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아마 YOUN님은 이 구절들이 말하는 바에 대해서, 이렇게 해석하실 것 같습니다.

이론철학자들의 언어게임이 한 축으로 모든 언어의 본질이 ‘엄밀한 논리적 질서’에 기반을 둔다는 전제를 받아들이고, 그와 동시에 다른 한 축으로 일상 언어는 그런 질서에 입각하지 않았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면, 모순되는 두 전제를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이론철학자들의 언어게임은 엉터리다.

저는 YOUN님의 이러한 해석에 두 가지 이의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첫째, 앞서 제가 비트겐슈타인의 모순에 관한 논의를 설명하면서 나온 결론 중 하나가, 언어 게임에서 모순이 발생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 게임을 버려버려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론철학자들이 자신의 언어게임을 완전히 버려버려야 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 전제를 적당히 수정하거나, 어쨌든 모순을 방지하기만 하면 될 텐데요. 단지 모순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그 게임을 왜 아예 갖다 버려야 하는지가 납득되지 않을 겁니다. YOUN님의 글에서 자주 보이는 표현이, 어떤 근본적인 균열을 상정한 뒤, 그것을 다시 연결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표현인데, 정말로 결코 성공할 수 없는지 어떻게 아나요? 형이상학자의 언어게임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어떤 근거로 알 수 있나요? YOUN님은 이 이유를 따로 보여주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뭐 이건 그렇다 칩시다. 저도 YOUN님의 결론에는 동의하니까요. 그 다음이 진정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론철학자들은 대체 왜 그런 모순적인 전제를 받아들이는 것인가요? 자신이 모순적인 전제를 암묵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알지 못해서일까요?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모든 언어의 본질이 ‘엄밀한 논리적 질서’에 기반을 둔다”는 전제와 “일상 언어는 그런 질서에 입각하지 않았다”는 전제는 명시적으로 모르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이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나요? 『논고』의 비트겐슈타인도 당연히 알고 있던 것입니다. 단지 둘을 명시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뿐만 아니라, 둘이 모순된다는 것도 명시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현대의 많은 이론철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YOUN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어떤 근본적인 균열을 상정한 뒤, 그것을 다시 연결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것이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근본적인 균열이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라고 생각하며, 어떻게 답을 구해야 하는지조차 합의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철학이 언젠가는 그 연결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사유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YOUN님의 해석적 그림에서 이런 물음은 전혀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비트겐슈타인은 “이론철학의 언어게임이 지닌 모순을 폭로하는” 작업을 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적어도, 어떤 모순을 집어내는 것 자체가 비트겐슈타인의 핵심적 작업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문제를 해소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둘째, YOUN님은 “이론철학자의 언어게임”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한다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론철학자의 언어게임”은 일상적인 언어게임들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들 나름의 체계 속의 전문용어를 사용할 때는 그렇다 쳐도, ‘철학적 문제’를 처음 제기할 때는, 그들이 일상적인 언어게임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데카르트나 흄이 철학적 문제로 제시하는 회의주의가, 앎 또는 의심에 관한 일상적인 언어게임에서 출발하지 않았다면, 그 문제에 무슨 중요성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또, 그들 나름의 제멋대로인 해결책을 강구한다고 해서 우리가 어떻게, 무슨 근거로 말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의 게임에 불과할 뿐이겠지요. 그렇다면 이 언어게임과 일상적인 언어게임 간의 연결이 YOUN님에게는 과제로 남을 텐데,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런 걸 상정하지 않고 이론철학자들의 발화가 왜 문제가 되는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105~108에서의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그가 여기서 논의하고 있는 것은 특정 철학 이론이 아니고(따라서 어떤 이론철학의 언어게임이 아니고), 어떤 ‘철학적 요구’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학의 순수성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요구(§107)였다고 고백합니다. 이 요구는 또한 결정체와도 같은 순수성에 대한 선입견(§108)이라고도 표현됩니다. 그 이후 §109절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고찰에는 설명이 아니라 기술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기술은 철학적 문제들로부터 그 빛, 즉 그 목적을 얻는다고 합니다. 즉, 철학적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해서 이런 기술의 방법이 도입되는 것입니다. 잠시 §90을 가져와 보죠.

§90. 우리는 마치 현상들을 꿰뚫어 보아야 할 것처럼 느끼지만, 우리의 탐구는 현상들이 아니라 현상의 ‘가능성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지향한다. 요컨대 우리는 현상들에 관한 진술의 종류들을 기억해낸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도 사건의 지속 및 사건의 과거, 현재, 미래에 관한 다양한 철학적 진술을 기억해낸다. (이는 물론 시간, 과거, 현재, 미래에 관한 철학적 진술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찰은 문법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고찰은 오해들을 제거함으로써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여기서 오해들이란 낱말들의 쓰임에 관한 오해들로서, 무엇보다 우리 언어의 서로 다른 영역들에 있는 표현 형식들 사이의 어떤 유사성들로 인해 생겨난 오해들을 말한다. -- 이런 오해들 가운데 일부는 표현의 한 형식을 다른 형식으로 대체함으로써 없앨 수 있다. 우리는 이를 우리의 표현 형식들을 ‘분석하는 일’이라고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과정은 때로 어떤 것을 분해하는 일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3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