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사실의 구분, 모순

믿음과 사실이 명확히 구분가능한가요?

어떠한 신념을 가지는 것이, 삶에 현실적인 이득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조금 무섭기도 합니다. 저만의 세계를 만드는 일이니까요. 믿음을 가지되 경계할 수 있나요?

또 생각을 계속 이어가다보니, 결국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조금씩 드는데 다들 회의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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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다양한 논점이 있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아마 다른 분들께서도 좋은 답변을 달아주시겠지만, 일단 이하 논점에 관해서만 얘기하자면

최소한 철학적 문헌에서는 '믿음'과 '사실'은 상호배제적인 의미로 쓰이지 않습니다. 믿음은 개인의 태도에 달린 문제이고, 사실은 세계가 어떠한지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산술적 조합를 따지자면 '사실에 대한 믿음 /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한 믿음 / 사실을 믿지 않음 / 사실이 아닌 것을 믿지 않음' 네 가지 가능성 모두 그 예시가 충분히 많습니다. 따라서 "믿음과 사실이 명확히 구분가능"하냐는 질문은 좀 어폐가 있습니다.

사실 제가 지금 드린 대답은 어찌보면 변죽을 올리는, 질문자께서 말씀해주신 진의를 충분히 헤아리지 못한 답변인 것은 같기에 죄송하다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철학적 질문을 할 때에는 이처럼 먼저 쓰고자 하는 개념어를 사전에 명확히 설정하는게 유용하다는 철학적 전통이 있으므로, 이런 관점 하에서 말씀을 드려봤습니다.

질문의 다른 부분에 관해서는 다른 분들께서 더 좋은 답변을 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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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와일드버니님의 서론(?)에서 제가 좀 더 살을 붙이도록 하겠습니다.

(1) 와일드버니님이 말하셨든, 철학에서 믿음(belief)/사실(facts)은 서로 같은 층위에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믿음은 (굉장히 오래된 분석철학적 정의로) 하나의 명제(그냥 쉽게 주장이라고 여기시면 됩니다)에 대한 태도로 여겨집니다. 예컨대 '"이 물체는 빨강이다."라고 나는 믿는다.' 같은 형태죠.
이러한 태도와 같은 층위에 있는 것은 보통 감정입니다. 예를 들어 (조금 이상한 문장이지만) '"이 물체는 빨강이다."'라는 점이 나는 무섭다.'처럼 말이죠.

(1-1) 한편 사실이라는 개념은 이 세상/세계와 어떠한 주장이 일치하는지에 관한 문제입니다. 여기서 학자들마다 '이 세계'에 대한 정의와 '무엇이 일치인지'에 대한 정의는 다 다를 것입니다.

(1-2) 아마 질문자님의 의도에 부합하는 구분은 믿음과 지식(knowledge)일겁니다.
지식은 흔히 믿음에 "정당화"라는 하나의 조건을 추가한, 보다 정교한 형태의 믿음입니다. 예를 들어, 시험 문제를 찍어도, 저는 여전히 그 문제를 맞췄다는 믿음을 아무런 근거 없이 믿을 수도 있습니다. 한편 저는 시험 문제를 제대로 풀었고, 이 과정이라는 '정당화'를 통해 시험문제를 맞췄다는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이제 질문자님의 본격적 고민으로 들어가죠. 무엇을 믿는게 더 이득이 되면, 믿는게 낫다. 이는 전형적인 파스칼의 논변입니다.

다만 제가 질문자님의 고민을 조금 수정해볼까 합니다. 과연 인간은 노력을 통해 무엇을 믿을 수 있을까요? 적어도 저와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에 부정적입니다. 저희는 손을 의식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과 달리, 어떠한 것을 의식적으로 믿고자 한다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통계적으로 종교를 믿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 증명되었지만, 그렇다고 제가 종교를 의식적으로 믿고자 해도 믿음이 "곧바로" 생기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파스칼의 논변을 고민하시는 것은, 인간이 실천하기에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고민하실 필요가 없다 여겨집니다.

(3) 다만 이제 질문자님의 고민처럼 믿음을 경계해 볼 수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어떠한 근거가 있는 정당화인지, 그 근거는 충분히 근거가 있고 믿을만한지 자기 스스로 검토해볼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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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무엇이 사실이라고 믿음'의 줄임말입니다. 그 믿음은 틀릴 수도 맞을 수도 근거가 제시되어 있을 수도 제시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근거가 제시되어 있어도 틀릴 수 있고 근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아도 맞을 수 있습니다. 어떤 믿음은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가능한 한, 근거가 있는/근거를 제시하고 믿음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믿음을 근거가 제시된 믿음이라고 오해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사회의 평화로운 존립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억압/지배/착취/차별을 정당화하는 믿음을 갖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진리는 나의 빛이다'라고 믿을 수도 있고 '진리는 끔찍하다'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둘 다 맞는 믿음일 수도 있습니다. 즉 인간은 잘 살려면 진리도 필요하고 판타지나 픽션도 필요한 존재라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인간은 잘 사는데 필요한 정도의 진리는 알 수 있는 존재라고, 사실 이미 벌써 다 알고 있다고 믿습니다. 물론 적당한 회의주의도 잘 사는 데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대체로, 믿고 싶은 대로 믿기는 힘듭니다.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믿음은 사실에 의해 제거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의 체크를 받기 힘든/원칙적으로 받을 수 없는, 무수한 사실들 가운데 내가 관심을 가져야 할 사실들로 나를 지향시키는 믿음도 있고 내 삶에 현실적 의미나 현실적 이익을 줄 수 있다면 그 믿음은 유지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그 '나'는 문화적으로 (상당히) 일체화된 '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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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과 인식론, 두 가지 층위에서 접근이 가능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질문하신 내용을 형이상학적으로는 '마음 독립적 실재가 존재하는가?'로 이해해 볼 수도 있고, 인식론적으로는 '지각적 믿음(혹은 관찰적 믿음)은 추론과 독립적인가?로 이해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세부 논쟁과 논증을 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한 가지 거의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회의주의는 저 두 주제에 대한 주류 입장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령, '마음 독립적 실재'라는 개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차이는 존재하더라도, 거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마음 독립적 실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동의합니다. 또한 '지각적 믿음'과 '추론적 믿음'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란은 있더라고 하더라도, 거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지각', '경험', '관찰' 등으로 일컬어지는 과정을 통해 획득된 지식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동의합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회의주의'라고 부르는 입장이 나이브하다는 점일 것입니다. 얼핏 회의주의는 대단히 강력한 입장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입장들의 이론적 가정들은 회의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이론적 가정에 대해서는 회의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그래서 대다수의 회의주의는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라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우리는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라는 것은 알 수 있다."와 같은 형태의 지식은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자기 모순적인 결론으로 빠지곤 합니다. 적어도, 이런 식의 나이브한 회의주의는 오늘날 전문화된 철학에서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는 거죠.

그래서 형이상학이나 인식론에서 회의주의를 주장하는 전문 철학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흔히 '반실재론'이나 '관념론'이나 '해체주의'나 '실용주의' 같은 명칭들이 마치 '회의주의'와 동의어인 것처럼 무분별하게 사용되긴 하지만, (심지어 전문 철학자들조차 저 용어들을 종종 혼동하곤 하지만,) 이 주제들을 진지하게 다뤄보면 저 명칭들이 '회의주의'와는 분명하게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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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철학을 제대로 공부한 건 아니지만은, 또 이게 논리가 없이 접근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youn님이 언급하신 회의주의에 대한 반박은 지나치게 언어에만 매몰된 생각이 아닌가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에 우리는 우리가 인지하는 감각과 경험 내에서만 결론을 내릴 수 있기에 회의적으로 모든 걸 바라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냥 제 생각입니다..

또 위와 같은 생각에 이어 결국 세계에 던져지고 나서 보니, 특정한 방식으로 살아가고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표현하는 이 모든 것이 다 무엇일까? 허무한 생각이 들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철학적인 지식이나 논리가 갖추어지지 않아서 많이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곧바로 생기지는 않는다는 것에 동의하기가 힘듭니다. 정확히 무슨 말인가요?

감사합니다! 두 단어가 상호배제적이지 않다는 말은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

회의주의의 문제는 '자기 지시성(self-referentiality)'의 문제입니다. 자신이 비판하는 문제를 자기 자신이 그대로 가지고 있는데도, 스스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철학에서는 종종 "자기 지시성이 없다."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언어적인(verbal) 문제가 아닙니다. 소위 '언어적' 문제란 다른 방식의 언어적 표현이나 논증을 통해 얼핏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상태가 해소될 수 있는 문제를 의미합니다. 가령, "배는 먹을 수 있다!"라는 주장과 "배는 먹을 수 없다!"라는 주장이 서로 갈등할 때, 그 갈등은 "과일 '배'는 먹을 수 있지만, 신체 '배'와 이동수단 '배'는 먹을 수 없다."와 같은 방식으로 해소될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철학에서는 '언어적' 문제라고 일컬어집니다. 그렇지만 자기 지시성의 결여는 단순한 논리적 모순일 뿐입니다. 적어도, 저는 이 문제를 언어적 문제로 해소하는 철학자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바로 이 점도 회의주의가 무비판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이론적 가정 중 하나입니다. '나의 감각' 혹은 '나의 경험'이 실재와 괴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전제부터가 사실 회의되어야 하는 대상 중 하나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회의주의는 정작 자신의 가정은 회의 없이 받아들이고 있기에 자기 지시성의 문제가 생깁니다. 제가 며칠 전에 다룬 존 캠벨과 콰심 카삼의 Berkeley’s Puzzle이라는 책이 바로 이 사실을 지적하면서 회의주의를 비판하는 논의를 펼치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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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를 들어, 지금 제 눈 앞에 노트북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이 노트북을 노트북이 아니라 토마토라고 '믿기로' 한다고 해서, 제가 이 노트북을 진짜 '토마토'로 믿기는 어려울 것 입니다. 그렇게 바로 토마토라고 믿어진다면, 토마토를 좋아하는 저는 당장 이 노트북을 씹어먹겠죠.

(적어도 저는) 믿음이 '단순히 무언가를 믿기로 한다'를 넘어서, 그에 수반되는 행동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예컨대 저는 내일 세상이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돈을 흥청망청 쓰지 않습니다.

(2) 믿음이라는 것은 제가 볼 때, 인간 의식이 가지고 있는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 중 하나입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을 믿게 하는지, 그리고 무엇이 그 믿음을 변화시키는지 저는 설명하기 어렵다 생각합니다.
다만 적어도, 단순히 우리가 '오늘부터 난 이걸 믿기로 했어.'라는 생각만으로 믿음이 생기기는 어렵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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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세게 한대 맞은것 같네요. 제가 가지고 있던 뿌리깊은 편견을 깨주는 부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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