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어 구상: 아곤주의와 능력주의는 구별 가능한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곤주의(경합주의 혹은 아고니즘으로 번역되는 agonism)를 공부하다가 최근 사회 담론에서 자주 언급되는 능력주의와 아곤주의는 어떤 차이점을 갖는지 생각해봤습니다. 능력주의에 대한 정확한 개념 규정 없이, 아곤주의는 니체주의적 아곤주의를 기반으로 했습니다.

전통적인 독법에 따르면 니체 철학은 개인주의 철학의 형태를 띠고 있다. 대표적으로 니체는 더 강하고, 고귀한 소수의 인간 유형의 번성에만 관심을 가졌으며, 그의 엘리트주의적 철학은 독단적인 자기 창조를 위한 것이라는 아펠(1999)의 해석이 있다. 또한 말년의 유고작(책세상 학회전집 기준 19-21권)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힘 상승에 대한 니체 자신의 강조를 염두에 둔다면, 니체 철학에서 배태한 아곤주의의 이념은 사실상 능력주의의 근본 이념과 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분석적 전통에 서 있는 니체 주석가들의 최근 니체 해석에 따르면 니체가 지지하는 아고니즘과 능력주의는 확실히 구별된다.

첫째, 아곤주의는 능력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인 공동체(혹은 사회)적 요소의 파괴를 경계한다. 사회 담론에서 제기되는 능력주의 비판의 핵심은 그것이 극단적 개인주의 양상의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즉, 능력주의에 따라 공동체를 구성하면 개개인은 오직 한정된 재화를 얻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단자로 환원된다. 개개인 사이의 연합은 각자의 이익을 위한 일시적 동맹에 불과하다.
반면 아곤주의는 그러한 투쟁 양상을 죽음을 향한 투쟁(Vernichtungskämpf)으로 여기고 비판한다. 아곤주의는 투쟁의 한계선을 분명하게 정하고 타자의 절멸에 이르는(혹은 위한) 투쟁을 단호히 거부한다. 아곤주의는 경쟁 참가자들에게 자기-절제 기술을 닦도록 촉구하여 상대방을 절멸 상태에 이르게 하지 않는다. 동시에, 경쟁의 승/패에만 집중하는 진흙탕 싸움의 능력주의와 달리 아곤주의 문화 사회는 경쟁 승리자가 탄생시킨 훌륭한 산물을 규준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 규준은 사회적 모범이 된다. 아곤적 투쟁의 산물인 모범은 다른 사회 구성원이 한층 더 훌륭한 자가 될 기회를 제공하고, 이러한 교육적 효과를 통해 정립된 규준을 넘어서는 더 훌륭한 산물을 만들도록 촉구한다는 점에서 사회 전체의 발전에도 기여한다.

둘째, 아곤주의는 능력주의의 또 다른 문제점인 특정 요소에 따른 라벨링 및 사회적 계층의 고착화를 경계한다. 능력주의는 인서울 대학 혹은 직장 같은 특정 면모에 근거해 한 사람의 인생, 성격, 기질을 단번에 규정한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라벨링과 그에 따른 갖가지 규정은 서로서로 옭아매어 계층의 고착화를 이룬다. 사실과 상관 없이 유명 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대기업 사무직에 입사한 초봉 7천만 원 A 씨는 고졸 출신 중소기업 생산직 라인에서 근무하는 연봉 5천만 원 B 씨보다 따뜻한 인격, 상대를 헤아릴 줄 아는 마음씨와 지적 능력, 좋은 가정 배경을 가진 자로 쉬이 여겨진다.
반면 아곤주의 문화 사회는 사회 속 투쟁을 끊임없이 진행하고, 투쟁에 따른 승리가 고착화되길 거부한다. 즉, 아곤주의는 도편추방제의 이념을 함축하고 있다. 아곤주의의 투쟁의 목표는 투쟁의 승리를 위한 자기-절제 기술의 고양 및 승리를 통한 자신 덕의 사회적 현현화이다. 고양된 자기-절제 기술은 타자에 대한 라벨링을 억제하는 좋은 덕성이 된다. 또한 아곤주의 문화 사회에서는 자신이 어떤 영역에서는 승리자일 수는 있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또 아닐 수도 있다. 그렇기에 재화만을 유일한 승리 척도로 지니며 상품 가치의 상승을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 속 능력주의와 달리 아곤주의의 투쟁의 목표는 부가 아니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나아가, 아주 긍정적으로 해석할 때, 아곤주의의 승리자들에게 부 따위는 별로 큰 의미가 없을 뿐더러, 어차피 다시 승리해서 쟁취하면 될 뿐인 대상이기에 경제적으로 궁핍함을 느끼는 자들에게 자기 재산을 기꺼이 증여한다.

산책하는 중에 잠깐 생각한 것을 옮긴 탓에 아직 잡념 수준이다만, 언젠가 이 주제로 크리틱이나 논문을 내려고 합니다. 제목 형식은 뉴헤겔님의 이전 글을 표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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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능력주의가 정확히 무엇인지 규정되지 않으면, 논문 전체가 흔들릴 것 같네요. 이거야 뭐....sophisten님도 아실거고, 누구나 하실 수 있는 말이니 그냥 넘어가고.

(2)

이 설명에 따르면, 아곤주의는 저한테 미묘한 사회계약론의 느낌이 있습니다. 아마 서양 근대 철학의 뉘앙스라기보단, 동북아 고대 철학의 뉘앙스에 가까울 듯합니다. (그래서 도움이 되실지는 모르겠으나) 제가 기억하는 바를 말하면 이렇습니다.

<순자>에서는 a) 인간은 이기적입니다. 아곤주의처럼 자기 자신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죠. (뭐, 도덕적 감정이 있느냐 없느냐는 논쟁의 지점이 있긴합니다.) b) 흥미로운 점은,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를 만든다는 점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공동체를 만들어 같이 뭘 하는게, 개인의 이익이 더 극대화 된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묘하게 자본주의 느낌이 있습니다. 공동체로 엮이며 각자 사람들이 전문화되고, 그래서 각자의 이익이 극대화된다는 논지로 전 읽습니다.)(그래서 능력주의로 언급하신 것이 가진 단점을 미묘하게 피해가죠. 내가 너무 날뛰어서 공동체가 파괴되면, 제 최대화된 이익도 파괴되는 셈이니깐요. 그래서 여기서 도덕이 나오죠.)
여기서 더 유사한 점은 c) 개인이 만든 산물 (아곤주의에서는 "모범"이라 하신 것)이 <순자>에서는 '예'라는 형태로 계속 내려온다는 점입니다. 이 예는 마찬가지로 사회적 모범이지요. (묘하게 문화적 진화[cultural evolution]에 관한 논지와도 조응한다 저는 생각하는 편입니다.)

(3)

이 부분은 사실 전반적으로 갸우뚱합니다. 능력주의의 단점이 고착화가 아니라, 고착화의 해체에 있지 않던가요? 음. 정확히 말하자면, 능력주의는 어떠한 능력으로 계층을 재배치할겁니다. 문제는 이 능력이 재산/혈통 등 상속되는 것과 달리, (완전히) 상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계층의 고착화를 말하는 것은 약간 부담감이 있어 보입니다. (물론 지적 능력의 유전이라던가, 유전-양육의 문제와 같은 여러 상호작용하는 요소들이 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이면 아곤주의와 능력주의가 구분될 수 있는지도 약간 의문이 듭니다. 아곤주의 역시,

을 일종의 미덕(즉 능력)으로 삼는 셈인데, 이것을 기준으로 한 사회의 고착화가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요? (예컨대, 상무적 전통이 강한 국가 [스파르타 등]에서는 자기-절제 등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상류 계층이었죠.)

그리고 아곤주의/능력주의를 구분하는 기준 중 하나가

인 듯 한데, 능력주의 역시 개인의 단위에서는 이러지 않나요?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을 입증함으로서, 사회 속에서 투쟁하고 승리하길 원하고. 나아가 자신의 목표가 (일종의 역사적 사명이라던가 초월적 영웅심이라던가 그러면) 계속 자기계발을 해 나가지 않을까요? 굳이 능력주의를 성공 후 멈춤으로 한정할 필요가 있는지 전 사실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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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부분에서 말씀하신대로, 아곤주의가 어느 정도 계약론의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다양한 해석 라인이 있지만 아곤적 문화 사회의 형성에 관해서는 크게 (1) 동등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 어찌할 수 없는 막다른 궁지에 몰렸을 경우, 자기 보존을 위해 서로를 제압하길 포기하고 타협하여 아곤 문화 사회를 만든다는 관점과 (2) 인간의 필연적인 상호 의존성을 염두에 두고, 자기 극복을 위해 서로를 제압하지 않고 차이의 발생을 옹호하기 위해 아곤 문화 사회를 만든다는 관점이 있습니다.
한눈에 알수 있듯이, 입장(2)는 기본적으로 '죽음을 향한 투쟁'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이 입장(1)인데, 이 입장은 "사회 형성 단계에서만 자기 보존이 중심 위치를 차지할 뿐, 아곤적 사회가 형성되고 나면 그 아곤적 투쟁 욕구를 룰에 의해 한계지어지는 경합의 형태로 승화시킴으로써 '죽음을 향한 투쟁'을 거부할 수 있다"는 식으로 자신 입장을 방어하곤 합니다.

말씀하신대로 능력주의가 각광을 받은 이유가 집안 배경같은 자연적 요소에 의한 고착화(세습신분제 등)의 탈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봉건적 요소의 안티테제로 등장한 능력주의가 비판받는 이유는, 현실에서 능력주의는 구조적 불평등이나 차별을 마치 정당한 것으로 둔갑시키며 사실상 기득권을 옹호하는 논리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시로 든 것들의 핵심을 보면, 사회 구조에 대한 판단 없이 모든 문제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면서 한 사람을 폭력적으로 규정하는 태도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니네가 공부 존나안해서 지잡대 가놓고 왜 겨우겨우 괜찮은 대학입학한 우리가 지역할당제로 인한 역차별 받아야함? 니네가 게을러터진 탓아님?"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를 견지한 자(예시의 A 씨)가 한국에서는 그래도 괜찮은 일자리를 얻고, 또 그 아들딸내미들이 당연히 B씨의 자식보다 좋은 대학을 가고 일자리를 얻을 확률은 높습니다.
그래서 결국 능력주의는 결국 자신의 안티테제와 결합합니다.

제가 기본적으로 염두에 둔 능력주의는 본글에서 말한대로 "자본주의 (사회) 속 (에서 어그러진) 능력주의"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을 입증함으로서, 사회 속에서 투쟁하고 ... 자기계발" 해봐야 그것은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히려는 투쟁에 불과합니다. '자본주의 속 능력주의'에서는 모든 투쟁이 상품가치를 높히려는 투쟁입니다. 그러니 그 구체적 형태가 어찌됐든, 능력주의 사회의 투쟁에는 단 하나의 투쟁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투쟁에서 한번 승리한 자는 (높은 확률로) 영원한 승자입니다. (A 의 예)

퇴근 시간이 다되어 일단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나중에 또 애기거리가 생기면 다시 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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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 감사합니다.

다만 Mandala님께서는 "잘 정의된"과 "일그러진"를 대비하시는 듯한데, "잘 정의된"의 반대는 "잘 정의되지 않은"이지 "일그러진 사례"가 아닙니다. 즉, 개념적으로 능력주의 '잘 정의'된다고 하더라도, 현실 차원에서 '이념형(ideal)으로 구현된 사례'와 '일그러진 사례'는 있을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정치사회 철학 분야의 경우, 이념형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일그러진 형태의 제도/기관/사상도 다루기 때문에 "철학적 문제로 보이지 않는다" 혹은 "능력주의를 (누군가가 잘 정의한) 원의대로 쓰고 실제도 그렇게 돌아간다면, 들어맞는 비판이 아니다"라는 반박이 좋은 반박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말씀대로 어떤 분들이 보기엔 제 작업이 "철학이 오용된 케이스"라고 리젝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주로 보고 배우는 곳이 철학/사회학/정치학 등을 이용해 사회문제 잡다에 관해 논의하는 집단이기에 이런 부류의 작업도 수준만 있다면 용인해줄 듯합니다. 그 집단 중에 '철학(연구)'이라는 키워드를 가진 곳이 애초에 한 곳 뿐이기도 하고요.
사실 저도 제가 엄격한 의미에서의 아카데믹한 철학 연구만 하고 있다 생각하지 않아서, "(이건 철학이 아니라) 사회 비판에 가까워 보인다"고 말해도 별다른 생각이 안 들 것 같습니다. ㅎㅎ

어찌 됐든 사려 깊은 조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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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제가 잘 모르고 오지랖을 부렸네요. 모쪼록 잘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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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읽었습니다. 제가 주로 알고 있었던 건 가치와 도덕의 발생적 기원을 추적해서 비판했던 계보학자 니체였는데, 경합주의적 정치철학자로서의 니체는 니체를 잘 모르는 저로서는 새롭게 다가오네요. 특히 개인을 완전히 원자화하고 서로와의 극단적인 경쟁 속에 몰아넣는 능력주의와 달리 공동체적인 가치를 보존하면서 이루어지는 개인들의 (이렇게 표현해도 된다면) '건강한' 경쟁의 모델을 니체로부터 읽어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욕구들의 체계인 시민사회의 원자주의적 경향을 비판하면서 이를 극복할 새로운 인륜성의 모델을 제시했던 헤겔 법철학과는 비슷하면서도 또 달라 보이는데, 이런저런 문맥에서 다양하게 응용될 수 있는 논의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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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요 주제는 21세기에 들어 몇몇 유명 니체 학자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논의를 검색해보니 국내에서는 손에 꼽을 정도의 논문밖에 없고, 그마저도 해외의 유명 논문 두어개를 참고하라고 인용할뿐 입장과 논쟁들을 잘 정리하지 않았더라고요. 아마 선생님께서 관심가지시는 <분석적 헤겔주의>와 같은 처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니체의 아곤주의에 대해서는 논문을 하나 쓸 생각이라, 더 공부한 후 좋은 결과가 나오면 올빼미에 공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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