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자님께서 가지고 계신 의문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지만, 쉽게 대답을 드리기는 다소 어려울 것 같네요. 말 그대로, ‘현대철학 일반’의 경향에 대해 질문하셨다 보니, 철학의 분과를 전공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솔직히 이 질문에 댓글을 적기가 굉장히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아마 다른 분들도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거칠게 답변을 드릴 수밖에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시고, 공부하실 때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정도로 참고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실재에 관해 총체적이고 절대적인 설명은 확실히 불가능한가요?
오늘날 철학자들이 “총체적이고 절대적인 설명”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회학적인 이유입니다. 과거와 달리, 우리 시대에는 더 이상 한 사회 전체에 통용되는 공적 이데올로기가 존재하지 않고, 문화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었고, 학문의 각 영역이 대단히 세분화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사회, 모든 문화, 모든 학문을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총체적이고 절대적인 설명”을 제시하려는 노력은 허황된 것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죠. 물론, 철학 비전공자분들이나 소위 ‘재야철학자’분들 중에는 여전히 자신이 우주의 진리를 깨우쳤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그리고 그런 분들이 종종 철학과 사무실로 자신들의 자비 출판 저서를 보내주시기도 하십니다만,) 오늘날의 사회, 문화, 학문이 얼마나 복잡해졌는지를 자각하고 있는 전문 철학자들 중에서는 이런 ‘우주의 진리’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심지어 형이상학자들조차도 “총체적이고 절대적인 설명”을 제시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두 번째는 철학적인 이유입니다. 서로 다른 철학적 전통에서, 서로 다른 이유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제시된 여러 논증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서 “총체적이고 절대적인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가령, 우리의 인식 조건을 벗어나서 사물 자체를 파악하려는 시도가 월권 행위라는 논증(칸트), 각각의 분과 영역에는 각각의 사태에 적합한 방법이 존재한다는 논증(후설), 종합명제의 진리값은 경험과학의 실험과 관찰에 의존해야 한다는 논증(에이어), 명제의 참/거짓이 세계와의 1:1 대응을 통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논증(콰인), 언어의 의미가 사회적 실천에 의존한다는 논증(비트겐슈타인), 인식은 이유의 논리적 공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논증(셀라스), 자연과학이 반증을 통해 발전한다는 논증(포퍼), 자연과학조차 각 시대의 패러다임에 의존한다는 논증(쿤), 자연과학을 규정하는 단일한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증(파이어아벤트), 각 사회가 각 시대마다 서로 다른 지식의 체계 속에서 권력의 질서를 형성하였다는 논증(푸코), 서양 형이상학이 전제한 문자/목소리의 이분법이 자기 모순적이라는 논증(데리다) 등이 “총체적이고 절대적인 설명”의 불가능성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2) 현대철학은 무엇을 하고 있나요?
딱 잘라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총체적이고 절대적인 설명”이라고 표현하신) 소위 ‘거대담론’ 대신에 ‘미소담론’을 성립시키려는 철학자들도 있습니다. 혹은, 각각의 미소담론들을 중재하려는 철학자들, 각각의 미소담론이 내포하고 있는 함의를 분석하려는 철학자들, 각각의 미소담론을 비교하거나 평가하려는 철학자들도 있습니다. 아니면, 철학사 속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 철학자들을 해설하고 비평하려는 철학자들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아예 ‘철학의 종말’을 선언하는 철학자들도 있습니다.
(3) 왜 철학은 자연과학과 달리 결론이 나지 않나요?
한 마디로, 철학이 근-본 학문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보다 훨씬 오래된 학문입니다. (근대적인 의미의 ‘과학’은 기껏해야 3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죠.) 그래서 그동안 철학에서는 워낙 많은 방법론이 생겨났고, 워낙 많은 입장이 생겨났고, 워낙 많은 글쓰기 스타일이 생겨났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의 기준으로 ‘철학의 표준’을 통일시키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더군다나, 철학 전공자들뿐만 아니라 예술, 종교, 비평, 정치, 역사 등 다른 분야 종사자들도 일종의 철학적 사유를 수행한다는 점 역시 무시할 수 없죠. 그래서 철학은 다른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과 달리 전문가 집단을 엄격히 한정해서, 표준화된 연구 방법론에 따라, 권위가 인정된 소수 학회를 중심으로 수행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대학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의 전문화는 가능하지만, 이미 역사 속에서 지금의 다양한 모습으로 형성된 철학을 완전히 표준화킬 수는 없는 거죠. 바로 이 점 때문에, 철학에서는 다른 학문들보다도 훨씬 입장 차이, 관점 차이, 스타일 차이, 전통 차이가 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