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될 수 없는 철학사 이야기: 흄에서 헤겔로(1)

그래서 헤겔이 철학자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비판하나요? 이 단계에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부정이 또 다시 부정되는 지양을 통해 다음 챕터로 넘어가는 것이, 그 철학자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비판인가요?

제가 용인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라고 한 것을, 오류-->무의미로 고쳐서 재진술하겠습니다. 내용이 딱히 달라진 건 아니고 맥락이 바뀌어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철학적 문제"에 도달하기만 해도 그것이 철학자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는 증거가 된다는 사고방식

입니다. 헤겔이, 철학자들이 철학적 문제에 도달하기만 해도 그게 잘못되었다고,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말하나요? 그럼 정신현상학은 감각적 확신 장을 못 넘어갈 것 같은데요. 감각적 확신 자체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채로 제기된 거잖아요. 근데 무의미의 통일로 유의미로 넘어갔더니 알고보니 사실 거기서도 유의미가 아니라 무의미여서 또 통일했더니 또 유의미가 된 줄 알았더니 또 무의미고 ... 전 헤겔이 이런 과정을 거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YOUN님도 헤겔을 이런 식으로 해석할 리는 없겠지요. 근데 YOUN님은 비트겐슈타인 해석에 자꾸 모순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제게는 헤겔의 사상과 YOUN님의 비트겐슈타인 해석이 모순을 강조한다는 겉모습만 비슷해보일 뿐, 충분히 달라 보입니다. 지양이라는 방법은 제가 아는 한 그 자체로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무의미에 호소하지 않고도요. 무의미에 호소할 필요성이 생기는 것은 전적으로 YOUN님이 비트겐슈타인을 해석하면서 모순을 끌어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유사성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헤겔과 비트겐슈타인이 둘 다 설득력 있으며, 둘을 비교해서 유의미한 결과물이 나온다고도 생각합니다. 근데 YOUN님은 모순을 가지고 비트겐슈타인의 "무의미" 개념까지 해설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실패한다고 생각합니다. 모순 문장은 무의미한 게 맞더라도, 모순이 벌어졌다는 그 이유만으로 그 과정이 죄다 무의미하다든지 하는 사고방식을 헤겔이 가지고 있지는 않아 보입니다. 근데 YOUN님은 비트겐슈타인을 모순이라는 툴로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철학자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까지도 주장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독관론의 주요 주제가 모순이라고 해도, 그것이 제 주장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지도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헤겔은 YOUN님과 같이 단순명료한 방식으로 모순을 제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철학이 그렇게 간단하면 헤겔은 왜 그렇게 먼 길을 돌아가는 걸까요? 헤겔은 옛날 사람이니까 그렇다 쳐도, 21세기의 헤겔 연구자들은 대체 왜 그걸 못 보는 걸까요?

그리고 YOUN님을 패러디하자면, 제가 비트겐슈타인적인지 아닌지는 별로 상관 없습니다. YOUN님의 말이 맞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저보고 철학사적 지식이 형편없다고 말해도 전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저 헤겔 잘 모릅니다. 근데 적어도 헤겔을 제멋대로 읽고 안다고 주장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딱 정신현상학 읽어본 만큼만 얘기하려 하며, 제 (헤겔에 관한) 주장이 옳다고 보장하지도 않을 겁니다. 반대로 제 주장 중 하나는, 내용상 시시비비에 관한 주장과 별개로, YOUN님이 "글을 안 읽고 논문을 작성했다"는 것입니다. YOUN님의 해석이 틀렸다 이걸 공격적인 표현으로 말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말 그대로 글을 안 읽었다는 증거가 있다구요. 이건 단순한 비방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저는 이에 관한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The Claim of Reason은 카벨의 작품 전체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주저입니다. 카벨의 글로서 인용한 “Excursus on Wittgenstein’s Vision of Language”는 The Claim of Reason의 2부 7장입니다. 또 인용한 코넌트의 “Stanley Cavell’s Wittgenstein”은 The Claim of Reason(의 주로 2부)에 관한 요약입니다. 카벨의 The Availability of Wittgenstein’s Later Philosophy는 The Claim of Reason의 발단과도 같은 논문입니다. 해당 논문에서의 사유가 발전되어 그대로 들어가 있습니다. The Claim of Reason 이후의 저작들, 예컨대 Conditions Handsome and Unhandsome은 The Claim of Reason에 대한 이해 없이는 제대로 다룰 수 없는 저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건, 맥도웰을 다루면서 Mind and World를 안 읽은 거고, 헤겔을 다루면서 논리의 학을 안 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근데 카벨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도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글을 보고 전 의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