있다. 반면 정합론에 따르면 믿음체계라는 배를 고정시킬 건선거 같은 것은 없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체계 밖으로 나갈 수 없으며, 오로지 믿음체계 내부에서만 믿음들을 검사하고 수정할 수 있다. 이는 망망대해에서 자신이 탄 배를 수리해야 하는 선원과 같은 상황이다.
이 은유의 요점은 우리가 믿음체계를 평가하고 수정할 때 믿음체계 밖의 관점을 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점은 믿음의 정당화에 관한 이론적 관점에도 자연히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믿음의 정당성이 오로지 다른 믿음에 의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순환적 정당화라는 개념으로 우리를 이끈다.
- 정합론과 순환
플란팅가와 같은 학자는 믿음들의 순환의 크기가 충분하다면 믿음들이 잘 정당화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납득하기 어렵다. 첫째, 자기정당화는 (앞 장에서 살펴봤듯) 불가능하다. 둘째, “x가 y를 정당화한다”는 이행적 관계이다. B1이 B2를 정당화하고 B2가 B3을 정당화한다면 B1은 B3을 정당화한다. 이제 B1이 B2를, B2가 B3을, B3이 B1을 정당화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정당화는 이행적 관계이므로 우리는 “B1은 B1을 정당화한다”라는 명제를 얻게 된다. 그러나 이는 자기정당화가 불가능하다는 당초의 전제에 어긋난다. 이런 이유에서 순환적 정당화는 그 크기가 어떻든 간에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런데 본주어(L. BonJour)의 지적처럼, 이 논증은 정당화가 선형적인 형태를 띤다는 전제 하에서만 순환적 정당화 모형을 반박할 수 있다. 정합론자는 개별 믿음들이 인식적 선후 관계에 따라 정당화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을 거부해야 하며, 정당화는 믿음체계 전체를 단위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야 한다. 하나의 믿음은 그 믿음이 속한 믿음 연결망 전체와의 추론적 관계에 의해 정당화되는데, 이것이 전체론적 정당화 개념이다. 전체론적 정당화를 받아들인다면 정당화의 퇴행 문제는 애초에 발생하지 않는다. 믿음은 믿음체계에 의해 정당성을 획득하며, 믿음체계는 그 자체의 정합성에 의해 정당성을 얻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의 정당화 근거가 순환을 통해 자기에게로 후퇴하는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합론이 제시하는 정당화 규준인 정합성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 추정상의 정합성 요소들
정합성을 해명할 후보에는 (1) 필함(entailment), (2) 논리적 일관성(logical consistency), (3) 설명적 관계(explanatory relation)가 있다.
먼저 B1이 참이면서 B2가 거짓인 경우가 불가능하다면 그리고 오직 그때에만 B1은 B2를 필함한다. 이처럼 믿음들 간의 논리적 필함 관계로 정합성을 정의하는 것은 그럴듯해보인다. 체계 내 믿음들이 서로 논리적으로 연역될 수 있다면 확실히 믿음체계는 잘 짜여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정합성이 필함 관계라면, 어떤 체계이든 연역 논리를 통해 정합성 있는 체계로 만들 수 있다. 그 체계가 비합리적이고 부당한 체계라도 상관없다. 예컨대 다음의 두 가지 비합리적인 믿음이 있다고 해보자.
(B1) 달은 치즈로 만들어져 있다.
(B2) 백두산은 사악한 외계인의 전진기지이다.
우리는 논리적으로 P가 참이라면 P∨Q, Q→P 등도 참이라는 것을 안다. 따라서 이를테면 다음의 믿음들을 연역할 수 있다.
(B3) 달은 치즈로 만들어져 있거나 모든 정사각형은 슬픔을 자아낸다.
(B4) 모든 강아지가 고양이라면 백두산은 사악한 외계인의 전진기지이다.
B1~B4로 구성된 믿음체계는 이상하고 비합리적이지만 논리적 필함 관계로 잘 짜여 있다. 정합성을 필함으로 정의할 경우 위의 믿음체계 또한 정합적이고 정당화된다고 말해야 하지만 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따라서 필함은 정합성의 정의로 부적절1)하다.2)
둘째로 믿음체계는 그 체계를 구성하는 믿음이 모두 참인 경우가 가능하다면 그리고 오직 그때에만 논리적으로 일관적(=무모순적)이다. 그런데 논리적 일관성은 정합성의 기준으로는 지나치게 넓다. 단지 모순이 없을 뿐인 믿음체계라면 얼마든지 존재하며, 앞서 제시되었던 반례와 같은 이상한 믿음체계도 무모순성을 쉽게 충족한다. 따라서 무모순성은 정합성의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문제는 정합성의 필요조건으로 무모순성이 성립하는가이다.
논리적 일관성을 결여하면서도 정당화되는, 정합적인 믿음체계는 존재한다. 믿음체계가 모순을 내포하더라도, 그 모순이 쉽게 발견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면 모순이 자각되기 전까지는 믿음체계가 정당화된다고 말해야 한다. 예컨대 프레게는 산술의 기본법칙을 연구해서 그 체계를 발표했으나, 러셀이 이 체계에 모순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체계가 모순적이라는 점을 몰랐다. 이때 프레게가 부주의하거나 해서 모순을 간과한 것이 아닌 한, 우리는 산술의 기본법칙에 관한 프레게의 믿음이 모순을 깨닫기 전까지 정당화된다고 주장해야 한다. 따라서 논리적 일관성은 정합성의 필요조건이 아니다.3)
셋째로, 레러나 본주어 등의 정합론자들은 믿음들이 서로를 설명하고 또 서로에 의해 설명될 때 믿음들이 정당화된다고 주장한다. 다음의 세 믿음을 보자.
(1) 그는 피곤하다.
(2) 그는 밤늦게 깨어 있었다.
(3) 그는 일과 시간에 졸았다.
(2)는 (1)을 설명하고, (3)은 (1)에 의해 설명된다. 정합론에 의하면 세 믿음은 서로 설명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서로의 정당성을 증강한다.
그런데 믿음이 정당화되기 위해 반드시 다른 믿음들과 설명적 관계를 맺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 예컨대 허기를 느끼고 내가 형성한 “나는 배가 고프다”라는 믿음은 다른 믿음들에 의해 꼭 설명되지 않더라도 내성에 의해 정당화된다. 이것이 반드시 다른 믿음에 의해 설명되거나 다른 믿음을 설명해야만 한다는 점이 논증되지 않는다면, 설명적 관계는 정합성의 필요조건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게다가 좋은 설명과 나쁜 설명을 구분하는 기준도 모호하다. 믿음이 정당화되려면 나쁜 설명이 아닌 좋은 설명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할 터이다. 그러나 경쟁하는 가능한 여러 설명들의 우열을 가리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어떤 설명은 우리의 상식에 잘 부합하지만 복잡하고, 어떤 설명은 단순하고 간명하지만 상식에 잘 들어맞지 않을 수 있다. 설명적 정합성의 측면에서 전자의 설명이나 후자의 설명은 단적으로 우위에 있지 않다.
이러한 반론들은 설명적 관계만으로는 정합성을 규정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설명적 관계가 믿음체계의 정합성에 기여할 수 있고 믿음들의 정당성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발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 승인에 관한 레러의 견해
레러와 본주어는 설명적 관계를 정합성의 구성 요건으로 보지만 여기에 대해 그 이상의 자세한 해명을 내놓지는 않는다. 대신 이들은 논파 가능성, 수준 상승(level ascent), 메타정당화(metajustification) 등의 개념에 의해 정합성을 설명한다. 먼저 레러의 정합론은 승인(acceptance) 개념에서 출발한다. 레러에 의하면 승인은 진리를 얻고 오류를 피하려는 관심에서 형성되는 믿음이다. 믿음은 그 외에도 행복, 도덕적 의무, 유용성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형성될 수 있지만, 승인은 참에 관한 관심이라는 특정한 목표로부터 산출되는 믿음이다. 그리하여 레러는 “S가 p를 믿는 것이 정당화된다”가 아닌 “S가 p를 승인하는 것이 정당화된다”를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나아가 레러는 승인에 관해 기능주의적(functionalist) 입장을 취한다.4) 승인에 관한 기능주의는 “S가 p를 승인한다”는 심적 상태를 입력과 출력을 갖는 하나의 함수로 규정한다. S가 p를 승인한다는 것은, S가 이러저러한 입력을 받았을 때 p를 매개로 이런저런 추론과 행위를 출력한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내가 초인종 소리를 듣는 경험이 입력이라면, 나는 “초인종이 울리고 있다”를 승인하고, “누군가 밖에 와 있다”라는 결론과 문을 열어주는 행위를 출력한다. 이때 나의 승인은 입출력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그런데 승인에 관한 레러의 기능주의적 견해는 승인된 p의 내용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즉 승인된 명제의 내용은 입출력과의 관계로만은 온전히 규정되지 않는다. 앞서의 예시에서 S가 승인한 명제는 “초인종이 울리고 있다”이지만, “초인종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다”나 “빨간 초인종이 울리고 있다”도 같은 입출력을 갖는 듯하다. 그러나 뒤의 두 명제는 앞의 명제와 명확히 다르다. 이 점에서 기능주의적 승인 개념은 승인의 내적이고 질적인 특성을 무시한다.
이 반론은 앞서 승인이 믿음의 부분집합이라는 레러의 주장에도 타격을 입힌다. 입출력 관계를 통해 승인을 온전히 규정하지 못한다면 믿음이 아닌 승인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위의 예시에서 내가 믿는 것은 “초인종이 울리고 있다”이고 “초인종이 시끄럽게 울린다”가 아니지만, 뒤의 명제도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므로 나는 뒤의 명제를 믿지 않으면서도 승인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5)
- 경쟁 주장을 물리침으로서의 정합성
레러에 의하면, 정합성이란 믿음과 승인체계 사이의 관계이다. 승인체계는 주체 S가 승인하는 모든 명제들의 집합이다. 레러는 “S가 t에 p를 승인한다”라느 형식을 띤 모든 참인 명제들의 집합이 시점 t에서 S의 승인체계라고 정의한다.
레러의 정합성 분석은 다음의 두 가지 필요조건을 포함한다. 첫째, p에 대한 승인은 p가 p와 경쟁하는 모든 명제들을 이길 때에만 승인체계와 정합적이다. 둘째, p에 대한 승인이 신뢰할 만한 출처(trustworthy source)에 근거하고 있음을 승인할 때에만 p에 대한 승인은 승인체계와 정합적이다. 이 절에서는 그 중 첫 번째 조건을 검토한다.
여러 명제들 중 어떤 명제를 승인해야 할지 숙고할 때 명제들은 서로 승인되기 위해 경쟁하는 경쟁자들이다. 그리고 승인할 명제를 결정했을 때 그 명제는 경쟁 주장을 물리친 것이다. 어떤 명제를 승인할지 고려할 때 관건이 되는 것은 어떤 명제가 승인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무엇을 승인하는 것이 합리적인지이다. 레러에 의하면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주체의 승인체계이다. 예를 들어 내가 고양이를 보고 다음 두 개 명제 중 무엇을 승인할지 고민한다고 하자.
(1) 나는 고양이를 보고 있다.
(2) 나는 고양이에 대한 환각을 보고 있다.
두 명제는 서로 경쟁하는 주장이다. 그리고 둘 중 무엇을 승인하는 것이 합리적인지는 나의 승인체계가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내가
(3) 내 시력은 정상이다.
(4) 나는 어떠한 환각 물질도 복용하지 않았다.
를 승인한다면, (1)을 승인하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5) 나는 한 시간 전에 환각 물질을 복용했다.
(6) 나는 눈이 좋지 않으며, 우리 집에는 고양이가 없다.
를 승인한다면, (2)를 승인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이처럼 레러에 의하면, 어떤 명제가 승인체계가 정합적이기 위해서는 다른 경쟁 명제들을 물리쳐야 한다.
- 신뢰성(trustworthiness)
앞서 (3)과 (4)를 승인할 때 (1)은 (2)를 물리칠 수 있다고 했는데, 어째서 그러한가? 그 이유는 (3)과 (4)를 승인할 때 나는 사실상 나의 지각이 신뢰할 만한 출처라고 승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나는 또 다른 명제인
(7) 현재 상황에서 나는 내 지각을 신뢰할 수 있다.
를 승인하고 있다. (3)과 (4)는 나로 하여금 지각에 기초를 둔 승인들이 참이라는 점을 승인하게 한다. 또 그러한 승인의 명시적인 표현인 (7)은 이러저러한 조건 c 아래에서 p를 승인하는 일을 보증하는 명제이다. 이 보증은 해당 상황에서 p에 대한 승인의 근거가 되는 출처가 신뢰할 만하다는 점을 인지함으로써 이루어진다. (7)을 승인할 때 나는 단순히 인식 대상의 수준이 아니라 대상 인식의 조건을 반성하고 평가하는 수준으로 상승한다. 이 점에서 신뢰성 요건은 다른 말로 수준 상승 요건(requirement of level ascent)이라고 부를 수 있다.
수준 상승 요건은 정합론에 대한 한 반론에 응답으로 제시되었다. 어떤 믿음은 정당화되기 위해 승인체계와 꼭 정합적일 필요는 없으며 지각 경험만으로 충분하다는 반론에 대해, 레러는 수준 상승을 강조한다. 지각 믿음이라도 그 자체로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고차 수준의 명제를 반드시 포함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레러에 의하면 S의 승인 p가 정당화된다는 것은 p가 S의 승인체계와 정합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p가 승인체계와 정합적이기 위해서는 (1) p가 모든 경쟁 주장을 물리쳐야 하면 (2) S의 승인체계가 p를 승인하는 출처가 신뢰할 만하다는 명제를 하나 이상 포함해야 한다.
- 수준 상승, 승인, 믿음
레러는 수준 상승이 정합성에 본질적인 요소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주장과 관련하여 우리는 5장에서 현대 토대론에 제기했던 것과 비슷한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감각 경험에 대한 믿음이 아닌 실재 대상에 관한 믿음을 형성하듯, 우리는 고차 수준의 승인을 형성하지 않은 채 지각 믿음을 승인한다. “현재 상황에서 내 지각 능력은 신뢰할 만하다”와 같은 명제는 이 반론에 따르면 수준 상승을 이해할 만한 철학적 훈련을 받지 않았다면 승인하기 힘들다. 결국 레러가 수준 상승을 정합성의 필요조건으로 간주한다면,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정당화된 믿음을 형성하지 못한다고 말해야 한다. 수준 상승 요건은 지나치게 강한 조건이라는 것이다.
이 반론에 대해 가능한 대답은, 정합성이 수준 상승에 관한 믿음이 아니라 승인만을 요구할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7)을 믿지는 않더라도 우리가 일상에서 지각 믿음을 형성하고 그로부터 추론하고 행위하는 방식으로 미루어본다면 우리는 (7)을 실질적으로 승인하고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는가? 승인이 입출력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함수라는 점을 떠올려본다면 이 응답을 이해할 수 있다. 첫째 경쟁 주장 요건과 관련한 레러의 주장을 고려할 때 이 응답은 레러의 입장에서 충분히 제시 가능한 종류의 것이다. 인식주체가 자신의 시력이나 환각 물질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아서 (3)과 (4)를 믿지 않는다면, 그가 (1)을 승인하는 것은 정당화되지 않는가? 레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해당 주체의 승인체계가 (3)과 (4)를 함축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2)가 아닌 (1)을 승인하는 것이 정당화되기 위해 주체는 (3)과 (4)가 참인 것처럼 추론하고 행위해야 한다. 즉 (3)과 (4)를 (기능주의적인 의미에서) 승인해야 한다. 수준 상승 요건인 (7)에 대해서도 레러는 같은 주장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레러의 이 응답은 앞서 논의된 승인과 믿음의 관계에 어긋난다. 레러는 승인이 믿음의 부분집합이라고 말했지만, 앞 문단의 반론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아닌 승인이 존재한다고 말해야 한다.6)
- 레러 정합론과 토대론 비교
레러 정합론의 정당화 요건은 다음과 같다.
(JL) S의 승인 A는 정당화된다 ↔ (i) S의 승인체계에서 A의 모든 경쟁 주장이 물리쳐진다. (ii) S는 A가 산출되는 조건 아래에서 자신이 신뢰할 만한 정보의 출처임을 승인한다.
JL은 기초믿음의 존재를 배격하지 않는다. 앞서 토대론에 의하면 기초믿음은 다른 믿음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으면서 정당화되는 믿음이다. 앞서 레러는 당초 자신의 주장과 달리 승인을 믿음과 별개의 것으로 구분했었고, 레러 이론에 가해진 반론을 고려한다면 양자를 구분하는 것에는 좋은 이유가 있다. 이처럼 믿음이 다른 믿음이 아닌 승인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JL은 기초믿음과 양립 가능한 조건이다.
레러의 이론은 토대론과 양립 가능할 뿐만 아니라 토대론과 유사하게 보인다. 토대론의 입장에서 S의 믿음 p는 (1) S가 p의 정당성을 파기하는 어떤 증거도 지니고 있지 않고 (2) S가 자신의 믿음이 신빙성 있는 과정에 의해 산출되었다고 믿을 증거를 지니고 있을 때에만 기초믿음이다. (1)과 (2)는 각각 레러의 경쟁 주장 요건 및 수준 상승 요건과 대략 부합한다.7)
그러나 토대론의 기초믿음 조건은 레러의 정합론과 두 가지 점에서 다르다. (1)은 (i)과 달리 믿음을 주체의 믿음체계에 부정적, 소극적인 방식으로 의존하게 한다. 즉 믿음체계는 경쟁 주장을 물리친다기보다는 해당 믿음을 물리칠 요인을 지니지 않아야 한다. 또 (2)는 (ii)와 같은 상위 승인이 아니라 상위 믿음에 대한 증거를 요구한다. “따라서 레러와 토대론자들 사이의 논쟁은 정당화 구조에 관한 조화될 수 없는 직관들 사이의 갈등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두 조건의 기초를 이루는 직관들을 어떻게 해야 가장 잘 포착하는가에 관한 논쟁으로 간주할 수 있다.”(Steup, 2006: 265)
- 로렌스 본주어: 메타정당화(metajustification)로서의 정합성
본주어 또한 정합론자이지만, 그는 레러와 달리 정합성을 실제 믿음들 사이의 관계로 이해한다. 이는 인식적 책임에 대한 본주어의 입장 때문이다. 그에 앞서 일단 정합성에 관한 본주어의 입장을 살펴보자.
본주어에 의하면 믿음 B가 정합적이기 위해서는 B를 정당화하는 논증을 구성할 다른 두 개의 명제를 주체가 믿고 있어야 한다. 내가 B의 참에 대한 논거 또는 논증을 갖고 있다면 그리고 오직 그때에만 B는 나의 배경 믿음들과 정합적이다. 이 논증의 형식은 다음과 같다.
(1) B는 특징 F를 지닌다.
(2) 특징 F를 지닌 믿음은 매우 참일 법하다.
∴ (3) B는 매우 참일 법하다.
이 논증의 두 전제 (1)과 (2)는 대상적 믿음이 아니라 믿음에 관한 고차 믿음이다. 따라서 본주어도 레러와 같이 수준 상승을 정합성의 조건으로 주장한다. 나아가 본주어는 레러와 달리 고차 명제를 실제로 인식 주체가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B에 대한 정당성을 주체가 인식적으로 점유하고 있어야 한다.
- 본주어 식 정당성과 인식적 책임
본주어가 고차 믿음을 주체가 믿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식적 책임 때문이다. 주체가 자신의 믿음 B에 인식적 책임을 지니기 위해서는 B의 정당성을 인지적으로 점유하거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때 정당성을 “인지적으로 점유”한다거나 “파악”하고 있음이 무슨 뜻인지가 문제가 된다. 여기서 이 표현에 대한 관대한 해석과 엄밀한 해석을 구별할 수 있는데, 먼저 관대한 해석에 의하면 내가 내 믿음의 인식적 신뢰성을 반성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정당성을 파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엄밀한 해석에 따르면 정당성에 대한 인지적 점유는 믿음의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 본주어는 둘 중 엄밀한 해석을 취한다.
믿음의 정당성이 주체에게 인지되는 것을 정당화의 요건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본주어는 내재주의자이다. 그런데 내재주의를 주장하기 위해 본주어의 엄밀한 해석에 반드시 동의할 필요는 없다. 주체에게 반성되는 믿음의 정당화의 출처가 꼭 믿음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정당성에 대해 강한 조건을 설정하는 본주어의 믿음주의(doxasticism)는 오히려 약점으로 작용한다.
- 본주어 식 수준 상승
B가 어떻게 고차 믿음으로 구성된 논증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내가 책상 위를 보고
(B) 책상 위에 붉은 책이 있다.
를 믿는다고 하자. 본주어는 B에 대한 정당화 논거가 다음의 두 가지 믿음이라고 말한다. 첫째 논거 믿음은 B가 어떤 종류의 믿음인지를 파악하는 믿음이다. 우리는 B에 관해 세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B는 비추론적인 믿음이다. 즉 B는 추론을 통해 얻어진 믿음이 아니라 나에게 떠오른 것이다. 본주어는 이런 믿음을 “인지적으로 자발적인 믿음”이라고 부른다. 둘째, B는 색깔과 적당한 크기의 대상을 일반적으로 분류하는 믿음이다. 본주어는 이런 믿음을 종류 K에 속하는 믿음이라고 규정한다. 셋째, 이 믿음을 형성할 때 내 눈은 정상이었으며 조명에도 이상이 없었다. 즉 이 믿음은 표준적인 관찰 조건 하에서 형성되었다. 이 세 가지를 종합해서 우리는 첫째 전제를 구성할 수 있다.
(P1) 나는 조건들 c 아래서 종류 K에 속하면서 인지적으로 자발적인 믿음 B를 갖고 있다.
둘째 논거는 특정 종류의 믿음에 관한 신뢰성을 나타내는 고차 믿음이다.
(P2) 조건들 c 아래서 종류 K에 속하면서 인지적으로 자발적인 믿음은 매우 참일 법하다.
이 두 가지 전제로부터 우리는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C) B는 매우 참일 법하다.
C의 전제인 P1과 P2는 대상적 믿음에서 상승한 고차 믿음이므로, 본주어의 믿음 정당화는 반드시 수준 상승을 동반한다.
- 수준 상승과 회의주의
본주어의 정합론은 레러의 정합론과 비슷한 반론에 맞닥뜨린다. 본주어가 제시한 논증의 전제들은 철학적으로 훈련받은 사람만이 형성할 수 있는 믿음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일상에서 저런 유의 믿음을 전혀 믿지 않으며, 그렇게 복잡한 논증을 구성하지도 않는다. 결국 평범한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8)
이 반론은 본주어의 정합성 개념의 층위로 확장될 수 있다. 앞선 본주어의 논증은 믿음의 정합성을 증명하는 논증이므로, 본주어에 의하면 믿음은 인식주체가 그 믿음이 다른 믿음들과 정합적이라고 믿을 때에만 정당화된다. 그러나 일반인은 그러한 정합성 개념을 잘 모른다. 따라서 평범한 사람은 정당화된 믿음을 지닐 수 없다는 회의주의적 귀결에 이르게 된다. 본주어는 일반인이 정합성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반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보통 사람들도 일정 정도로는 정합성에 대한 관념을 대략이나마 이해하고 직관적으로 정합성 없는 믿음을 거부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본주어가 전개한 것과 같은 복잡한 정당화 논증을 구성할 만한 고차 믿음을 형성하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본주어는 전문적인 철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마저도 본주어 식 정합성 요건에 대해 명료하게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래서 그는 이상적 정당화와 근사적 정당화를 구분한다. 현실적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상적으로 정당화된 믿음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근사적 정당성과 관련하여 본주어는 그러한 회의주의를 거부한다. 애초에 그의 정합론은 회의주의에 대한 논박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본주어 식의 논거 믿음을 형성하지 않으며, 그렇다면 이상적 정당화에 근사한 정당성을 이들의 믿음이 지니는지도 의문스럽다. 결론적으로 본주어의 믿음주의는 인식론적 회의주의를 피해가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9)
- 고립 반론(isolation objection)
고립 반론은 정합론에 가해지는 대표적인 반론이다. 고립 반론은 정합론이 믿음체계와 세계와의 관계를 고려하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믿음체계를 세계로부터 유리시킨다는 비판이다. 소사(E. Sosa)에 의하면 고립 반론은 대안 체계(alternative systems) 반론과 실재로부터의 분리(detachment from reality) 반론이라는 두 가지 형태를 띤다. 전자는 하나의 세계에 대해 여러 체계가 가능하다는 주장이고, 후자는 하나의 체계에 대해 여러 세계가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두 반론 모두 정합론이 세계가 믿음체계의 정당화에 미치는 영향을 간과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한 사람이 땅돼지 두 마리를 보는 세계 W를 가정하자. 그는 땅돼지를 보고
(1) 여기에 땅돼지 두 마리가 있다.
라는 믿음을 형성하며, 이 믿음은 그의 믿음체계 S와 정합적이다. 한편 그가 땅돼지 세 마리를 보는 세계 W′를 가정하자. 정합론에 의하면, S가 W와 W′에서 모두 정합적이라고 했을 때 (1)을 믿는 일은 두 세계에서 모두 정당화된다. 그러나 땅돼지 세 마리를 보면서 (1)을 믿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귀결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처럼 정합론은 세계의 변화에 따른 믿음체계의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분리 반론이다.
정합론자는 이 반론에 다음처럼 대응할 수 있다. W′에서 인식자가 받아들인 지각 경험은 인식자로 하여금
(2) 여기에 땅돼지 세 마리가 있다.
를 믿도록 만들 것이다. 즉 W와 달리 W′는 (1)과 양립 불가능한 믿음을 형성시킴으로써 믿음체계를 수정하도록 강제할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정합론자는 정합론이 세계의 변화에 따른 믿음체계의 변화를 잘 설명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정합론의 비판자는 정합론이 믿음체계와 세계 사이의 연결을 고려하고 있다고 인정해야겠지만, 양자의 연결 관계가 충분히 구체적이지 않아 둘의 관계를 미결정적인(indeterminate) 상태로 남겨둔다고 응수할 수 있다. W′에서 인식자가 (1)과 양립 불가능한 믿음을 반드시 형성하리라는 보장이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정합론은 지각 경험으로부터의 믿음 형성 과정을 여하한 정당화 조건으로 채택하지 않으므로, W′의 사람이 지각 경험으로부터 (1)과 양립 불가능한 믿음을 형성해야 한다는 점을 요건으로 채택하기는 어려워 보인다.10)
대안 체계 반론은 다음처럼 진행된다. W에 인식자가 두 명 있다고 하자. 한 명은 믿음체계 S를 가지고 (1)을 믿지만, 다른 사람은 같은 지각경험을 하고서 (2)를 믿는다고 해보자. (2)는 그의 믿음체계 S′와 정합적이다.11) 그렇다면 정합론자는 S′를 믿는 사람이 (2)를 믿는 것이 정당화된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비합리적인 귀결이다. 정합론자는 다시 W의 지각 경험이 (2)와 양립 불가능한 믿음을 산출할 것이라고 응수할 테지만, 그 지각 경험이 반드시 (2)가 아니라 (1)을 산출할 것이라고 보장할 수는 없다. 정합론은 신빙성 있는 비믿음적 정당화 원천을 이정하지 않기 때문에, 지각 경험과 믿음 사이에 적절한 관계 조건을 설정함으로써 이 비판에 대응할 수는 없다.
본주어는 고립 반론이 그가 제시한 표준적인 “관찰 요건”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고 본다. 관찰 요건은 세계로부터 믿음체계로의 관찰적 입력을 규정하는 요건이다. 정합론에 관찰 요건을 추가함으로써 세계와 믿음체계 사이의 연결 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본주어는 주장한다. 그러나 본주어의 관찰 요건이 지각 경험으로부터 믿음으로의 연결을 충분히 결정적인(determinate) 상태로 보증하는지는 의심스럽다. 정합론의 비판자는 믿음의 정당성이 다른 믿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지각 경험에 의해서만 파훼되는 사례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본주어는 엄밀한 믿음주의에 의해 그러한 사례가 믿음의 정당성을 훼손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즉 땅돼지 세 마리를 지각하면서 (1)을 믿는 것이 정당화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정말 그럴듯한 답변인지는 의문스럽다.
레러는 본주어와 비슷하게 다음처럼 응답할 수 있다. 세계 내의 변화는 지각 경험을 통해 승인체계에 영향을 줄 것이다. 따라서 W에서 W′로의 변화가 일어난다면 (1)은 (2)와 같은 경쟁 주장을 더 이상 물리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W에서 S′를 바탕으로 (2)를 믿는 사람이 존재할 가능성을 레러 정합론은 완전히 부정할 수 없다. 레러 또한 본주어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사례가 믿음의 정당성을 훼손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이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고립 반론을 둘러싼 이 문제는 비믿음적인 정당화가 존재하는가, 비믿음적인 경험이 인식적 의의를 지니는가, 지닌다면 어떤 의의를 지니는가의 물음을 기저에 두고 있다. 토대론과 정합론이 격돌하는 쟁점 또한 이 물음이다.
1)슈토이프는 믿음체계의 필함 관계가 체계의 정합성에 기여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슈토이프의 말을 그대로 따르자면 논리적으로 서로를 함축하면서도 정합적이지 않은 체계가 있다고 말해야 하는데, 이는 다소 어폐가 있는 듯하다. 슈토이프가 예시로 든 믿음체계는 비합리적이고 정당화될 수 없을지언정 ‘정합성’은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는가? 따라서 논리적으로 서로를 필함하면서도 정합적이지 않은 체계가 있다고 말하기보다는, 믿음체계가 강한 의미에서 정합적이라고 하더라도 곧바로 그 믿음체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편이 나아 보인다.
2)슈토이프 자신은 소개하고 있지 않치만, 필함 관계가 정합성의 정의가 되기에 부적절한 또 하나의 주된 이유는 필함 관계가 지나치게 좁은 의미의 정합성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믿음들이 서로를 필함하지 않더라도 정합적으로 보이는 믿음체계들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예컨대 화학 이론, 생물학 이론 등의 믿음체계는 그 구성요소들이 상호 논리적으로 연역되는 체계가 아니지만 정합적이고 정당화되는 체계로 생각된다.
3)이는 지나치게 강한 주장이 아닌가 싶다. 슈토이프는 모순을 내포하는 믿음체계에 대해서도 인식주체가 모순을 깨닫지 못한다면 정합적이라고 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식이라면 정신병에 걸린 사람들이 지니는 비논리적이고 모순에 가득 찬 믿음체계들도 이들이 자기의 증상을 자각하기 전까지는 정합적이며 정당화된다고 주장해야 하지 않는가?
4)“기능주의”라고 번역이 되지만, 여기에서의 “function”은 “함수”로 새기는 것이 보다 쉽게 이해될 수 있다.
5)슈토이프의 반론은 레러의 기능주의를 공박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초인종이 울리고 있다”와 “초인종이 시끄럽게 굴리고 있다”는 해당 상황에서는 동일한 입출력을 지니겠지만, 우리는 다른 상황에서 양자가 같은 입력값을 지니고도 다른 값을 출력한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 예컨대 누군가 “당신은 저 초인종 소리가 시끄럽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전자를 승인한 사람은 ”아니오“라고 답할 수도 있는 반면 후자를 승인한 사람의 답은 ”예“임에 틀림없다. 애초에 모든 입력값에 대한 출력값이 같은 것이 아니라면, 한두 개의 입력값에 대한 출력값이 일치한다고 해서 양자를 동일한 함수(function)라고, 즉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모든 상황에서’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면서도 질적으로 다른 명제들을 제시하지 않는 이상 레러의 기능주의는 슈토이프의 반론에 의해서 반박되기 어렵다.
6)이 절에서 레러에게 제시된 비판은 다소 설득력 있는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문제는 레러가 믿음의 정당화에 관해 과도한 내재주의적 조건을 부과한다는 데 있다. 명제에 대한 승인을 정당화하기 위해 주체가 가능한 모든 경쟁 주장을 물리칠 만한 근거들을 고려해야 하고 자신의 인식 능력의 신뢰성에 대해서도 항상 반성하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강하다.
그리고 비판에 대한 레러의 응답 또한 불만족스럽다. 레러의 패착은 정당화 조건을 완화하기 위해 승인 개념을 끌어왔다는 데에 있다. 승인은 애초에 믿음의 부분집합으로 규정되었으므로 믿음보다 약한 조건일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조건을 다른 방식으로 완화함으로써 비판에 대응할 수 있다. 인식 주체는 (1)과 같은 지각 믿음을 정당하게 믿기 위해 경쟁 주장과 고차 명제를 매 순간 반드시 의식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지각 믿음은 지각적 상태로부터 형성된 시점에서 이미 정당화된 믿음이다. 해당 믿음을 정당화하는 것은, 믿음의 정당성이 도전받았을 경우에 그 도전에 맞서 경쟁 주장을 물리칠 만한 명제들과 자신의 인식 능력의 신뢰성을 정당성의 이유로 내세울 수 있는 능력에 있다. 레러가 제시했던 정당화 요건은 매번 믿음을 형성할 때마다 능동적, 적극적인 의미에서 충족될 필요가 없다. 믿음의 정당성이 딱히 문제시되지 않는 상황에서 믿음은 기본적으로 정당화된다(justified by default)고 간주할 수 있다. 실제로 경쟁 주장을 물리치고 자신의 인식 능력의 멀쩡함을 반성하는 일이 필요한 경우는 정당성이 도전받는(challenged) 상황뿐이다. 내 인식 능력과 믿음을 의심할 구체적인 이유가 주어지지 않는 이상, 내가 인식한 명제는 기본적으로, 다시 말해 수동적, 소극적인 의미에서 정당화된다. 구체적인 이유가 없는데도 명제를 믿는 매 순간 정당화를 요구하는 것은 “초월적 불안”(transcendental anxiety) 내지 “오류 가능성에 대한 종래 철학의 그릇된 관념”을 반영한다. (물론 이런 식으로 응수한다면 이 ‘정합론’은 토대론과 매우 가까워질 것이다.)
셀라스에 대한 버지(T. Burge)의 비판과 그에 대한 맥도웰의 응답이 이와 비슷한 취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Burge, T., “Perceptual Entitlement”, Philosophy and Phenomenological Research, vol. 67, no. 3, 2003, 503-548; McDowell, J., Perception as a Capacity for Knowledge, Milwaukee, Wisconsin: Marquette University Press, 2011 참조.
7)이는 5장 중에서도 추정적 신빙성 조건을 첨가한 형태의 토대론인 것으로 생각된다.
8)본주어 정합론의 문제 역시 레러와 마찬가지로 정당화에 과도한 내재주의적 조건을 설정한다는 데에 있다. 이는 “과도한 지성주의”에 대한 버지(2003)의 비판이 겨냥하는 유의 견해이다.
9)본주어 정합론의 목적이 정말로 회의주의의 극복에 있었다면, 애초에 이상적 정당성과 근사적 정당성에 대한 구별을 해서는 안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구분은 정당화 규준이 매우 달성하기 어려운 이상적인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충족하지 못한다는 발상을 내포하는데, 사실상 이는 곧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정당화된 믿음을 지니지 못한다는 뜻이 아닌가?
10)이 문장은 정합론에 대한 추가비판을 최대한 설득력 있게 구성하기 위해 임의로 추가한 내용이다. 슈토이프 자신은 W′에서 인식자에게 (1)과 양립 불가능한 모든 믿음 형성 과정을 방해하는 “지각 중화제”를 발사하는 미친 과학자를 도입하는데, 이것은 제대로 된 분리 반론으로 간주하기 힘들다고 보인다. W′에 도입된 미친 과학자와 지각 중화제는 세계로부터 믿음체계에로 가해지는 또 다른 자극이다. 반론을 이런 방식으로 전개한다면 정합론자는 내재주의적 관점에서 인식자에게 (1)을 믿는 것이 의무론적으로 정당하다고, 즉 추정적 신빙성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1)믿음체계 S′는 반론을 설득력 있게 구성하기 위해 임의로 추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