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인식론 입문』, 5장 「토대론」 요약

  • 기초믿음

기본적으로 토대론은 믿음체계의 정당화 구조에 관해 두 가지 입장을 승인한다. 첫째, 믿음들은 기초믿음과 비(非)기초믿음으로 구분된다. 둘째, 비기초믿음의 정당성은 기초믿음의 정당성에 의존한다. 토대론자들은 모두 이 두 가지 진술을 승인하지만, 기초믿음이 무엇이고 기초믿음과 비기초믿음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입장이 다양하게 갈린다. 판이한 입장들 중 모두가 동의하는 대표적인 형태의 토대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장에서는 일단 세 가지 다른 형태의 토대론을 살펴본다.

기초믿음은 세 가지 특성을 지닌다. 첫째, 기초믿음은 비추론적 믿음이다. 이는 기초믿음이 다른 믿음으로부터 추론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눈으로 보거나 소리를 들어서 형성된 믿음은 다른 믿음으로부터 추론되지 않은 비추론적 믿음이다. 둘째, 기초믿음은 스스로 정당화되는 믿음이다. 기초믿음은 비기초믿음의 정당성을 보증하기 위해 그 스스로 정당한 믿음이어야 한다. 셋째, 기초믿음은 비믿음적으로(nondoxastically) 정당화되는 믿음이다. 기초 믿음은 다른 믿음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고 믿음이 아닌 다른 요인에 의해 정당화된다.

여기서 셋째 특성은 앞의 두 가지 특성을 모두 함의한다. 즉 비믿음적으로 정당화되는 믿음이란 비추론적이면서 스스로 정당화되는 믿음이다. 이러한 비기초믿음이 성립한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비믿음적 정당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해야 한다. 토대론자는 직관적으로 자명한 공리적 믿음들, 지각 경험이나 내성에 의해 형성된 믿음들을 비믿음적으로 정당화되는 믿음들의 예시로 든다.

  • 토대론 정의

이제 토대론의 핵심 주장을 다음처럼 정의할 수 있다.

(1) 우리의 믿음 중 많은 믿음이 기초믿음이다.
(2) 모든 정당화된 추론적 믿음은 그 정당성을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기초믿음으로부터 제공받는다.

기본적으로 토대론은 인식적 정당성에 관한 분석이 아니라 믿음체계의 구조에 관한 이론이다. 2장에서 보았듯 인식적 정당성에 관한 분석은 인식적 정당성이라는 평가적 속성이 수반되는 비평가적 속성들을 밝히는 작업이다. 위의 토대론의 두 가지 주장은 그러한 속성에 대해 아무것도 밝혀주는 바가 없다. 그러나 (1)과 (2)를 함축하는 토대론적 분석이 존재한다. 정당성에 관한 토대론적 분석은 다음의 형식을 지닌다.

S가 p를 믿는 것은 정당화된다 ↔ p는 속성 F를 지니거나, F를 지니는 S의 믿음 중 하나 이상과 관계 R을 맺는다.

이 형식은 필요충분조건을 이루는 적절한 속성 F와 관계 R을 대입할 때 실질적인 분석이 된다. 이때 토대론은 속성 F를 지니는 믿음, 그리고 F인 믿음과 R인 관계에 있는 믿음이 정당화되는 믿음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전자는 기초믿음이고 후자는 비기초믿음이다.

  • 토대론적 분석 표본

F를 의심불가능성으로, R을 필함(entailment) 관계로 두자. 어떤 믿음이 의심불가능하다면, 그 믿음의 참을 의심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비합리적이다. 또 믿음 B1이 B2를 필함한다면, B1이 참이면서 B2이 거짓일 수 없다. 이를 ‘의심불가능성 토대론’이라 부르자.

S가 p를 믿는 것은 정당화된다 ↔ p가 의심불가능하거나, 하나 이상의 의심불가능한 믿음에 필함된다.

그러나 이 분석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의심불가능하거나 의심불가능한 믿음에 필함되는 믿음이 아니면서도 정당화되는 믿음을 얼마든지 생각해낼 수 있다. 내가 어제 저녁으로 라면을 먹었다는 믿음은 의심불가능하거나 의심불가능한 믿음에 필함되지 않지만 정당화된다.

  • 후퇴 논증

토대론의 핵심은 다른 믿음이 아닌 자기에 의해 정당화되는 기초믿음에 관한 주장에 있다. 토대론자는 무슨 근거로 이런 기초믿음들이 있다고 주장하는가? 토대론자는 무한 퇴행 논증을 통해 기초 믿음의 존재를 주장한다. 무한 퇴행에 근거한 기초믿음 옹호 논증은 다음처럼 개진된다.

정당화되는 믿음이 존재한다고 전제하고, 이 믿음을 B1이라 하자. 이제 기초믿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B1은 비기초믿음이므로 B1을 정당화하는 다른 믿음 B2를 전제한다. 그런데 B2도 비기초믿음이므로 B2를 정당화하는 다른 믿음 B3를 전제한다. 이런 식으로 B1을 정당화하는 모든 근거 믿음은 다시 자기가 정당화되기 위해 다른 믿음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B1을 정당화할 수 없다. 따라서 정당화되는 믿음이 존재한다면 기초믿음도 존재한다.

이 퇴행 논증에 비추어봤을 때 기초믿음은 정당화와 관련하여 퇴행 종결자(regress terminator) 역할을 한다. 퇴행을 종결하기 위해 기초믿음은 다른 믿음에 의존하지 않은 채 스스로 정당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퇴행 논증과 관련하여 두 가지 주의점이 있다. 첫째, 토대론은 모든 기초믿음이 퇴행 종결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기초믿음으로부터 굳이 다른 여러 믿음을 도출하지 않더라도 기초믿음을 지닐 수 있다. 둘째, 토대론은 비기초믿음의 정당화 퇴행이 언제나 선형적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여러 개의 비기초믿음이 하나의 기초믿음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도 가능하고, 하나의 비기초믿음이 여러 개의 기초믿음에 의해 정당화되는 경우도 가능하다.

  • 후퇴 문제와 회의주의

우리는 무한 퇴행 문제와 여러 가지 퇴행 논증들을 구별해야 한다. 무한 퇴행은 정당화 근거나 기준 등이 무한히 후퇴하는 문제이다. 반면 퇴행 논증들은 무한 퇴행을 피하거나 해결하기 위한 대답들이다. 이를테면 앞서 다룬 기초믿음 논증은 무한 퇴행을 피하기 위해 기초믿음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 토대론 논증만이 퇴행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아니다. 회의주의자는 앞선 토대론자의 논증에서 전제들과 무한퇴행에 관한 논변을 모두 승인하면서 기초믿음의 존재를 도출하는 결론을 거부할 수 있다. 즉 정당화되는 믿음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퇴행을 해결할 수 있다. 상기의 토대론 논증의 결론이 조건문이라는 점에 주목하자. 회의주의자는 여기서 정당화되는 기초믿음 개념이 의심스러움을 지적하고 초두의 전제인 정당화되는 믿음(B1)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퇴행을 해결할 것이다.

  • 후퇴 문제와 정합론

토대론자와 회의주의자는 기초믿음이 없을 경우 정당화 논거가 무한 퇴행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반면 정합론자는 이 점을 거부하고 기초믿음이 없더라도 무한퇴행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앞서의 논증에서 B3이 B1에 의해 정당화된다고 말한다면 퇴행은 무한히 많은 믿음을 요청하지 않은 채 순환할 것이다. 토대론자는 이러한 순환 역시 믿음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어떤 정합론자들은 순환 연쇄가 충분히 크고 내용이 풍부하다면 믿음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본다.

또 정합론자는 선형적 정당화 개념에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무한 퇴행을 거부할 수 있다. 무한 퇴행 논증은 B1의 정당화 근거를 B2에서 찾고, 다시 B2의 정당화 근거를 B3에서 찾는 식으로 정당화가 선형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암암리에 전제한다. 그러나 전체론적 정당화 모형에 따르면 정당화는 개별 믿음들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믿음과 믿음체계 사이에서 성립하는 관계이다. 믿음의 정당성은 하나 또는 소수의 특정한 믿음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이 속한 믿음체계의 정합성에 의해 획득된다. 따라서 B1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일련의 무한한 믿음들의 선형적 연쇄가 아니라 정합적인 믿음체계만 전제하면 된다.

  • 무한 후퇴가 실제로 불가능한가?

무한 퇴행 논증은 믿음의 정당화 근거가 무한히 후퇴한다면 그 믿음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가정을 뒷받침하는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인간의 정신은 유한하기 때문에 무한히 많은 믿음을 형성할 수 없다. 둘째, 논거의 무한 퇴행을 통해서는 믿음의 정당화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첫째 이유는 무한 퇴행의 심리적 가능성, 둘째 이유는 논리적 가능성의 문제와 연관된다.

소사(E. Sosa)는 무한 퇴행이 생각처럼 손쉽게 파기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B1) 적어도 한 개의 짝수가 있다.
(B2) 적어도 두 개의 짝수가 있다.
(B3) 적어도 세 개의 짝수가 있다.
...
(Bn) 적어도 n개의 짝수가 있다.

위처럼 진행되는 믿음의 무한한 연쇄를 우리는 믿을 수 있다. 임의의 자연수 n에 대해 Bn을 믿는다면 우리는 무한히 많은 믿음들을 믿는 것이 아닌가? 이 점에서 무한히 많은 믿음을 믿는 일이 가능하다고 소사는 말한다.

그러나 이는 원리상 무한히 많은 믿음에 대해 믿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지, 실제로 의식 속에서 무한히 많은 믿음을 형성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디(R. Audi)는 우리가 무한수의 믿음을 형성하려 하더라도 정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면 더 이상 믿음을 형성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Bn에서 n이 너무 큰 수라면 n의 표기가 미처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길어질 것이다. 앞부분부터 차례로 기억하려고 시도하더라도 뒷부분을 기억할 때쯤 앞부분을 잊어버릴 것이다. 결국 우리는 심리적 한계 때문에 무한히 많은 믿음을 믿을 수 없다.

둘째로, 무한수의 믿음을 믿는 일이 심리적으로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무한한 믿음들의 연쇄에 의해 믿음을 정당화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한지가 문제가 된다. 무한 퇴행 속에서 B1은 정당화되기 위해 B2를 필요로 하고, B2는 다시 정당화되기 위해 B3를 필요로 한다. 이런 식으로 B1을 정당화하기 위해 계열 속에서 제시되는 모든 믿음은 다시 또 다른 믿음을 필요로 한다. 이는 어떤 믿음에서 퇴행이 끝나지 않는 한 B1이 정당화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 자기 정당화

전통적으로 기초믿음의 개념에는 인식적 특권의 지위가 부여되어 왔다. 인식적 특권으로는 보통 자기정당화, 확실성, 의심불가능성, 오류불가능성 등이 거론되어 왔다. 거론된 네 가지 속성들 중 기초 믿음에는 무엇이 부여되어야 할지가 앞으로 검토될 것이다.

레러(K, Lehrer)는 기초믿음의 특성으로 자기정당화를 제시한다. 즉 토대론을 특징 지우는 핵심 주장은 레러에 의하면 기초믿음이 자기정당화되는 믿음이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믿음이 자기정당화되는 일이 가능한가? “x가 y를 정당화한다”는 비재귀적 관계(irreflexive relation)이다. 비재귀적 관계는 x와 y에 동일한 항이 대입될 수 없는 관계이다. 예컨대 글은 스스로를 작성할 수 없고, 아버지는 자기 자신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 믿음이 자기를 정당화한다고 가정해보자. 그 믿음은 정당화되어 있거나 정당화되지 않았다. 만일 믿음이 정당화되어 있다면, 그 믿음은 이미 정당화되어 있으므로, 녹인 얼음을 다시 녹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 다시 정당화될 수 없다. 만일 믿음이 정당화되어 있지 않다면, 정당성이 없는 믿음은 어떤 믿음도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에 역시 정당화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자기정당화는 불가능하다.

한데 기초믿음은 반드시 자기정당화되는 믿음이어야 하는가? 레러에 의하면 기초믿음은 자기정당화되는 믿음이어야 하는데, 이는 불가능하므로 토대론은 틀린 입장이다. 그러나 기초믿음이 반드시 스스로 정당화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기초믿음이 비믿음적으로 정당화될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초믿음은 후퇴 종결자의 역할을 하기 위해 굳이 자기정당화될 필요가 없으며, 다른 ‘믿음’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기만 하면 된다. 그러므로 경험에 의해 정당화되는 믿음 등은 충분히 기초믿음의 조건을 만족한다.

  • 의심불가능성, 오류불가능성, 확실성

따라서 기초믿음을 비믿음적으로 정당화되는 믿음으로 정의하자. 이때 나머지 세 가지 속성들 역시 기초믿음의 특성일 필요가 없다. 다음은 정의에 부합하는 기초믿음의 예시이다.

(1) 이 대상은 붉다.

이 믿음은 다른 믿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각 경험에 의해 정당화되므로 기초믿음의 기능을 수행할 요건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의심불가능하지 않다. 예컨대 조명이 붉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1)을 의심할 상황은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 둘째로, 비슷한 이유에서 (1)은 오류가능하다. 붉은 조명 때문에 대상이 붉게 보일 뿐이며 사실 대상이 파란 것일 가능성이 있고, 이 점에서 (1)은 거짓일 수 있다. 셋째로, 어떤 믿음이 가능한 최고의 인식적 지위를 지닌다면(=최고 수준으로 정당화된다면) 그리고 오직 그때에만 그 믿음은 확실하다고 하자. (1)은 논파되지 않은 경험에 의해 정당화되지만 확실한 믿음은 아니다. (1)보다 높은 수준으로 정당화되는 믿음들(이를테면 “1+1=2”)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초믿음은 확실할 필요도 없다.

  • 기초믿음과 경험

그렇다면 기초믿음이 되는 일 즉 비믿음적으로 믿음이 정당화되는 일이 실제로 어떻게 가능한가? 그 방법 중 하나는 지각 경험을 통한 정당화이다. 어떤 대상이 붉게 보이는 경험을 통해 “이것은 붉다”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는 x가 F처럼 보임(x looks F)이라는 경험이 비믿음 수준에서 x가 F임(x is F)이라는 믿음을 정당화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F처럼 보임(looks-F)은 F임(is-F)이라고 믿는 일의 충분조건이 아니다. F처럼 보이지만 사실 F가 아닌 경우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앞서 (1)의 경우처럼 붉은 조명이 대상을 비추거나 안경의 렌즈가 붉은 색일 경우 대상은 붉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붉지 않다. 따라서 x가 F라고 믿는 것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F처럼 보이는 경험에 더해 추가적인 조건이 있어야 한다.

  • 기초믿음과 신빙성

이에 대한 대표적인 제안 중 하나는 신빙성 조건을 덧붙이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대상이 S에게 F처럼 보이고 S가 F인 사물들을 구별할 신빙성이 있다면 “이것은 F이다”는 정당화된다.

이 신빙론의 제안은 다음과 같은 반론에 부딪친다. 사실 S는 악신에게 완벽하게 속고 있어서, 실제 S의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데도 생생한 환상에 의해 F인 사물이 있다고 믿는다고 하자. 그렇다면 S는 F인 사물들을 구별할 신빙성이 없다. 그럼에도 S에게는 자신의 믿음을 의심할 어떤 증거도 없으므로 S의 믿음은 정당화된다. 다르게 말하면, 정상세계 W1에서의 경험 E1과 악신의 세계 W2에서의 경험 E2이 현상적으로 동일하다면, 정당화에 관해서도 양자는 같아야 한다. 우리는 W1에서 E1이 믿음을 정당화한다고 했으므로 E2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 기초믿음과 추정적 신빙성

악신의 세계 반론을 고려하더라도 신빙성 규준은 여전히 설득력 있어 보인다. 따라서 당초의 신빙론적 제안을 다음처럼 수정하자. x가 S에게 F처럼 보이고, S에게 자신이 F인 것들을 구별할 신빙성이 있다고 믿을 좋은 증거가 있다면, “x는 F이다”는 정당화된다.

앞 절에서 소개된 신빙성 조건이 사실적(de facto) 신빙성을 요구하는 외재주의적 신빙성 조건인 반면, 이 조건은 추정적(presumptive) 신빙성을 요구하는 내재주의적 신빙성 조건이다. 전자에서는 신빙성이 인식 주체에 의해 자각되지 않아도 상관없는 반면, 후자의 신빙성은 인식 주체가 증거를 통해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 신빙성이다.

그렇다면 인식 주체는 어떤 조건 하에서 그러한 증거를 갖는가? 예컨대 나는 키위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키위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다는 자기지식(self-knowledge)이 신빙성을 뒷받침할 증거가 된다. 한편 가오리와 홍어를 내가 구별할 수 없고 내가 이 점을 자각하고 있다면, 나는 가오리와 홍어를 분간할 신빙성의 증거를 갖지 못한 셈이다.

추정적 신빙성 조건은 외재주의적 신빙성 조건이 봉착하는 악신의 세계 문제에 맞닥뜨리지 않는다. 우리는 악신의 세계에서도 인식 주체가 여전히 추정적 신빙성은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추정적 신빙성 조건은 ~처럼 보임(looks)과 ~임(is) 사이의 간극을 잘 해결한다. 내가 F인 사물들을 잘 식별해내는 신빙성이 있다고 믿을 좋은 증거를 스스로 지니고 있다면, 나에게 어떤 사물이 F처럼 보일 때 “이것은 F이다”는 정당화된다.

  • 고전적 토대론

앞서 보았듯 정당화에 관한 토대론적 분석은 기초믿음의 특성, 그리고 기초믿음이 비기초믿음과 맺는 정당화 관계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그런데 토대론의 세부적 입장에 따라 그 설명은 각기 달라진다. 앞으로는 고전적 토대론, 강한 토대론(=현대 토대론), 최소 토대론의 설명을 살펴보도록 한다.

고전적 토대론에 의하면, 정당화는 믿음의 참을 반드시 보증해야만 한다. 따라서 기초 믿음은 오류불가능성을 지니고, 비기초믿음은 기초믿음으로부터 연역적으로 도출되어야 한다. 고전적 토대론의 대표적인 예는 데카르트의 『성찰』에서 볼 수 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나는 존재한다”와 같은 오류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명제들로부터 외부세계의 존재를 연역적으로 증명하고자 했다.

오늘날 고전적 토대론은 심각한 문제에 맞닥뜨려 옹호되기 어렵다고 간주되고 있다. 고전적 토대론의 기준에 따르면, “이 대상은 붉게 보인다”와 같은 현상적 믿음만이 견지될 수 있고 “이 대상은 붉다”와 같은 실재 물리적 대상에 관한 믿음은 오류가능하므로 거부되어야 한다. 이때 현상적 믿음은 오류불가능하다고 주장된다. 그러나 현상적 믿음이 정말로 오류불간으한가? 비판자들은 현상적 믿음 가운데서도 오류불가능한 믿음은 극히 소수라고 말한다. 만일 이들의 비판이 맞다면, 그러한 극소수의 믿음들이 어떻게 물리적 대상들에 관한 수많은 믿음들을 모두 정당화할 수 있는지 매우 의심스럽다.

설령 현상적 믿음 가운데 오류불가능한 믿음이 많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발생한다. 이들 믿음은 오류가능한 비기초믿음을 정당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앞서 고전적 토대론은 비기초믿음이 기초믿음으로부터 연역됨으로써 정당화된다고 주장했음을 상기해보자. 이에 따르면 물리적 대상에 관한 믿음은 현상적 믿음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하다. “x가 F처럼 보인다”로부터 “x가 F이다”를 논리적으로 연역할 수는 없는 것이다. F처럼 보이면서 실제 F가 아닌 경우가 논리적으로 가능하며 실제로도 가능하다. 결국 고전적 토대론은 외부 세계에 관한 믿음의 정당화를 해명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회의주의로 귀착한다.

  • 현대 토대론

현대 토대론은 고전적 토대론과 유사하게 기초믿음이 인식적 특권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반면 현대 토대론은 고전적 토대론과 달리 기초믿음과 비기초믿음이 비연역적으로 정당화 관계를 맺는다고 말한다. 이 점에서 현대 토대론은 현상적 믿음과 물리적 대상 믿음 사이의 논리적 간극으로 말미암은 앞 절의 비판을 피해갈 수 있다. 현상적 믿음이 과연 인식적 특권을 지니는가 하는 비판에는 직면하지만, 현대 토대론자들은 현상적 믿음 가운데 오류불가능한 믿음이 극히 소수라는 비판에 동의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현대 토대론은 여전히 심각한 문제에 부딪친다. 현상적 믿음 중 많은 것들이 오류불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일상에서 우리는 현상적 믿음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우리는 고양이를 보고 “저기에 고양이가 있다”고 믿지, “저기에 고양이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후자의 믿음은 고양이와 고양이에 대한 지각 경험을 구별하도록 철학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야 형성할 수 있다. 게다가 양자를 구별해야만 할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 즉 나의 감각이 잘못되었는지 의심할 상황이 아닌 이상 지각 경험에 관한 믿음이 아닌 지각 대상에 관한 믿음을 형성하는 것은 일상적으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예컨대 배가 고파 눈앞에 있는 빵을 먹어야 한다면 관건이 되는 것은 빵에 대한 지각 경험이 아니라 빵 자체이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현상적 믿음을 형성하지 않고 물리적 대상에 관한 믿음을 형성하며, 결국 일상적으로 우리는 물리적 대상 믿음을 뒷받침할 기초믿음을 지니지 않는 셈이다. 다른 종류의 인식적 특권을 가정하더라도 동일한 문제에 맞닥뜨린다. 결국 현상적 믿음에 인식적 특권을 부여하더라도 일상적으로 형성되는 대상적 믿음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귀결에 이른다. 현대 토대론 또한 현상과 대상 사이의 간극을 극복하지 못하고 회의주의의 출현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 최소 토대론

전통적으로 토대론은 기초믿음에 인식적 특권을 부여해 왔다. 특히 토대론은 경험에 관한 현상적 믿음에 특권적 지위를 귀속시키고 실재 물리적 대상에 관한 믿음을 비기초믿음으로 간주해 왔다. 반면 최소 토대론은 앞서의 두 토대론과 달리 기초믿음에 인식적 특권을 부여하지 않는다. 최소 토대론에 따르면 기초믿음은 인식적 특권이나 믿음 내용이 아니라 믿음이 정당화되는 방식에 의해서만 규정될 따름이다. 기초믿음은 비믿음적으로 정당화되는 믿음을 뜻할 뿐이다.

예컨대 내가 창밖을 보고 “밖에 벌이 돌아다닌다”라는 믿음을 형성했다면, 이 믿음은 다른 믿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각 경험에 의해 정당화된다. 이때 이 믿음은 기초믿음이다. 한편 이 믿음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벌집이 있다”라는 믿음을 추론한다면, 이것은 앞서의 믿음에 의해 정당화되므로 비기초믿음에 속한다. 여기서 전자의 믿음은 오류불가능하거나 의심할 수 없는 믿음도 아니고 현상적 믿음도 아니다.

최소 토대론은 따라서 인식적 특권과 관련한 비판을 피해갈 수 있다. 최소 토대론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어떤 믿음이 비믿음적으로 정당화되는 일이 가능한가의 여부이며, 이 쟁점이 토대론과 정합론의 논쟁점이다.

  • 토대론과 정합성

정합론이 토대론의 핵심 개념인 기초믿음의 존재를 부정하는 반면, 토대론은 정합성을 인식적 정당성의 또 다른 원천으로 인정한다. 정합성은 토대론에 두 가지 방식으로 수용된다. 첫째, 다른 믿음과의 정합성은 믿음이 정당화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앞서의 예시에서 벌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추가적인 증거가 발견된다면, 밖에 벌들이 돌아다닌다는 믿음은 비기초믿음의 증거로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즉 정당화되는 믿음은 다른 믿음과 충돌하지 않아야 한다. 둘째, 믿음은 보다 많은 믿음들과 정합적일수록 더 정당화된다. 만일 밖에 벌이 돌아다닌다는 믿음만이 벌집이 가까이 있다는 믿음에 대한 유일한 근거라면 그 정당성은 그리 강하지 않을 테지만, 벌집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여럿 발견되어 여러 개의 근거 믿음을 형성했다면 내 믿음은 보다 많은 믿음들과 정합적이므로 더 강하게 정당화된다고 할 수 있다.
상술한 이유로 토대론자들은 정합성을 정당화의 조건으로 인정한다. 그럼에도 정합론자들은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 토대론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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