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주의적 해명: "나의 철학자들은 그러지 않아!"(2)

이 글은 아래 논쟁을 배경으로 합니다.

voiceright님은 저에 대해 일종의 '의분'을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저는 이 논의가 다소 시큰둥하게 느껴집니다. voiceright님의 논지들 하나하나에 제가 재반박을 올리는 것이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간략히 '권위주의적'으로만 답변하려고 합니다. 저의 '비트겐슈타인 해석'부터 '철학의 컨셉션'까지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주장이 정말 그런지는 다른 '권위'가 판단하도록 맡기겠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들은 본질적으로 '권위에 호소하는 논증'입니다.

(1) YOUN은 카벨을 읽지도 않고 논문을 썼다?

솔직히, 저는 이 부분을 보았을 때 굉장히 의아했습니다. 그 전에 voiceright님은 The Claim of Reason의 목차까지 제시하실 정도로 그 책에 대해 강조하셨는데, 제가 논문에서 인용한 "Excursus on Wittgenstein’s Vision of Language"가 바로 그 책의 한 챕터이기 때문입니다. voiceright님이 그 다음 댓글에서 스스로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voiceright님의 주장은 무엇입니까? 제가 The Claim of Reason을 읽었다는 이야기입니까, 안 읽었다는 이야기입니까? 제가 "Excursus on Wittgenstein's Vision of Language"을 인용한다고 하시면서 The Claim of Reason을 읽지 않았다는 주장은 '모순'아닙니까? (본의 아니게 여기서도 '모순'이 등장하네요.)

(2) YOUN은 카벨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논문을 썼다?

권위에 호소하자면, 저는 "Excursus on Wittgenstein's Vision of Language"을 저 혼자 방구석에서 마음대로 읽고 인용한 것이 아닙니다. 저 글은 2019년에 성균관대학교에서 다른 대학원생분과 스터디를 하면서 읽은 글입니다. 제 블로그에 저 글에 대한 꽤 상세한 요약이 있습니다. voiceright님은 다시 제 요약이 총체적으로 틀렸다고 하시겠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저도 틀렸고, 당시 저와 스터디를 하면서 함께 글을 읽었던 대학원생분도 틀렸겠군요.

우리는 어떻게 언어를 배우는가?: 스탠리 카벨,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관에 대한 첨언」(1)
잡념과 공상 : 네이버 블로그

우리는 어떻게 언어를 배우는가?: 스탠리 카벨,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관에 대한 첨언」(2)
잡념과 공상 : 네이버 블로그

(3) YOUN은 카벨을 '종합적으로' 읽지도 않고 논문을 썼다?

제가 The Claim of Reason 전체를 '종합적으로' 읽지 않고 논문을 썼다고 한다면, 맞습니다! 저는 그 책 전체를 다 읽지는 않았습니다. 서문과 "Excursus on Wittgenstein's Vision of Language"과 회의주의를 다루는 몇몇 장들을 보고서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인가요?

애초에 제 논문은 비트겐슈타인 해석에 관한 글입니다. 반면 The Claim of Reason비트겐슈타인 연구서가 아니죠. 제가 이 책 전체를 다 읽고 인용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카벨의 비트겐슈타인 이해만 알면 됩니다. 애초에 The New Wittgenstein의 편집자들이 저 챕터만 따로 뽑아내어 책에 수록한 것도, 저 챕터 안에서 충분히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카벨의 관점을 끄집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강조해드리지만, 제가 인용을 The Claim of Reason에서 하지 않고 The New Wittgenstein에서 한 것은, 제가 애초에 The Claim of Reason 전체를 다 읽은 것처럼 속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본 글 속에서 카벨에 대해 말하면 충분할 뿐입니다.

(4) YOUN은 카벨을 읽기는 읽었지만 '총체적으로' 오독했다?

voiceright님이 제 카벨 해석에 불만족스러워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완전히 틀렸을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제 글은 초고 완성 당시부터 이미 두 분의 비트겐슈타인 전공자 교수님들께 검토를 받았습니다. 출판되고 나서는 한 분의 언어철학 전공자 교수님이 서평을 써주셨죠. 이분들도 카벨을 총체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계시겠군요.

더 나아가, 저는 논문 투고 과정에서 6편의 논평을 받았습니다. 그 중 한 분은 브랜덤에 대한 제 비판이 너무 피상적이라고 불만족스러워하셨고, 두 분은 해커에 대한 해석이 다소 편향적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모두 제가 어느 정도는 납득할 수 있는 이유에서 말입니다. voiceright님 이외에는 카벨에 대한 해석을 지적하신 분은 아직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그 해석이 '총체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한 분은 못 보았습니다. 아마 비트겐슈타인 연구자분들이 카벨에 대해 너무 관심이 없거나, 제 논문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국내 학계가 총체적으로 카벨을 오독하고 있는 것이겠죠.

(5) YOUN은 자기 생각에 갇혀 있다?

"그 이상함의 감각"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주신 분이 voiceright님이셔서 제가 그동안 열심히 voceright님의 비판을 따라 카벨도 읽어보고 코넌트도 읽어본 겁니다. 그걸 다 읽은 다음 제가 내린 결론이 제 글들입니다. voiceright님이 말씀하신대로 읽어보았지만 이상하지 않더라고 말입니다. 아마 제가 여전히 선입견에 싸여 카벨, 비트겐슈타인, 셀라스, 헤겔 등 총체적으로 오독하고 있어서겠죠. 그리고 카벨, 비트겐슈타인, 셀라스, 헤겔 등에 대한 제 논문들이 학술지에 게재된 건, 국내 학계가 심각하게 잘못되어서일 것이고요.

(6) 사소한 문제들: 해커와 베이커의 글로 회의주의 설명하기?

처음 문단에서 voiceright님의 글과 두 번째 문단에서 해커와 베이커의 글이 정말로 같은 의미라고 생각하신다면, 저로서는 솔직히 실망스럽습니다.

(a) 주관적 경험의 진리에 대한 진술로부터 물질적 세계에 대한 진술을 추론해낼 수 없다.

라는 주장과

(b) 특정 영역으로부터 다른 영역의 지식을 추론해낼 수 없다.

라는 주장은 동치가 아닙니다. (b)로부터 (a)와 같은 회의주의는 도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회의주의'라는 용어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 번 더 물어보았던 것입니다.

(7) 나의 철학자들은 그러지 않아!

voiceright님의 주장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논증들입니다. 정리하자면,

  1. 철학자들이 설마 YOUN이 제시하는 그런 쉬운 문제를 몰라서 틀릴 리 없다.
  2. 따라서 YOUN이 틀린 것이다.

한 마디로, "나의 철학자들은 그러지 않아!" 혹은 "나의 철학은 그러지 않아!"라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그런데 이 주장이 정당한지는 따져봐야 하는 문제입니다. 쉬운 문제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경우도 상당히 빈번하게 발생하는 일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voiceright님은 이 부분에서 '철학자'와 '철학'의 권위에 호소하시면서 제가 제시하는 비판들을 일거에 부정해버리시려 합니다.

제가 보기에, voiceright님이야말로 너무 손쉽게 철학을 하시려고 합니다. 헤겔을 인용하면서 강조했듯이, 모순을 해소하는 이 작업은 부단하고 끈질기게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한 철학자를 비판하려면, 그 철학자의 텍스트에 밀착해서 그가 어디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를 주석적으로 집요하게 지적해야 합니다. (데리다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이 작업은 다른 철학자의 텍스트에 '기생적'입니다. 루소를 해체하고자 하는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전체가 루소의 텍스트들에 대한 주석작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말입니다.)

저는 논문과 댓글에서 그 비판의 얼개를 제시하였습니다. 실제 비판이 수행되는 과정, 그래서 실제 철학적 문제의 무의미성을 드러내는 과정은 훨씬 지난합니다. 한 학기 수 백만원의 돈을 써서 10년 가까이 대학을 다닌 전문 철학자들이 비판 한두 개에 쉽게 굴복하겠습니까? 그래서 아주 다층적으로 모순을 지적해야 하고, 아주 다층적으로 무의미를 폭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voiceright님은 '흄'이나 '크립키' 같은 이름 몇몇 개를 툭 던지시고서는 저에게 회의주의를 해소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런 텍스트도 없고, 아무런 맥락도 없고, 아무런 합의된 논의도 없는데 말입니다. 이미 강조하였던 것처럼, '흄'이라는 하나의 이름에 대해서도 수많은 해석과 맥락이 있기 때문에 voiceright님과 같은 요구는 애초에 '논점'을 잘못 맞추고 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와 voiceright님 중에서 철학의 문제에 쉽게 접근하는 쪽이 어느 쪽인지 모르겠습니다.

(8) 로티를 인용하기

카벨에 대한 로티의 비판을 인용해보겠습니다. 로티는 카벨의 비트겐슈타인 해석을 상당 부분 옹호하면서도, 카벨이 '넓은 의미의 회의론'과 '협소하고도 전문적인 의미의 회의론'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카벨은 협의의 회의론, 즉 철학 교수들 (가령 그린과 베인, 브래들리와 무어 그리고 오스틴과 에이어A. J. Ayer 등) 사이에서 통상적으로 논의된 의미의 회의론이, 더 심오하고도 낭만적인 의미에서의 회의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웠어야 했다. 카벨은 <회의론>이란 것이 어른들의 자기 교육과, 문화의 자기 비판에 이르게 하는 자극으로서 좋은 것이라는 점을 밝혔어야 했다. 그러고 나서 카벨은 넓은 의미의 회의론을 협소하고도 전문적인 의미의 회의론과 연관지어야 했다.

그의 저서에 대한 나의 주된 불만은, 카벨이 그와 같은 연관성을 옹호하는 논변을 펼치지도 않은 채 그것을 당연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 우리가 대학 초년생들에겍 데카르트나 브래들리는 꼭 읽어야 될 인물, 즉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 혹은 자신의 인간성과 접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꼭 읽어야 될 인물이라며 과제를 내어 전염시킨 <철학의 문제들>을 카벨은 <당연시하고 있는 것이다>.

리처드 로티, 「회의론에 대한 카벨의 견해」, 『실용주의의 결과』, 김동식 옮김, 민음사, 1996, 371쪽.

제가 보기엔, 이 비판이 voiceright님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회의론'이 의미를 지니는 맥락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 생각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철학자들의 '좁은 회의론'과 우리 자신의 문제를 고민하기 위해 필요한 '더 넓은 회의론'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voiceright님은 '협소하고도 전문적인 의미의 회의론'을 '철학의 문제'와 동일시하면서, '철학의 문제'라는 게 당연히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저에게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시고 있을 뿐입니다.

(9) "나의 철학자들도 그러지 않아!"

voiceright님께서 "철학자들이 설마 YOUN이 제시하는 그런 쉬운 문제를 몰라서 틀릴 리 없다."라고 하시는 게, 저에게는 단지 "나의 철학자들은 그러지 않아!"라는 일방적인 외침으로 들립니다. 그렇다면 저도 똑같이 외칠 수 있습니다. "나의 철학자들도 그러지 않아!"라고 말입니다. 적어도, 저와 공부하신 분들, 제 논문이 쓰이기까지의 과정을 옆에서 보신 분들, 제 글을 그동안 논평해준 분들이라면,

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권위에 호소해 봅니다.

Chariatability Principle이라고도 하죠. 스피노자 학계에서 에드윈 컬리가 그만의 특이한 해석을 주장할 때, "스피노자는 그러지 않아!" 라는 논리를 쓰기도 합니다. 이 논리에 대해서는 전체적으로 싸늘한 것 같습니다 (컬리의 다른 주장들이 설득력 있어서 컬리를 중요하게 보는거죠). 특히 Melamed가 Spinoza's Metaphysics of Substance pp. 56-59에서 컬리의 주장에 대한 통찰을 하면서 이 법칙의 한계에 대해서 지적하죠. 예를 들어, 노예 제도는 틀렸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을 제대로 알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인/노예를 다르게 해석해야한다, 이런 주장들은 하면 안되니깐요. 그래서 이 법칙을 사용할 때 굉장히 조심스러워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이 논쟁이 다루는 내용에 대해 하나도 모르지만, 아는 거 하나 나와서 끼어들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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