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무엇을 줄 수 있는가

철학만큼 소문과 신화가 무성한 곳도 없다고 생각한다. 철학에 대한 이미지는 스펙트럼이 퍽 다양하다. 누군가는 철학이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학문이라거나, 눈부신 성과를 내고 있는 자연과학에 비추어볼 때 곧 도태될 시대에 뒤처진 학문이라는 저주를 퍼붓기도 한다. 누군가는 철학과를 ‘취업 안 되는 학과’와 동의어로 생각한다. 한편 철학에 대해 선망의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이 나의 주목을 끈다. 이들은 철학 전공자에게 심오하다거나 지혜롭다는 수식어를 붙이거나, 세상 돌아가는 이치나 인간의 본질을 날카롭게 꿰뚫어보고 있을 법한 현자의 아우라를 떠올리기도 한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철학자들에게 그런 이미지를 부여하는가?

이는 그들이 철학에 모종의 기대를 걸기 때문이다. 이들은 철학자를 선망하는 만큼 암암리에 철학자로부터 무언가를 기대한다. 예컨대 이들은 철학자들이 뒤죽박죽인 세상에 대해 촌철살인의 한 마디를 던지거나, 한 치 앞도 장담할 수 없는 그들의 삶에 등불이 되는 귀중한 가르침을 주기를 원한다. 나아가 보다 절박한 사람들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인간과 세계의 본질에 대한 궁극적인 답변을 철학으로부터 듣기를 원한다. 그러나 철학은 이들의 기대와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철학은 그 역사만큼이나 광범위한 연구주제를 지니고 있어서, 철학자들 간의 분업은 거의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혼자 모든 걸 하려고 하면 결코 제대로 된 학자가 되기 힘들다. 학문적 노동 분업은 철학만의 특징이 아니라 현대 학문 일반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한 명의 의학자가 에이즈 치료약을 개발하면서 항암제도 연구하고 코로나 백신도 만들기는 힘든 것처럼, 한 명의 철학자가 플라톤 전집을 그리스어로 전부 꿰뚫으면서 헤겔철학에도 정통하고 현상학에도 전문가면서 양상논리에도 빠삭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하물며 철학 전체를 아우르는 궁극의 문제 같은 것을 상정한 후 그 대답을 철학자로부터 듣기를 원한다면 실망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의사에게 어떤 병도 고칠 수 있는 약을 달라고 하는 일과 같다. 철학자들 중 그런 ‘궁극의 문제’를 철학적 문제로 보기 거부하는 사람도 생각보다 많다(나도 그 중 하나이다).

그래서 철학에 실망한 사람들 중 일부는 극렬한 철학의 안티로 돌아서기도 한다. 초두에서 언급한 ‘저주를 퍼붓는 사람’ 중에는 한때 철학에 엄청난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이 섞여 있다. 한때 팬이었던 안티가 무서운 법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철학 말고 다른 것을 움켜잡는다고 해서 자신의 삶과 세계에 대한 궁극의 해답을 얻을 수가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이 문제는 보다 깊은 뿌리를 지니고 있다. 이 사람들이 궁극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애초에 그런 식의 물음을 무의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회 속에서 나고 자라서 사회 속에서 비로소 인간으로 있는 한 그렇다. (사회가 아예 방치해버린 채 야생에서 자란 인간 같은 것을 상상해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우리와 같은 종일 뿐, 말하고 사유하는 우리와 같은 의미에서 정녕 ‘인간’이라고 부르기는 힘들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15세기 조선이나 9세기 유럽으로 간다면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옛날의 사회는 하나의 통일된 세계관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계층적으로 분화된 사회’들은 그런 세계관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런 사회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단 하나의 세계상만을 공유했고, 그 세계상을 궁극적 준거로 해서 모든 사물들에 위계를 부여했으며, 이 세계상을 공유하지 않는 자는 가차 없이 배제했다. “[……] 의미부여는 우주론적 확실성을 보장하며, 이런 확실성은 의식이 사회구조 안에서 자기 위치를 찾을 가능성을 [……] 위계적-신분적 전체 질서가 역사적 임의성에서 벗어나 영원성과 신의 의지라는 인장印章을 갖춘 유일무이한 의미토대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다.”1

따라서 이때 살았던 사람들에게 “나는 누구이고 이 세계는 무엇인가?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같은 물음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처럼 심각하고 절박한 물음이 아니었다. 그런 것은 다음 몇 문장이면 그냥 끝나는 질문이었다. “너는 농노고 이 세계는 하느님의 창조물이다. 너도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네가 착하게 살면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갈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현대인이지 중세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대 사회는 계층적으로 분화된 사회와 달리 각각의 기능에 따라 철저하게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이고, 이런 사회 속에서는 분화된 부분 체계들만큼이나 많은 숫자의 세계관이 출현한다. 학문, 정치, 예술, 경제, 종교 등 수많은 사회 내 부분체계들은 각각 자기의 관점에 따라 세계를 인식하며, 자기의 관점에 입각하는 한에서만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그 많은 세계관을 초월해서 저 하늘 위에 신처럼 군림하며 단 하나의 세계관을 그려낼 수 있는 신의 눈(God’s eye) 따위는 현대 사회에 없다. 신처럼 군림하려는 자는 자기 자신도 수많은 관찰자들 중 한 명에 불과하다는 점을 모르고 있으며, 그는 기껏해야 또 다시 무수히 많은 세계관에 한 가지 종류를 더 추가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현대 사회 속에서 ‘나’는 소비자로도, 종교인으로도, 학자로도, 음악가로도, 남자로도, 환자로도, 군인으로도, 학생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그 모든 것들이 나의 정체성의 부분들을 구성한다. 중요한 것은, 모두를 아우르는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세계상이 출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수많은 자기규정들 중 하나로 결코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이다.

같은 이유에서 철학도 대중들이 흔히 바라는 ‘궁극적 진리’를 제시해줄 수 없다. 저 ‘궁극적 진리’라는 말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무엇인지에 관한 최종적인 해답을 찾길 원한다. 그리고 그런 진리를 거머쥠으로써 그들은 자신과 세계에 대한 하나의 통일적인 그림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철학은 그런 일을 해줄 수 없다. 그런 일은 이제 종교도 신화도 그들을 둘러싼 그 무엇도 해줄 수 없는 일이다. 온 세계를 한눈에 넣을 수 있는 단일한 세계관이 그립다면, 그들은 문학 작가나 종교인에게 호소할 수는 있을 것이다. 문학 작가나 종교인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하나의 세계상을 제시해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대 사회 속에 범람하는 무수히 많은 세계상 중의 하나일 뿐이다. 철학이 사람들에게 어떤 만족스러운 세계도 제시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은 강단철학이 소위 본질에서 벗어난 쓸데없는 일에 몰두하거나 철학자들이 무능력하기 때문이 아니라, 궁극적 진리 따위는 이제 허상에 불과하며, 철학 역시 사회 속에서 기능적으로 분화된 학문이라는 체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들어맞지는 않지만 현대의 한 철학자가 이와 비슷한 생각에 도달하고 있다. “‘철학’이라 불리는 어떤 단위체, 과거에는 하나의 전체였다가 지금은 쪼개진 그런 단위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은 자연종(自然種)에 대한 이름이 아니라 인문학의 문화가 행정적이며 문헌적인 목적 등을 위해 구분한, 정리하는 함(函)의 이름에 불과하다.”2

그래서 우리는 인간과 세계에 관한 궁극적 해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절망해야 하는가? 난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궁극적 그림이 왜 필요한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으며, 혹시 그것은 애초에 잘못된 문제설정이 아닐지, 낡은 패러다임의 산물은 아닐지 곰곰이 반성해봐야 한다. 그처럼, 의심 없이 견지했던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고 검토하고 반성해보도록 충동질하는 일이야말로 철학이 보통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줄 수 있는 선물이다. 그것은 그리 대단한 선물은 아니지만, 철학이 그들에게 줄 수 있는 확실하고 유용한 선물이다.


1 게오르그 크네어, 아민 낫세이, 『니클라스 루만으로의 초대』, 정성훈 역, 갈무리, 170.
2 리처드 로티, 「오늘날 미국에서의 철학」, 『실용주의의 결과』, 김동식 역, 민음사, 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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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문이네요. 솔직히, 철학으로 '궁극적 진리'에 도달하려는 환상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대답하기조차 귀찮을 만큼 전공자 입장에서는 이게 참 어처구니가 없는 생각인데, 총대를 메시고 굉장히 현실적인 글을 써주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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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저 환상이 어떤 의미에서 1) 인간이 가장 근원적인 욕망이자 처음 철학을 시작했던 이유이고 2)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사람들은 그걸 찾아 헤매며 3) 철학자들 역시 이걸 찾아야하며, 이걸 철학으로 찾을 수 있다고 여기는 부류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문단에서도 말했지만, 이게 낡은 패러다임이라면 그 패러다임을 폐기한 채로 '잘' 살아가는 방식이 제시될 필요가 있는데 (즉,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이 어떤 식으로든 해소되어야하는데) 아직 이게 부족해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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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언하면 이제 저 세계관의 자리는 생물학, 그것도 진화생물학이 차지한 듯한 생각이 들어요. 리처드 도킨스와 에드워드 윌슨에서 시작해서, 이걸 본격 사회과학에 응용한 제레드 다이아몬드랑 유발 하라리까지.

엄밀히 말해서, 생물학은 다른 자연과학 중에서 가장 특이한 설명 방식을 가집니다. 바로 인과적 설명과는 구분되는 목적론적 설명이죠. (이건 전체에서 무슨 기능을 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단순히 이건 A 유전자의 발현이다, 라는 인과적 설명을 넘어서요.)

과학철학 내부에선 이런 목적론적 설명을 제거하려하고, 반대로 이 목적론적 설명으로 모든걸 환원해버리려는 입장도 있고(기존의 철저한 인과론으로 환원하려는 자연주의와 구분해서 말이죠.)

앞으로의 철학이 대중에게 뭔가 유의미하려면, 이 목적론에 따른 생물학적 설명과의 관계를 잘 고려해야하지 않을까 합니다. 단순한 거부나 상식적인 거부만으로는 대중을 설득하긴 힘들테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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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사는가. 무엇이 옳음인가. 질문으로 시작한 학문이 철학이었으니까요. 궁극의 진리가 있다고 가정하는건 시원한 답을 바라는 인간의 본성이라 생각합니다. 그나마 그 질문에 시도했던 인문학이 철학이었기에 그기제가 기대가 내려오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분과학문 체제하에서 고도화 전문화가 되어가며 그러한 질문의 필요성은 퇴색되었지만, 마지막문단에서 말씀하신대로 질문하는 자세와 끊임없는의심과 반성의 태도가 저도 현실에서 철학이 일반인에게 줄수있는 가장 유용한 툴이라 생각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주드래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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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 모든것에 대한 궁극적 해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답을 얻은게 아닐까요.
여기에 대해 절망한다거나 오히려 열린 가능성을 보고 세상을 즐기는 건 개인차인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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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가는 글입니다. 마지막 문장에 참 마음에 드네요. 대단한 선물은 아닐지라도 확실하고 유용하면서 소중히 여길만한 선물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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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근원적’이라고 말씀하신 인간의 어떤 욕망이 철학을 발생시킨 원인(동기)가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과연 철학이라는 학문 분과 자체를 존속시킬 ‘이유’와 직결되는지는 의심해봐야 합니다. 나아가 삶의 ‘궁극적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이 과연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망인지부터 따져 물어야 할 것입니다. “삶의 궁극적·최종적 의미를 찾고자 하는 욕망은 환상이다.”라는 주장에 “그것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망이다”라고 비판하는 것은 그다지 설득력 있는 반응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앞의 논제는 명시적으로나 암시적으로나 그 욕망을 “근원”이라고 부르기를 이미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것이 왜 다른 것들에 우선하는 근원적인 욕망인지를 논증하는 것이 더 좋은 방향일 것입니다.)
두 번째 토막글에서 저 ‘근원적’ 세계관의 자리는 생물학적 세계관이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본 글에서 제시된 논점에 따르면 생물학적 세계관 역시 현대 사회 내부의 특정한 관찰 입장일 것이고,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 가능한 수많은 세계관 중 하나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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