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사고는 별개이다"

https://m.news.nate.com/view/20240620n06901

제목이 너무 낚시성이지만, 흥미로운 내용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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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엄청 놀라운 것 같지는 않아요.

언어가 사고의 핵심이라는 주장은, 사실 50년대 촘스키의 보편 문법론이랑 이 촘스키 언어학에 일정 부분 영향을 받은 초창기 인지과학자들의 언어 사고 가설 (제리 포더 등)에서 시작된 것인데, 이제 50년이 지난만큼....많은 변화가 이루어졌죠.

기사에도 나와있지만, 60년대 철학계는 이미 오스틴 - 비트겐슈타인을 거쳐서 화용론이라는, 의사소통에 더 집중하는 분야를 개척했고, (물론 이후 70년대에는 다시 양상 개념을 활용해 의미론을 더 정교화하는 작업을 언어 철학에서 더 많이 하긴 했지만 말이죠) 70년대 언어학계에서도 인지언어학처럼, 언어 능력을 더 큰 '인지 능력'의 일부로 다루는 여러 시도들이 나왔으니깐요. (조지 레이코프 등등)

(2)

게다가 어떤 의미에서 사고(thought)와 인지(cognition)이라는 단어/개념이 지칭하는 범위 자체가 달라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곤 합니다.

비 인간 동물이라던가, 식물 등도 기억을 가지고 행동을 수정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가지는 것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최소 인지(minimal cognition)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도 꾸준히 나오고, 문어/조류/포유류 같은 경우 인간과 거의 흡사한 동물 인지(animal cognition)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도 나오죠.
(아마 미래의 연구 방향은 인간 인지와 동물 인지가 정확히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인간 중에서도 뇌질환/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는 장애인의 인지는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AI와 이 인지 기능 간의 상관 관계가 무엇인지 등등.

기존 인간이 가진 [고유하다고 가정된] 심적 능력을 '인지'라고 말했던 것과 다르게, 굉장히 세분화되고 디테일한 연구가 진행될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가진 언어 능력이라 부르는 것도, 어쩌면 더 세분화 될지도 모르죠.
예컨대 화용론처럼 맥락을 알아듣는 것은 거울 뉴런처럼 상대의 마음을 파악하는 것과 연관된 능력이고, 의미론의 기반이 되는 개념은 이와 독립된 일종의 세상을 분할해서 저장하는 정보 기능 능력이고, 한편 비유는 더 넓게는 공통된 패턴을 찾으려는 추론 능력의 일부가 진화한 것이라 나올 수도 있고, 등등등.

여튼 현 철학 분야에서 가장 흥미롭게 보는 몇 가지 분야 중 하나입니다. 비교 인지 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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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 여러 가지로 어그로가 끌리는 제목과 내용이네요.

(1) 수천 년 전부터 철학자들은 언어가 사고의 핵심이라고 강조해왔다?

수천 년 전부터 철학자들은 언어가 사고의 핵심이라고 강조해왔다.

플라톤은 사고는 “조용한 영혼의 내적 대화”라고 표현했고

철학자들이 수천 년 동안 언어를 과대평가하였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기자님이 플라톤을 인용한다는 게 굉장히 역설적이네요. 정작 플라톤은 언어를 폄하한 것으로 유명한 철학자거든요. 언어에 대해 다루는 대표적인 플라톤의 저술인 『크라튈로스』가 이 점을 잘 보여주죠. 플라톤은 이 저서에서 언어를 통해 사물을 탐구하려는 시도의 한계를 강조하니까요. 심지어 '영혼의 내적 대화'나 '소리 없는 말' 같은 표현조차 언어를 강조하기 위해 제시된 표현이 아니에요. 오히려 언어를 초월하여 이루어지는 이데아에 대한 직관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죠. 가다머가 이 점을 잘 지적해요.

"플라톤에 따르면 언어라는 것은 사물보다 전면에 나서는 결함이 있어서 진정한 변증술 사상가라면 사물의 감각적 외양과 마찬가지로 제처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데아를 직관하는 순수한 사유dianoia는 영혼들 사이의 대화이기 때문에 '소리 없는 말aneu phōnēs'이라는 것이다. 로고스는 그런 사유에서 발원하여 '입을 통해 표현되는 술어rheuma dia tou stomatos mata phthogou'라 일컬어진다. 감각적인 소리로 표현되는 것은 고유한 진리치를 가질 수 없다고 단언하는 것이다.

[…]

플라톤의 사유에서 언어의 문제는 인식의 한 계기일 뿐이며, 언어를 포함한 인식의 계기들은 인식이 추구하는 사물 그 자체에 의해서만 변증법적 과정의 잠정적 계기로 드러날 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플라톤은 이데아를 발견함으로써 언어의 고유한 본질을 더욱 철저히 은폐한다."

(한스게오르크 가다머, 『진리와 방법: 철학적 해석학의 기본 특징들』, 제2권, 임홍배 옮김, 문학동네, 2013, 335-336쪽.)

이런 언어 폄하가 철학의 역사에서는 훨씬 일반적이었어요. 언어란 사물에 다가가기 위한 수단일 뿐, 결코 그 자체가 의의를 지니지는 못한다는 생각 말이에요. 그래서 철학자들은 오랜 세월동안 언어를 넘어서는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든 있는 그대로 그려내려고 했어요. 바로 그런 시도들이 언어 이전의 '이데아'에 대한 강조, '지적 직관'에 대한 강조, '감각 자료'에 대한 강조, '사물 자체'에 대한 강조 등으로 철학사에서 번번히 나타났고요.

'언어'라는 주제에 특별히 철학이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 대륙철학과 후기-분석철학부터에요. 대륙철학에서는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테제 하에 시적 언어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가다머가 "이해될 수 있는 존재는 언어이다."라는 테제로 자신의 해석학을 집약하고, 데리다가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라는 테제로 해체주의를 출범시키고, 라캉이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라는 테제로 정신분석을 새로운 방향으로 정위하면서 '언어'라는 주제가 급부상했죠. 분석철학은 원래부터 언어를 강조해 오긴 하였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 콰인의 「경험주의의 두 도그마」, 셀라스의 「경험주의와 심리철학」, 데이비슨의 「개념적 도식이라는 바로 그 생각에 대하여」라는 유명한 논문들 이후로 감각 자료에 대한 기존 경험주의적 전제들을 포기하면서 '언어게임', '이유의 논리적 공간', '개념적 도식'이라는 주제들에 더욱 철저히 주목하게 된 것이고요.

(2) 철학자들이 주목하는 '언어'란 무엇인가?

게다가, 이때 철학자들이 말하는 '언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도 고려될 필요가 있어요. 여기서 말하는 '언어'란 언어학이나 인지과학 등에서 다루어지는 한국어, 영어, 독일어, 일본어 같은 언어와는 층위가 좀 달라요. 물론, 이런 의미의 언어와 철학적 주제가 되는 언어가 완전히 별개의 대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1960년대 이후의 철학적 논의에서 철학자들이 무슨 실증과학적 관심 때문에 언어에 주목하게 된 것은 전혀 아니에요. 가령, 데리다의 대표 저서는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이고, 이때 '그라마톨로지(grammatology)'는 직역하면 '문자학(文字學)'이지만, 데리다의 철학이 무슨 한자나 알파벳 같은 문자들을 연구하고 있는 게 아닌 것처럼요.

아주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소위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나 '후기-분석철학(post-analytic philosophy)'에서 주목하는 '언어'란 표상/실재 혹은 주체/객체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사회-문화-역사적 지평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전통적으로 철학자들은 "우리의 세계는 표상의 세계이고, 실재는 그 넘어에 존재해." 혹은 "우리의 세계는 주관의 세계이고, 객관은 그 넘어에 존재해."와 같은 주장을 하였지만, 현대철학은 이런 식의 이분법이 여러 가지 잘못된 철학적 전제로부터 발생하는 환상이라고 폭로하려는 거죠. 그리고 그 폭로 과정에서 '언어게임', '텍스트', '이유의 논리적 공간', '개념적 도식' 배후에 놓인 '이데아', '감각 자료', '사물 자체'에 직접 다가가고자 하는 시도가 성공할 수 없다는 걸 지적하는 거고요.

그래서 이때 철학자들이 말하는 '언어'란 단순히 한국어, 영어, 독일어, 일본어 같은 언어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오히려 사회-문화-역사적으로 형성된 개념 체계를 벗어나서 세계를 순수하게 바라보려는 시도가 불가능하다는 게 철학자들의 요지에요. 오죽하면, 데리다는 '텍스트'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모든 것이 텍스트라고 하면서 원자폭탄조차 텍스트라고 답한 적이 있어요(J. Derrida, "Deconstruction in America: An Inverview with Jacques Derrida",Society for Critical Exchange, Vol. 17, 1985, p. 20) 자신이 말하는 '텍스트'라는 것이 단순히 글로 쓰이거나 말로 발화된 의미 체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기호 관계를 가리킨다는 거죠.

(3) 인지과학적 실험 결과가 철학적 테제를 논박하는가?

그래서 저런 인지과학적 실험 결과를 가지고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나 "이해될 수 있는 존재는 언어다." 같은 철학적 테제들이 논박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오산이에요. 오히려 그런 식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현대철학이 정확히 무슨 작업을 하고 있는지를 자신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스스로 방증하고 있을 뿐이에요. 쟁점은, '표상/실재' 이분법 혹은 '주체/객체' 이분법이 정당한지 정당하지 않은지에 달려 있어요. 우리가 소위 '신의 관점(God's eye view)'이나 '아무 곳도 아닌 곳으로부터의 관점(view from nowehre)'을 가질 수 있는지 없는지가 핵심인 거죠. 모든 선입견과 맥락으로부터 벗어나서 실재를 완전히 순수하게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지, 혹은 그런 순수한 '실재(Reality)'가 애초에 존재하기나 하는지가 철학자들의 논쟁거리인 거예요.

언어를 담당하는 뇌의 부분과 추론을 담당하는 뇌의 부분이 다를 수 있죠. 실어증에 걸린 사람이 체스를 두는 일이 있을 수도 있고요. 그런데 철학자들이 이걸 몰라서 언어를 강조한 게 아니에요.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처럼 1945년에 출판된 철학 고전에서조차 이런 사례들은 수없이 많이 등장해요.) 오히려 언어의 편재성(ubiquity)을 주장하는 철학자들이라면 위의 인지과학적 실험 결과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겠죠.

(a) 그 실험은 어떤 암묵적 가설을 전제하고 있는가?
(b) 그 실험은 어떤 암묵적 평가 기준을 전제하고 있는가?
(c) 그 실험을 수행한 연구원들 사이에는 어떤 권력 관계가 숨겨져 있는가?
(d) 그 실험을 수행한 연구원들은 자신들에게 후원금을 제공하는 기관으로부터 과연 자유로운가?
(e) 그 실험의 결과가 출판된 학술지는 어떤 이데올로기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가?

아주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만약 이런 식의 질문들로부터 해당 실험이 자유롭지 않을 경우, 사고가 언어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그 실험조차 결국 '언어적' 질서 속에서 수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여기서 '언어'라는 것은 단순한 의사소통 매개체를 넘어서, 그 의사소통에 동반되는 온갖 사회-문화-역사적 질서들을 포함하는 전체 구조를 말하는 것이니까요. 교수와 대학원생, 학술지와 연구자, 학자와 대중 사이에 성립하는 온갖 권력 관계와 이데올로기 관계도 모두 '언어'에 포함되는 거죠. 특정한 발화가 사회에서 지니는 위치를 결정하는 데 그 모든 것들이 수행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치니까요. 그리고 이 점에서, 인지과학자들이 생각하는 '언어'라는 개념보다, 철학자들이 염두에 두는 '언어'라는 개념은 훨씬 포괄적이고 추상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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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수준이 높은 댓글을 남겨주셔서 감탄하면서 봅니다. 그와 별개로 저는 YOUN님의 주요 테제인 "저런 실험결과가 철학적 테제를 논박하는가"에 대한 의견에 대해 상당히 설득되었습니다만, 몇몇 질문들이 떠오르기 때문에 댓글을 남겨봅니다.

(1) 기사에서 얘기하는 "언어"가 철학자들(여기서는 YOUN님이 언급하신 철학적 전통에 속한 자들)이 말하는 '언어'와 지칭하는 바가 다른 거 같기는 합니다. 하지만 철학자이 상정하는 '언어'가 아니라 다른 의미에서 '언어'(인지과학에서의 언어)라는 의미로 자비의 원칙을 적용하여 기사를 읽어보면 사실 그 자체는 상당히 재미있는 얘깃거리이긴 합니다. 저기서 정의한 '사고'와 '언어'의 관계(물론 학술논문이 아니기 때문에 정의가 그렇게 명시적으로 명료하게 나타나지는 않는 거 같지만)에 대해 인지과학 실험이 상당한 직관과 참고할만한 경험적 자료를 제공해주는 거 같습니다.

(2) 그러면 저 기사의 목적이 철학자들의 얘기하는 언어와 사고에 대한 철학적 테제를 반박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YOUN님 댓글을 읽고 기사를 다시 읽어보니까 사실 철학자들을 래퍼런스한건 "수천 년 전부터 철학자들은 언어가 사고의 핵심이라고 강조해왔다." 와 "플라톤은 사고는 “조용한 영혼의 내적 대화”라고 표현~" 이정도인 거 같거든요. 물론 첫문장이니 임팩트가 쎄긴 하지만, 사실 그 이후에 래퍼런스된 연구나 학자들은 거의 인지과학이나 언어학에 속하는 사람들이고, 마지막에 철학교수도 인지과학적 의미로 '언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듯 합니다. 이로 보아 저는 기사가 어디까지난 인지과학적 의미에서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한 얘기를 하기 위해 철학자'도' 래퍼런스한 것이지, (YOUN님이 말씀하신 철학적 전통에서 ) 주제를 철학적 테제로 세팅하기 위한 거 같지는 않아보이긴 합니다.

(3) 여기서부터는 저의 뇌피셜이지만, 저런 인지과학적 연구가 YOUN님이 말한 철학적 테제에 영향을 줄 수있는지는 좀더 심도깊은 논의가 필요해보입니다. 하지만 모든 철학 연구 분야에서 저 인지과학 연구가 도움이 안될 수 있는지, 아니면 회의적으로 전망될 것인지는 물음표가 붙기는 합니다. 저런 인지과학적 의미에서 언어와 사고의 관계(물론 제대로 논변을 갖추려면 더욱 엄밀한 정의가 필요해보입니다)에 관심을 가지는 철학적 전통에 속하는 철학자들도 충분히 있을 법 할 거 같거든요.

그래서 정리하면

  • 사실 기사에서 얘기하는 언어는 인지과학적 '언어'로 자비의원칙을 가지고 해석해도 될 거 같다. 그런 언어와 사고의 관계도 충분히 흥미로운 주제다.
  • 기사를 보고 "인지과학 연구성과가 언어에 대한 철학적 테제에 영향을 주는 지 회의적이다" 긴 댓글을 쓰셨는데, 기사가 그런 철학적 테제를 겨냥한것인지 의심스러워보인다. (허수아비를 때리는 거 아닌가)
  • YOUN님이 말씀하신 철학적 전통 외에 다른 철학적 전통에 속하는 사람들은 기사에 소개된 인지과학 연구자들과 유사한 의미의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대해 관심이 있고, 거기서는 기사에 소개된 인지과학 연구를 참고할 수도 있을 거 같다. 말씀하시는 철학적 전통에 속하는 사람이 그런 다른 분야의 철학자들을 대표할 수 있는가? 인지과학 성과가 "철학 전체"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너무 과하게 비관적으로 전망하시는 거 아닌가하는 의문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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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과학적 언어"라는 것은 한국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수준의 "자연언어"를 일컫는 것인가요? 만약 인지과학에서의 연구가 이러한 자연언어의 층위에 한정되는 것이라면 철학자들에게는 좀 재미없는 연구이긴 합니다. 해당 연구는 "사고에 자연언어가 필수적이지 않다"라는 결론일테고, 여기서 "자연언어"란 우리에게 "경험적으로" 알려진 자연언어의 리스트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를 선제할테고, 따라서 새로운 자연언어(를 쓰는 부족)이 발견될 경우, 해당 인지과학의 연구는 곧바로 유효성을 잃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적" 연구의 한계를 넘어, 사고와 언어일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보편적 주장을 하고싶을 경우 실제로 존재하는 그리고 가능한 자연언어의 공통된 속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죠. 이것이 가능해야, 연구결과를 사고와 언어일반의 관계로 일반화할 수 있습니다. 철학자들이 특정한 자연언어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언어적인 것"에 주목하는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에 따라 철학자들 중에서 인지과학에 친화적인 철학자들, 예컨대 위에서 Mandala 님이 언급한 J. Fodor 같은 경우 인간의 mental states들이 언어에서의 의미론적 관계에 상응하는 (isomorphic)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사고 자체가 넓은 의미의 언어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이러한 논의들은 왜 철학자들이 자연언어에 국한되지 않고 넓은 의미의 언어에 주목하는지에 대한 한 이유가 되겠습니다.

당연하게도 철학자들 역시 인지과학의 연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그룹과 그렇지 않은 그룹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전자가 여러가지 이유로 대세인 것 같기는 합니다.) 반면 후자의 그룹은 인지과학 자체를 불신한다기 보다는, 인지과학의 연구가 가지는 "과도한 해석" 혹은 "과도한 함축"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사에서의 연구는 뇌 안의 특정 부위들의 활동을 스캔한 뒤, 이를 통해 "사고"와 "언어"에 대한 결론으로 점프하고 있습니다. 반면, 인지과학에 회의적인 철학자들의 다수에 따르면, "사고"나 "언어"와 같은 것들은 sub-personal 수준의 무언가로 환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칠게 말해서 "사고"나 "언어"는 내 머릿 속 (in my head; sub-personal; internal)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세계 사이의 관계(relation)에서 성립하는 것이죠. 따라서 애초에 "사고"나 "언어"는 sub-personal 한 인지과학의 층위에서 "원리적으로" 포착될 수 없는 것이라고 이들은 주장합니다. 만약 이들의 주장이 맞다면, "사고"와 "언어"가 가지는 관계에 대한 인지과학의 어떠한 연구도 이미 선험적 한계를 가지고 있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인지과학에 "일부" 철학자들이 회의적인 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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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b님이 잘 말씀해주셨는데, 몇 가지 부연 설명을 드리고 싶어요. 언어가 철학에서 중요한 주제로 부각된 것은 현대철학에서 일어난 소위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분석철학에서는 20세기 초반에 프레게, 러셀,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을 통해 언어의 한계를 기준으로 사고의 한계를 긋고자 한 시도가 이루어졌고, 대륙철학에서는 1960년대 이후에 하이데거, 가다머, 데리다, 라캉 등이 언어와 사유와 존재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을 강조하였거든요.

이렇듯 현대철학 전반에서 언어가 커다란 이슈로 떠올랐고 여전히 많은 철학자들에게 언어가 중요하게 여겨지다 보니, 철학 안에서 이루어지는 언어에 대한 논의들은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대부분 언어적 전회에 대한 평가와 관련되어 있어요. 기사에서 언급된 촘스키의 연구도 넓게 보면 언어적 전회의 흐름 안에 놓여 있고요. 오히려 언어적 전회의 맥락을 벗어나면 (a) "철학자들은 언어가 사고의 핵심이라고 강조해왔다."라면서 철학자들 일반의 입장과 언어의 중요성을 굳이 연결 지을 이유도 없을 뿐더러, (b) 언어가 철학적으로 중요성을 지닌다는 주장 자체가 의문스러운 것이 되고 말죠.

그래서 저는 저 기사를 쓴 기자분이나 저 기사에서 제시된 인지과학적 연구를 수행한 분들이 언어적 전회에 대한 논의를 분명히 겨냥하고 있을 거라고 봐요. 언어적 전회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만이 "철학자들은 언어가 사고의 핵심이라고 강조해왔다."라는 주장을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그 주장에 대해 동의하든 비판하든 할 수 있는 거죠. 언어적 전회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언어가 철학자들에게 중요한지조차 알 수 없으니까요.

다만, 언어적 전회가 영향을 미치는 철학의 영역이 너무나 광범위하다 보니, 경우에 따라서는 이 논의들의 쟁점이 다소 불분명해 질 때도 있어요. 특히, 지각철학처럼 철학과 인지과학이 자주 뒤섞이는 분야에서는 '언어'나 '개념'이라는 단어로 두 분야가 서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다르다 보니, 이런 혼동이 더 자주 발생하기도 하고요.

저는 인지과학의 논의들이 철학에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제가 지각철학에서 흥미롭게 보았던 존 캠벨(John Campbell)의 논의는 '시각적 주의 집중에 대한 불주의적 지도 이론(Boolean map theory of visual attention)'이라는 인지과학 이론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던 걸요. 캠벨의 책에는 아예 이 논의를 도표와 그림까지 인용하면서 자세히 설명할 정도로요. (캠벨은 감각을 통해 대상을 '선택'하는 과정과 표상을 통해 대상에 '접근'하는 과정 사이의 차이를 이 이론에 근거하여 구별하거든요.)

그러나 이렇듯 인지과학적 연구가 철학적 논의에 유의미한 기여를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해서, 인지과학이 그 자체로 철학적 논의를 반박하거나 옹호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특별히, 언어에 대한 인지과학자들의 경험적인 연구 성과들이 언어에 대한 철학자들의 선험적 탐구들과 같은 층위에 놓이는 것은 아니죠. 저는 (a) 인지과학이 종종 철학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아요. 단지 (b) 인지과학이 언어의 편재성에 대한 철학의 통찰을 비판하는 데 사용될 수는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에요. 적어도, 저 기사의 내용은 확실히 이 두 가지 층위를 구분하지 못하였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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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인지과학에서의 연구가 이러한 자연언어의 층위에 한정되는 것이라면 철학자들에게는 좀 재미없는 연구이긴 합니다

이 부분에서 기사의 대상이 철학자인지를 생각해봐야할 거 같습니다. 제 생각에 경험적인 언어에 한정하더라도 일반 대중에서 교양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얘기일 거 같거든요.

여기서 "자연언어"란 우리에게 "경험적으로" 알려진 자연언어의 리스트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를 선제할테고, 따라서 새로운 자연언어(를 쓰는 부족)이 발견될 경우, 해당 인지과학의 연구는 곧바로 유효성을 잃게 됩니다

철학적으로 엄밀한 의미에서는 정당화가 안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있는 자연언어에서 발생한 법칙성에 대한 보고를 "앞으로 그 법칙이 만족안되는 연구가 발견되면 " 의미를 잃게 된다는 건 귀납연구 대부분(그러니까 철학을 제외한 대부분 과학연구활동)에 대해서는 너무 엄격한 잣대가 아닌가하는 의문이 듭니다.

당연하게도 철학자들 역시 인지과학의 연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그룹과 그렇지 않은 그룹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전자가 여러가지 이유로 대세인 것 같기는 합니다.)

저는 후자의 그룹의 테제에서 인지과학이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특별히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YOUN님이

  1. 철학자들이 주목하는 '언어'란 무엇인가?

이렇게 인지과학적 연구로 밝혀지는 특성을 가진 언어들에 대해서 철학자들이 전혀 주목하지 않는듯한 뉘앙스로 얘기하셔서 (3)에 대해 질문한 것일뿐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오히려 참고하는 쪽이 대세인 거 같은데, 후자가 마치 철학자들을 대표하는 듣한 뉘앙스로 들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물론 이건 제 오해일 수도 있습니다.)

YOUN님께서 (2)에서 제가 제시한 허수아비 때리기에 대해 아래와 같이 해명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1) 언어적 전회의 맥락을 겨냥하지 않고서는 "철학자들은 언어가 사고의 핵심이라고 강조해왔다."라던가 "언어가 철학적으로 중요성을 지닌다는 주장"을 할 수 없다
(2) 기자는 해당 주장을 했다

그런데, 저는 이런 해명을 듣자마자 기자가 "언어적 전회에 대한 맥락을 겨냥한다"는 게 상당히 의문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 그냥 일반적으로 추정해봤을 때, 길에 지나가던 대학학위를 졸업한 교양있는 사람 중 언어적 전회에 대해 책 1권이라도 읽어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일단 저랑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은 다 대학을 나왔지만, 막상 철학책을 가끔 취미로 읽는 저는 별종 취급을 받고, 대부분은 '언어적 전회'라는 말을 하면 갸우뚱하는 반응이 나올 겁니다. 그래서 기사에 래퍼런스로 철학자들을 언급한 정도로 언어적 전회라는 구체적인 철학적 운동을 겨냥했다는 추론은 너무 과한 비약같아보입니다.
  • 만약 언어적 전회를 겨냥했다면 (의도적으로 빼신 건지 모르겠지만) "수천 년 전부터" 라는 워딩을 붙였을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1900년대 이후라던가, 누구누구 이후로 라는 표현으로 더욱 정확하게 명시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 의견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철학적 사조들은 대중적으로 소개될 때 매우 간략화되거나 때로는 왜곡되어 알려집니다. 서강올빼미에서 얼마 전에 이슈가 되었던 철학사 논쟁의 표어들처럼, "신 중심의 중세에서 벗어나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라든가 "데카르트 이래 보편화된 이성 중심의 근대적 주체" 같은 표어들이 아무런 맥락 없이 퍼지게 되는 것이죠. 저는 저 기사를 쓴 기자 분이나 저 연구를 진행한 연구원들이 학술적으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언어적 전회'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저렇게 단순화된 주장을 제시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러나 저는 그분들이 언어적 전회로부터 파생된 표어들을 염두에 두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언어의 철학적 의의에 대해 주목할 수조차 없었을 거라고 봐요. 그리고 이런 추측은 그다지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에요.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이다." 같은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표어라든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같은 하이데거의 유명한 표어는 워낙 대중적이라, 현대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표어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 대중적 표어를 매우 나이브하게 받아들여서 "철학자들은 언어가 사고의 핵심이라고 강조해왔다."라고 주장한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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