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진술에 관한 몇 가지 생각

(1) 네, 제가 또 겁없이 메타윤리학적 주제를 가져 왔습니다 (...)

(2) 개인적으로 (기본적으로) 도덕 비인지주의를 옹호하는 편이다.

(i) "살인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

에서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도덕적 사실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감정/찬반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3) 내가 의문을 삼는 것은, 도덕적 사실에 대한 진술이 '아니더라도' 그에 대한 참-거짓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3-1) 이는 기본적으로 '도덕적 진술'이 대상에 대한 감정/찬반만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에 기반한다.

(i) 살인은 옳지 않다.
(ii) 살인은 역겹다.

두 문장은 대상에 대한 감정/찬반의 표현에서는 동일하다. 둘 다 살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태도를 보여준다. 하지만 직관적으로 두 문장에는 의미의 차이가 존재한다. "역겹다"는 표현은 부정적인 감정/태도에 더해서 어떠한 내용/느낌을 전달하는 듯하다. 이는 "역겹다"를 "증오한다"라는 표현으로 대체해보면 보다 명확해진다.

(3-2) 또한 도덕적 진술마다 태도/감정의 정도(degree)가 다른 경우 역시 생각해 볼 수 있다.

(i) 기부 하는 건 좋은 일이다.
(ii) "아니, 그냥 좋은 일인건 아니지. 기부하는 건 존나 멋진 일이야."

두 문장은 대상에 대한 감정/찬반의 표현 정도가 다르다. (ii)의 발화자는 대상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선호의 정도보다 더 높은 선호도를 표현하고자 했다.

[이건 (3) 참-거짓 문제와는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4) 도덕적 진술의 참/거짓을 단순히 도덕적 사실과의 정합성으로 보지 않으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 (꽤 강한 가정이지만] 나는 좋음이란 상황에 적절함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도덕적 진술의 참/거짓은 상황에 적절한가, 하지 않는가의 문제로 치환될 수 있다.

여기서 (3)의 테제를 결합해보면, 이렇게 볼 수 있다. 도덕적 진술의 참/거짓은 상황에 '적절한' 감정/태도를 가지는지의 문제인 셈이다. (이기서 적절함의 범위에는 호오뿐 아니라, 그 내용[혐오나 증오의 차이처럼], 강도 역시 포함될 것이다.)

(5) embedding problem이 있다. 도덕적 진술이 (명제적인) 참/거짓을 가지지 않는다면, 도덕적 진술을 '포함한' 명제가 참/거짓을 가지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가?

(i) 살인은 옳지 않다.
(ii) 카렌은 살인이 옳지 않다 믿는다.

(i)은 내 가정에 따르면, 감정의 표현으로 명제적 참/거짓값을 가지지 않는다. (마치 감탄사/표현어인 "씨발!"이 진리값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ii)는 진리값을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카렌이 도덕적 진술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지, 아닌지에 대해 참/거짓을 말할 수 있다.

(5-1) 나는 이 문제가 언어 표현이 지칭하는 '대상'이 전환되는 문제로 본다면, 해결할 수 있다 본다. 예를 들어 '안다'라는 표현에서도 우리는 동일한 유형의 문제에 봉착한다. (정말?)

(i) 나는 자전거를 탈 줄 안다.
(ii) 카렌은 자전거를 탈 줄 안다.

'자전거를 탈 줄 안다'는 명제로 표현되었지만, '자전거를 탈 줄 안다'라는 명제적 지식와 대응되진 않는다. '자전거를 타다'는 명제가 아닌 '노하우'라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전환이 직관적으로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 느끼는 것 같다. 그렇다면 (5)의 예시도 이와 비슷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

(5-2) 기본적으로 나는 노하우와 명제 사이의 관계를 '환원될 수 있지만', 그 환원이 '무의미한' 관계라 생각한다.

이 아이디어는 기본적으로 무한과 가산(accountable)에서 가져왔다. 수학에는 연속/불연속의 개념이 있다. 숫자는 연속적이다. 자연수 1과 자연수 2 사이에는 무한한 숫자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자연수는 불연속적이다. 자연수 1과 자연수 2 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기본 단위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같은 범위조차 다르게 '분할'할 수 있는 셈이다.

노하우 역시 이렇다 본다. 예컨대, (i) 자전거를 탈 줄 암은 다음과 같은 명제적 지식의 형태로 환원 가능할 것이다.

(a) 오른발로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b) 왼발로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이 과정은 다시 무한하게 분할 가능하다.

(a) 오른발로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b) 왼발로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c) 손으로 방향을 잡는다

즉, 노하우 지식은 명제적 지식으로 분할할 수 있지만, 명제적 지식으로 (체계적으로) 환원 가능한지는 알 수 없는 셈이다.

(5-3) 이미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한 갈색 개를 상상해보자.

(a) 저것은 개다.
(b) 저것은 갈색이다.
(c) 저것은 네 개의 다리를 가진다
(d) 저것의 눈은 어떠하게 생겼다

이러한 명제의 목록은 무한할 것이다. 동시에 이미지나 노하우는 명제의 참/거짓 값으로 잘 표현되며, 직관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아 보인다.

(a) 내가 상상한 개는 갈색이다.

(5-4) 우리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event), 행위(action), 이미지(image) 등 여러 가지에 대해 명제로 표현할 수 있지만, 동시에 명제로 (온전히) 환원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i) 나는 그를 때렸다.

이 명제로 표현된 사건은 당연히 참/거짓값을 가진다. 하지만 이 사건들을 무수히 많은 명제로 분할할 수 있다.

(i) 나는 그를 주먹으로 때렸다.
(ii) 나는 그를 오른 주먹으로 때렸다.
(iii) 나는 그를 오른 주먹으로 복싱하듯 때렸다.

(만약 명제로 표현된 사건이 우리가 사는 세계 에서 발생했다면 우리는 이렇게 더 구체적인 묘사가 가능할 것이다.)
(이는 가능 세계에 대한 어떤 강한 전제를 함축하는 듯하다.)

상황에 적합한 도덕적 행동 역시 이런 방식으로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

(6) 결론을 내리자면 다음과 같다.

(i) 도덕적 진술은 대상에 대한 감정/찬반을 표현한다. (동시에 여기에는 감정의 내용, 강도 등의 정보 등도 포함될 수 있다. 다만 자연 언어의 한계로 이게 명확히 표현되지 않을 뿐이다.)(어떠한 의미에서 '좋다'라는 표현이 우리가 느끼는 감정/찬반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만을 제공하는 셈이다. 나는 이 최소한의 정보가 도덕적 진술에 있어서 '근본적'인지 의문스럽다.)
(ii) 도덕적 진술의 참/거짓인 이러한 감정/찬반이 상황에 얼마나 '적합한지'의 문제로 치환할 수 있다. 이 적합성이란 명제의 참/거짓과는 구분된다. (굳이 따지자면, 상황의 적절성을 상상하는 folk psychology 혹은 empathy의 문제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 주장이 성립하려면, 도덕적 명제/원칙을 거부하는 도덕 개별론에 대한 논증이 있어야 하는 듯하다.)
(iii) embedding 문제는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비록 도덕적 진술이 지칭하는 것이 명제가 아닌 것이지만, 명제로 분할할 수 있다. 그렇게 분할된 명제의 참/거짓을 말하는 말하는 것이다.

(7) 도덕적 진술에 대한 내 주장은 내가 가진 더 강한 형이상학적 주장을 함축하는 듯 하다.

(a) 세상은 연속적으로 존재한다.
(b) 인간은 그 세상을 어떠한 단위를 가지고 분할한다. (사건, 이미지, 개념, 명제, 행동)
(c) 어떠한 분할도 '최소단위'가 아니다. 그러므로 분할 과정에서는 언제나 '보더라인 케이스'가 생기고, 모호성의 문제가 발생한다. (아마 유일한 예외가 있을 수 있다면, 수학일 것 같다.)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 주장은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주장으로 연결되는 듯하다.
(d) 그렇다면 픽션적 존재자들은 무엇인가? 셜록 홈즈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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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올빼미를 아이디어 스케치와 피드백의 장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주 좋다고 생각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4) "상황의 적절함"의 의미는 여전히 불분명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게 도덕적 비인지주의를 어떻게 옹호하는지도 불분명해보입니다. x는 좋다 iff x는 상황에 적절하다 (?)

(5) embedding problem을 다른 방식으로 풀면

"비인지주의에서 도덕적 명제를 포함하는 논증이 어떻게 가능한가?"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논증은 명제들로 구성되는데 비인지주의에 따르면 애초에 도덕적 진술은 명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도덕적 진술들로 구성된 타당한 논증이 있어 보이는데 도덕적 진술이 명제를 표현하는 게 아니면 그것들을 논증이라고 부를 수도 없죠. "우웩, 야발, 칵퉷"을 논증으로 볼 수 없듯이 말입니다.
또한 도덕적 진술이 명제를 표현하지 않는다면 명제 태도의 대상도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도덕적 비인지주의를 받아들이면 "카렌은 살인이 옳지 않다고 믿는다"는 어떤 명제에 대한 태도가 아니거나, 애초에 말이 되는 문장이 아닐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장은 말이 됩니다. 오히려 이는 비인지주의를 위협하는 예시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많은 비인지주의 지지자들이 도덕적 진술을 명제라고 보지 않으면서도 인지주의에서 도덕적 명제를 다루는 방식을 어떻게 도입할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5-2에서 능력지를 명제지로 환원하는 논증이 반드시 제시된 방식으로 전개될 필요는 없음. 저 논증에서 수학적 개념이 적절하게 적용되고 있는지도 조금은 의심스럽구요. 제가 알고 있는 게 맞다면 Jason Stanley와 Timothy Williamson이 능력지를 명제지로 환원할 수 있다는 논문을 쓴 바 있습니다. 아마 "Knowing How"라는 논문이었던 것 같아요. 이 주제에 대해 꽤 설득력 있는 논증을 제시했다고 하던데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6)
(i) 감정의 "표현"이라고 했을 때에는 그게 설령 문장의 형태를 한 발화더라도 어떤 내용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도덕적 진술에 내용이 포함된다는 것은 이미 비인지주의의 근본적인 형태로부터 조금은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도덕적 진술이 감정의 표현이라는 것과 도덕적 진술은 감정을 포함하는 마음 상태에 관한 진술이라는 것은 다른 주장.

(ii) 가능한 얘기긴 합니다. 실제로 현대 윤리학에서 "fittingness"에 대한 논의가 종종 나오고 있음.(붐인지는 모름) 한 가지 제가 가지는 의심은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이 fittingness 개념이 단순히 자리 바꾸기가 아닌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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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에 대해선 동의합니다. 그냥 말바꾸기가 아니려면, 좀 더 나아간 논의가 있어야 겠죠.

(2)

이 부분은 도덕적 진술에 대한 이 논의보다는, 저의 형이상학적 입장을 드러내기 위한 주장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제 형이상학적 입장은 (7) 부분에 부가적으로 상술했습니다. 이게 원래 목적이던 도덕적 진술에 대한 논의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좀 더 고민해 봐야 할 문제 같습니다.

(3)

이 부분은 사실 정확히 무슨 목표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를 고려해보면, 제 주장이 (i) 감정을 포함하는 마음 상태에 대한 진술이라 보시기에 (ii) 전형적인 비인지주의가 아니다, 라는 게 주장의 요지로 보입니다.

이에 대해 (i) 제 주장이 감정이 아닌 감정을 포함하는 마음 상태에 대한 진술이라 받아드리기 어렵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비인지주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i) 도덕적 진술이 명제가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는 라쿤님과 동일하게 생각합니다. 다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이해/생각이 있는 듯합니다.

(ii)

라는 예시만으로는, 왜 도덕적 진술이 명제가 아닌지에 대한 라쿤님의 해석/견해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이제 제가 이해하는 바를 서술하겠습니다.

(i) 도덕적 진술은 명제가 아니다.
(ii) 왜냐하면 도덕적 진술은 명제의 형태로 표현될지라도, 그에 해당하는 도덕적 참(혹은 사실)이 없으므로 진리값을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살인이 옳지 않다." = "씨발"이라면, "카렌은 살인이 옳지 않다 믿는다." = "카렌은 씨발"이라는 이상한 형태가 되고, 애당초 명제(의 형식조차) 성립하지 않아 보입니다. (만약 이게 라쿤님의 해석이라면) 하지만 제가 볼 때, 이는 잘못된 대체처럼 보입니다.

제가 보기에 옳은 대체는 다음과 같습니다.

(a) 옳지 않다 = 씨발 [감정의 표현]
(b) 살인은 옳지 않다 = 살인은 씨발 [적어도 여기는 표현과 표현의 대상은 있는 듯 합니다.](하지만 여전히 이 문장은 참값은 존재하지 않는 듯합니다.]
(c) 카렌은 살인이 옳지 않다 믿는다 = 카렌은 살인은 씨발이라 믿는다

저는 라쿤님과 제 해석이 갈리는 부분이 (b)가 생각합니다.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라쿤님은 (b) 단계의 도덕적 진술이 오직 "감졍" 표현만을 가진다 해석하시는 듯합니다. (즉 대상이 없이, "씨발"만 발화하는 것과 같죠.) 저는 (b) 단계에서 도덕적 진술이 "감정 표현"과 그 대상 역시 가지고 있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는 '감정'(emotion)이 가지는 필연적 특성이라 생각합니다. (기분 mood와 다르게 말이죠.)

따라서 만일 이 차이가

라는 것이라면, 그리고 전자가 비인지주의라면 저는 비인지주의를 수용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전 적어도 도덕적 진술이 감정 표현 + 그 감정 표현의 대상은 존재한다 생각하거든요. (즉, 감정에는 필연적으로 그 대상과 강도, 다른 현상적 차이까지 포괄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4) 이 주장을 확장해보면, 저는 도덕적 진술이 "도덕적 참/사실"을 지칭하지는 못하더라도, "사실"은 지칭한다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화가 난다."는 사실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될 수 있으니깐요.

(5) 물론 제 주장을 비인지주의라 하는 건, 비인지주의에 대한 제 오독에서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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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전체 논지를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글을 읽으면서 하버마스의 세계 개념이 생각났습니다. 하버마스는 우리의 의사소통 행위를 ‘목적론적(전략적) 행위’, ‘규범에 의해 규제되는 행위’, ‘극적 행위’라는 세 가지 범주로 구분하고, 그 각각의 합리성이 ‘객관세계’, ‘사회세계’, ‘주관세계’라는 기준에 따라 판단될 수 있다고 보거든요. 주관적 감정도 ‘주관세계’와 대응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다른 객관적 사실 기술처럼 평가될 수 있다는 거죠.

물론, 두 가지 점에서 하버마스의 입장과 Mandala님의 입장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것 같아요.

(a) 하버마스는 도덕적 진술을 주관세계가 아닌 사회세계와 관련시키고,

(b) 주관세계와 대응하여 합리성을 지니게 되는 진술을 ‘진리(“화자가 행한 진술이 참이다.”)’보다는 ‘진실성(“화자가 자신의 발언을 통해 표현한 의도대로 실제로 생각하고 있다.”)’이라는 용어로 기술하거든요.

그렇지만 주관적 진술에도 객관적 사실 진술과 거의 유사한 종류의 평가 기준을 도입하려 한다는 점에서, (즉, 감정 표현에도 감정 표현의 대상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하버마스와 Mandala님의 기본적 입장은 통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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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본 해결책이 성공적인지는 여부에 대해서는 염려가 듭니다. 왜냐면 (c)의 우변이 어떤 말인지 이해하려 하다보니, 저로서는 다음 문장과 같은 의미를 띠는 것으로 이해하는게 최선인 것 같기 때문입니다.

카렌은 살인이 역겹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게 (ii)의 번역문이라고 본다면 (i)에 상응하는 문장은 곧

살인은(/이) 역겹다.

가 되기 때문에 문제가 재발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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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선

이 주장은 임베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 견해가 아니라는 점을 밝히는 바입니다. 이 주장은 어디까지나, 도덕적 진술은 단순한 감정에 대한 발화가 아닌 감정+대상에 대한 발화라는 점을 주장하는 바입니다.

(2) 임베딩 문제에 대한 제 해결책은 (본문에 굉장히 난삽하게 나와있지만)

로 말할 수 있어 보입니다. 이를 좀 더 다듬자면

인듯합니다.

(3) 제 입장을 비인지주의라고 포지셔닝한게, 비인지주의에 대한 제 오독에서 비롯된 것 일 수도 있습니다 하하하......임베딩 문제도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의심스럽기도 하고요.

(4) 기본적으로 이 비-인지주의와 관련된 임베딩 문제에는 명제-진리값-참에 대한 강한 "형이상학적" 견해들이 존재하는 것 같은데, 저는 제가 그 형이상학적 입장에 동의하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1)

기본적으로 제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b)가 참값을 가질 수 없는 이유는. 그 문장이 지칭하는 대상이 없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감정이라는 것은 심적 상태를 가진 인지자가 가질 수 있는 것인데, 이 문장에서는 그러한 인지자의 표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b) 단계에 대응하는 사실이 없기에 도덕적 사실이 없다 말할 수 있어 보입니다.)

반대로 (c)의 경우, 카렌이라는 인지자가 문장에 있고, 그렇기에 지칭하는 대상/사태를 찾을 수 있고. 그렇기에 "사실"이라 판단할 수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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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본문에서 감정 표현만 언급하셔서 저는 염두에 두신 비인지주의를 emotivism에 가까운 것으로 가정했는데, 이건 따지고 보면 좀 자비롭게 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현대 비인지주의 이론은 그보다 더 넓은 범위이긴 하니까요.

생각을 좀 더 해봐도, Mandala님의 주장이 (여전히 인지주의라고 할 수 있는) 일종의 주관주의(subjectivism)를 취하지 않고 설명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제가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emotivism을 따르더라도 (b)와 같은 분석을 받아들일 이유는 없어보입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도덕적 진술이 명제가 아니기 때문에 도덕적 용어를 사용한 문장은 의미를 갖지 않고, 없는 의미를 분석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x는 옳지 않다"라고 발화하는 것은 도대체 뭐냐? 라고 했을 때 그들이 답하는 방식은 "그것은 '호우~~' 또는 '우우~~'와 같은 호오의 감정을 드러내는 말일 뿐이다"이 될 것입니다. (b)가 진릿값을 갖지 않는 것은 이 발화가 애초에 명제로서 고려되는 대상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주관주의는 도덕적 진술의 의미가 진술자의 호오에 관한 마음 상태에 대한 진술이라고 여깁니다. "x는 옳지 않다"라는 진술은 그 진술의 발화자가 x에 대해 호 또는 오의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 도덕적 진술은 참/거짓을 따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발화자가 따로 표시가 안 되는 거 아니냐는 질문을 할 수도 있는데, 그에 대한 답은 어떻게 보면 간단합니다. 발화자는 맥락에서 주어지는 것이고 맥락이 주어졌을 때 비로소 "x는 옳지 않다"의 의미가 결정되는 것이라고 보면 되는 것이죠.)

(c)가 참/거짓이 될 수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이건 애초에 도덕적 명제가 아닙니다. 카렌이라는 사람이 무엇을 믿느냐에 대한 진술이죠. 비인지주의자든 인지주의자든 (c)가 명제를 표현한다는 것에는 다 동의할 것입니다. 문제는 비인지주의자의 경우에 카렌의 믿음이라는 명제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려면 안긴 문장 "살인이 옳지 않다"를 명제로 간주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다는 것이죠. 어쩌면 비인지주의자 입장에서는 (c)가 "카렌은 자기 자신이 살인에 대해 "우우~~"라는 식으로 감정을 표현할 것이라 믿는다"와 같은 의미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죠. 인지주의자에 비해 상당히 덜 깔끔해보이긴 하지만 한 가지 가능한 답일 수는 있습니다.
요컨대, 제 생각은 (c)에 대한 Mandala님의 지적은 대체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c)는 어떤 사실에 관한 진술입니다. 그러나 이 점이 비인지주의의 한 버전을 옹호하는 데 있어서 정확히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저에게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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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가 주장한 바가 주관주의에 가깝다면, 전 주관주의자라 불려도 별 상관 없습니다. (의도치 않게 철학에 대한 제 무식이 드러났네요 쩝.)

(2)

사실 전 (라쿤님의 설명에 따른) emotivism과 주관주의가 (그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구분되는지 의문스럽습니다.

(i) x는 옳지 않다
(ii) 주관주의 - "x가 싫다."라는 진술
(iii) emotivism - 우우우우

(iii)은 사실상 (ii)을 수반하는 것 아닌가요? 누구라도 (iii)의 발언이 x에 대한 태도 표명이라는 것은 인정할 수 있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ii)과 (iii)이 의미론적으로 둘은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화용론적 의미에서는 사실상 동일한 의미인 것 아닌가요?

게다가 도덕적 상황이라는 한정된 범위라면, 도덕적 진술의 의미는 화용론적으로 봐야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예컨대, 아무런 발화 맥락이 없는 "우우"는 그저 부정적 태도의 표명입니다. 하지만 도덕적 맥락에서 우우는 언제나 특정한 대상을 가정할 수 밖에도 전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x가 싫다."라는 진술이나 x라는 것에 대해 "우우"라는 진술이나 화용론적 의미는 동일하다 생각됩니다. (굳이 차이를 뽑으라면 청자가 우우 진술을 보다 감정적으로 받아드릴 수 있겠죠. 표현 방법이 다른 셈이니깐.)

(1)

곰곰히 생각했을 때, 아마 이 부분이 주관주의와 제 입장이 갈라서는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저는 (만일) 이모티비즘이 도덕적 진술이 "어떠한 명제의 형태"도 아닌 "감탄사"(와 같은 것으로) 환원된다는 주장이면, (만일 semantic한 차원이면) 수용할 수 있으나 사실상 무의미하다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이 주장이 성립하는 영역이 단순한 진술이 아닌 "도덕적 진술"이라는 맥락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전 어떠한 대상이 없는 "도덕적 진술"[그게 감탄사일지라도]은 상상하기가 어렵네요.) 화용론적 차원이면 어떻게 (명제의 형태로 드러내는 내용이 없는) 감정만을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고요.

나아가 주관주의에서 받아드리기 어려운 지점은 "도덕적 진술의 참/거짓을 따질 수 있다."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도덕적 진술이 감정의 표현이라는 전제하에, 이 진술의 도덕적 참과 사실적 참을 구분해야 한다 여깁니다.

(i) x는 옳다.
(ii) 카렌은 x가 좋다 생각한다. (믿는다는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어서 생각하다고 좀 더 평이하게 옮겼습니다.)

저는 도덕적 진술이 (ii)의 형태로 전환된다 여깁니다만, 이게 어떤 의미에서 도덕적 진술의 참/거짓을 가릴 수 있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ii)가 실제 사태에 대응한다는 점에서, 진리대응론적으로 이 문장의 참/거짓은 가릴 수 있습니다. (주관주의는 이러한 참/거짓이 곧 도덕적 참/거짓이라 여기는 것인가요?)

하지만 저는 그렇다고 이게 도덕적 참이라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참에 대한 두 가지 다른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듯한 생각도 드네요.)

보론하자면 이런 것 같습니다. 다른 문장을 예로 들면 도덕적 진술은 다음과 같은 유형인 것으로 보입니다.

(i) 저 사람은 한국인이다.
(ii) 저 사람은 조센징이다.

두 문장은 명제에 있어서 같고, 진리값도 같아 보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대상에 대한 '태도' 혹은 '감정'이겠지요. 저는 도덕적 진술이 이와 같다 생각합니다. 다만 핵심은 태도/감정에 있으며, 이 영역에서 (진리대응론적인) 도덕적 참은 존재하지 않다 여겨집니다.
굳이 도덕적 '참' 같은 것을 찾자면, 원문에서 언급한 상황에 대한 감정/태도의 적절성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2)

SEP(Moral Cognitivism vs. Non-Cognitivism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에 따르면, 제 입장에 가장 가까운 것은 이모티비즘보단, 표현주의(expressionism)이나 유사 실재론(quasi-realism)이나 혼합 이론으로 보입니다. 다만 구체적인 각론을 살펴봐야 무엇이 쟁점 사항인지 알 수 있어 보입니다.

(1) 이모티비즘에 대한 평가의 내용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이모티비즘이 도덕적 진술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한계가 많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제가 이전 글부터 세심하게 썼더라면 이모티비즘의 맥락에서 도덕적 진술을 언급할 때에는 차라리 "도덕적 발화"라는 말을 쓸 걸 그랬나 싶기도 합니다.

(2) 주관주의 부분과 관련해서 계속해서 오해가 생기는 건 "표현"이라는 말 때문 같습니다. 저는 꾸준히 (이모티비즘에 가까운 비인지주의에서) 도덕적 발화가 감정의 표현이면 그것은 명제적 내용을 갖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단지 감정에서 야기된 어떤 언어적 행위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관주의는 (제가 아는 바가 맞다면) 일반적으로 도덕적 진술은 (ii)처럼 발화자의 마음 상태에 대한 진술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마음 상태에 대한 진술은 굳이 분류하자면 사실 진술입니다.
선생님의 말씀은, 말하자면 (ii)가 (i)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도덕적 진술이 (ii)의 형태로 '전환'된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 '전환'의 의미가 무엇인지 좀 불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대략적으로 어떤 아이디어를 갖고 계신지는 알 것 같습니다. 도덕적 명제는 도덕적 판단이라는 구체적인 맥락에서 등장하는 경우에만 따지는 것이 유의미하고, 어떤 상황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에는 그 상황에 대한 판단자의 감정과 태도가 포함되며, 도덕적 판단에 대한 평가는 바로 그 감정과 태도의 적합성에 의존한다는 생각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 맥락에서 한국인/조센징 예시는 약간 관련없는 예시일 수도 있습니다. 이건 멸칭에 대한 다른 철학적 논의를 다루기에 좀 더 적절해 보이기도 하네요.)
만일 그렇다면 아마 선생님께서는 앨런 기바드(Allan Gibbard)가 제안한 규범-표현주의에 가까운 입장을 갖고 있지 않나 싶네요. 작년에 저도 선생님과 비슷한 동기로 블랙번의 Ruling Passions와 기바드의 Wise Choices, Apt Feelings를 구해서 몇 챕터 정도 읽어봤는데 매력적인 이론이긴 했습니다. 기바드의 글은 좀 더 자세히 읽어볼 필요도 있겠다 싶구요. (올해 희망 리딩리스트 중에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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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닙니다. 덕분에 저도 공부를 많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귀찮은 일을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

이 부분은

에서 볼 수 있둣, "옳다"가 "좋다"로 전환된 것이겠죠? 제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X가 옳다"에 해당하는 참/사실이 (자연주의적 형이상학을 견지할 때)(진리대응적으로)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1) 라쿤님. 제가 요근래 이 주제를 곱씹고 있는데, 세 가지 층위가 뒤섞여있어서 저희 논의가 꼬인거 아니였을까요?

(a) 발화(speech act)의 목적
; 발화의 목적이 애당초 사실에 대한 진술이 아니였다면, 그에 대해 사실을 평가하는 답을 하는 건 올바로 된 화행이 아니다. (예컨대 청소해라!라는 명령에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라고 대답하는 건 이상하다.)

(b) 의미론적 측면
; 명제의 형태로 구성될 수 있는 내용이 없다면, 그 명제의 참거짓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예컨대, 사과 혹은 좋아! 라는 명제의 부분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애당초 참거짓을 따질 수 있는 단위가 아니다.)

(c) 화용론적 차원
; 발화된 언어의 의미론적 차원에 더해, 화행 상황이 함축하는 의미. (예를 들어, 내가 사과를 가리키며 사과!라고 했다면 이건 화용론적으로 "저건 사과다."라는 명제 형태로 구성될 수 있는 의미를 지닌다 추정할 수 있다.)

여기서 에이어가 가정한 이모티비즘은 (a) 발화의 목적은 감정 표현이며 (b) 이건 감탄사 같아서 의미론적으로 명제적 내용이 없고 (c) 화용론적 의미만 가진다. (근데 에이어가 화용론적 의미를 고려하지 않았거나, (b)에 대한 명시적인 주장을 안 했을거같기도하네요. 50년대 이론이니...)
(제가 보기에 (a)만을 주장한다면 굳이 임베딩 문제가 일어날 것 같지 않습니다. 아마도 (b)까지 주장하니깐 그런 것 같은데, 여전히 제가 받아드리기에는 쉽지 않은입장이네요.)

주관주의는 (a) 발화의 목적은 사실의 표현이며 (b) 이는 화자의 감정적 심적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c)는 열려있고요.

아마 이게 라쿤님이 설명하시려던 지점 같은데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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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해한 바가 맞다면 에이어의 주장에 (b)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이모티비즘의 핵심이기도 하구요. 제가 설명하려던 핵심은 둘의 차이는 (b)에 있다는 점에서는 정확히 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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