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사고는 별개이다"

아, 참… 여러 가지로 어그로가 끌리는 제목과 내용이네요.

(1) 수천 년 전부터 철학자들은 언어가 사고의 핵심이라고 강조해왔다?

수천 년 전부터 철학자들은 언어가 사고의 핵심이라고 강조해왔다.

플라톤은 사고는 “조용한 영혼의 내적 대화”라고 표현했고

철학자들이 수천 년 동안 언어를 과대평가하였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기자님이 플라톤을 인용한다는 게 굉장히 역설적이네요. 정작 플라톤은 언어를 폄하한 것으로 유명한 철학자거든요. 언어에 대해 다루는 대표적인 플라톤의 저술인 『크라튈로스』가 이 점을 잘 보여주죠. 플라톤은 이 저서에서 언어를 통해 사물을 탐구하려는 시도의 한계를 강조하니까요. 심지어 '영혼의 내적 대화'나 '소리 없는 말' 같은 표현조차 언어를 강조하기 위해 제시된 표현이 아니에요. 오히려 언어를 초월하여 이루어지는 이데아에 대한 직관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죠. 가다머가 이 점을 잘 지적해요.

"플라톤에 따르면 언어라는 것은 사물보다 전면에 나서는 결함이 있어서 진정한 변증술 사상가라면 사물의 감각적 외양과 마찬가지로 제처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데아를 직관하는 순수한 사유dianoia는 영혼들 사이의 대화이기 때문에 '소리 없는 말aneu phōnēs'이라는 것이다. 로고스는 그런 사유에서 발원하여 '입을 통해 표현되는 술어rheuma dia tou stomatos mata phthogou'라 일컬어진다. 감각적인 소리로 표현되는 것은 고유한 진리치를 가질 수 없다고 단언하는 것이다.

[…]

플라톤의 사유에서 언어의 문제는 인식의 한 계기일 뿐이며, 언어를 포함한 인식의 계기들은 인식이 추구하는 사물 그 자체에 의해서만 변증법적 과정의 잠정적 계기로 드러날 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플라톤은 이데아를 발견함으로써 언어의 고유한 본질을 더욱 철저히 은폐한다."

(한스게오르크 가다머, 『진리와 방법: 철학적 해석학의 기본 특징들』, 제2권, 임홍배 옮김, 문학동네, 2013, 335-336쪽.)

이런 언어 폄하가 철학의 역사에서는 훨씬 일반적이었어요. 언어란 사물에 다가가기 위한 수단일 뿐, 결코 그 자체가 의의를 지니지는 못한다는 생각 말이에요. 그래서 철학자들은 오랜 세월동안 언어를 넘어서는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든 있는 그대로 그려내려고 했어요. 바로 그런 시도들이 언어 이전의 '이데아'에 대한 강조, '지적 직관'에 대한 강조, '감각 자료'에 대한 강조, '사물 자체'에 대한 강조 등으로 철학사에서 번번히 나타났고요.

'언어'라는 주제에 특별히 철학이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 대륙철학과 후기-분석철학부터에요. 대륙철학에서는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테제 하에 시적 언어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가다머가 "이해될 수 있는 존재는 언어이다."라는 테제로 자신의 해석학을 집약하고, 데리다가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라는 테제로 해체주의를 출범시키고, 라캉이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라는 테제로 정신분석을 새로운 방향으로 정위하면서 '언어'라는 주제가 급부상했죠. 분석철학은 원래부터 언어를 강조해 오긴 하였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 콰인의 「경험주의의 두 도그마」, 셀라스의 「경험주의와 심리철학」, 데이비슨의 「개념적 도식이라는 바로 그 생각에 대하여」라는 유명한 논문들 이후로 감각 자료에 대한 기존 경험주의적 전제들을 포기하면서 '언어게임', '이유의 논리적 공간', '개념적 도식'이라는 주제들에 더욱 철저히 주목하게 된 것이고요.

(2) 철학자들이 주목하는 '언어'란 무엇인가?

게다가, 이때 철학자들이 말하는 '언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도 고려될 필요가 있어요. 여기서 말하는 '언어'란 언어학이나 인지과학 등에서 다루어지는 한국어, 영어, 독일어, 일본어 같은 언어와는 층위가 좀 달라요. 물론, 이런 의미의 언어와 철학적 주제가 되는 언어가 완전히 별개의 대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1960년대 이후의 철학적 논의에서 철학자들이 무슨 실증과학적 관심 때문에 언어에 주목하게 된 것은 전혀 아니에요. 가령, 데리다의 대표 저서는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이고, 이때 '그라마톨로지(grammatology)'는 직역하면 '문자학(文字學)'이지만, 데리다의 철학이 무슨 한자나 알파벳 같은 문자들을 연구하고 있는 게 아닌 것처럼요.

아주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소위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나 '후기-분석철학(post-analytic philosophy)'에서 주목하는 '언어'란 표상/실재 혹은 주체/객체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사회-문화-역사적 지평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전통적으로 철학자들은 "우리의 세계는 표상의 세계이고, 실재는 그 넘어에 존재해." 혹은 "우리의 세계는 주관의 세계이고, 객관은 그 넘어에 존재해."와 같은 주장을 하였지만, 현대철학은 이런 식의 이분법이 여러 가지 잘못된 철학적 전제로부터 발생하는 환상이라고 폭로하려는 거죠. 그리고 그 폭로 과정에서 '언어게임', '텍스트', '이유의 논리적 공간', '개념적 도식' 배후에 놓인 '이데아', '감각 자료', '사물 자체'에 직접 다가가고자 하는 시도가 성공할 수 없다는 걸 지적하는 거고요.

그래서 이때 철학자들이 말하는 '언어'란 단순히 한국어, 영어, 독일어, 일본어 같은 언어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오히려 사회-문화-역사적으로 형성된 개념 체계를 벗어나서 세계를 순수하게 바라보려는 시도가 불가능하다는 게 철학자들의 요지에요. 오죽하면, 데리다는 '텍스트'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모든 것이 텍스트라고 하면서 원자폭탄조차 텍스트라고 답한 적이 있어요(J. Derrida, "Deconstruction in America: An Inverview with Jacques Derrida",Society for Critical Exchange, Vol. 17, 1985, p. 20) 자신이 말하는 '텍스트'라는 것이 단순히 글로 쓰이거나 말로 발화된 의미 체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기호 관계를 가리킨다는 거죠.

(3) 인지과학적 실험 결과가 철학적 테제를 논박하는가?

그래서 저런 인지과학적 실험 결과를 가지고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나 "이해될 수 있는 존재는 언어다." 같은 철학적 테제들이 논박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오산이에요. 오히려 그런 식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현대철학이 정확히 무슨 작업을 하고 있는지를 자신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스스로 방증하고 있을 뿐이에요. 쟁점은, '표상/실재' 이분법 혹은 '주체/객체' 이분법이 정당한지 정당하지 않은지에 달려 있어요. 우리가 소위 '신의 관점(God's eye view)'이나 '아무 곳도 아닌 곳으로부터의 관점(view from nowehre)'을 가질 수 있는지 없는지가 핵심인 거죠. 모든 선입견과 맥락으로부터 벗어나서 실재를 완전히 순수하게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지, 혹은 그런 순수한 '실재(Reality)'가 애초에 존재하기나 하는지가 철학자들의 논쟁거리인 거예요.

언어를 담당하는 뇌의 부분과 추론을 담당하는 뇌의 부분이 다를 수 있죠. 실어증에 걸린 사람이 체스를 두는 일이 있을 수도 있고요. 그런데 철학자들이 이걸 몰라서 언어를 강조한 게 아니에요.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처럼 1945년에 출판된 철학 고전에서조차 이런 사례들은 수없이 많이 등장해요.) 오히려 언어의 편재성(ubiquity)을 주장하는 철학자들이라면 위의 인지과학적 실험 결과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겠죠.

(a) 그 실험은 어떤 암묵적 가설을 전제하고 있는가?
(b) 그 실험은 어떤 암묵적 평가 기준을 전제하고 있는가?
(c) 그 실험을 수행한 연구원들 사이에는 어떤 권력 관계가 숨겨져 있는가?
(d) 그 실험을 수행한 연구원들은 자신들에게 후원금을 제공하는 기관으로부터 과연 자유로운가?
(e) 그 실험의 결과가 출판된 학술지는 어떤 이데올로기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가?

아주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만약 이런 식의 질문들로부터 해당 실험이 자유롭지 않을 경우, 사고가 언어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그 실험조차 결국 '언어적' 질서 속에서 수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여기서 '언어'라는 것은 단순한 의사소통 매개체를 넘어서, 그 의사소통에 동반되는 온갖 사회-문화-역사적 질서들을 포함하는 전체 구조를 말하는 것이니까요. 교수와 대학원생, 학술지와 연구자, 학자와 대중 사이에 성립하는 온갖 권력 관계와 이데올로기 관계도 모두 '언어'에 포함되는 거죠. 특정한 발화가 사회에서 지니는 위치를 결정하는 데 그 모든 것들이 수행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치니까요. 그리고 이 점에서, 인지과학자들이 생각하는 '언어'라는 개념보다, 철학자들이 염두에 두는 '언어'라는 개념은 훨씬 포괄적이고 추상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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