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근래 국역된 몇 가지 책들에 대한 소개

(0) 철학책 뿐 아니라, (문학을 제외한?) 제가 관심 있게 본 여러 책들에 대한 소개입니다. 나름 이런 것들에 관심 있으신 분들이 있어보여서, 시간 나는 김에 짧게 적었습니다.

(1) 애나 칭 - 세계 끝의 버섯

알라딘: 세계 끝의 버섯 (aladin.co.kr)

이 책이 번역될 줄은 몰랐네요 (...) 미국 인류학계에서 중요한 상인 빅터 터너상 수상작입니다. (따라서 인류학 책이긴한데)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인류학과는 결이 많이 다를 겁니다. 통상 인류학이라 하면 (a) 여러 부족 혹은 소수 집단의 문호 혹은 (b) 사회/경제/정치 구조에 대한 연구라 생각하실겁니다. 그렇지만 60년대 이후 그리고 80년대 이후 본격화된 도시인들에 대한 현장 조사 그리고 90년대 정점을 이루었던 세계화 - 혼종성 담론 그리고 00년대 이후 본격화된 생태 - 환경 - 비인간 행위자 연구들이 결합되어서 이와 같은 재미있는 책이 나왔습니다.

일본의 송이버섯 홀릭에서 시작해서, 그걸 전달하는 자본주의적 연결망과 실제로 이걸 채집하는 로컬한 사람들에 대해 기록한 책인데, 곁다리로 많이 세기도 하고....여러모로 기존 학술서와 다릅니다.

아마 요근해 핫한 신유물론과 (어느정도의) 친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이 아닐까 싶네요.

(2) 토마스 리고티 - 인간종에 대한 음모

알라딘: 인간종에 대한 음모 (aladin.co.kr)

사실 이걸 철학책...이라 해야하나? 싶지만 여튼 미묘한 책입니다. 리고티는 53년생 호러 작가인데, 호러 문단 내에서도 굉장히 아웃사이더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컬트 작가'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러브크래프트를 계승한 듯한 정신병적 강박과 공포 아래에서, 묘한 이성을 통해 반출생주의 - 삶에 대한 비관주의를 설파한 책입니다.

기후 위기, 세대적 공황처럼 세상이 일종의 '암흑기'로 진입하고 있다는 감각이 사방에서 엄습하고 있는 요즘, 이와 같은 책들이 실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비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3) 마크 피셔 -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알라딘: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aladin.co.kr)

엄밀히 말하면, 재간행이긴 한데 마크 피셔는 한번 쯤 주목할 만한 작가라고 생각해서 이리 소개합니다. 철학자로 비유하자면, 벤야민에 가까운, 아웃사이더에 문화 비평을 핵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아마 학계를 벗어나서, 반(half)-철학계에 몸 담고 있으신 분들에게는 신유물론만큼이나 입지가 큰 것이 마크 피셔처럼 보입니다.

신유물론과는 다르게, 묘한 좌파 (그것도 영국의 펑크 느낌이 나는) 향이 솔솔 나는 것이 이 책의 특징입니다.

(4) 존 제러마이아 설리번 - 펄프헤드

알라딘: 펄프헤드 (aladin.co.kr)

이 책이야 말로 번역될 줄 몰랐네요 (...) 미국 에세이집 중에서는 가장 극찬을 받았던 작품입니다. 이거 하나로 맥아더 팰로우쉽을 받았죠. (정정 구겐하임 팰로쉽이네요.)(안타깝게도 그 이후로는 별 활동이 없지만 말이에요.)

여러모로 미국에서 논픽션/에세이 장르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그 중에서 가장 수준이 높은 글은 어떻게 쓰였는지 알 수 있는 좋은 전범처럼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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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책들이 정말 많네요. 그 중에서 요즘 반출생주의 관련 책들이 주목받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특히, 스크롤을 내리다가 적어주신 아래 문장에서 멈칫하게 되었거든요.

제가 반출생주의를 깊이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당 논의들을 다소 오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말해, 저는 이런 철학적 경향들의 인기가 일종의 '철학적 파산 상태'를 방증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해요. 철학에서 뭔가 삶의 목적이나 의미를 발견해 보려고 하는 막연한 시도들이 어떤 식으로 파산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게 이런 반출생주의 논의라고 보는 거죠. (과거에는 그것이 일종의 실존주의적 허무주의였다고 생각하고요.)

저로서는 출생의 이점과 단점을 비교해서 반출생주의를 옹호하려는 논리가 굉장히 순진한 공리 계산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오늘날 철학이 삶에 대해 이런 식의 관점밖에 도출하지 못하는 데다 사람들이 이런 식의 주장에 열광한다는 것이 다소 기이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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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에서, 학술적 철학이 그만큼 대중에게서 멀어졌다는 반증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올빼미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실존적 질문'에 대해서 묻지만, 사실 학술적 철학을 하는 입장에서 이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궁색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학술계에서는 (이제야!) 조금씩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으니깐요.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답은 제 개인적인 이야기들뿐이었습니다.

이게 질문은 있는데, 사람들이 (여러 이유에서) 답은 안 하니, 그 과정에서 여러 담론들이 학술계 밖에서 나오고, 그것들이 영향력을 가지고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반출생주의와 같은 비관주의적 - 니힐적 논증이 어느정도 정합성이 있기도 하고요. 다만 이에 대한 대안들은 거의 언급되지 않아서, 사람들의 시야/선택지를 제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라쿤님이 언급하신 '분석적 실존주의'의 흐름이 좀 더 거대해져서 이런 불균형이 해소되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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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중에 "펄프헤드"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네요. 소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꼭 읽어볼 생각이에요.

리고티나 마크 피셔도 그렇고...좀 어둡고 기이한 소재들에 대한 관심이, 아마도 요즘 우울한 세계정세와 더불어, 예전보다 증가한 듯 합니다. 공포(호러)의 철학에 대해서는 일찍이 노엘 캐럴이 다룬바 있었고, 핀란드 헬싱키 대학의 Timo Airaksinen 이 그 뒤에 러브크래프트를 중심으로 한 공포의 철학적 문제를 다룬바가 있죠.

이후로 학자들 13명(13이라는 숫자!)의 논문을 모은 논문집 하나가 출간된 이후 별다른 학술서적의 출판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공포(호러)의 철학 이라는 분야가 성립한 거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영화학이나 기호학 분야 등에서 공포라는 장르를 다루는 것과는 별개로, 철학의 한 영역으로서 (독립적인 장르가 되었다고 가정하면) 공포의 철학은 Gothic studies, 혹은 OOO(객체지향존재론)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며 발전할 수 있을 가능성도 존재할 수 있겠지요. 참고로 'Objective Oriented Ontology as a Horror Philosophy' 라는 논문도 있더군요.

Object-Oriented Ontology as a Horror Philosophy - University of Waterloo “Object-Oriented Ontology as a Horror Philosophy” | marcel | University of Waterloo

좋은 책들 소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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