왈저는 이미 특정 가치에 대한 독점이 다른 가치에 대한 지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어요. 오히려 바로 이 점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독점'과 '지배'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는 거죠. 왈저의 주장은 "지배 없는 순수한 독점이 존재한다."가 아니라 "우리는 독점이 아니라 지배를 비판해야 한다."에요.
다시 과학자의 예시를 사용하자면, (a) 물리학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만 대학에서 물리학 강의를 '독점'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면 (b) 물리학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회적 부와 명예와 발언권도 '지배'하기 쉬운 위치에 놓이죠. 그런데 이 상황에서 우리가
"왜 물리학 박사 학위자만 물리학 강의를 독점하냐? 물리학 박사 학위가 없어도 누구나 대학에서 물리학 강의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허용하라!"
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회적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게 왈정의 지적이에요. 부정의의 문제는 독점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오히려
"물리학 박사 학위자라고 해서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까지 전문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물리학 박사 학위자가 모든 문제에 대해 전문가인 척 행세하지 말라!"
라고 주장해야 한다는 게 왈저가 주장하는 내용이에요. '독점'과 '지배'는 구분되어야 하고, 부정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판해야 하는 것은 독점이 아니라 지배라는 거죠.
음. 왈쳐의 입장이 얼추 정리가 됩니다. 역시 저의 비판이 허수아비를 때린 것 같습니다. 글을 적을때 뭔가 쎄하긴 했습니다. 그래도 YOUN님 덕분에 많은걸 얻고 갑니다. 저의 잘못된 질문에 정성스러운 답변 감사합니다. 사실 제가 문제 삼는 것은 어떤 영역에서 '전문성'이라는 것이 의미 없어지는 상황인데 이러면 그 영역에서의 분배정의라는게 굳이 필요하지 않네요. 이런 상황에서는 애초에 독점과 같은 차등분배는 정당하지 않을테니까요.
샌델 책 5장에서도 나오지만, 샌델 이전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나 존 롤스에게도 능력주의는 비판의 대상이었습니다. 능력주의의 대안으로 하이에크의 경우에는 자유시장 자유주의, 롤스의 경우에는 복지국가 자유주의를 주장한 것입니다. 재분배 강화를 이야기하셨는데, 샌델의 문제는 (그리고 하이에크나 롤스에게도 동일하게 문제시되는 것은) 경제적 보상이 개인의 자격에 근거해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글을 잘 못 읽어서 그런 것일 수 있는데, (롤스나 하이에크처럼) 경제적 보상이 개인의 자격에 근거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동의하십니까? (그 자격이 '능력'이든 도덕적인 다른 무언가이든 간에 말입니다.) 제가 이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현실적인 대안으로 '재분배 강화'를 얘기하셔서 그렇습니다. 샌델 책에서도 나오지만 재분배는 '경제적 보상이 개인의 자격에 근거해야 된다'는 이유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샌델의 문제는 재분배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라기보다는 재분배를 하는 이유가 '능력주의'적(경제적 보상이 개인의 자격에 근거해야 된다는 생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왈저의 주장도 분명 일리가 있긴 하나, 경제적 재화의 공정한(?) 분배에 있어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능력 중에서도 당장의 경제적 효용 가치가 높은 몇몇 능력만 우대되는 것이 현실이며 다양한 능력을 고려하자고 해서 곧 바로 다양한 능력이 고려될 수는 없습니다.
또 특정 가치에 대한 독점이 다른 가치에 대한 지배로 이어지는 경우를 막기 위해서라도 결국 독점의 완화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우리는 학문의 길을 동경하면서도 경제적 장벽에 부딪혀 대학원에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경제적 가치의 중요성이 간과될 수 없는 만큼 저에게는 왈저가 롤즈보다도 유토피아적 주장을 전개해나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이에크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저는 롤즈가 어느 정도의 능력주의를 용인한다고 봅니다. 차등의 원리만 고려하더라도 롤즈는 필요악으로서의 불평등과 인간의 인센티브 민감성을 인정하고 있죠. 아마 현대의 능력주의자 역시 롤즈의 입장에서 능력주의가 우리 사회를 가장 부유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재분배가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겁니다. (일명 성장이 우선되어야 분배가 가능하다는...)
저는 경제적 보상이 개인의 자격에 근거해야 하나, 그 자격이 어디까지나 본인이 선택할 수 있었던 요소 이를 테면 노력에 국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전, 집안환경 등은 선택할 수 없는 요소인 만큼 당연히 배제되어야 할 텐데 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네요.
이런 문제는 철학자보다도 정치가가 해결해야 하는 사안 아닐까요? 왈저 같은 철학자에게 현실에서 다양한 능력을 어떻게 고려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제도를 제시하라고까지 요구하는 건, 철학자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봐요. (가령, 저는 철학자에게 "수능 위주의 능력 평가 제도를 개편할 새로운 교육 모델을 제시하라!"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고 봐요. 이런 일을 하는 전문가들은 따로 있는 걸요. 오히려 철학자가 수능에 대해 왈가왈부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월권'이겠죠.) 따라서 왈저가 현실 정치에서 사용될 수 있는 구체적인 제도를 구상하지 않는다고 해도, 왈저의 다원주의적 정의론은 '정의의 원칙'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충분히 의의를 지닌다고 평가할 필요가 있어요.
(2)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운다.
'지배'를 막기 위해 '독점'까지 막는다는 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는" 격이 되지 않을까요? 적어도, 왈저의 논의 맥락에서 '독점'이란 딱히 부정적인 개념이 아니니까요. 오히려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그 몫을"이라는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적 정의관을 나타낸 표현이 '독점'이거든요. 의사 면허가 있는 사람만 수술을 독점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운전 면허가 있는 사람만 운전을 독점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런 게 왈저가 말하는 '독점'이잖아요. 의학 지식이 없는 사람도 수술을 할 수 있도록 하고, 만취자도 운전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방향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요. 즉, 부정의의 문제를 완화하겠다고 이런 긍정적인 의미의 독점까지 거부할 필요는 없죠. 물론, (a) 초가삼간을 다 태우면 빈대를 잡을 수야 있겠지만, (b) 빈대만 살충제로 죽일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있는데 왜 굳이 초가삼간까지 태우냐는 거죠. 바로 이게 '독점'이 아니라 '지배'를 비판해야 한다는 왈저의 주장의 요지에요.
다른 얘기에 관해서는 더 잘 아시는 분들이 달아주셔서 제가 잘 답할 수 있는 내용은 이 부분 밖에 없는 것같습니다.
알파고가 등장한지 어언 10년을 달려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일자리의 감소의 주원인을 인공지능보다 경제적 원인으로 더 꼽습니다. 최근에 들어서야 예전보다 더 다양한 분야에서 공격적으로 시범도입을 하고 있습니다. 결과론적으로 지난 10년을 봤을 때 지나친 비관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분야의 발전속도가 원체 빨라서 비관론을 견지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고요.
이 부분에 대해서 떠오르는 것이라면 제조업 현장에서의 로봇도입(특히 자동차산업), 대기업, 은행, 관공서들의 고객상담원 대체 등이 있습니다만 아직 고객들의 만족도가 높지도 않고 실제 경제적 타격을 주지도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기업들의 인공지능 도입과 만족도에 대한 자료들을 보면 도입률은 여전히 한 자릿수 퍼센트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도입한 기업 대부분이 긍정적인 평가를 했고 인공지능의 신뢰성과 성능, 이에 따른 인력 시장의 증가는 빠른 시일에 많은 일자리가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것을 시사합니다. 물론 여기에 블루칼라도 속도가 느리긴 하겠지만 예외는 아닐 것 같습니다.
혹시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대부분 대체하여 생산성이 지수적으로 증가했을 때를 얘기하고 싶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질문하신 것에서 논점이 벗어나긴 합니다만 제 생각에는 현재로썬 인공지능을 통한 산업 혁신이 거의 유일한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