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히 독창적이고, 매우 대담한데, 약간 의아스러운 칸트 해석: 로버트 한나의 『칸트와 분석철학의 토대』에 대한 단상

남수빈 선생님의 '언어철학으로 칸트 읽기'에 2부에 참여하여 로버트 한나의 『칸트와 분석철학의 토대(Kant and the Foundations of Analytic Philosophy)』를 4주 동안 읽었습니다. 책 전체의 내용을 순서대로 따라가면서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아주 유익한 세미나였습니다. 텍스트 자체가 영어 원서로 된 전문 학술 연구서이다 보니, 세미나의 난이도는 꽤 높은 편이었어요. 발제 부담이 없다는 점만 빼면, 대학원 철학 전공 수업과 거의 맞먹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도 진행자이신 남수빈 선생님께서 매 주마다 발제문을 아주 꼼꼼하고 성실하게 작성해 오셔서, 참여하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편하게 책의 내용을 살펴볼 수 있었네요. 발제문에 논의의 흐름이 잘 구조화되어 있어서, 원문과 비교해서 보면 핵심이 한눈에 잘 들어오더라고요.

이전부터 로버트 한나의 칸트 연구에 대해서는 여러 경로로 들어서 대략 알고 있었지만, 책을 실제로 읽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네요. 개인적으로, 굉장히 흥미로운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칸트의 철학을 일종의 '의미론'의 관점에서 (더욱 정확히 말해, '인지적 의미론'의 관점에서) 독해하겠다는 것이 한나의 야심입니다. 전통적 칸트 독해가 주로 "세계에 무엇이 존재하는가?"라는 형이상학적 물음과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적 물음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한나의 칸트 독해는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의미론적 물음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거죠.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한나는 칸트가 18세기에 했던 논의들이 20세기 이후의 영미권 철학에서 제시된 언어철학의 의미론적 논의들과 매우 밀접하게 관계된다고 주장합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프레게, 콰인, 카르납, 크립키, 카플란 같은 인물들의 논의 맥락에 위치시켜서 현대적으로 해설하려 하는 거죠.

그런데, 글을 읽다보면 한나가 좀 지나치게 야심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나는 영미권 언어철학의 주류 논의를 바탕으로 칸트를 해설하려 하지만, 결국 칸트를 가지고서 주류 논의와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해서요. 가령, 칸트를 통해 분석/종합 이분법에 대한 기존 언어철학자들의 비판을 넘어설 수 있다고 주장한다든가, '내포' 개념의 의의를 부활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든가 하는 부분은, 저에게는 굉장히 과감해 보였어요.

물론, 저런 주장을 하는 것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죠. 스트로슨과 그라이스처럼 콰인 이후에도 분석/종합 이분법을 옹호하는 철학자들은 여전히 존재하죠. 또 "의미가 지시를 결정한다(Meaning determines reference.)"라는 구호를 내세우면서 프레게의 전통을 따르는 철학자들 역시 여전히 존재하고요. 하지만 이런 입장들을 주류 언어철학자들에게 납득시키려면 상당히 광범위하고 다차원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한나는 언어철학자들이 이 주제들로 벌인 논쟁에 깊게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옹호하는 입장에 있는 실제 학자들을 아주 적극적으로 인용하는 것 같지도 않고, 단순히 칸트의 철학만을 자신의 주된 무기로 삼아 주류 입장들을 논파하겠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어서, 저로서는 약간 '돈키호테' 같다는 인상을 받았네요.

칸트의 논의들을 현대적으로 해설하기 위해 언어철학의 논의를 가져오는 방식도, 너무 칸트의 철학과 오늘날 언어철학 사이의 '유사성'을 드러내는 데만 치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어요. 가령, 한나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감성의 형식을 바탕으로 경험적 직관을 해명하려고 하는 칸트의 논의를 카플란의 지표사 이론과 비교하더라고요. 지표사가 '특성(character)'과 '내용(content)'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는 카플란의 주장처럼, 칸트의 철학에서 공간과 시간도 일종의 지표사의 '특성'처럼 기능한다는 주장이었어요. 그런데 카플란의 지표사 이론에서 특성과 함께 지표사의 의미를 구성하는 '내용'은 결국 발화가 이루어지는 '맥락(context)'인 반면, 칸트의 철학에서 공간과 시간의 형식에 주어지는 '내용'은 사물로부터의 '인과적 촉발(causal affection)'이라는 점에서, 카플란과 칸트 사이의 비교가 너무 단편적이라는 생각을 하였어요. 카플란의 논의에서는 발화의 맥락이 매우 중요한 반면, 칸트의 논의에서는 그런 맥락이 그다지 고려되지 않는데, 이런 차이를 무시하고서 카플란으로 칸트를 설명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모르겠더라고요.

결론적으로, 한나의 책은 분명 상당히 독창적인 관점에서 칸트를 읽고 있고,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거의 생각하지 못할 법한 아이디어들을 서로 엮고 있다는 점에서 참 재미있긴 한데, 저에게는 논의가 너무 대담하거나 다소 의아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한나의 전문적이고 두꺼운 칸트 연구를 초견적으로만 보고 평가한 저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요. 그래도 이 책은 앞으로도 종종 참고하게 될 것 같네요. 제가 주로 맥도웰이나 브랜덤 같은 언어철학적 헤겔주의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그와는 꽤나 상반된 위치에 있는 하나의 언어철학적 칸트주의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겠더라고요. 혹시라도 앞으로 책을 다시 읽으면서 한나에 대한 제 평가가 바뀌는 게 있다면 그때마다 생각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다른 분들 중에서도 한나의 책을 읽으신 분이 있다면 의견을 나눠주시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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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지점에서 말씀하신 바와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고, 저 또한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가졌던 느낌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논의의 다양성을 위해 Hanna (해나?)를 위한 변론을 좀 해보겠습니다.

  1. Hanna는 주류 언어철학의 입장을 반박할 필요가 없다.

이 책에 나타나는 저자의 테제 중 하나는 프레게에서 콰인에 이르는 초기 분석철학의 역사에서 칸트의 철학이 정당하게 다루어지지 않은 채 거부(reject)되어 왔을 뿐 제대로 반박(refute)된 적이 없다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자의 입장은 의외로 소박한 측면이 있습니다. 가령 분석/종합의 구별에 대해서 이 구별이 헛소리라는 콰인의 입장과 콰인 이후에도 이 구별을 옹호하는 입장이 있는데, 저자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콰인의 비판(분석성 = truth in virtue of meaning)이 칸트가 제시하는 구별의 내포적 측면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즉 칸트의 분석성 개념을 내포를 중심으로 테크니컬하게 방어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칸트가 제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intensional logic" 전통이 현재까지도 콰인주의에 대한 주된 경쟁자로서 굳건하다는 점에서, 콰인의 비판이 refute라기 보다 reject에 가깝다는 것이죠. 따라서 콰인주의자에게 분석성 개념을 직접적으로 설득시키는 것이 저자의 주된 목표가 아니게 됩니다. 콰인주의자를 직접적으로 반박하고 설득시키는 것은 현대의 콰인-비판자들이 할 몫이고, 저자의 주된 목표는 이 콰인주의자 및 콰인-비판자들에게 지금까지 무시되어 온 칸트적 전통을 환기시키는 것이죠.

  1. Hanna는 의외로 대담하지 않다.

사실 이 지점이 메인인데요. 내포논리에 기초한 분석성 개념의 옹호 정도를 제외하면, 이 책에서 저자가 "아주" 새롭게 제시하는 것은 또 딱히 없습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제시하는 칸트철학과 현대언어철학의 연결점들은 이미 수십년 전부터 영미권의 칸트 연구 뿐만 아니라 순수(?) 분석철학 연구에서 인지된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카플란 연관을 본문에 언급하셨는데, 칸트가 말하는 "직관"이 지시/지표사적 표현, 대물적(de re) 태도, 단칭어(singular term)와 동일하다는 사실은 이미 6-70년대부터 J. Hintikka, C. Parsons, T. Burge, J. McDowell, W. Sellars 등에 의해 지적되어 왔습니다. 초기 분석철학의 역사를 칸트와 연결짓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프레게가 전반적으로 칸티안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오늘날 프레게 연구에서는 거의 클리셰죠. 좀더 과감하게 말한다면, 프레게가 칸트적인 만큼, 칸트가 프레게적 이라는 것입니다 (이 후자는 특히 셀라스와 맥도웰에 의해 지지되었습니다). 따라서 저자의 작업들이 완전히 새로운 연결점을 제시한다기 보다는, 기존에 조명되었던 칸트의 현대언어철학적 연관들을 좀더 세밀하고 체계적으로 집대성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결론적으로, YOUN님의 감상에 공감하는 부분들이 많습니다만, 그 맥락을 더 면밀히 들여다 본다면 저자의 기획의 허무맹랑함이 돈키호테 급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해나는 제가 알기로 심리철학, 언어철학, 논리철학 등에 대해서도 다수 논문을 출판한 전문 연구자이기 때문에, 그가 제시하는 연결점들이 완전히 피상적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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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멘트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유익한 내용들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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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로버트 한나라는 인간에 대한 의구심이 커진 상태였는데, 덕분에 이 분의 다른 저작들도 살펴볼 기회를 주셨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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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저도 돈키호테(라는 수식을 사용하시다니... 고급져)같은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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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후기 나누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이제 마지막 장을 마무리하는 참인데, 이 책의 서술 방식 전반에 대해 가진 불만이 끝까지 변하지는 않네요. 유수의 대학출판부에서 나온 연구서이니 믿고 봐도 되지 않을까 했는데, 그런 편견을 깨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개별 장의 논의든, 전체 구성에 있어서든 Herb님의 말씀처럼 ”칸트의 현대언어철학적 연관들을 좀더 세밀하고 체계적으로 집대성“했다고 평하기는 어려워 보인다는 것이 세미나를 진행해 본 제 생각입니다.

첫 번째 불만은 칸트의 철학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철학적 반론에 대응할 수 있는 만능키처럼 숭배하는 것 같다는 점, 둘째는 각 장의 주요 테제와 상관 없는, 별개의 논문으로 써야 할 내용으로 분량을 너무 많이 채우고 있다는 점, 셋째는 이렇게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하느라 주요 테제에 대한 논증을 탄탄하게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넷째는 댓글에서 Herb 님이 말씀하신 것 같은 굵직한 선행연구들을 정리하지 않고 논의를 전개한다는 점입니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던 논제이기도 해서 힌티카와 파슨스 및 후속 논의들의 주장이 잘 요약되어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언급조차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선행연구 정리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질문들의 연쇄로 이루어지는 학술공동체라는 것이 의미가 없어지고 이전 세대의 연구 성과와 지금의 연구가 단절되어 버리는 것 같거든요.

『언어철학』에서 콜린 맥긴은 카플란의 지표사 이론이, 언어에 대한 논의에 실제 개체를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매우 비전통적이고 특이한 입장이라고 평하던데요, 로버트 해나도 아마 이런 지점에서 직접적 표상인 칸트의 직관을 지표사와 연결하려 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글에서 말씀하신것처럼 이런 주장에 대한 논증이 본문에 충실히 제시되어 있지 않아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4장의 직관-지표사 논의와 관련해 세미나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덧붙여보자면, 이 부분은 제가 비개념주의적 칸트 해석에 관한 석사논문을 쓰면서 공부한 내용과 연결고리가 있어서 꽤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비개념주의를 둘러싼 분석철학자들의 논의 가운데 지시사와 관련된 것이 있는데, 대강 이런 내용입니다.

  • 비개념주의: 개념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세밀하고 풍부한 지각의 표상들이 있다.(에반스의 풍부성/세밀성 논증)
  • 개념주의의 반론: 그러한 세밀하고 풍부한 표상들은 지시사 개념으로 포착할 수 있다.
  • 비개념주의의 재반론: 지시사는 여러 대상에 일관적으로 적용되지 못하므로 개념이라고 할 수 없다.

이들은 칸트를 전혀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재반론의 입장을 지시사가 곧 직관(칸트 철학에서의 ‘비개념적 표상’)이라는 해나의 주장과 연관지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세미나에서도 했던 이야기지만, 카플란의 주장처럼 지시사는 ‘맥락’+‘특성’으로 이루어지고, 그 ‘특성’이라는 것이 이미 개념적인 것이므로, ‘직관(혹은 비개념적 표상)이 발화의 맥락으로서 지시사의 내용 일부를 구성한다’라는 주장은 할 수 있겠지만 ‘직관은 곧 지시사다’라는 주장은 너무 무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약간 다른 의견인데, 저는 칸트의 직관이 충분히 발화의 ’맥락‘ 역할을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이것‘을 보고 있다”처럼 지표사가 들어간 문장에서 ’지금‘이 언제인지, ’이것‘이 무엇인지는 결국 시공간 형식 아래 정렬된 감각 표상들로부터 오니까요. 경험과 판단(혹은 명제)의 성립에 관한 칸트의 논의도 모두 현상에 한정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여기서 굳이 사물 자체와 현상의 구분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언어철학 공부가 짧다 보니 직관이라는 비개념적인 표상이 인식론이나 심리철학이 아니라 언어철학에서 이 이상으로 어떤 지위를 확보할 수 있을지, 이게 언어철학의 맥락에서 중요한 논제가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아무튼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70년대부터 이어진 ’칸트의 직관은 단칭어인가‘와 관련해서 정리된 글을 써보고 싶기는 합니다.(여기다 이렇게 얘기해 두면 진짜 쓸 가능성이 높아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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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은 아마 저자의 성향 그 자체인 것 같아요. 실제로 유사한 내용이 다음에 실려 있습니다: Hanna, Robert. "Kant in the twentieth century." The Routledge Companion to Twentieth Century Philosophy . Routledge, 2008. 149-203.

이 점은 어떤 부분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건지 감이 안 잡혀서, 예시를 말씀해주시면 저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어쩌나 보니 제가 해나의 변호인이 된 것 같아 난감하긴 한데요.. 사실 너무 광범위해서 문제지, 해당 선행 연구들을 저자가 대부분 각주에서 언급하긴 합니다. 다만 저자의 의도는 힌티카나 파슨스의 선행연구를 "요약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칸트의 의도는 X이고, 이 X에 대한 선행연구는 .... 가 있으니 ... 를 봐라" 이런 식입니다. 저도 저자가 좀더 친절하게 설명했으면 더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지만, 아무튼 뭐 그렇다는 겁니다.

비개념주의 맥락은 아주 흥미롭군요. 언급하신 "개념주의의 반론"은 맥도웰이 "Mind and World"에서 제시한 (에반스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으로 이해되는데요. 흥미롭게도 맥도웰은 "비개념주의의 재반론"에 대해서 1984년 논문 "de re Sense" (특히 섹션 5)에서 프레게주의에 입각한 대답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 거칠게 요약하면, 예컨대 맥락 1에서의 "이것"과 맥락 2에서의 "이것"은, 동일한 mode of presentation을 그 뜻으로 가진 "이것"의 서로 다른 지시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맥도웰은 러셀적 명제를 따르는 카플란의 Character와, 프레게주의를 따르는 대물적 뜻을 구별합니다.) 맥도웰은 셀라스의 칸트 해석을 거쳐 이 프레게적 "대물적 뜻"을 칸트에게도 적용합니다. ("Sellars, Kant, and Intentionality" in: Having the World in View)

개념주의/비개념주의를 막론하고 (참고로 해나는 비개념주의를 옹호합니다), 직관의 지시/지표성을 인정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직관은 곧 지시사다"라는 주장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들 (특히 개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직관의 (개념적?) "내용"이 곧 지시/지표사를 통해 표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념주의자라고 할지라도, 대상이 나의 감관을 촉발하여 나의 감성에 주어질 때 "ㅇ ㅣ ㄱ ㅓ ㅅ"이라는 글자 형태 혹은 소리 형태로 주어진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직관이 그 자체로 지시사로 동일하다" 혹은 "직관이 그 자체로 그 개념적 내용과 동일하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 말이 안됩니다. 맥도웰을 비롯한 개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직관을 종합한 결과로서의 "내용"이 지시/지표사를 통해 (부분적으로/완전히) 표현될 수 있고, 그렇다면 에반스가 강조하는 직관의 현상적 풍부성 역시 결국 이 개념적 내용을 통해 지시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저도 기다려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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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답변을 달아 봅니다.

  1. 저는 기본적으로 한 명의 사상가를 유일한 해답으로 숭앙하는 태도는 낡은 천재 신화를 강화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서 좀 거부감을 느낍니다. 말씀하신 글은 마침 세미나 마지막 시간 총정리로 좋은 텍스트 같아서 읽어보고 있는데요, 오늘날 대륙철학과 분석철학 양자가 맞닥뜨린 위기는 결국 칸트 철학을 다시 읽음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라는 거대한 주장으로 시작하는데 설득이 될지 어떨지 모르겠네요.

이 점은 4장에서 많이 느꼈는데요, 도입부에 따르면 4장(특히 4.4)의 주요 주장은 이런 것들입니다.

  • 직관에 대한 프레게의 이론은 프레게의 의미론에 필수적인 부분이며, 이는칸트의 직관과 동등하다.
  • 칸트와 프레게는 모두 직관 및 종합명제가 ‘본질적 지표성’을 지닌다고 보았다.
  • 칸트의 직관과 프레게의 직관은 모두 지표사로 해석할 수 있다.
    • 경험적 직관은 지시사로 기능한다.
    • 순수 직관은 특별한 고유명(extraordinary proper name)(?)처럼 기능한다.

그런데 정작 카플란은 지표사에 관해 프레게의 이론과 전혀 다른 입장에 섭니다. (맥긴의 정리에 따르면) 프레게의 모델에서는 단어가 뜻이라는 매개를 통해 지시체를 간접적으로 지시하고, 카플란의 모델에서는 지표사가 뜻의 매개 없이 개체를 직접 지시합니다. 이런 차이는 해나의 글에서 딱히 지적되지 않습니다.
또 해나는 ‘기하학의 지식은 순수 직관에 의존해 성립되며 따라서 선험적 종합이다’라는 프레게의 수학철학적 주장과, ‘단어가 뜻을 매개로 지시체를 가리킨다’라는 프레게의 언어철학적 주장을 연결하는 작업을 딱히 하지 않습니다. 두 주장이 어떻게 연관되어 지표사라는 해석 아래 묶일 수 있는 걸까요?
게다가 ’경험적 직관=지시사‘, ’순수 직관=특별한(?) 고유명‘이라고 하려면 순수 직관이 모든 경험적 직관을 근거짓는 형식으로 작용하듯이 순수 직관의 언어적 대응물도 지시사를 근거지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런데 지시사와 ’특별한 고유명‘의 관계에 대해서는 충분히 논하지 않고, ’특별한 고유명‘이라는 것이 그저 ’적도‘처럼 추상적인 공간적 개체를 고정적으로 지시한다는 식으로 간략한 유비만을 제시합니다. 이것이 명제에서 실제로 어떻게 쓰이는지는 딱히 추가로 설명하지 않고요.
이런 설명 대신에, 4장은 칸트 공간론에 대한 파슨스의 수학철학적 독해(칸트는 구성주의적 유한론자다)를 소개하고 검토하는 데에 지나친 분량을 할애합니다. 테크니컬한 논의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20세기에야 등장한 칸토어의 가산/불가산 무한 개념이 칸트 공간론과 어떻게 관련될 수 있는지?) 어쨌든 이 검토의 결론은 ’공간이 순수 직관이다‘인데, 이 논의를 딱히 프레게의 공간론과 연관짓는 것도 아니고, 칸트와 프레게를 연결하는 4장의 테제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잘 모르겠네요. 물론 제가 단순히 이해를 못해서 생긴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요.

제 기억에 지시사를 둘러싼 비개념주의자들의 주장은 딱히 적극적 주장 없이 맥다월식 논증의 세부사항에 대한 소극적 논박으로만 이루어졌던 것 같습니다(지시사는 ‘개념’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등). 제 불만은 로버트 해나가 이 책 4장에서 ‘경험적 직관은 지시사에 대응한다’라는 주장을 다소 무리하게 펼친다는 것이었습니다.(p.214, “the correct linguistic correlate of the empirical intuition is the demonstrative” 이하) 혹시 여기서 비개념주의 입장의 적극적 주장이라 할 만한 것이 나오려나 했는데 딱히 아니더군요.(지금 보니 비개념주의자들의 지시사 논쟁은 이 책보다 4~5년 뒤의 것이었긴 하네요.) 말씀하신 내용 전반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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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na가 생각하는 칸트 이후의 철학 계보입니다. 분석철학도 헤겔에 대한 반항으로 생겨났고, 헤겔도 칸트에서 파생되는 등 근대 이후 모든 철학이 칸트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게 Hanna의 생각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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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저는 현대철학 속 칸트의 영향력에 대한 한나의 설명이 꽤나 설득력 있다고 봅니다. 예전에 "Kant in the Twentieth Century"라는 논문을 대략 훑어본 적이 있는데, 현대철학의 개별 인물이나 주제만 공부해서는 자칫 놓칠 수 있는 핵심 맥락들을 '칸트'라는 하나의 인물로 관통한 것이 저에게는 꽤나 인상적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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