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단 제가 이해하고 배우기로는 해체는 탄압받는 어떤 주체를 해방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해체는 텍스트(데리다에게 텍스트는 단순히 언어만이 아니라 일체의 모든 흔적들, 기호입니다.) 내에 이분법적인 폭력적인 위계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을 밝히려 하지만, 열위에 있는 항목을 우위항으로 올려 고정시키려는 그런 움직임을 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분법적인 구조를 다시 재생산해낼 뿐이죠. 그렇다고 구조 자체를 파괴해버리자는 허무주의를 꿈꾸지도 않습니다. 해체는 이분법적 구조의 위계의 역전 혹은 전복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은 맞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전복의 효과를 유예하며 새로운 개념의 생산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텍스트 내의 이분법적 위계질서는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데리다나 데리다 연구자들은 해체를 어떤 궁극적인 목표를 지향하는 것, 혹은 한 방식으로 고정된 방법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운동 비슷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 같습니다. 다음은 <입장들>에서 데리다의 언급들입니다.
그때 나의 관심을 끌었으며 지금은 다른 방향에 따라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일반 경제'임과 동시에 일종의 해체의 일반적 전략입니다.
이는 형이상학의 이항대립을 단순히 중화시키거나 이를 공고히 하면서 이러한 대립의 닫혀진 영역 속에 단순히 머무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입장들, 64)
한편으로 전복의 단계를 거치는 것, 나는 일반적으로 지나치게 빨리 가치 폄하 되어왔던 이러한 전복의 단계의 필요성을 매우 그리고 끊임없이 강조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필요성에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고전적인 철학적 대립 속에서 우리가 관여하고 있는 것은 서로 마주보는 상태의 평화로운 공존이 아니라 폭력적 위계 질서 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두개의 용어들 중 하나는 다른 하나를 (위상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지배하고 있으며 우위를 점하고 있습니다. 대립을 해체한다는 것은 우선 어떤 주어진 순간에 위계질서를 전복하는 것 입니다… 이러한 단계의 필요성은 구조적이며 이항 대립의 위계질서란 늘 재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끝없는 분석을 필요로 합니다. 그들의 죽음이 결코 사망선고를 준비하지 않음을 알고 있는 작가들과는 달리 전복의 순간은 결코 공백의 시간이 아닙니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이러한 단계에 집착하는 것은 해제된 체계의 내부에서 그리고 그 토양 위에서 작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층위를 이룬, 어긋난 그리고 어긋나게 하는 이러한 이중의 글쓰기에 의해,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을 낮게 하고 승화시키며 이상지향적인 그것의 계보학을 해체하는 이러한 반전의 작업과 더 이상 이전의 체계 속에서는 이해될 수 없었고 지금도 그러한, 새로운 ‘개념’의 돌발적인 출현 사이의 간격을 드러내야 합니다(입장들, 65)
이런 의미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정체성 정치의 원인(혹은 협력자)으로 데리다를 지목하는 움직임이 좀 의아합니다. 데리다가 아무리 정치적으로 소수자의 편을 들었다고 해도, 제가 짧게 이해하기로 정체성 정치는 소수자들의 정체성을 공고히하고 소수자들을 우위항에 올려놓으려는 움직임 같은데 이게 정말 해체의 '전복을 통해 새로운 개념의 생산'으로 나아가려는 데리다의 사상과 어울릴 수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오히려 페넬로페 도이처의 <how to read 데리다>에 따르면, 데리다 자신은 그런 소수자들의 나르시시즘이 향하는 운동에 저항한다고 언급했다 합니다.
- '억압받지 않아야 할 질서'라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의 맥락을 볼 때 '진실' 같은 것도 억압받지 않아야 할 질서에 속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리 맥킨타이어의 언급으로 돌아가보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접근법이란 모든 것을 의심하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어디에도 '정답'은 없으며 각자의 '이야기'만 존재할 뿐이다.
이렇게 맥킨타이어는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따를 경우 객관적 사실, 진실 등은 없으며 모든 것은 개별적인 이해에 불과 하다는 결론이 추론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맥킨타이어는 해체주의를 문학이론으로 단순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20세기에는 그밖에도 마르틴 하이데거,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등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상을 제시한 핵심 사상가들이 풍부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몇 가지 기본적인 사상의 윤곽만을 제시하도록 하겠다. 우선 데리다의 '해체주의' 이론이 있다. 해체주의 이론에 따르면, 글쓴이 자신조차 텍스트를 통해 무엇을 의도하고자 했는지 모를 수 있기 때문에 비평가는 텍스트를 조각조각 해체한 뒤 이면에 숨어 있는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전제들에 비추어 텍스트를 검토해야 한다. 해체주의 이론은 1980~1990년 북미 및 유럽 전역의 인문 대학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이제 문학 연구가들은 자신들이 위대한 문학 작품에 대해 이해하고 있던 거의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된 것이다. (탈진실, 168)
이는 데리다 자신부터가 <법의 힘>에서 법 역시 텍스트로서 해체 가능한 대상이라 주장한 것을 생각하면, 잘못된 설명입니다. 제 생각에 맥킨타이어는 핑커 처럼 데리다의 '텍스트 바깥은 없다'라는 언급에서 '텍스트'를 '일체의 모든 흔적'이 아니라 '언어'나 '개별적인 이야기' 같이 협소한 방식으로 오해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오해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데리다 전문가들이 연구서를 냈지만, 김민호 교수님이 최근에 <데리다와 역사>라는 책을 내셨는데, 데리다를 공부하는 데 있어 좋은 입문서니 그 책을 참조해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데리다와 역사>에서 소개되는 데리다의 주장을 과감하게 요약해 보자면, 데리다의 주장은 역사나 객관적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텍스트로서 주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 아닐까 싶네요. <데리다와 역사>에서 김민호 교수님은 프랑스 혁명가 마라Jean-Paul Mara의 죽음을 예로 드십니다. 마라가 죽은 것은 객관적 사실이지만, 마라의 죽음은 혁명으로, 암살로, 과다출혈로, 심정지로 죽었다는 다양한 층위의 텍스트들로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역사란 개념은 내가 방금 전에 그 체계를 환기시켰던 술어들의 힘에 의하여 형이상학에 의해 항상 재활용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일반적 역사와 역사의 일반적 개념을 구분해야 합니다. 알뛰세르가 역사의 '헤겔적' 개념과 표현적 총체성의 개념들에 대해 제시했던 매우 필요한 비판은 단 하나의 유일한 역사, 일반적 역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 유형, 리듬, 기입 양식에 있어 서로 다른 역사들, 즉 성층화되고 분화된 역사들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을 그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솔레르스가 "기념비적"이라고 부르는 역사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나는 이에도 항상 수긍해왔습니다. (입장들, 84-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