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주의의 문제는 '자기 지시성(self-referentiality)'의 문제입니다. 자신이 비판하는 문제를 자기 자신이 그대로 가지고 있는데도, 스스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철학에서는 종종 "자기 지시성이 없다."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언어적인(verbal) 문제가 아닙니다. 소위 '언어적' 문제란 다른 방식의 언어적 표현이나 논증을 통해 얼핏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상태가 해소될 수 있는 문제를 의미합니다. 가령, "배는 먹을 수 있다!"라는 주장과 "배는 먹을 수 없다!"라는 주장이 서로 갈등할 때, 그 갈등은 "과일 '배'는 먹을 수 있지만, 신체 '배'와 이동수단 '배'는 먹을 수 없다."와 같은 방식으로 해소될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철학에서는 '언어적' 문제라고 일컬어집니다. 그렇지만 자기 지시성의 결여는 단순한 논리적 모순일 뿐입니다. 적어도, 저는 이 문제를 언어적 문제로 해소하는 철학자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바로 이 점도 회의주의가 무비판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이론적 가정 중 하나입니다. '나의 감각' 혹은 '나의 경험'이 실재와 괴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전제부터가 사실 회의되어야 하는 대상 중 하나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회의주의는 정작 자신의 가정은 회의 없이 받아들이고 있기에 자기 지시성의 문제가 생깁니다. 제가 며칠 전에 다룬 존 캠벨과 콰심 카삼의 Berkeley’s Puzzle이라는 책이 바로 이 사실을 지적하면서 회의주의를 비판하는 논의를 펼치는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