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정연한 데리다

데리다의 글이 어렵다거나 데리다가 글을 엉망으로 쓴다고 많이들 말하지만, 저는 종종 몇몇 글들을 읽다보면 데리다가 정말로 논리정연하게 사고하는 인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학위 논문 작성 때문에 가다머-데리다 논쟁과 관련된 글들을 오랜만에 찾아보는데, 1981년에 데리다가 가다머에게 제기한 세 가지 비판들은 다시 봐도 참 잘 짜여져 있네요. (a) “이해를 향한 선의지가 과연 존재할까?“ (b) “그런 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례가 정신분석학이 아닐까?“ (c) “그런 반례를 고려한다면 이해란 오히려 교감의 중단을 조건으로 이루어지지 않는가?“가 데리다의 비판들입니다. 비판 하나하나가 생각할 만한 거리를 던져주는 데다, 세 가지가 아주 논리정연하게 이어지고 있어요. 로고스중심주의를 누구보다 신랄하게 비판한 인물이 데리다지만, 정작 논리를 어느 대륙철학자보다 잘 지키는 인물 역시 데리다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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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데리다나 푸코같은 20세기 프랑스 철학자들은 영미권에선 상대주의를 퍼뜨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수로 인식되는 느낌입니다. 데리다나 푸코가 안그랬을지언정, 그들이 주장하는 사상은 '진리는 없다'란 급진 상대주의를 촉진시켜, 결국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사상을 퍼뜨리고, 결국에는 허무주의나 반지성주의를 촉진시킨다라는 식이죠. 아래는 과학철학자인 리 맥킨타이어의 저서 <탈진실>에서 나온 문구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학자들을 비롯한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해제주의 이론을 받아들여 문학 텍스트 외에도 여러 '텍스트'에 이론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행위자 본인은 모른다고 할지라도 사실상 모든 인간 행동(전쟁, 종교, 경제, 성생활 등)에 나름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점에서 세상에 텍스트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텍스트가 의미하는 바에 정답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진실 개념 자체도 의심받기 시작했다. 텍스트를 해제하는 과정에서 비평가는 필연적으로 자신만의 가치, 역사,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단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여러 해답이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접근법이란 모든 것을 의심하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어디에도 '정답'은 없으며 각자의 '이야기'만 존재할 뿐이다.

맥킨타이어는 이런식의 태도가 미국 좌파들 뿐만 아니라 트럼프를 비롯한 우파들한테도 퍼져서(자신은 포스트 모더니즘을 지지한다는 우파유명인사의 말을 인용하며) 미국의 반지성주의를 촉진시켰다고 비판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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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공이 극에 달해서 이제 데리다조차 논리정연하다고 하는 그는 도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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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댓글을 읽다 몸댓글인 여기까지 오게되었습니다.

말씀하신 내용들에 너무너무너무 공감하는 바입니다. 요즘 사회현상이나 정치를 보면, 데리다나 푸코 등의 철학자들의 의도와는 별개로, 해체주의가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된다고 생각합니다.

해체주의는 초반, 기존으로서의 질서를 해체하며 질서로부터 억압받던 주체들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했다면, 중후반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다시 억압의 정당성(혹은 구조의 정당성) 으로 재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억압할 이유가 해체되어 사라졌지만, 억압하지 않을 이유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해체주의는 좌파 뿐 아니라 우파인사까지 폭넓게 사용되는 개념이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는 것은, 데리다나 푸코로 대표되는 후기구조주의 - 혹은 대륙철학은 해체를 통한 허무주의와 반지성주의에 대한 일종의 간접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저에게는, 그들의 철학에 윤리학에 대한 언급이 없거나, 적거나, 혹은 파급력이 적다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계속 고민하는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기도 합니다. 이번에 도서관에 맥킨타이어의 책 After Virtue 을 신청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관점을 소개해줄지 기대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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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라고는 할 수 있겠으나, "어디에도 '정답'은 없으며 각자의 '이야기'만 존재할 뿐이다"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단지 그들이 말하는 것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진리라고 받아들여지는 것은 우리 마음과 독립적으로 진리가 아니라는 점에서 완벽히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고, 바로 그렇기에 비판할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정답은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우리 마음 독립적인 초월적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러한 인식론적 측면을 염두에 둔다면, 그리고 언제나 질서라는 것이 그것에 맞지 않는 것들을 이상한 취향, 또라이, 퀴어라고 규정하여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잉여나 소수자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그들 철학의 인식론은 그 질서에 대한 비판이라는 정치철학적 혹은 윤리적인 면모가 있으며, 별도로 윤리학에 대한 언급이 적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것이 고착화 된 질서나 윤리적 틀에 대한 비판적 개입이라면, 그들 철학은 '반지성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반-반지성주의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데리다는 모르겠지만, self-knowledge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후기 푸코의 작업은 바로 이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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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역시도 이 부분을 인정하기에, 초반 기존으로서의 질서를 해체하며 해방하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역할을 위에서 언급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체주의는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닌, 새롭게 재정의되는 질서 - 억압받지 않아야 할 질서까지 해체하는 방식으로 반지성주의에 일종의 간접적 영향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지점에서 해체주의에는 윤리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칼이란 도구 자체에 윤리란 없듯이, 날이 선 칼인 해체주의는 현재에 이르러서는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른 진영의 논리를 흔드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꾸 '간접적 영향' 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마치 후기구조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말씀하신 해체주의의 본 의도(반-반지성주의)와는 다르게 이것이 반지성주의에 사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부분에서 저는 윤리학을 언급하는데, 이는 말 그대로 윤리학을 꼭 다뤄야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위에 말씀하신대로 그들의 철학에 윤리적인 면모가 있다면 그 자체로 파급력이 있다는 것인데, 현재 논의되는 반지성주의에 다시금 반박하는 내용으로서의 후기구조주의 철학이, 적어도 제게는, 크게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아직까지 제가 공부가 부족한 탓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말씀해주신 후기 푸코의 작업이나, 혹은 결이 전혀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을 통해 위의 내용들이 다뤄지는 부분을 즐겁게 공부할 생각입니다. :slight_sm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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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글을 다시읽다 갑자기 궁금증이 생겼는데요,

  1. 데리다가 로고스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을 논리정연하게 썼다는 건 또 무슨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무래도 학문이라는 틀은 논리적어야만 하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걸까요? 아니면 로고스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역시도 로고스 없이는 불가능한 걸까요..? 뭔가 돌고도는 느낌입니다.

  2. 만약 데리다가 정말로 이해가 교감의 중단으로 이루어진다고 믿었거나, 혹은 언어는 고정적 의미를 전달할 수 없다고 믿었다면, 그가 언어로서 다른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과정은 왜 한 걸까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믿는다면 말이죠.

읽다보니 갑자기 궁금해져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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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원 댓글에는 그냥 이렇다~ 정도로만 써서 제 입장이 잘 드러나지 않았는데, 사실 저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트럼피즘에 책임이 있다는 리 맥킨타이어(덕윤리학자인 맥킨타이어와는 다른 인물입니다.) 의 주장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책의 그 대목에서 맥킨타이어는 라튀르 같은, 소위 '지식은-과학지식마저- 구성된다'라는 명제를 옹호하는 것 처럼 보이는 (라튀르의 주장은 그런게 아닌데도) 학자들도 후기 구조주의자들과 함께 묶어 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 주장하고 비판하는데, 각 철학자들의 사상의 세세한 이해 보다는 (흔히 소칼 사건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라 지명되어온 철학자들에 대한)대중적인 편견에 기대 비판하는 게 눈에 밟혀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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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다른맥킨타이어인가요(?)

말씀하신부분은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로 쉽게 퉁(?)쳐버려서 한번에 싸잡아 비판하려는 부분에 대해 비판하시는거군요!

저 역시도 그런식으로 사유했는지 되돌아보며 반성합니다.

좋은 댓글 감사합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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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냐하면 로고스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을 했다는 것은 논리를 포기하자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데리다는 일상적인 의미에서 이성을 배격한 것이 아니라, (데리다가 보기에) 서양 철학의 저변에 놓여있던 이성을 우위에 두고 그에 반대되는 것을 열위에 두는 이성 숭배적 현상(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다면)을 두고 로고스 중심주의라 칭했기 때문입니다.
  2. 데리다가 언어는 고정적인 의미를 전달할 수 없다고 믿었다고 얘기하는 것은 차연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마찬가지로 차연 역시 기표와 기의의 결합이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미끄러진다는 언어 철학적 맥락에서의 얘기지 우리의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같은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미끄러지는 것을 잠시 고정할 수 있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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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답변 감사드립니다. 로고스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논리를 포기하자 는 지점까지 가는 건 아니군요!

  2. 미끄러지는 것을 잠시 고정할 수 있기에 소통할 수 있다는 건, 저에겐 마치 미시거시물리학 같은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양자나 상대성이론 등은 사실일지라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피부로 느끼는 건 뉴턴의 물리학이잖아요? 그것처럼 지금 우리가 소통할 수 있는 건 어떠한 시공간적 공유라던지, 아니면 평소 우리 감각에 포착되지 않는 어떠한 진실들을 외면하면서 가능해지는지 그런 생각들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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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단 제가 이해하고 배우기로는 해체는 탄압받는 어떤 주체를 해방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해체는 텍스트(데리다에게 텍스트는 단순히 언어만이 아니라 일체의 모든 흔적들, 기호입니다.) 내에 이분법적인 폭력적인 위계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을 밝히려 하지만, 열위에 있는 항목을 우위항으로 올려 고정시키려는 그런 움직임을 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분법적인 구조를 다시 재생산해낼 뿐이죠. 그렇다고 구조 자체를 파괴해버리자는 허무주의를 꿈꾸지도 않습니다. 해체는 이분법적 구조의 위계의 역전 혹은 전복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은 맞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전복의 효과를 유예하며 새로운 개념의 생산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텍스트 내의 이분법적 위계질서는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데리다나 데리다 연구자들은 해체를 어떤 궁극적인 목표를 지향하는 것, 혹은 한 방식으로 고정된 방법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운동 비슷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 같습니다. 다음은 <입장들>에서 데리다의 언급들입니다.

그때 나의 관심을 끌었으며 지금은 다른 방향에 따라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일반 경제'임과 동시에 일종의 해체의 일반적 전략입니다.
이는 형이상학의 이항대립을 단순히 중화시키거나 이를 공고히 하면서 이러한 대립의 닫혀진 영역 속에 단순히 머무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입장들, 64)

한편으로 전복의 단계를 거치는 것, 나는 일반적으로 지나치게 빨리 가치 폄하 되어왔던 이러한 전복의 단계의 필요성을 매우 그리고 끊임없이 강조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필요성에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고전적인 철학적 대립 속에서 우리가 관여하고 있는 것은 서로 마주보는 상태의 평화로운 공존이 아니라 폭력적 위계 질서 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두개의 용어들 중 하나는 다른 하나를 (위상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지배하고 있으며 우위를 점하고 있습니다. 대립을 해체한다는 것은 우선 어떤 주어진 순간에 위계질서를 전복하는 것 입니다… 이러한 단계의 필요성은 구조적이며 이항 대립의 위계질서란 늘 재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끝없는 분석을 필요로 합니다. 그들의 죽음이 결코 사망선고를 준비하지 않음을 알고 있는 작가들과는 달리 전복의 순간은 결코 공백의 시간이 아닙니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이러한 단계에 집착하는 것은 해제된 체계의 내부에서 그리고 그 토양 위에서 작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층위를 이룬, 어긋난 그리고 어긋나게 하는 이러한 이중의 글쓰기에 의해,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을 낮게 하고 승화시키며 이상지향적인 그것의 계보학을 해체하는 이러한 반전의 작업과 더 이상 이전의 체계 속에서는 이해될 수 없었고 지금도 그러한, 새로운 ‘개념’의 돌발적인 출현 사이의 간격을 드러내야 합니다(입장들, 65)

이런 의미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정체성 정치의 원인(혹은 협력자)으로 데리다를 지목하는 움직임이 좀 의아합니다. 데리다가 아무리 정치적으로 소수자의 편을 들었다고 해도, 제가 짧게 이해하기로 정체성 정치는 소수자들의 정체성을 공고히하고 소수자들을 우위항에 올려놓으려는 움직임 같은데 이게 정말 해체의 '전복을 통해 새로운 개념의 생산'으로 나아가려는 데리다의 사상과 어울릴 수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오히려 페넬로페 도이처의 <how to read 데리다>에 따르면, 데리다 자신은 그런 소수자들의 나르시시즘이 향하는 운동에 저항한다고 언급했다 합니다.

  1. '억압받지 않아야 할 질서'라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의 맥락을 볼 때 '진실' 같은 것도 억압받지 않아야 할 질서에 속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리 맥킨타이어의 언급으로 돌아가보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접근법이란 모든 것을 의심하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어디에도 '정답'은 없으며 각자의 '이야기'만 존재할 뿐이다.

이렇게 맥킨타이어는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따를 경우 객관적 사실, 진실 등은 없으며 모든 것은 개별적인 이해에 불과 하다는 결론이 추론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맥킨타이어는 해체주의를 문학이론으로 단순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20세기에는 그밖에도 마르틴 하이데거,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등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상을 제시한 핵심 사상가들이 풍부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몇 가지 기본적인 사상의 윤곽만을 제시하도록 하겠다. 우선 데리다의 '해체주의' 이론이 있다. 해체주의 이론에 따르면, 글쓴이 자신조차 텍스트를 통해 무엇을 의도하고자 했는지 모를 수 있기 때문에 비평가는 텍스트를 조각조각 해체한 뒤 이면에 숨어 있는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전제들에 비추어 텍스트를 검토해야 한다. 해체주의 이론은 1980~1990년 북미 및 유럽 전역의 인문 대학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이제 문학 연구가들은 자신들이 위대한 문학 작품에 대해 이해하고 있던 거의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된 것이다. (탈진실, 168)

이는 데리다 자신부터가 <법의 힘>에서 법 역시 텍스트로서 해체 가능한 대상이라 주장한 것을 생각하면, 잘못된 설명입니다. 제 생각에 맥킨타이어는 핑커 처럼 데리다의 '텍스트 바깥은 없다'라는 언급에서 '텍스트'를 '일체의 모든 흔적'이 아니라 '언어'나 '개별적인 이야기' 같이 협소한 방식으로 오해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오해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데리다 전문가들이 연구서를 냈지만, 김민호 교수님이 최근에 <데리다와 역사>라는 책을 내셨는데, 데리다를 공부하는 데 있어 좋은 입문서니 그 책을 참조해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데리다와 역사>에서 소개되는 데리다의 주장을 과감하게 요약해 보자면, 데리다의 주장은 역사나 객관적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텍스트로서 주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 아닐까 싶네요. <데리다와 역사>에서 김민호 교수님은 프랑스 혁명가 마라Jean-Paul Mara의 죽음을 예로 드십니다. 마라가 죽은 것은 객관적 사실이지만, 마라의 죽음은 혁명으로, 암살로, 과다출혈로, 심정지로 죽었다는 다양한 층위의 텍스트들로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역사란 개념은 내가 방금 전에 그 체계를 환기시켰던 술어들의 힘에 의하여 형이상학에 의해 항상 재활용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일반적 역사와 역사의 일반적 개념을 구분해야 합니다. 알뛰세르가 역사의 '헤겔적' 개념과 표현적 총체성의 개념들에 대해 제시했던 매우 필요한 비판은 단 하나의 유일한 역사, 일반적 역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 유형, 리듬, 기입 양식에 있어 서로 다른 역사들, 즉 성층화되고 분화된 역사들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을 그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솔레르스가 "기념비적"이라고 부르는 역사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나는 이에도 항상 수긍해왔습니다. (입장들, 8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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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감사드립니다.

  1. 제 글 역시도, 데리다를 비롯한 많은 후기구조주의자들 (본인들은 이렇게 불리고 싶지 않았겠지만서두요) 의 철학을 단순화하여 사회적 현상에 대한 설명을 하려고 하지 않았나 반성해봅니다. 그러한 점에서 @friend2442 님께서 댓글로 달아주신 부분에 대해 - "해체주의" 가 탄압받는 주체의 해방이 목적이 아니다- 대부분 공감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이렇게 말씀하신 부분에서는, 제가 데리다에 대해 오독한 부분이 있던 것은 아닌지,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말씀해주신 <데리다와 역사> 라는 책을 참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slight_smile:

  1.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접근법이" 미국의 반지성주의를 촉진시켰다 라는 주장에 제가 동의했던 이유와 맥락에 대해서 말씀드릴까 합니다.

  2. 개인적으로 사회적 운동이나 예술 등은 철학에서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3.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양한 후기구조주의자들의 철학에서 영향을 받아 탄생한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포스트모더니즘을 탈탈탈 털어서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고정된 정답은 없다" 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4. 그것이 후기구조주의철학자들에 대한 오독일지라도, "고정된 정답은 없다" 라는 태제는 객관적 사실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이고 협소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방식을 가능케 했으며, 이는 "전문가적 지식과 개인적 직관 사이에 우열이 없다" 라는 급진적 방식으로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5. 이 지점에서 저는 후기구조주의 철학 -> 포스트모더니즘 -> 반지성주의 로의 영향이 있다고 동의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반지성주의가 촉진되었다 하더라도, 후기구조주의 철학자들이 이를 나서서 정정하거나 자신의 철학에서 이 부분을 더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아니겠습니다. 애초에 자신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런 것이다 하고 말한 것도 아니니깐요. 하지만(혹은 그렇기에), 이러한 반지성주의를 비판하는 철학의 힘이, 아직까지 제게는 후기구조주의 철학에서 찾기가 쉽지 않아 보였기에 위와같이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사실 이 글에서 핵심은 아직까지 제게는 입니다. 추천해주신 책들을 읽으며 언젠가 조금 더 데리다와 푸코 등의 철학을 더 이해하면서 그 안에서 반지성주의에 대한 비판을 좀 더 공부해보겠습니다/공부해보고 싶습니다. :slight_sm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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