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변적 실재론 - 신유물론에 대한 여러 가지 잡념들

(0) 예전에 윤님과 라쿤님 등이 메이야수, 그레이엄 하먼 등으로 대표되는 '사변적 실재론', 즉 오늘날 시점에서는 대체로 "신유물론"으로 표현되는 사조에 대해 논의하셨던 바가 있습니다. 최근 (분석) 철학 (혹은 그에 기반한 철학사적 재해석) 이외의 글들을 읽다보니, 신유물론이 출현하고 각광받는 배경에 대해서 몇 자 적는게, 나쁘지 않겠다 느꼈습니다.

(1) 우선 '이론'(theory)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해야할 것 같습니다. 흔히 대륙철학을 영미권에서 다룰 때, 대체로 이들은 철학과가 아닌 문학 이론, 혹은 다른 예술 매체에 대한 비평을 중심으로 하는 학과를 통해 수입된 것을 다들 꽤 잘 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21년 현재 이 이야기는 살짝 오래된 감이 있습니다. 대륙철학과 분석철학을 동시에 전공한 학자들은 물론, 다문화적 배경으로 철학을 하는 학자들과 과학과의 통합을 위한 실험 철학 등등이 등장한 시점이니깐요.)

여하튼 문학 이론에서 "이론"의 지위는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조너선 컬러 (예일대 교수로, 예일대는 미국에 프랑스제 이론들을 수입하는 창구로서 유명한 학교입니다. 데리다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폴 드만이 예일대 교수였습니다. 조너선 컬러는 폴 드만 다음 세대 정도에 해당하는 학자입니다.)는 자신의 책 <문학 이론>에서 이리 설명합니다.

"이론"은 1) 검증할 수 없지만 2) 흥미로운 논의점을 가져다주는 3) 가설이다.

네. 문학 이론에서 주장하는 속칭 "이론"은 애당초 검증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고 (적어도 컬러는) 학자들은 생각하는 셈입니다.

(2) 실제로 이처럼 검증과는 무관한 반-과학적(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말이죠) 태도, 즉 (흥미로운 논의점을 중요시하는) 비평적 태도는 여러 이론 서적들의 서문에 미묘한 뉘앙스로 기술되어있습니다.

제인 베넷의 <생동하는 물질>의 서문에서도, 저자는 이 책이 당면한 긴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쓰였다고 스스로 선언합니다.

이 형태의 가장 급진적인 책은 레자 네가레스타니의 <사이클로노도피아>일겁니다. 이 책은 저자 자신도 "이론-픽션"으로 불렀으며, 픽션과 난삽한 음모론, 철학적 사변이 마구 뒤섞인 책입니다. 허나 이 책은 그레이엄 허먼 등에 의해서 극찬을 받았고, 이들의 이론이 주로 응용되는 분야의 매체인 현대 미술 비평지 아트 포럼에서 극찬을 받습니다. 이 책 부록에 수록된 인터뷰에서, 레자는 스스로 "블로그 잡상 - 중간 철학"으로 책을 의도했으며, 그러한 형태가 왜 나쁘냐고 반문합니다.
네. 이제 미국에서도 블로그 잡탕글이 극찬을 받는 시대가 온겁니다.

(3)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학계의 변화는, 대학 혹은 아카데미에 대한 일반 대중들, 혹은 중간 이론가들 (비평가들, 저널리스트들, 논픽션 작가들)의 압력에서 생존하려는 자연스러운 반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인문학 기금을 고갈되고 있고, 인문학이 돈을 벌려면 사람들이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서, 그럴듯한 말을 하는게 필요합니다.

당장 BLM 이후, 미국 흑인에 대한 서적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제 아프리칸 아메리칸 철학, 혹은 아프리칸 철학도 학계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환경 역시 굉장히 중요한 테마죠.

(4) 여러 "이론"들 중에서 신유물론이 부상한 배경에는 20세기 프랑스 철학을 미국 학계 전반이 소화한 후, 그에 대한 영향을 한번쯤 종합해서 거창한 "브랜드"를 붙일 필요가 있어서 그렇다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제인 베넷이나 마누엘 데란다, 레자 등이 생각하는 핵심에는 비-인간 행위자가 있습니다, 즉, 인간 말고도 다른 것들이 단순히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그 나름대로 행위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들은 그 중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동물 등의 준-의식적 행위자뿐 아니라, 물질 등의 비-의식적 존재들도 "행위"를 한다 주장할 따름입니다.
제인 베넷은 돌, 쇠, 원자 등도 인간과 동일한 행위자로 봐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는 모두 [니체-베르그송-들뢰즈에서 가져온] 힘을 기반으로 행위하며, 이 두 행위자의 경계는 힘이라는 요소를 통해 보면 동일하다고 주장합니다.) 데란다는 살짝 결이 다르지만, 드론과 (디지털) 네트워크가 행위자라 생각합니다, 레자 같은 경우에는 석유고요.

이들의 참조점은 들뢰즈와 브루노 라튀르입니다.

(5) 사실 이와 같은 주장은 다른 분야에서는 썩 놀라운 주장은 아닙니다. 푸코 이후, 70/80년대 사학, 인류학, 과학사회학, 영화-미디어학은 모두 기관, 체제, 생태, 동물 등의 다른 생물체, 도구, 미디어 등등이 인간 행위자와 함께 복잡한 '계', 즉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이들의 중요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강조합니다.

따지고보면, 신유물론은 이걸 종합해, 환경 - 뉴미디어라는 트렌드에 맞게 다듬어서,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가 사실상 동일하다는 급진적인 주장을 하고, 이를 '옹호하려는' 나름의 복잡한 형이상학적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라 전 이해하고 있습니다.

(6) 사실 어떤 의미에서, 철학과 이론의 역할과 전범, 아카데미의 역할과 경제적 구조의 변화 등 미국 학계의 복잡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상징적인 징후처럼 전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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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은 내용이네요. 여기서 말씀하신 내용에 대해 대부분 동의합니다. 특히, 개인적으로, "검증할 수 없지만 흥미로운 논의점을 가져다주는 가설"을 만드는 작업의 중요성은 저 역시도 크게 지지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전 글에서도 사변적 실재론, 객체지향 존재론, 신유물론이 자신들을 '형이상학'이라고 인정하는 한에서는 긍정적으로 보아줄 생각이 있다고도 적었습니다. 그 입장들이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로서, 관점으로서, 비평 방식으로서의 제시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해당 입장들은 자신들을 '형이상학'으로 규정하기 싫어한다는 점이죠. 사변적 실재론이나 객체지향 존재론이나 신유물론은 자신들이 현대철학의 기성 흐름을 극복하였다고 주장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형이상학 담론 장에서 놀기보다는 탈형이상학 담론 장에 뛰어들고 싶어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대결해야 하는 논의가 보편자 실재론과 유명론, 기체 이론과 다발 이론, 시간에 관한 이동 지속 이론과 확장 지속 이론 같은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논의가 아니라, 오히려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 라캉의 정신분석학, 푸코의 계보학, 데리다의 해체주의라고 보는 거죠. 한 마디로, 형이상학 담론을 주장하면서도, 자신들이 형이상학이라는 걸 인정하려 하지 않고, 형이상학과 상관 없는 분야의 담론들에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 현재의 사변적 실재론, 객체지향 존재론, 신유물론의 모습인 것입니다.

저는 그 입장들이 자신들의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현대철학의 다른 영역을 악의적으로 비방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자신들 이전까지의 모든 철학적 작업이 '인간중심주의'였다는 말도 안 되는 요약과 그 요약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찬동하는 분위기가, 현대철학을 연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거슬려서요. 새로운 형이상학을 주장하고 싶으면 기존 형이상학과의 대결 속에서 새로운 형이상학적 아이디어를 보여주고 그 정당성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그 입장들이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 없는 다른 이론철학의 영역을 억지로 깎아 내려서 일종의 '선동'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주목을 끄는 모습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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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뭐랄까....상대적으로 허먼이 기회주의자인 측면이 있죠. 제가 인용한 베넷이나 레자는 사실 꽤 솔직하고 자기가 잘 모르는 영역에 대해선 별 이야기를 안 하도 있습니다.

이게 철학과에서는 다른 분야의 연구에 대해서 굳이 나서서 비판하지 않고, 반대로 이런 이론을 수입하는 과에서는 뭐든 가져다 쓰기 좋은 도구면 그만인 상황에서, 여러 사람들이 판을 크게 벌리고 있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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