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에 대한 오해 - 이해가능성

비전공 입문자로 서강올빼미에서 추천받은 공부 방법 중 하나인 SEP둘러보기를 시작했습니다. 시작으로 하이데거를 검색해 읽고 있습니다.

SEP를 읽으면서 몰랐던 것을 알게되거나 더 정리가 잘 되는 느낌이 듭니다. 특히 intelligibility interpretation of being - 존재의 이해가능성 대목에서 저 역시도 그 동안 하이데거를 오해했던 부분이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Blattner의 설명에 따르면, 하이데거를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존재의 이해가능성에 대해 idealism 의 한 형태로 치부해버리는 오류를 범한다고 하는데, 저 역시도 이 부분에서 그렇게 생각했었나 봅니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존재의 이해가능성 으로만 생각하게되면, 이는 주관적 현존재의 존재자에 대한 이해가능성의 철학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처럼

‘현존재-존재자 이해는 그냥 이전의 경험론과 실재론이야기에서 용어만 바꾼거 아니야?‘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낭 존재자= 경험 내 존재, 존재= 초월적 존재 라는 이분법을 그대로 적용해버리는 거죠. 하도 이전까지 그 두 논쟁만 보다가 갑자기 새로운 존재론을 보니 그 연장선으로 생각해버리는 오류를 범했던 것 같습니다.

이전의 나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 하이데거 이전의 존재론적 담론을 잊고 아예 존재론을 처음 다루는 것처럼 읽어보자
  • 이데아는 좀 잊어버리고 읽어봐라
  • 존재 라는 단어를 고정된 하나의 의미로 생각하지 말아라
  • 존재 라는 단어를 명사형으로만 생각하지 말아라
  • 어디가서 하이데거는 현존재 어쩌고 하면서 아는체 하지 말아라(?)

라고 해주고 싶습네다..

아무튼 SEP만 읽어도 너무 즐겁네요! (물론 아직 다 읽지 않고 초반인건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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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트너는 영어권 하이데거 연구자 중에서 뛰어나다고 손꼽히는 인물 중 한 명이죠. 국내에도 블라트너의 책이 번역되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책보다 블라트너의 다른 짧은 논문들을 인상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이데거가 '관념론자'가 아니라는 주장은, 다소 철학적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장인 것 같습니다. 물론, 하이데거 옹호자들은 자주 이런 주장을 하긴 하지만, (a) 하이데거 본인이 이미 『존재와 시간』에서 관념론과 실재론 중 관념론이 "원칙적 우위"를 지닌다고 스스로 강조하였을 뿐더러, (b) "오직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에서만, 다시 말해서 존재이해라는 존재적 가능성이 있는 한에서만, 존재가 "있다"."라고 주장하는 하이데거의 입장이 과연 '현존재와 독립적인 실재'를 인정할 수 있을지가 철학적으로 문제시되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하버마스 같은 비판 이론가는 하이데거가 "언어적 세계개시의 관념론"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고, 오늘날 메이야수 같은 사변적 실재론자도 하이데거가 관념론자라고 비판하는 거죠.

개인적으로, 저는 경험적 실재론과 초월적 관념론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칸트의 유명한 논제를 하이데거가 따르고 있다고 생각해요. 하이데거의 사유에서 '실재론'과 '관념론'이란 서로 모순되는 입장이 아닌 것이죠. 다만, 하이데거가 그 두 입장 사이의 뗄 수 없는 관계를 얼마나 잘 해명하였는지는 다소 의문스러운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의문스러움이 하이데거 이후에 그에 대한 수많은 비판이 제기되도록 한 것 같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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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이지만, 하이데거처럼 수많은 지지자와 반대자를 거느린 철학자들을 공부하다 보면, 몇몇 주제에서 양쪽 진영에 모두 불을 지필 수 있는 표현들을 접하게 됩니다. "관념론"도 딱 그런 표현이에요. "하이데거는 관념론자다." 혹은 "하이데거는 관념론자가 아니다."와 같은 문장은, 일단 그 문장을 발언하였다는 것만으로 아주 극렬한 지지나 반대를 받을 수 있죠. (요즘 말로 "빠와 까를 모두 미치게 만든다."라고나 할까요;;)

솔직히, 저로서는 철학에서 어떤 주장이든 정당한 근거만 있다면 얼마든지 제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철학조차 사회문화적 현상이다 보니, 저런 표현이나 문장이 그 자체로 특정 철학적 논의, 학파, 진영에 들어올 수 있는지 없는지를 판가름하는 일종의 '게이트 키퍼' 같은 역할을 하는 것 같더라고요. 하이데거 옹호 진영과 대화할 때는 "관념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 자체를 아주 조심해야 하고, 하이데거 반대 진영과 대화할 때는 "관념론"이라는 표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야 하더라고요. 제 경험상으로는, 자칫하면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입구 컷'을 당하기가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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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존재양식의 다양성과 존재자 간의 구조적차이 등에 초점을 맞추면서 오히려 존재자-존재 의 부분은 더 느슨하게 봤던 것 같아요. 존재-존재자 간의 1대1 대응이 아닌 개별적 개체같은 느낌으로 말이죠. 존재를 오히려 정적인 명사가 아니라 동적인 동사개념으로 느끼고 있었는 와중에 또 말씀해주신 댓글내용을 보니 역시 오해할만했었던건가(?) 싶은 생각으로 회귀하게 됩니다..ㅋㅋ

이런 좀 다른얘긴데 하이데거가 자꾸 존재 존재자 현존재 이런식으로 비스무리(?)한 단어들을 만들어내거나 재정립하는 거는 따라가면서 읽는 입장에서는 뭐랄까 좀 얄밉달까요..무튼 그렇습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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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의 분위기였는지는 제가 몰랐었네요. 다른 진영에서 말실수 했을 때의 등골의 오싹함 같은게 글에서도 느껴졌습니다. 말씀해주신 댓글로도 하이데거 철학 뿐 아니라 바라보는 관점들에 대해 알 수 있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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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에게 있어서 관념론이란 플라톤식 이데아 + lismus (ism)으로 이해하고 있어요. 그러니깐 Idealismus (Idealism)은 사실 이데아주의 정도라고 봐야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깐 우리의 관념 (idea) 에다가 무게를 두는 것이 아닌 플라톤식 이데아에 무게를 두기 때문에 idealist인 것이지요. 이게 칸트하고 하이데거에게도 적용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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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에 강조점을 두어서 '이데아주의'라고 말할 때, 그 '이데아주의'의 입장이 우리가 흔히 '관념론'이라고 부르는 입장과 정확히 어떻게 다를지가 관건이 될 것 같아요. 하이데거를 '관념론'이라는 이름으로 비판하는 (하버마스나 메이야수 같은) 입장들은, 실재가 인간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사실을 하이데거가 제대로 강조하지 못하였다고 주장하거든요. 모든 것이 인간과의 관계에 의존해서만 '존재한다'면, 인간의 세계관을 무너뜨리는 '실재의 저항'(하버마스)이나 인간이 아직 우주에 존재하기 전에 이미 존재하였던 '원화석'(메이야수)은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주된 비판이죠. 말씀하신 '이데아주의'가 이런 비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하이데거의 입장을 '이데아주의'와 연결할 수 있을지가 달라질 것 같아요.

*물론, 하이데거 옹호자들은 위의 비판이 하이데거에게 굉장히 억울하다고 주장할 거예요. 「휴머니즘 서간」과 같은 글에서 나타나듯이, 하이데거는 인간중심주의를 극렬하게 거부하거든요. 하지만 (a) 하이데거가 인간중심주의를 문헌적으로 거부하는지의 여부와 (b) 하이데거가 인간 독립적 실재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는지의 여부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저로서는, 항상 그런 옹호 입장을 접할 때마다 논점이 어긋난다는 인상을 받게 되더라고요. 저도 하이데거를 굉장히 좋아하고 옹호하지만, 개인적으로 그 두 문제 사이의 간극을 항상 느끼다 보니 '하이데거주의'의 입장에 선뜻 서기는 어렵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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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주의는 인간과 별개로 존재하는 이데아가 있고, 세상이 그 이데아에 기반한다... 정도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깐 이데아주의에 있어서

는 거짓이 되겠지요. 그러니깐 만일 하이데거의 Idealismus가 버클리식 관념론이 아닌 이데아주의라면

라는 주장은 Idealismus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물론 하이데거가 칸트의 관념론을 이데아주의로 읽었다라는 전제를 한다면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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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질문이 있는데요. 왜 하이데거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하이데거가 '관념론자'이기를 거부하는 건가요? 하버마스와 메이야수는 하이데거를 관념론자라고 비판하면서 실재(실재의 저항이나 원화석)가 인간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하잖아요. 여기에 대항해서 "하이데거는 관념론자가 맞다. 인간이 독립적인 실재가 어딨냐?"라고 강경하게 나가면 안되나요?저는 세계가 인간과 독립적으로 주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이 입장이 관념론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하이데거주의자들은 관념론이라는 이름을 거부하는지 궁금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메이야수의 원화석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죠.

마찬가지로, 하이데거 이후에 '이해될 수 있는 존재는 곧 언어이다'라고 말한 가다머,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 데리다, '모든 인지는 언어적 일이다'라고 말한 셀라스, 언어의 편재성을 말한 로티 전부 세계가 우리의 언어놀이 바깥에 독립적으로 주어질 수 없다고 주장하잖아요. 그런데 이분들은 신기하게도 '언어적 관념론'이라고 불리기를 싫어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세계가 항상 언어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이분들 주장이 바로 '언어적 관념론' 아닌가요? 왜 그 명칭을 싫어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언어적 관념론이 맞다고 인정하고 밀고 나가면 뭐가 문제가 되는 건가요? 하는 말은 전부 언어적 관념론이 맞는거 같은데 막상 물어보면 또 아니다 관념론과 실재론의 이분법 자체가 문제다 어쩌고 하니까 공부하기가 헷갈려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제가 나열한 철학자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시는(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아니면 죄송합니다) youn님께서 '언어적 관념론'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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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설명을 처음 듣고 저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말같지도 않은 주장을 한다고 보았지요. 지금은 개체간의 관계를 중시하는 철학자 정도로 이해하지만. 그냥 시인이죠. 시인도 보통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가치를 찾아내지요.
이번 하이데거 담론도 이해가능성에서 시작되듯이 결국 관념론으로 귀결되는군요. 관념론이 철학논쟁의 뿌리가 맞는 듯합니다.
언어가 세상을 표현하는 방법이 맞지만 언어가 실체라고 보는데는 주저합니다. 유명 화가가 명화를 물감으로 남기지만 물감이 본질이 아닐 수 있지요. X선으로 본질을 볼 수 있습니다. 언어외에 행동으로도 세상을 알 수가 있지요.
저의 관념론, 하이데거에 대한 느낌이고 철학 문제를 개관적으로 보고자하는 나그네니 별 의미 없습니다.

로티에 대해서라면, 이 글에 달린 댓글들이 참고가 되지 않을까 해서 가져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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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론"이라는 분류가 근대 이후 특히 현대철학에서 워낙 혐오표현(?)으로 사용되다보니, 연구자들이 최대한 관념론이라는 낙인을 피하고자 하는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오류추리가 암묵적으로 작동하고 있는거죠.

P1: 하이데거는 관념론자이다.
P2: 버클리는 관념론자이다.
C: 아, 하이데거의 헛소리는 버클리와 동급이구나!

의도하는 "관념론"의 개념을 명확하게 하면 되지 않은가? 맞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비판자들이 이러한 해명을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지를 않아요.

A: 야, 하이데거가 관념론자냐?
B: 응 그렇지. 그런데 여기서 내가 말하는 "관념론"이 무엇이냐면 ...
A: 그럼 그렇지. 역시 하이데거는 관념론=헛소리였구만!
B: ....

이러한 이유로, 저 역시 많은 철학자들의 실제 입장이 (건강한) 관념론에 속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연구자들이 그들의 입장을 "관.념.론"이라고 자신있게 표현하는 것을 꺼린다고 생각합니다. "관념론"이라고 명시하는 순간, 비판자들에 의해 (말도 안되는 이유로) 조리돌림 당하는 미래가 훤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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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가 아니라서 말 얹기 조심스럽지만, 그런 '언어만이 다 다.'라는 이미지가 그 철학자로 하여금 상대주의나 허무주의적이라는 이미지를 줘서 그런게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알기로 이런 오해(사실 제 지식 수준이 그게 오해인지 아닌지 판별하기엔 미약해서 몹시 조심스럽지만)의 대표주자는 데리다입니다.

관련해서 이런 댓글을 단 적이 있었고, 또 스티븐 핑커는 <빈 서판>에서 데리다를 비롯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언어가 먼저냐 사고가 먼저냐 를 두고 과도하게 언어의 편을 든다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사회과학의 많은 개념들처럼 언어가 사고의 중심이라는 언어 구심성 개념 역시 해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상대주의 이론에서 극단적인 형태를 띠었다. 자크 데리다 같은 예언자들의 글에는 “언어로부터의 탈출은 불가능하다.”, “텍스트는 자기 지시적이다.”, “언어는 권력이다.”,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등의 잠언이 곳곳에 등장한다.(…) 극단적인 언급에 대한 최우수상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 롤랑 바르트에게 돌아가야 한다. “인간은 종으로나 개인으로나 언어보다 먼저 존재하지 않았다.” (빈서판, 368)

그런데 제가 보기엔 데리다는 그런 언어-사고 선행 문제에 딱히 관여한 바가 없는데도 저런 문구만 끌고와서 비판하는 거는 좀 과도한것 같습니다. (<지금, 다시 계몽>에서 핑커는 아예 데리다를 허무주의자라 부르더군요.)

그리고 제가 보기에 데리다를 '언어만이 우리의 전부다' 라고 또 다른 관념론의 형태로 이해하는 것은 데리다 스스로나 데리다 연구자들이 거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제가 알기론) 데리다 스스로 해체하고자 했던 것이 서양철학 내부에 흐르던 그런 어떤것을 우위에 놓고 어떤것은 열위에 두는, 그런 이분법적인 움직임이니까요. 언젠가 읽겠지 하고 사둔 <입장들>을 펼쳤는데, 거기에 이런 대목이 있네요.

로고스 중심주의는 또한 근본적으로 관념론(idéalisme)입니다. 그것은 관념론의 모태입니다. 관념론은 로고스중심주의의 가장 직접적인 표상이자 그것이 항상 지배하는 힘입니다. 로고스 중심주의의 분해는 동시에 -더구나- 그 모든 변이체 속에서 관념론이나 정신주의의 해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입장들, 77)

서강 올빼미에서도 관련 논의들이 좀 있는것 같네요.
현상학적 해석학에 대한 질문 - YOUN 님의 게시물 #11?
"언어와 사고는 별개이다" - YOUN 님의 게시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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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은 그냥 꽤 넓은 범위의 입장을 '빈 서판'으로 정리하고 공격하는 책입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나오는 다양한 소리에 '빈 서판'이라는 레이블링을 하는데, 하도 다양한 입장에다가 '빈 서판' 소리를 하니, 묘한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SSSM 같은 단어를 써서 사회과학 및 심리학의 다양한 입장들을 다 공격하는 동시에, 인공신경망/연결주의도 빈 서판 이론이라고 공격하는데, 지금 AI의 발전을 생각할 때, 우스운 면이 없잖아 있습니다. 너무 옛날 책이라서 그런 것 아니냐 하는데, 딥 러닝이 장족의 발전을 보여주고 있을 때인 2016년 Afterword에서도 비슷한 소리를 합니다.

저는 철학도가 아니다 보니, 철학 관련 내용은 그냥저냥 넘어가지만, AI 연구나 사회과학의 다양한 입장에서도 이런 소리 하는 것 볼 때마다 핑커가 그렇게 세밀한 분석가는 아니라고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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