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전 YOUN님의 얘기를 계속해서 들을 때마다, 진지하게 논쟁에 제3자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제가 느끼기의 YOUN님의 철학이 무엇인지에 관한 생각이, 철학을 너무 터무니없고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든다고 저에게는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냥 철학을 잘 모르고 별로 관심도 없는 사람이 철학 같은 건 쓸모 없다고 하는 말이랑 무슨 큰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옳든지, 아니면 역으로 제가 철학을 터무니없이 진지한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흄에 관해서도 똑같은 논조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흄이 말씀하신 (a)와 (b)를 모두 받아들인다고 합시다. 그리고 흄이 (a)와 (b)를 모두 받아들인다고 해도, 여전히 일상적이지는 않지만 형이상학적인 조건 따위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도 맞아 보입니다. 근데 왜 갑자기, 대체 어느 순간부터 (a')와 (b')처럼 층위 없는 언명으로 (a)와 (b)가 치환되나요? "아인슈타인이 맞긴 맞는데, 어쨌든 틀렸어!"라는 말은, "과학적으론른 맞는데, 형이상학적으론 틀렸어" 아닌가요? 이게 어째서 모순인가요? 자꾸 모순을 억지로 만들어내기 위해서 표현을 의도적으로 탈락시키는 건 아니구요? 예컨대 흄 시대의 범형적 과학자는 뉴턴이었으니, 뉴턴역학을 생각해 보면, 흄은 분명 뉴턴의 업적을 칭송하고, 뉴턴역학을 전반적으로 수용하는 듯 보입니다. 다만 뉴턴의 자연철학의 형이상학적 함축(예컨대, 인과력으로서의 뉴턴적 힘 개념 등)에 대해서는 거부하죠. 흄은 YOUN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모든 종류의 과학적 지식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그냥 반지성주의에 가까운 거죠. 어쩌면 흄은, 과학적 명제들이 과학자들이 소박하게 생각하는 그대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뭐 이런 정도의 주장은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도 흄을 전문적으로는 모르니까 여기서 그만두겠습니다만, 아무튼 흄을 반지성주의자로 이해하면 그냥 흄이 미운 거라고밖에는 생각이 안 됩니다. 도대체 어느 회의주의자가 과학적 지식 자체를 부정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과학적 지식이 과학 내부에서 옳고 그름이 가려져야 한다는 생각은 회의주의자에게도 낯설지 않은 사고방식 같습니다. 흄이 정말로 (a'), (b')를 받아들인다면, 대체 대학에서 왜 흄을 공부하고 가르칠 기회를 제공해야 하나요? 흄이 일상적이지는 않지만 형이상학적인 조건 따위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 형이상학적 조건이 충족되지가 않는다는 것이 바로 흄의 회의주의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맞서는 형이상학자들은 그 형이상학적 조건을 찾으려고 하겠지요. 그럼 또
라고 답하시겠죠. 그래서 흄은 인과에 대한 회의적 논변을 제시하잖아요. 여타 회의주의자들도 특정 대상 영역에 대한 회의적 논변을 제시하잖아요. 애초에 조건이 있다는 생각을 안 하면 된다는 건, 그냥 철학을 안 하겠다는 말로밖에 안 들립니다. 철학을 안 하면 철학적 문제는 쓸모가 없죠. 이건 철학자들도 다 동의할 텐데요(물론 예외는 있겠습니다).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의 영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논변을 통해 철학적 문제가 제시될 때에는, 상식의 사고방식을 따라가다 보니 이것만으로는 문제가 있다는 게 밝혀져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무언가를 찾아나서는 겁니다.
흄은 본인이 제시한 회의주의 때문에 과학을 하지 못한다고 주장한 적 없습니다. 그래도 "형이상학적으로는" 과학이 우리가/과학자들이 생각하는 액면 그대로가 아니다 정도를 주장하겠지요. 이걸 어떻게 YOUN님처럼 깔끔하게 모순으로 정리할 수 있는지 전 참 신기합니다. 만약 YOUN님이 옳다면 어떻게 이렇게 깔끔하게 모순으로 정리되는 걸 다들 모른 채로 철학을 하고 있는지도 더더욱 신기합니다. 이건 본인이 모순의 방법을 선호하냐 아니냐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을 좋아하는 저 같은 사람 말고, 그냥 이론철학 하는 아무나한테 가서 이걸 설명하면, 내용을 100% 이해해도 전혀 설득이 안 될 것 같습니다. 내용은 엄청 간단하잖아요. 철학자들이 모순된 전제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걸 이해를 못해서 설득에 실패하진 않겠죠. 그냥 이걸 이해를 해 봐야,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고 오히려 그쪽에서 YOUN님이 철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겠죠. 이것에 비하면 차라리, "너가 비트겐슈타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니까 가서 책 좀 더 읽고 공부 좀 더 하고 와라!" 하는 게 차라리, 차라리 조금 더 나은 것 같습니다. 물론 이쪽도 역겹지만, 그래도 내용을 좀 더 이해하고 나면 설득이 될거라는 "여지"라도 말이 되게 남겨 놓으니까요.
위에서도 저는 똑같은 불만족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건 무려 제가 2년 8개월 전에 했던 말입니다.
(II)
라고 하셨는데, X에 대한 회의주의(skepticism about X)라는 표현은 영미철학에서 엄청 자주 쓰이는 표현 아닌가요? 물론 제 '회의주의'라는 표현에 대한 사용이 뭔가 "커다란" 회의주의와 "국소적" 회의주의를 별로 구분하지 않고 이뤄지긴 했습니다. 근데 제가
이렇게 말했을 때, 일차적으로 제가 이 얘기를 꺼낸 건 Baker&Hacker의 1985년 "Scepticism, Rules and Language"의 6페이지 본문에 정확히 동일한 내용이 있어서입니다. 그냥 통으로 가져오겠습니다.
Initial qualms may be strengthened by reflection on the oddity of the so-called scepticism. What is classically known as scepticism typically involves challenging an apparent evidential nexus. The sceptic agrees that we do know the truth of statements about subjective experience, but, since they do not entail statements about objects, he denies that we really know anything about the material world. In a more obliging frame of mind, he accepts the possibility of knowledge about the behaviour of others (or about memories and current evidence, or singular statements) but denies that it supports cognitive claims about other minds (the past, inductive generalizations). But Kripke's sceptic, unlike the classical sceptic, saws off the branch on which he is sitting. For he is not claiming that certain given knowledge fails to support other commonly accepted cognitive claims. ...(중략)... But this is not scepticism at all, it is conceptual nihilism, and unlike classical scepticism, it is manifestly self-refuting. Why his argument is wrong may be worth investigating (as with any paradox), but that it is wrong is indubitable. It is not a sceptical problem but an absurdity. (pp. 5~6, 강조 제가 한 게 아니고 원문입니다.)
크립키의 회의적 역설에 대한 B&H의 평가는 저의 지금 맥락에서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과 대조하는 데 쓰인 classical scepticism의 sceptical problem에 대해서, 누구든지 그렇게 자기파괴적이라는 이유로 쉽게 dismiss 해버리진 않으리라는 생각이 아주 당연하다 정도는 보여드리고자 하는 겁니다. 뭐 사소한 거지만, 전 "p에서 q를 추론해낼 수 없다"는 구조이면 전부 회의주의라고 한 적 없고, 회의주의가 그런 구조를 지닌다라고 말했습니다. 혹시 예시가 하나밖에 없어서 근거가 부족하다고 느끼신다면, 반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철학자를 한 명만 가져와 보세요.
저는 다소 과감하긴 해도, 철학의 정의가 회의주의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III)
근데 베이커 해커의 이 책 읽으셨잖아요. 심지어 제가 리뷰를 시도했던 그 논문의 참고문헌이기도 합니다. 가볍게 읽고 만 정도도 아니겠죠. 물론 지엽적인 부분이니까(그래도 크립키의 "회의적 역설"이 회의주의조차 아니라고 지적하는 건 제게는 꽤 중요해 보입니다), 기억이 안 나실 수도 있겠지요. 이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근데 저는 진지하게 텍스트 독해와 관련해서도 문제제기를 해야겠습니다. 인신공격이 될 까봐 그동안은 자제하고 이렇게까지는 말을 안 했는데, 전 정말로 YOUN님의 철학 텍스트 독해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A)
2년 9개월 전 저희의 논쟁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YOUN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멘탈헬스 이슈로) 글삭튀를 해서 지금 가면 제 글이 사라져있지만, YOUN님은 저 인용을 제 글에서 했습니다. 근데 사실 제가 쓴 저 문장은, 그냥 James Conant의 본 논문을 그대로 번역한 것에 불과합니다. YOUN님의 저 글은
는 내용의 글입니다. 바로 그 Conant의 논문 "Stanley Cavell's Wittgenstein"의 64페이지, 그러니까 마지막 페이지에 정확히 "Rather the grammar of our various language games is exhibited to the skeptic, in order to present him with an Übersicht of the various possibilities of meaning his words that are available to him." 이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저는 당시에 Conant의 논문에 대한, 또 Cavell에 대한 YOUN님의 요약이 핵심을 벗어났다고 느꼈기 때문에 답글을 썼었고, 저런 응답이 왔습니다. YOUN님은 Cavell의 회의주의 트리트먼트에 대해
이렇게 요약하셨는데, 카벨은 이런 소리를 한 적이 없습니다. 코넌트가 다루고 있는 카벨의 회의주의는 The Claim of Reason의 2부에 나오는 세계의 존재에 대한 회의주의입니다. 카벨은 회의주의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의심의 근거조차도 의심해야 하는 상황에 빠진다 따위의 언급은 일절 한 적이 없습니다. 정말 그걸로 끝난다면, CR 2부는 대체 뭐한다고 분량이 110페이지가 넘을까요? 카벨을 읽지 않아도, 적어도 카벨을 요약하는 코넌트의 논문만 꼼꼼하게 읽었어도, 코넌트 본인조차 (카벨의) 회의주의에 대해서 저런 말을 안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제가 그 점을 지적하니까 "그것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한다면, 그러면서도 정작 본문은 "카벨의 비트겐슈타인 해석의 논지에 동의한다"고 말한다면, 그냥 글을 전혀 안 읽은 채로 논문 속 표현들에 자기 사고 틀을 투영한 것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예컨대
와 같은 언급은, CR 1부 1장에서 카벨이 criteria, grammar, agreement, attunement, authority 등에 관해 논의하는 것에 정확하게 반대되는 지적입니다. 무식하게 말해서 카벨은, 이미 우리가 언어에서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동등하게 권위가 있다고 얘기합니다. YOUN님은 우리가 언어에서 이미 일치한다는 사실은 그토록 강조하면서, 일상언어에 호소하는 권위에 관한 카벨의 논의에는 생각이 전혀 미치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언어에서 이미 일치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동기가 그저 철학적으로 의미의 조건을 탐구하지 마라는 주장을 펴는 데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때로 이 일치를 선택적으로 무시하신다는 생각도 드는데, 특히 너는 너의 언어가 있고 나는 나의 언어가 있다 식의 발언을 할 때 그렇습니다.)
(B) 논문 "사용 이론과 회의주의를 넘어서"의 주석 35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대한 카벨의 해석을 딜레마 형식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은 코넌트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이건 정말 말이 안 되는 게, 코넌트를 거칠 필요 없이 카벨 본인이 너무나 명시적으로 회의주의자가 딜레마에 빠진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카벨을 안 읽어 본 겁니다. 심지어 이는 목차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The Claim of Reason 2부 Chapter VIII의 세부 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The Philosopher's Ground for Doubt Requires Projection
-The Philosopher's Projection Poses a Dilemma
-The Philosopher's Basis; and a More Pervasive Conflict with His new Critics
-The Philosopher's Context Is Non-claim
-The Philosopher's Conclusion Is Not a Discovery
-Two Interpretations of Traditional Epistemology; Phenomenology
-The Knowledge of Existence
이 소제목들은, 그냥 책을 펼치면 목차 부분 viii 페이지에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책을 뒤져야만 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제 보니 이 책은 아예 참고문헌에도 없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넌트의 논문 속에서 CR을 인용한 문단에서 이미 딜레마 얘기가 원문으로 나오기 때문에, 딱히 면죄부가 주어지진 않는 듯합니다.)
심지어 카벨의 딜레마가 논문이 제시하는 것처럼
카벨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언어 일반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고자 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즉,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언어의 의미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을 찾기 위해 언어게임보다 아래로 내려가고자 하는 시도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서 근본적으로 거부된다. 애초에 ‘조건’이라는 말은 언어게임이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을 뿐이다. (a) ‘조건’이라는 말을 의미 있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언어게임보다 아래로 내려갈 수 없고, (b) 언어게임보다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조건’이라는 말을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없다. 35) 따라서 언어게임의 모든 구체적 맥락을 설명하면서도 어떠한 구체적 맥락도 전제하지 않는 ‘조건’이란 허구이다.
인 것도 아닙니다. 카벨의 따르면 세계의 존재에 관한 회의주의는 일상적 앎 주장의 맥락에서 시작하며, 그래야 합니다. 그래야만 "상식적인 누구나"에게 일반화되는 함의를 지니고, 우리가 상식이라고 여기는 바로 그것을 회의주의가 논박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카벨의 딜레마는 (i) 언어게임 내에서 의심을 표현하거나 (ii) 언어게임 밖에서 의심을 표현하거나의 선택지 사이에서 이루어집니다. 한편으로 (i)을 선택하면, 회의주의자처럼 일반적인 결론을 도출할 수 없고, 특정 맥락 하에서 구체적인 의심밖에 가능하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ii)를 선택하면, 일상언어 속에서는 그 모형을 찾을 수 없습니다. (i)은 회의주의자가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부되고, (ii)는 회의주의자가 탐구의 시작을 일상적 앎 주장의 맥락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또 그래야 하기 때문에, (ii)의 경우 회의주의자는 본인의 전체 탐구 과정에 부합하는 의미-모형을 자신의 표현에 부여할 것이 없게 됩니다. 이때 회의주의자에게 선택지로 주어지는 의미-모형이 일상언어의 언어게임이고, 그렇기 때문에
회의주의자에게 우리가 하는 것은, [……] 회의주의자에게 우리 언어의 다양한 언어 게임들을 보여줌으로써, 그에게 유효한 의미의 다양한 가능성들의 조망/통찰Übersicht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Rather the grammar of our various language games is exhibited to the skeptic, in order to present him with an Übersicht of the various possibilities of meaning his words that are available to him.
코넌트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사실 제가 위에서 튜링이나 괴델에 관한 견해를 설명할 때 유사한 구성을 취했죠. 그때는 이런 글까지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저는 일관된 해석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쩌면 YOUN님이 논문에서 카벨의 인식론적 회의주의를 다루려 한 것이 아니라, 딜레마 형식을 "응용"해서 언어의 (의미의) 조건을 찾는 시도를 "딜레마의 형식만 빌려" 비판한 것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카벨은 언어의 의미의 조건이 언어게임 아래에 있지 않다는 데 동의할 테니까요. 근데 YOUN님이 논문에서 제시한 (a), (b)는 모순도, 딜레마도 아닙니다. 그냥 둘을 전체로서 고려할 때, (a), (b)를 함께 제시하는 건 그저
(c) '조건'이라는 표현에 의미가 있다<=>'조건'이라는 표현이 언어게임 내부에 있다
랑 동일합니다. 만약 누가 이런 주장을 한다면, 뭐 이런 주장을 하는 것 자체는 그렇다 쳐도 그걸 철학적 탐구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으로 활용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걸 증명해보라고 할 겁니다. 그리고 이미 올빼미에서 그런 반응을 많이 들었습니다. 어째서 비트겐슈타인은 일상언어만 의미 있다고 인정하는가? 그러면 전문용어를 다 무의미하다고 해야 하나? 언어게임이 뭐길래? 조건에 대한 파악 없이도 언어가 돌아간다는 것과, 그럼에도 "실제" 조건에 대한 파악이 형이상학을 통해 가능하다는 주장은 최소한 겉보기에는 양립가능합니다. 이건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한 것과 동형입니다. 철학자들이 YOUN님의 논문에서처럼 "언어는 의미가 있으면서도 의미가 없다"는 단순명료한 모순을 (암묵적으로든 뭐든) 받아들인다는 건 전 도저히 납득이 안 됩니다.
근데 카벨이 인식론적 회의주의를 이야기할 때, 굳이 그런 주장에 개입할 필요까지 없습니다. 왜냐하면, 회의주의적 문제가 발생하기 위해서, 회의주의자가 본인이 바라는 그 함의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일상 언어 내부에서 시작을 해야 함을 카벨이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분명 일상 언어"만" 유의미하다고 인정하는 것과는 비슷해 보여도 엄연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이나 카벨이 일상 언어만 유의미하고 전문 용어는 무의미하다 뭐 이런 주장을 할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 목차에서만 봐도, 철학자의 의심의 근거는 투사를 필요로 하며, 바로 이 철학자의 "투사"가 딜레마를 설정한다고 말합니다. CR 2부 6장은 세계의 존재에 관한 회의주의의 논변 흐름을 따라가며, 회의주의자가 자신이 바라는 함의를 달성하기 위해 어째서 일상언어 내부에서 시작해야 하는지 등 이 회의주의가 어떤 논리로 제시되는지를 탐구합니다. 그리고 CR 2부 7장은 그 절반이 Projecting a Word에 관한 내용입니다(CR 7장이 바로 The New Wittgenstein에서 인용하신 "Excurses on~"입니다. 아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왜 NW의 첫 장을 장식하는지 그 중요성도 제 설명 하에서는 이해가 되실 겁니다.). 이게 다 빌드업이 필요하며 또 충분히 있다는 말입니다. 딜레마는 아무렇게나 구축되는 것이 아니고, 회의주의자의 논의 과정을 그대로 따라가며 검토한 후에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카벨은 이 지점에서는 이게 딜레마라고 해서 곧바로 회의주의가 논박되지는 않을 것(That will hardly constitue a refutation of skepticism, much less of the tarditional epistemological procedure as a whole)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다만 "But the dilemma we have come upon must itself give us pause"이라고 말할 뿐이죠. (CR, p.203). 더 깊은 자세한 논의는 생략하겠습니다. 아무튼 카벨에게 있어, 회의주의자는 모순에 빠지는 게 아닙니다. 2년 9개월 전에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카벨에 대한 해석으로서는 저는 똑같은 내용을 주장하고자 합니다. 모순 어쩌고가 아니라, 바로 이게 핵심입니다. 회의주의는 언어와 언어 표현에 대한 욕망이 서로 충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디테일하게 탐구를 한 이후에는 전혀 수사적 표현, 슬로건이 아니라 오히려 사태를 적확하게 설명하는 말로 이해될 것입니다.
사용이 있는 모순은 괜찮고 사용이 없는 모순이 문제라고 말한다고 해서 모순이 핵심이 아니라는 지적을 회피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사용이 있는 모순은 괜찮은데 사용이 없는 모순이 문제인 거면, 모순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겁니다. 사용이 없는 비모순도 사용이 없는 모순만큼 사용이 없다는 점에서 똑같이 무의미이니까요. 어차피 사용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에 달린 것입니다. 바로 그걸 보여야 하는데, 그걸 모순으로 정식화하기만 한다고 보일 수는 없다는 요지로 위에서부터 전 계속 말해왔습니다. 그래서 왜 철학적 문제를 제기하는 철학자들의 모순만 사용이 없냐고 반문한 것입니다.
(IV)
근데 YOUN님은 제가 이런 말을 하니까 해석이나 분류법, 명칭의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근래에 저희가 의견을 나눌 때에도, YOUN님이 철학적 내용을 보다 중요시하는 반면에 저는 주석적 문제에 집착하는 훈고학자로 프레임이 씌워진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철학도들이 주석적 문제는 추종자들이나 하는 일이고, 본인은 철학적인 문제를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명의 철학자, 하나의 사상에 매몰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그 말은 정말로 옳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텍스트를 아무렇게나 읽고 아무렇게나 써먹어도 상관없다는 거라면, 전 결단코 반대합니다. 철학 대 주석이 대립하는 건 사실 자주 있는 일이 아닙니다. 특히 분석철학계에서는 이런 문제가 겉으로 드러나게는 잘 발생하지 않죠. 열심히 읽었을 때 이해를 못할 만한 글이 잘 없기 때문입니다. 근데 열심히 읽어도 이해를 하기가 어려운 글들이 세상에는 많고, 이런 글들을 한 번 제대로 이해를 해 보고자 주석적 작업이라는 것이 요청되겠지요. 근데 열심히 읽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글들을 그냥 자기 나름대로 읽고 문제에다 잘 써먹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논리는, 전 수긍이 안 됩니다. 결국 이러면 본인이 평소에 가졌던 생각, 다른 어딘가에서 봤던 생각 등이 그 텍스트의 표현들에 그저 투영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뭐 그렇게 해서 문제를 해결하면 그만이라고 칩시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주석적 작업이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작업과 분리될 수는 없습니다. 정말로 오롯이 역사학만을 하고 있는게 아니라면, 주석적 작업도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직접적인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특히 해당 텍스트가 그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한 흔적이 있다면, 그것을 주석적으로 온전하게 재구성해보는 작업 자체가 이미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의 일환인 것입니다.
제가 이 커뮤니티에서 비트겐슈타인과 관련된 이야기밖에 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제가 훈고학자로, "책을 한 권만 읽은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도 납득은 합니다. 그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고, 제가 왜 positive한 주장을 그간 회피했으며 더 이상 하지도 않으려 하냐면, 제가 아무리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 역시도 YOUN님의 논의를 왜곡하거나 오해한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근데 그건 서로 인정할 만합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인터넷 커뮤니티고, 여기에 뭘 그렇게 집중해서 정신력을 소모해야겠습니까. 근데, 바로 그래서 저는 제 주장을 직접 하는 것 말고 카벨 같은 나름 권위가 있는 텍스트 자체에 호소한 것이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을, 카벨을 읽고 제대로 이해하면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제가 위의 언급한 것들을 그때 논쟁 당시에 지적하지 않은 것은, 카벨을 안 읽어봤을 테고 그렇기에 그런 거 가지고 지적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그냥 그런 잘못 지적 말고 순전히 내용상으로 반박을 하고 싶었습니다. 근데 지금은 다릅니다. 카벨을 소재 중 하나로 활용해 논문을 쓰고 심지어 그 논문의 저자가 "카벨의" "정적주의"를 철학적으로 올바르다고 지지하는데, 주변에서 아무도 이런 이슈를 지적을 안/못하고 비트겐슈타인 전공자로서 인정받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평가를 받는 이 상황이 저는 납득이 안 됩니다.
애초에 그 많은 학자들의 논의가 한 쪽 정도의 분량으로 모조리 논박되는 이유는, 그들의 사상을 끼워맞출 틀이 있기 때문입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들었나요? 그 이상함의 감각을 말해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나요? 만약 없었고 실제로 이게 이상하지도 않다면, 제가 그동안 철학을 완전히 헛공부한 것이거나, 지금 완전히 심각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겠죠 뭐. 그런데 말입니다. 만약 YOUN님의 모순 폭로 전략이 예컨대 셀라스의 소여의 신화 비판과 동일하다면, 셀라스는 왜 본인의 그 좋은 방법론을 철학의 문제 일반에다 확장하지 못했을까요? 모순, 귀류법 등을 활용해 철학적 작업을 한 사람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귀류법을 통해 모순을 지적함으로써 특정 문제가 잘못 제기된 문제임을 밝힌 사람도 꽤나 많습니다. 그 사람들은 대체 왜 그 간단한 걸 못 보고 놓쳤을까요? 이상하지 않나요? YOUN님의 논리는 누가 봐도 전혀 topic-sensitive하지 않게 무차별적으로 적용될 겁니다. 암묵적 모순을 텍스트의 함축 등을 탐사해 가며 밝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형이상학을 시도만 해도 무조건 그 입장을 모순으로 정식화할 수 있습니다. 근데 심지어 그렇게 정식화된 모순이 엄청 간단명료해요. 그럼 모든 철학적 문제를 다 해결해 버릴 텐데, 뭐하러 그런 기회를 놓치나요. (셀라스의 논변은 topic-sensitive합니다. 그리고 카벨의 논변조차 topic-sensitive합니다. 당장 회의주의만 해도 CR 2부의 세계의 존재에 대한 회의주의, CR 4부의 타인의 마음에 대한 회의주의, CHU의 규칙 따르기 회의적 역설 세 가지 모두 논변의 과정, 구조뿐만 아니라 결론, 의의도 다 다릅니다.) 전 YOUN님이 비트겐슈타인도, 카벨도, 그리고 철학이 무엇인지도, 전부 다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위의 근거가, 이 주장이 단순한 매도와 비방이 아님을 보여주기를 기대합니다. 철학이 무엇인지에 관한 YOUN님의 컨셉션이 교정되지 않는다면, 아마 이 글도 YOUN님에게 이해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