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 리얼리즘?

능력주의와 공정에 담론이 상당히 뜨거운 요즘인 만큼 서강올빼미 회원분들의 의견이 궁금해 짧은 글을 써봅니다. 아마 마이클 센델의 <공정하다는 착각>, 대니얼 마코비츠의 <엘리트 세습>을 읽어보셨거나 관련 내용을 아주 약간이라도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능력주의에는 뭔가 문제가 있다는 점에 동의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많은 학자들이 통계 및 기타 실증적 결과에 기반해 능력은 지능, 후천적 교육 및 집안환경 등등에 의해 세습되는 무언가에 가까우며 능력에 따른 차별이 심화될수록 양극화와 사회 갈등이 극심해진다는 점을 입증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능력주의는 새로운 신분제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참으로 답답한 점은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만 가득할 뿐 실질적 대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질적 대안을 제시하려던 노력이 아예 없지는 않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샌델은 추첨제를 능력주의의 대안으로 제시했으나 송지우(2022)는 본질은 재화 및 지위의 희소성에 있음을 지적하며 "추첨제를 도입하더라도 파괴적인 경쟁이 취업이나 전문대학원 입시 단계로 미뤄질 뿐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합니다. 학습 역량의 최저선을 넘는 모든 이에게 자격증을 부여하는 방안 역시 제시되나 이 역시 파괴적인 경쟁을 자격증을 수령한 이후로 넘길 뿐이라는 동일한 비판이 제기될 수 있을 듯 합니다. 한편으로 학습 역량의 최저선을 설정하는 것 역시 결국 경쟁을 완화할 뿐 큰 틀에서는 능력주의의 기조를 따르고 있다는 생각 역시 듭니다.

아마 최선의, 그리고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재분배 강화입니다. '능력'에 따른 차별이 해소 불가능하다면 능력에 따른 '차별'을 해소하는 방향이 유일한 선택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능력/경쟁에 따른 차별이 완화될수록 사회의 생산성 역시 낮아진다는 점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북유럽이 높은 세율을 유지하면서도 높은 생산성을 유지한다는 사실은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만, 제 외국인 지인은 북유럽 젊은이들이 최근 무기력(lethargy)에 시달린다고 하더군요. 능력이 뛰어난 이들일수록 능력에 따른 차별이 극심한 곳을 선호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장기적으로는 능력주의/신자유주의 국가들이 우수한 인재를 흡수하리라는 비관적 생각 역시 듭니다.

문제는 노력과 능력이 실질적으로 구분 불가능하다는 점에 있는 것 같습니다. 능력에 따른 차별을 완화한다면 노력에 따른 차별 역시 필연적으로 완화되고 이는 노력할 유인의 저해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구라도 좋으니 제 허접한 논리를 반박해주시면 진심으로 감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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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은 적당한 범위 설정이 필요한 주장 같습니다. 위 주장은 대체로 "모든 능력"에 관한 일반론이지만, "능력주의"에서 말하는 능력은 그렇지 않다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아마 대체로 물질적/비물질적 재화를 획득할 수 있는, 그것도 대체로 재능에 비례해 획득할 수 있는 영역에 한정되겠죠.

(2)

저는 능력주의가 지금 시점에서 그렇게 문제가 되나...싶습니다.

왜냐하면 AI의 등장으로 더 가속화될 것이 뻔하지만, 생산성을 담보할만한 (한 개인이 가져야하는) "능력의 범위/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또 (그 분야가 시도때도 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몇몇 법적 제도적 보호를 받는 직업을 제외하면) 능력주의의 수혜를 받을 것이라 여겨지는 안정적인 "능력/전공"이 있다고 보시나요?
이런 것이 보이지 않으니, 한국 사람들 모두가 제도의 보호를 받는 의사를 하려 난리치는 것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이제 능력주의 하에선 어떠한 사람도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죠.

(3)

그렇다면 유전자든 후천적 교육이든 우리는 투자한 노력에 비례한 재화를 생산할 수 없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기술적 변화로)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능력은 계급 재생산과 관련있다기 보단, 재산의 상속이 계급 재생산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겠죠. 따라서 저는 상속세를 더 높히는 것이 양극화 해결에 더 중요한 문제라 생각합니다.

(참고로 북유럽 노르딕 모델은 "소득세"[즉 능력에 대한 세금]은 높은 반면 상속세는 극히 낫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대기업이 이주하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던 탓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실 상속세의 획기적 증가는 대기업이 사실상 국영기업일 때나 가능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사우디마냥 자원 부국 말고는 좀 어려울 수도 있겠네요 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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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우(2022)를 읽어보고 싶은데 이것만으론 원본 논문을 찾을수가 없네요. 링크도 같이 올려 주시거나 처음 인용할 땐 서지사항을 전부 기록해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사실 재분배 강화가 유일한 대안인진 잘 모르겠습니다. 롤스에 반대한 노직과 같이 자유지상주의적인 분배 정의를 지지하는 정치철학자라면 아예 (자발적인 기부를 제외한) 재분배 정책 자체를 거부할 테니까요.

이에 대응하기 위해선 재분배 더 나아가서 평등주의라는 의제는 도덕적 의무이기 때문에 이해타산적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물론 기회의 평등만을 보장할 것인가 결과의 평등을 보장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가면 작성자님이 마지막에서 제시한 문제에 부딪힐 수밖에 없겠지만요.

작성자님의 수요를 충족시켜 줄만큼 현실적인진 제가 평가할 수 없지만 분배 정의에 대한 SEP 항목과 같이 철학자들이 재분배와 관련하여 다양한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 만큼 이런 자료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논점을 제안할 수도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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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송지우 교수의 이 논문을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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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글에 드러나 있는 문제의식을 보면 니체로부터 아곤주의(agonism)를 읽어내려는 시도에 관심이 가실 거라 생각이 됩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소모적 파멸적 경쟁을 통해 사회 계층의 고착화와 개인 및 공동체의 절멸을 가져오는 능력주의에 비해, 아곤주의는 사회계급의 재생산과 개인을 절멸로 이끄는 투쟁을 거부하고, 경쟁의 승리를 구성원들 전체의 도야의 기회로 삼고 경쟁의 패자들을 패자로 라벨링하기를 거부하는 사회를 그리는 입장인 것 같습니다. 글쓴이께서 파멸적 경쟁과 생산성 저하라는 스퀼라와 카뤼브디스를 넘어설 단서를 찾으신다면 여기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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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지적 감사합니다. 상속세를 높이면 대기업이 떠나고, 소득세를 높이면 사람이 떠나는 딜레마가 참으로 가슴 아프네요.
여담으로 제가 AI 발전에 따른 산업구조 변화에 대해 무지해서 그런데 생산성을 담보할만한 "능력의 범위/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사례를 여쭙고 싶습니다. AI가 화이트칼라 노동부터 예술계까지 침범한다는 얘기만 들으니 제가 너무 비관적이었던 건가 싶네요.

인용 양식을 안 지켜서 죄송합니다. 다른 분께서 링크를 달아주신 논문이 맞습니다!
운 평등주의를 고려하면 노직의 입장을 옹호하기는 어려운데, 재분배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행할지에 대해서는 합의가 묘연하고 저도 잘 모르겠어서 참 답답하네요... ㅠ

좋은 글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곤주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지 다소 모호하게 다가오긴 하나 나름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1)

이게 제가 말하고자 하는 사례였습니다. 얄궂게도 (아마도 투입하는 노동에 비례해서 재화가 산출되지 않는/달리 말해 고도의 전문화가 되지 않는 영역인) 간병/노가다와 같은 육체 노동 분야가 오히려 AI에 의해 대체될 확률이 낮아지고 있죠.

즉, 지식 혹은 학습을 통한 전문화라는 (제가 볼 때 능력주의가 가정하고 있는 "능력") 영역은 더 이상 기존 방식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제 예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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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상속세 인상이 더 중대한 문제라고 보신 거였군요. 말 그대로 얄궂네요...

능력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능력을 '일원론적으로' 평가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무엇이 지적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척도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다양한 대답이 가능하겠죠. 어떤 사람은 '암기력'을 내세울 수도, 어떤 사람은 '창의력'를 내세울 수도, 어떤 사람은 '계산 능력'을 내세울 수도, 어떤 사람은 '논술 능력'을 내세울 수도 있을 거예요. 문제는, 우리가 흔히 '능력'을 평가할 때 이런 다양한 기준들을 포괄적으로 고려하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 중 몇몇 가지만을 제한적으로 골라내고, 그 기준들 마저도 억지로 수치화하여 획일적으로 사람들을 평가하게 되는 거죠. (수능이 바로 이 대표적인 경우 아닌가요?)

그래서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a) "능력으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가 아니라 (b) "특정한 능력만으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가 되어야 한다고 봐요. 능력주의 자체가 잘못되었다기보다는, 현실에서 능력주의가 고려하고 있는 '능력'이라는 것이 너무 제한적이라는 점에 문제가 있는 거죠. (저는 이 점에서 샌델의 논의가 약간 잘못 방향 잡혀 있지 않은가 해요. 제가 샌델을 오해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샌델은 능력주의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그렇다면 대안은 '다원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능력으로 사람들을 평가하되, 그 능력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다양성이 최대한 잘 발휘될 수 있도록 제도를 개혁하는 방향을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한다고 봐요. 그리고 이 점에서 저는 마이클 왈저(M. Walzer)의 정치철학에 크게 동의합니다. "정의의 원칙들은 그 형식에서 그 자체가 다원주의적이다."라는 왈저의 주장처럼, 다원주의적 기준에 따라 사회적 가치를 분배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해요.

마이클 왈저, 『정의와 다원적 평등』 제1장 요약
https://blog.naver.com/1019milk/221300258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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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NewHegel 님이 언급하신 글뭉치들을 발전시켜서 지금 논문으로 완성시켜 학회에 제출한 상태입니다. 아쉽게도 능력주의 비판을 목표로 만든 논문은 아니긴합니다만, 어느정도 접점은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발표되면 올빼미에 공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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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마이클 센델의 <공정하다는 착각>만 읽었습니다. 이런 문제 의식을 갖고 인간의 삶을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인간의 삶이 개선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런 비판의 저변에는 미국과 서유럽의 사례와 한국의 사례가 인류 전체의 문제라는 생각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글로벌하게 보면 인도와 중국 두나라의 인구만 합쳐도 미국과 유럽의 인구보다 많습니다.

물론 아직 까지는 제일 잘사는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 경쟁 중심의 미국과 복지와 평등에 중심을 두는 유럽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존롤스와 로버트 로직의 논쟁과 같이 현실이 고정적이고 제한된 사회계약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라면 어떤 대안이 나올 수도 있을 듯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매우 다이나믹하게 움직이는 흐름의 연속이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글로벌 경제가 정체하거나 큰 공황상태가 지속되면 그럴 경우 오는 고통은 매우 큽니다. 두가지 정책이 상황에 따라서 적정하게 조정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양극 속에서 다이나믹하게 움직이는데 좌우 어느 한 방향으로 가면 다른 부작용이 따라온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균형점이 좌우 어느 쪽으로 더 가야 하는 가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생각들이 있을테고 미국과 유럽은 각자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고 방향을 정해서 산다고 봅니다.

사변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상과 현실 속에서 부딪치는 사람들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을 중시하는 사람들도 직접 육체적인 폭력에 시달리거나, 재산 상의 피해를 입으면 평소 자신의 신념과는 다른 반응이 나옵니다. 세상은 매우 넓고 미국, 유럽, 중국, 대한민국 정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도, 브라질, 아프리카, 러시아, 중앙아시아 등에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그들의 삶의 양태를 보면 참 세상 복잡하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물론 이런 생각은 제가 비지니스계 아니 돈세는 삼마이로 살다보니 갖는 시각일 수도 있습니다.

저도 약간 비슷한 의견인데, 샌델은 자본주의의 극단화로 인해 더 이상 넘어서기 어려운 빈부격차가 확립된 미국 사회를 주요 타겟으로 삼고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사회에서는 '능력주의'라는 논리가 빈부격차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에 샌델이 더욱 이 논리를 비판적으로만 바라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지만, 한국처럼 계층 이동이 비교적 활발한 나라에서는 오히려 '능력주의'가 고착화된 사회 구조를 무너뜨리는 논리로 작동하잖아요. 저는 센델의 논의가, 미국 사회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능력주의의 이런 긍정적 측면을 간과한 채 능력주의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 한계라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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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제가 조금 의문이 드는게 많은 사람들이 지향하는 혹은 얻고자 하는 사회적 가치(예를 들어 돈,권력,명예)의 분배 기준이 독립적이지 않을 수도 있지 않나요?. 제가 왈처의 책을 꼼꼼히 읽어보지 않아서 조심스럽긴 하지만 왈처는 독점은 지배를 필연적으로 수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몇몇 가치는(모든 가치는 아닙니다) 수반할지도 모릅니다. 인상비평일 수도 있지만 제가 볼때 왈쳐는 서로 다른 사회적 가치의 분배기준을 너무 무 자르듯 명확하게 보려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영역들의 분배기준은 너무나 밀접하게 얽혀있어서 한 영역에서의 독점이 지배로 연결될 여지가 다분할 수도 있는데도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 왈쳐는 여기에 두 가지 대응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점을 보여주거나 혹은 분배기준이 독립적이지 않은 영역에 한에서 독점을 금지하거나 둘 중 하나인것 같습니다. 물론 저의 허수아비 때리기일 확률이 높긴 하지만 지금 당장 떠오르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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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몇몇 가치에 대한 독점이 다른 가치에 대한 지배를 수반한다고 하더라도, 비판되어야 하는 사항은 '독점' 자체가 아니라 '지배'여야 하지 않을까요? 가령, 인터넷의 활성화가 포르노의 활성화를 수반한다고 하더라도, 비판되어야 하는 사항은 '인터넷' 자체가 아니라 '포르노'인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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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모든 독점이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저의 주장은 YOUN님의 주장보다 조금 더 약합니다. 그리고 예시가 그럴듯하지 않습니다. 인터넷의 활성화는 인터넷이라는 영역의 혹은 그보다 더 큰 영역의 독점이 아닙니다.

아뇨, 제가 지적한 건 소위 '목욕물을 버리면서 어린아이까지 버리는 오류(fallacy of throwing the baby with bathwater)'에요. 왈저에게 '독점'이라는 개념은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반면, '지배'라는 개념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죠. 즉, (a) 전문성이 있는 특정 집단이 그에 맞는 사회적 가치를 '독점'하는 것은 정당성을 지니는 반면, (b) 한 사회적 가치를 확보한 집단이 다른 사회적 가치까지 '지배'하는 것은 비판받아야 하는 것으로 설명되니까요. 제가 한 말은, 때로 특정 사회적 가치의 독점이 필연적으로 다른 사회적 가치에 대한 지배를 수반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 상황에서 역시 비판의 초점은 '지배'에 맞추어져야 하는 것이지 '독점'에 맞추어져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가령, 과학적 권위를 독점한 과학자 집단이 정치적 권력까지 지배하는 일이 생겨날 가능성이 높다고 해도, 이때 우리가 주장해야 하는 건 "과학자가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과학적 권위를 허용하라!"가 아니라 "과학자가 정치의 문제에까지 관여하려 하지 말라!"가 되어야 한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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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람을 뽑을 때는 다른 주요한 조건에서 별 차이가 없는 한 조금이라도 더 능력있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각 분야에서 요구되는 능력의 정도를 정확히 재는 테스트를 개발해야 합니다. 분야에 따라 그 개발의 난이도는 다를 것입니다. 예를 들어, 비행기 조종을 잘하는 데 필요한 자질, 등반 가이드를 잘하는 데 필요한 자질, 특정 과학기술 분야의 훌륭한 학자가 되는 데 필요한 자질 등을 확인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울 것입니다.

  2. 능력주의가 반드시 대우의 극심한 격차를 낳는 것은 아닙니다. 능력주의가 함축하는 것은 성과/기여에 따른 차별 대우이지 대우의 극심한 격차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의 차별을 해야 능력주의라고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객관적인 답이 없습니다. 시장이 답을 내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시장도 사람들이 결정을 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CEO들에게 엄청난 연봉을 주고 일본 사람들은 CEO들에게 엄청나기까지는 않은 연봉을 줍니다. 실로, 개인별로 성과/기여를 정확히 측정하는 것부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3. 대우에 극심한 격차가 나지 않으면 능력있는 이들의 인센티브 부족으로 생산성이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종합병원의 유능한 외과의사의 년봉이 같은 병원의 보안요원의 년봉보다 5배 많든 10배 많든 그 외과의사의 업무성적은 차이가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특히 자신의 유능함이 순전히 자신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충분한 인문교양 교육을 받은 사람은 아래도 위도 안 쳐다보고 '내 소득이 내가 누리고 싶은 것을 누리는 데/현재 내가 하는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하는 데 충분한가'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4. 가난은 누구에게든 나쁜 것입니다. 따라서 이상적으로는 성과/기여가 가장 떨어지는 사람도, 따라서 실업자도, 취업이 불가능한 사람도, 퇴직자들도 가난해서는 안 됩니다. 아마 일인당 명목 GDP가 일정 이상이 아니면 성과/기여가 가장 떨어지는 사람은 반드시 가난할 것입니다. 따라서 경제발전이 중요합니다. 경제를 발전시켜 성과/기여가 가장 떨어지는 사람도 가난하지 않거나 덜 가난하게 하는 것이 최고의 인권 성취입니다.

  5. 인간다운 삶의 기준을 정해놓고 급여와 복지혜택이 공동으로 그 기준을 충족하게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정신적 및 신체적 잠재력이 동일한 사람들은 동일한 교육 기회를 누려야 합니다. 누구도 치료가 가능한 병으로 죽거나 장애가 생겨서는 안 됩니다. 각종 공과금 및 대중교통비가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큰 부담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1주에 5일 하루 8시간 이상 일하는 사람들의 급여+복지혜택은 자신 외에 적어도 한 명의 어른과 한 명의 아이를 부양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합니다. 인간다운 생활이 불가능한 (좁은) 주택의 건설과 임대는 불법화해야 하며 1주에 5일 하루 8시간 이상 일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자신의 급여의 3분의 1 이하로 직장에서 1시간 이내 거리에서 3인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주택을 임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상적으로는 모든 국민이 주택을 소유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6. 5와 같은 사회는 아마 정치경제가 자본주의인 나라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인 나라들 간에도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유럽 대륙의 사민주의 나라들과 미국 간에는 아직도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일본과 그 둘 사이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은 유난히 노숙자가 적습니다. 인도같이 먹는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자본주의 나라도 있습니다. 훌륭한 나라는 그 나라의 정치경제를 뭐라고 부르든 느린 속도로라도 5를 향해 전진해 가는 나라입니다. 미국은 전혀 그런 나라가 아니고 유럽 대륙의 일부 나라들은 한때 가장 그런 나라였다가 후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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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 '전문성'이라는게 각 영역의 분배기준이라면 왈쳐의 말대로 그 기준은 다른 영역에서의 분배기준과 충분히 독립적이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학계에서의 전문성, 즉 학문적 명예에 대한 가치의 분배기준은 프로스포츠에서의 전문성과는 충분히 독립적이어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독립성이 지켜지지 않으면 지배가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영역에서 이러한 기준의 독립성이 애초부터 충분히 확보될 수 없거나 혹은 그 영역에서의 독점이 이러한 독립성을 해치는 경우에 대해서 왈쳐는 어떤 입장을 취할 수 있나요? 이 경우 독점에게 정당성을 주는 소위 '전문성'이라는게 있을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