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의 투명성에서 감각론적 표상주의로: 내재주의에 대한 캠벨의 비판과 감각주의에 대한 카삼의 비판을 종합하기

Ⅰ. 들어가는 말

버클리의 퍼즐을 대하는 캠벨과 카삼의 태도에는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두 인물은 버클리의 퍼즐을 발생시키는 잘못된 인식론적 가정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문제를 해소하고자 한다. 다만, 버클리의 퍼즐에서 무엇이 ‘잘못된 인식론적 가정’인지에 대해서는 그들의 의견이 서로 다르다. 캠벨은 버클리의 퍼즐이 내재주의에서 기인하는 문제라고 보는 반면, 카삼은 버클리의 퍼즐이 감각주의에서 기인하는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본고는 우선 캠벨과 카삼이 버클리의 퍼즐을 정식화하는 방식을 간략히 소개할 것이다(Ⅱ). 다음으로, 내재주의에 대한 캠벨의 비판과 감각주의에 대한 카삼의 비판이 과연 버클리의 퍼즐을 제대로 해소할 수 있는지를 각각 평가할 것이다(Ⅲ). 마지막으로, 두 인물의 입장을 종합하여 버클리의 퍼즐을 해소하는 더욱 철저한 논증을 구성할 것이다(Ⅳ).

Ⅱ. 버클리의 퍼즐이란 무엇인가?

버클리는 영국 경험론에 근거하여 외부세계에 대한 관념론을 주장한 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감각 경험이 인식을 성립시키는 원천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여 우리가 마음 독립적 대상에 대한 이해나 지식을 결코 가지지 못한다는 회의적 결론을 도출한다. 즉, 그에 따르면, 우리가 대상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내용은 감각 경험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개념과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인식론적 토대는 바로 감각 경험이다. 문제는 감각 경험이 결국 우리의 정신이 지닌 주관적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주관적 감각 경험과 외부세계의 객관적 실재성은 서로 무관할 수 있다. 우리가 특정한 감각 경험을 갖는다는 사실은 대상이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감각 경험이 ‘F임’이라는 속성을 지닌다는 사실로부터 대상이 F라는 사실을 도출하고자 하는 시도는 논리적 비약일 뿐이다. 따라서 외부세계에 대한 우리의 모든 인식이 감각 경험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외부세계의 실재성에 대해 정당하게 이야기할 가능성이 사라지고 만다. 캠벨은 버클리의 논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중간 크기 세계의 개념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우리의 감각 경험에서 정초되며,
(2) 감각 경험은 오직 감각 경험 자신에 대한 개념만을 제공한다.

(Campbell, 2014b, 26)

캠벨은 버클리의 논증 앞에서 우리가 직면한 상황을 경험의 설명적 역할마음 독립적 대상의 존재 사이의 관계를 통해 설명하기도 한다. 즉, (a) 우리는 감각 경험이 외부세계에 대한 ‘설명적(explanatory)’ 혹은 ‘인식적(epistemic)’ 역할을 지닌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우리가 외부세계에 대해 알고 있는 내용은 기본적으로 감각 경험을 통해 정초되는 것 같다. 또한 (b) 우리는 대상이 ‘마음 독립적(mind-independent)’이라는 사실 역시 부정하기 어렵다. 외부세계가 우리의 정신적 상태에 의존한다는 주장은 너무나 지나친 것 같다. 그러나 (a)와 (b)가 어떻게 서로 양립 가능할 수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감각 경험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a)처럼 우리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감각 경험에 의존한다고 주장할 경우 우리는 마음 독립적 대상을 부정하고서 관념론을 인정해야 하고, (b)처럼 마음 독립적 대상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경우 우리는 감각 경험의 설명적 역할을 부정하고서 경험주의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카삼은 이러한 상황을 ‘경험주의’, ‘감각주의’, ‘실재론’ 사이의 트릴레마를 통해 더욱 세부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하기도 한다.

우리가 실재론을 일상적 대상과 그들의 속성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마음 독립적 대상과 속성에 대한 개념이라고 보는 관점으로 정의한다고 해보자. 버클리가 말하고 있는 것은 경험주의와 감각주의가 실재론과 함께 양립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경험주의와 체험주의가 타협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분명한 결론을 도출한다: 포기되어야 하는 것은 실재론이라고 말이다. (Cassam, 2014a: 103)

여기서 ‘경험주의(experientalism)’와 ‘감각주의(sensationism)’는 각각 버클리의 논증을 구성하고 있는 두 가지 주장에 대응한다. 즉, 우리의 인식이 감각 경험을 통해 정초된다는 주장은 경험주의이고, 감각 경험이 외부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는 주장은 감각주의이다. 두 가지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는 입장은 ‘실재론(realism)’을 거부해야 한다. 우리가 감각 경험을 통해 얻은 모든 개념과 지식이 단순히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 독립적 대상의 존재를 쉽게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고민을 발생시킨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버클리의 퍼즐(Berkeley’s puzzle)’이라고 일컬어지는 철학적 문제가 등장한다. “버클리의 퍼즐은 이것이다. 감각 경험의 설명적 역할을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것이 경험이라는 결론으로 빠지는 일 없이 기술하는 것”(Campbell, 2014a: 18) 이제 우리 앞에는 감각 경험의 설명적 역할을 주장하면서도 마음 독립적 세계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는 과제가 주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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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캠벨과 카삼의 접근법: 내재주의 비판과 감각주의 비판

버클리의 퍼즐에 대한 캠벨과 카삼의 접근법은 넓은 의미에서 모두 ‘치유적(therapeutic)’ 성격을 지닌다. 두 인물은 감각 경험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구성하여 버클리의 문제를 ‘해결(solving)’하고자 하기보다는 감각 경험에 대한 잘못된 인식론적 가정을 해체하여 버클리의 문제를 ‘해소(dissolving)’하고자 한다. 그들은 ‘버클리의 퍼즐’인 애초에 감각 경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철학적 문제라는 생각에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동의하고 있다(Campbell, 2014b, 27, 47; Cassam, 2014a: 105 참고). 다만, 무엇이 ‘잘못된 인식론적 가정’인지에 대한 캠벨과 카삼의 입장은 얼핏 서로 대결하는 것처럼 보인다. 캠벨은 ‘감각 경험’을 ‘감각질’로 바라보고자 하는 내재주의(internalism)가 버클리의 퍼즐을 발생시킨다고 주장하고, 카삼은 감각 경험이 ‘비표상적’이라고 전제하는 감각주의(sensationism)가 버클리의 퍼즐을 발생시킨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내재주의에 대한 캠벨의 비판(Ⅲ. 1.)과 감각주의에 대한 카삼의 비판(Ⅲ. 1.)을 중심으로 그들이 과연 버클리의 퍼즐을 과연 철저하게 해소할 수 있는지를 평가할 것이다.

Ⅲ. 1. 내재주의에 대한 캠벨의 비판

캠벨은 감각 경험이 주관의 영역을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고 보는 입장을 ‘내재주의’라고 규정한다. 그는 ‘내재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표상주의(representationalism)’와 ‘감각주의(sensationalism)’를 통칭하고자 한다. 즉, 내재주의는 감각 경험이 그려내는 대상이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는 독립적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내부에 존재하는 ‘감각질(qualia)’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모든 입장이다. 가령, 표상주의는 우리와 세계 사이에 ‘표상’이라는 관찰적 대상을 감각질로 상정한다는 점에서 내재주의의 한 종류이다. 표상주의에서는 우리가 세계의 표상을 관찰할 수는 있어도 세계는 관찰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마찬가지로, 감각주의는 우리와 세계 사이에 ‘감각’이라는 이론적 대상을 감각질로 상정한다는 점에서 역시 내재주의의 한 종류이다. 감각주의에서는 우리가 원초적으로 경험하는 대상이 세계가 아니라 세계로부터 주어진 감각이라고 여겨진다.

버클리의 퍼즐은 내재주의가 마치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는 결코 풀릴 수 없는 문제가 되고 만다. 내재주의는 우리가 감각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애초에 감각질에 대한 개념과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전제한다. “[…] 이러한 [내재주의적] 분석에서는 경험 자체가 대상의 질적 성격을 지각자의 주관적 삶에 데려오지 않는다. 경험의 질적 성격은 기껏해야 지각된 대상의 질적 성격의 결과일 뿐이다.”(Campbell, 2014b: 33) 따라서 마음 독립적 대상의 존재에 대한 고민은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불가능하다고 일방적으로 선언되어버린다. 감각질에 대한 개념과 지식을 넘어서 외부세계에 대한 개념과 지식을 얻을 가능성이란 내재주의에서는 원천적으로 차단되는 것이다.

그러나, 캠벨에 따르면, 감각 경험이 감각질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가정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감각질’이라는 내재주의의 개념이 문제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의 투명성(transparancy of experience)’에 근거하여 지적한다. 가령, 우리가 빨간 사과를 보면서 “이 사과는 빨갛다.”라고 말하는 상황을 떠올려 보자. 이러한 말을 하기 위해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사과’라는 외적 대상이지 ‘사과의 감각질’이라는 내적 대상이 아니다. 감각질은 관찰 보고를 위하여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여기서 내재주의가 말하는 ‘감각질’이란 마치 너무나 투명해서 쓰고 있는지조차 알기 어려운 “내적 안경”(Campbell, 2014a, 21)과도 같다. 즉, ‘감각질’이라는 내적 안경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더라도, 우리가 그 안경을 통해 바라보는 관찰적 대상은 ‘감각질’이라는 안경이 아니라 ‘사과’라는 사물이다. 더 나아가, 너무나 투명해서 쓰고 있는지조차 알기 어려운 내적 안경이 무의미한 것처럼, 우리는 감각질을 이론적 대상으로 애초에 가정해야 할 필요조차 없다. 따라서 감각 경험과 외부세계 사이에 굳이 감각질이 있다고 주장해야 하는 근거가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감각질은 관찰적 대상로나 이론적 대상으로나 어느 쪽으로든지 잉여물이다. 내재주의는 감각질을 가정하는 과정에서 별다른 명목 없이 관념론으로 빠지고 있기만 할 뿐이다. 캠벨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a) 내재주의적으로 생각된 경험은 [마음 독립적 대상과 관련된] 이러한 추론의 패턴에 대한 우리의 사용을 정초하지 못하며,
(b) 경험의 투명성은, 표상의 측면에서든지 감각의 측면에서든지, 우리가 어떻게 내적 ‘감각질’에 대한 정합적 관념을 형성할 수 있는지조차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문제를 제시하는 한 가지 방식은 ‘내적 감각질’이라는 우리의 개념이 관찰적인지 이론적인지에 대해 우리가 딜레마에 직면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내적 감각질은 관찰적일 수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일상적 감각 경험에서 관찰하는 모든 것은 외적 환경이기 때문이다. 내적 감각질은 이론적일 수 없는데, 왜냐하면 순전히 이론적인 개념은 의식적 경험에 대해 특별히 구별되는 어떤 것을 특징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Campbell, 2014c: 50)

따라서 캠벨은 감각 경험이 감각질을 넘어서 외부세계와 맞닿을 수 있다는 입장을 제시한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경험에 대한 관계적 이론(relational theory of experience)’이라고 일컫는다. 여기서 감각 경험이란 ‘관찰자(observer)’, ‘관경이 관찰되는 관점(point of view from which the scene is observed)’, ‘관찰된 관경(scene observed)’이라는 삼항 관계로 이루어진다. 즉, 외부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삼항 관계만으로도 충분히 성립한다. 우리가, 우리의 관점에서, 외적 대상을 보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 대상이 감각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직접 주어진다. “감각 경험의 질적 성격은 관찰되는 관경 속 대상과 속성의 질적 성격에 의해 구성된다.”(Campbell, 2014b: 28) 경험에 대한 관계적 이론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가정으로부터 감각 경험을 바라보고자 한다. 가령, ‘마음 독립적(mind-independent)’ 대상이란 무엇인지, 감각 경험을 통해 대상을 ‘선택하는(select)’ 활동과 표상을 통해 대상에 ‘접근하는(assess)’ 활동이 왜 구별되어야 하는지, 감각 경험 없이 생겨나는 착시(illusion)이나 환각(hallucination)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 등을 외부세계가 감각 경험에 직접적으로 주어진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존 캠벨

그러나 내재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곧바로 경험에 대한 관계적 이론이 도출될 수 있는지는 다소 의문스럽다. 캠벨은 경험에 대한 관계적 이론을 통해 내재주의에 대한 비판보다 훨씬 더 많은 주장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감각 경험과 외부세계 사이에 감각질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경험에 대한 관계적 이론을 위한 출발점일 뿐이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경험의 설명적 역할과 마음 독립적 대상의 존재를 양립시켜야 하는지는 추가적 설명을 필요로 한다. 경험에 대한 관계적 이론은 바로 이러한 설명으로 제시되는 수많은 입장 중 하나일 뿐이다. 우리가 경험에 대한 관계적 이론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정당화를 요구한다. “만약 그렇다면, 더 나아간 질문은 관계적 관점을 채택하는 것이 마음 독립적 대상에 대한 개념이 어떻게 감각 경험에서 정초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유일한 길인지이다.”(Cassam, 2014b: 137)

문제는 경험에 대한 관계적 이론이 자신이 비판한 내재주의만큼이나 여러 가지 의문스러운 가정에 호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별히, 이러한 가정 중에서도 버클리의 퍼즐과 관련하여 중요한 문제는 ‘경험의 질적 성격’과 ‘세계의 질적 성격’ 사이의 관계이다. 즉, 경험에 대한 관계적 이론은 세계의 질적 성격이 경험의 질적 성격을 ‘구성한다(constitute)’라는 사실을 통해 버클리의 퍼즐이 해소된다고 너무나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버클리의 퍼즐을 진정으로 해소되기 위해서는 감각 경험이 외부세계에 대한 개념과 지식을 ‘보증한다(endorse)’거나 ‘정당화한다(justify)’는 사실이 입증되어야 한다. “a는 F이다.”라는 우리의 판단이 a라는 대상으로부터 구성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a는 F이다.”라는 우리의 판단이 a라는 대상에 대해 정당한 것인지는 여전히 문제로 남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각 경험이 외부세계로부터 구성된다는 주장은 버클리의 퍼즐을 전혀 해소하고 있지 않다. “감각 경험은 우리에게 세계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감각 경험은 단지 세계를 줄 뿐이고, 우리가 세계의 본성에 대한 우리 자신의 결론을 이끌어내도록 세계를 우리에게 남겨둘 뿐이다.”(Cassam, 2014b: 156)

Ⅲ. 2. 감각주의에 대한 카삼의 비판

카삼은 감각 경험이 외부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못한다고 보는 입장을 ‘감각주의’라고 규정한다. 그는 감각주의가 두 가지 주장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지적한다. 즉, 감각주의는 “감각 경험은 감각으로 구성된다.”와 “감각은 비표상적이다.”라는 주장을 받아들인다(Cassam, 2014a: 101). 여기서 ‘감각’과 ‘비표상적’이라는 개념은 더 자세히 해명될 필요가 있다. 가령, 우리가 빨간 사과를 보면서 “이 사과는 빨갛다.”라고 하는 상황을 다시 떠올려 보자. “이 사과는 빨갛다.”라는 명제는 외부세계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그려내고 있다. 언어로 이루어진 명제는 의미가 파악되고, 진리값이 참이나 거짓으로 확정되고, 추론의 전제나 결론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세계에 대한 ‘표상적 내용(representational content)’을 지닌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의 인과적 관계에서 발생한 감각 경험이 과연 전제와 결론의 인식적 관계에서 유의미한 표상적 내용을 지니는지 다소 의심스럽다. (a) 감각 경험이 표상적 내용을 지닐 수 있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감각 경험을 ‘지각 경험(perceptual experience)’이라는 용어로 이야기하고자 하고, (b) 감각 경험이 표상적 내용을 지닐 수 없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감각 경험을 ‘감각(sensation)’이라는 용어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감각 경험이 ‘감각’이고 ‘비표상적’이라는 입장이란 감각 경험을 통해서는 외부세계에 대한 개념이나 지식을 의미 있게 만들거나, 참으로 확증하거나, 정당화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버클리의 퍼즐이 경험주의, 감각주의, 실재론 사이의 트릴레마로 규정되는 상황에서는 감각주의야말로 제거되어야 하는 문제라고 보는 관점이 자연스럽다. 우리가 세 가지 주장 중에서 경험주의나 실재론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경험주의는 경험의 설명적 역할을 위해 필요하고, 실재론은 마음 독립적 대상의 존재를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감각주의는 경험주의나 실재론과는 달리 우리가 굳이 왜 받아들여야 하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만일 경험주의나 감각주의에 대한 독립적 반박이―이러한 도그마들 중 하나나 다른 하나를 거부하는 것이 실재론을 거부하는 것보다 더 나은 독립적 반박이―존재할 경우, 퍼즐이란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 분명하게 약한 고리는 감각주의인데, 왜냐하면 왜 우리가 경험이―감각주의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된―감각으로 구성된다고 생각해야만 하는지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Cassam, 2014a: 103) 실제로, 감각주의를 애초에 받아들이지 않는 입장은 경험의 설명적 역할과 마음 독립적 대상의 존재가 갈등한다고 생각할 이유조차 없다.

따라서 카삼은 감각 경험이 그 자체로 외부세계를 표상할 수 있다는 관점을 바탕으로 버클리의 퍼즐에 접근한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감각론적 표상주의(sensationist representationalism)’라고 일컫는다. 즉, 우리는 감각 경험을 통해 대상을 ‘지속적(constant)’이고, ‘존속하는(persisting)’이며, ‘물질적(material)’인 것으로 표상한다. 가령, 나에게 감각 경험을 통해 주어지는 나무는 나의 움직임과 장소의 변화에도 상관없이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나무가 우리와 무관하게 동일성을 지닌 것으로 표상된다는 사실만으로 나무는 이미 ‘마음 독립적(mind-independent)’인 대상이라고 일컬어지기에 충분하다. ‘마음 독립적’이란 지속적이고, 존속하는, 물질적 대상에게 적용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안뜰의 나무를 마음 독립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란 그것을 나나 임의의 다른 주체의 경험에 대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란 그 나무를 지속적이고 존속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인데, 나는 감각 경험이 나무를 지속적이고 존속하는 것으로 표상한다는 사실을 논증하였다.”(Cassam, 2014c: 164) 이러한 상황에서 버클리의 퍼즐은 더 이상 문제되지 않는다. 감각 경험은 외부세계를 표상한다는 점에서 설명적 역할을 지니는 것으로 여겨지고, 외부세계는 감각 경험을 통해 지속적이고, 존속하는, 물질적 대상으로 표상된다는 점에서 마음 독립적 대상으로 보증되는 것이다. 카삼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근본적인 요점은 이것이다: 감각 경험은 마음 독립적 대상의 개념에 대한 우리의 파악을 설명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감각 경험은 마음 독립적 대상을 표상하고, 그것들을 마음 독립적인 것으로 표상하기 때문이다. 감각론적 표상주의는, 감각 경험에 대한 버클리의 개념에 반대하는 논증을 함으로써, 그리고 이러한 개념이 받아들여야 할 좋은 이유가 없는 감각 경험의 본성에 대한 가정에 어떻게 의존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버클리의 퍼즐을 해결하거나 해소한다. (Cassam, 2014c: 178)

그러나 카삼은 감각주의를 비판하고 있다기보다는 단순히 거부하고 있다. 그는 감각 경험이 외부세계를 표상하지 못한다는 주장이 왜 잘못된 것인지를 직접적으로 논증하지 않는다. 단지 경험주의와 실재론을 양립시키기 위해 감각주의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선택한 결과로 감각론적 표상주의를 지지할 뿐이다. 즉, 감각론적 표상주의는 버클리의 퍼즐에 대해 소극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감각 경험이 외부세계를 표상하지 못한다고 상정될 분명한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 바로 감각론적 경험주의가 강조하고자 하는 핵심적 주장이다. “나는, 감각이 본래적으로 표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캠벨이 증명한 것 이상으로, 감각이 본래적으로 표상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 표상주의가 버클리의 퍼즐을 해결하지 못한다고 믿어야 할 결정적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Cassam, 2014d: 205) 감각 경험이 표상적이지 않다는 입장과 감각 경험이 표상적이라는 입장이 어느 쪽도 상대방을 압도하지 못하는 이상, 감각주의를 포기하고서 경험주의와 실재론을 받아들이는 선택지가 원천적으로 차단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콰심 카삼

문제는 카삼의 입장이 버클리의 퍼즐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버클리의 퍼즐은 경험주의, 감각주의, 실재론이 모두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라는 점에서 발생하는 트릴레마이다. 그러나 감각론적 표상주의는 경험주의와 실재론의 설득력은 인정하면서도 감각주의의 설득력은 너무나 쉽게 부정해버린다. 여기서 우리는 감각론적 표상주의가 간과하고 있는 감각주의의 설득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령, 우리가 감각 경험을 통해 눈앞의 나무를 지속적이고, 존속하는 물리적 대상으로 표상한다는 사실로부터 눈앞의 나무가 실제로 지속적이고, 존속하는, 물리적 대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과연 정당화되는지는 의문스럽다. 감각 경험을 통한 표상이 단순한 착시나 환영일 가능성은 얼마든지 사라지지 않는다. 감각주의는 바로 우리가 감각 경험을 통해 얻은 개념이나 지식이 과연 외부세계에 대응하는지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무시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우리의 감각 경험이 외부세계를 있는 그대로 표상하고 있다는 별도의 논증이 제시되지 않는 이상, 우리의 감각 경험이 근본적으로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여전히 남는다. 단순히 감각주의를 부정하기로 선택하는 전략만으로는 감각주의의 설득력에 근거하여 제시된 버클리의 퍼즐이 해소되지 않는다.

Ⅳ. 캠벨과 카삼의 접근법을 종합하기: 경험의 투명성에서 감각론적 표상주의로

내재주의에 대한 캠벨의 비판과 감각주의에 대한 카삼의 비판에는 유사한 강조점이 있다. 두 인물은 모두 감각 경험이 외부세계와 괴리된 상태로 주관의 영역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물론, 두 인물이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는 이유는 서로 다르다. 즉, 캠벨은 감각 경험과 외부세계 사이에 감각질이 존재한다는 입장을 경험의 투명성에 근거하여 비판한 결과로 감각 경험이 세계와 직접 연결된다는 주장을 제시한다. 그러나 카삼은 경험주의, 감각주의, 실재론 중에서 감각주의가 가장 근거가 빈약한 주장이라는 판단의 결과로 감각 경험이 세계를 표상할 수 있다는 주장을 제시한다. 우리는 두 인물이 지닌 의의와 한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그들의 공통된 통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버클리의 퍼즐에 대한 캠벨과 카삼의 해설을 종합하여 우리의 문제를 다음과 같은 형태로 다시 서술해 보자.

경험주의: 외부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감각 경험을 통해 정초된다.
감각주의: 감각 경험은 오직 감각 경험 자신에 대한 개념만 제공한다.
실재론: 외부세계는 마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버클리의 퍼즐을 이러한 방식으로 규정하는 상황에서는 캠벨과 카삼이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이 ‘감각주의’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두 인물은 겉보기에 ‘내재주의’와 ‘감각주의’라는 서로 다른 주장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모두 동일한 목표를 겨냥하고 있다. “감각 경험은 오직 감각 경험 자신에 대한 개념만 제공한다.”라는 주장이야말로 그들이 모두 극복하고자 하는 잘못된 인식론적 가정이다. 다만, 두 인물 사이의 차이는 이러한 가정을 비판하기 위한 논증에서 드러난다. 그들의 논증을 서로 병렬하여 다시 비교해 보자.

(1) 캠벨은 경험의 투명성에 근거하여 논증을 전개한다. 그는 경험의 투명성을 통해 감각 경험과 외부세계 사이에 상정된 ‘감각질’이라는 개념을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즉, (a) 우리가 감각 경험의 과정에서 주목하는 대상은 감각질이 아니라 외부세계라는 점에서 감각질은 관찰적 대상이 될 수 없다. 또한 (b) 우리가 감각질은 감각 경험에 과정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론적 대상이 될 수도 없다. 어느 쪽으로든 경험은 너무나 투명하게 외부세계를 가리켜 보이고 있어서 ‘감각질’이라는 개념이 그 사이에 자리 잡을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경험의 투명성으로부터 우리가 감각주의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는 결론이 타당하게 도출된다. 다만, 경험에 대한 관계적 이론을 구성하는 (‘마음 독립적’의 의미에 대한 규정, ‘선택’과 ‘접근’ 개념의 차이, 착시와 환각에 대한 설명 등) 다른 많은 주장들까지 경험의 투명성으로부터 도출된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특별히, 경험에 대한 관계적 이론은 외부세계가 감각 경험을 ‘구성한다’는 주장과 감각 경험이 외부세계에 대한 인식을 ‘정당화한다’ 혹은 ‘보증한다’는 주장을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는 약점이 있다. 경험에 대한 관계적 이론을 철저하게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다른 추가적 논증이 보완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2) 카삼은 경험주의, 감각주의, 실재론 사이의 트릴레마에 근거하여 논증을 전개한다. 그는 트릴레마를 구성하는 세 가지 주장 중에서 감각주의가 가장 포기되기 쉽다는 판단에 근거하여 감각 경험이 외부세계를 직접적으로 표상할 수 있다는 감각론적 표상주의를 선택한다. 감각론적 표상주의는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히 정합적인 입장이다. 감각주의가 포기된 상황에서는 감각 경험의 설명적 역할과 마음 독립적 대상의 존재가 아무런 모순도 없이 양립 가능하다. 더욱이, 우리는 감각론적 표상주의를 구성하는 세부 주장을 보충하기 위해 별도의 추가적 논증을 요구할 필요도 없다. 물론, 감각론적 표상주의에서는 감각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이 제시되지는 않는다. 감각 경험이 외부세계를 표상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야만 하는 이유가 없다는 소극적인 사실이 감각론적 표상주의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뿐이다. 따라서 문제는 감각주의가 과연 쉽게 포기되어도 좋을 만큼 설득력이 부족한지에 달려 있다. 적어도, 감각주의는 감각 경험과 외부세계의 간극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시하기 어려운 설득력을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감각주의의 설득력이 건재한 이상, 감각론적 표상주의를 아무런 망설임 없이 선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여기서 두 입장이 지닌 의의와 한계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캠벨의 강점이 카삼의 약점이고, 카삼의 약점이 캠벨의 강점이다. 즉, 캠벨은 감각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을 제시하면서도 경험에 대한 관계적 이론을 정당화할 만한 추가적 논증을 제시하는 작업에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카삼은 감각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을 제시하지는 못하면서도 아무런 추가적 논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 감각론적 표상주의를 제시하고 있다. 캠벨과 카삼에게서 각각 강점은 취하고 약점은 버리는 방식으로 감각주의에 대한 새로운 논증을 다음과 같이 구성해 보자.

(3) 경험의 투명성을 전제로 삼는 캠벨의 논증과 감각론적 표상주의를 결론으로 삼는 카삼의 논증은 서로 양립 가능하다. 두 논증은 근본적으로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다. 즉, 우리는 우선 (캠벨을 따라) 경험의 투명성으로부터 ‘감각질’이라는 개념에 대한 적극적 비판을 수행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은 감각질이 관찰적 대상으로나 이론적 대상으로나 감각 경험의 과정에서 상정될 필요가 없는 잉여물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여 감각주의를 무너뜨린다. 여기서 감각주의는 더 이상 받아들여도 좋고 받아들이지 않아도 좋은 선택지 중 하나가 아니다. 감각주의가 자신의 근거로 삼고 있는 ‘감각질’이라는 개념은 실제로 결함을 지닌 것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우리는 (카삼을 따라) 감각론적 표상주의를 통해 감각주의를 포기하고서 경험주의와 실재론을 결합시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감각적 표상주의는 경험에 대한 관계적 이론과는 달리 아무런 추가적 논증도 요구하지 않는다. 버클리의 퍼즐을 구성하는 트릴레마 중에서 감각주의가 탈락되어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머지 두 주장은 아무런 모순 없이 결합된다. 감각 경험이 외부세계를 표상한다는 단순한 사실이 바로 감각 경험의 설명적 역할과 마음 독립적 대상의 존재를 그 자체로 모두 보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내재주의에 대한 캠벨의 비판과 감각주의에 대한 카삼의 비판이 근본적인 층위에서는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고 평가할 수 있다. 두 입장은 모두 “감각 경험은 오직 감각 경험 자신에 대한 개념만 제공한다.”라는 잘못된 인식론적 가정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제시된 서로 다른 논증이다. 물론, 캠벨은 경험에 대한 관계적 이론을 주장하고 카삼은 감각론적 표상주의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두 입장 사이에 세부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러한 차이가 그들이 서로 상호보완적 관계를 맺을 가능성을 가로막지는 않는다. 오히려 버클리의 퍼즐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이 제시한 논증은 서로 결합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경험의 투명성을 전제로 삼아 감각론적 표상주의를 결론으로 도출하는 논증이야말로 캠벨과 카삼의 입장이 지닌 각각의 한계를 넘어서 버클리의 퍼즐을 철저하게 해소하도록 하는 길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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