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아래 논쟁을 배경으로 합니다.
사실 저는 더 이상 추가로 글을 써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미 충분히 많은 이야기들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논쟁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듯하니, 관련된 몇 가지 추가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Mandala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두 가지 방향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은 '용인될 수 없는 철학'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 다음은 잡다한 문제제기들에 대한 '권위주의적' 해명입니다.
용인될 수 없는 철학사
(1) 왜 흄은 썩 좋지 않은 예시인가?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a) 저는 인과 관계를 인상의 다발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 흄의 지적에 그다지 반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날 인과론을 연구하는 철학자들 중에 흄의 저 문제제기 자체에 반대하는 인물이 몇이나 될지 의문스러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voiceright님이 흄을 저의 반대 사례로 제시하였을 때, 애초에 논점이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b) 흄은 해석하기에 따라 회의주의자로도, 실증주의자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논리실증주의의 뿌리가 흄에게서 나왔다고 하는 것도 흔한 해석입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경우에 따라, 어떤 식으로 논의를 전개해야 할지는 크게 달라집니다.
(c) 이런 상황에서 비트겐슈타인 본인조차 흄을 철학적으로 거론한 적이 없습니다. 제 논문에도 나와 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버클리를 "매우 심오한 사상가"라고 평가하는 것과 달리, 흄에 대해서는 살짝 부정적인 뉘앙스만 내비칠 뿐 진지하게 다루지조차 않습니다. 그러니, '흄'이라는 이름만으로 어떤 식의 일반적인 논의를 전개할 수 있을지부터 정해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애초에 '흄'을 거론하는 것부터가 생산적이지 않다고 본 것입니다.
(2) 그래도 한번 흄을 말해보자
그래도 '흄'이라는 이름을 굳이 거론해야 한다면, 철학사의 가장 일반적인 해석을 따라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제가
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흄이 서양 근대철학에서 어떤 위치를 지니고 있었는지에 대해 일반적으로 널리 합의된 해설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칸트'라는, 철학을 공부하면 누구나 한 번쯤 읽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 흄에게 근거해서 자신의 논의를 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들은, 철학과를 졸업한 사람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동의할 만한 아주 일반적인 해설입니다.
(3) 칸트와 이성의 이율배반
칸트가 왜 흄을 문제삼습니까? 인과에 대한 흄의 비판이 단순히 '인과' 비판만으로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칸트는 그 비판이 고전 역학의 체계 전체를 무너뜨리는 비판이라고 보았습니다. 흄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과학적 지식 자체가 무너진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칸트가 했던 작업이 무엇입니까? 바로 영역 구분입니다. voiceright님이 주장하셨던 것처럼, 두 가지 층위를 나누는 것입니다. 인과는 '지성의 개념'에 근거한 질서이기 때문에 '사물 자체'의 세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바로 이렇게 말입니다.
(a) 인과질서는 현상계에서는 성립한다.
(b) 인과질서는 예지계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과 '자유'라는 칸트의 유명한 구분으로도 표현됩니다.
(a') 우리는 현상계에서는 자연이다.
(b') 우리는 예지계에서는 자유이다.
바로 이 기본 아이디어를 통해, 칸트는 순수이성의 이율배반이 해소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성은 세계를 총제적으로 파악하고자 할 때 언제나 '모순'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데, '현상계'와 '예지계'가 구분되면 그 이율배반이 해소된다는 것이 칸트의 입장이었습니다.
(4) 헤겔과 변증법
그런데 바로 이런 식의 구분이 문제를 제대로 해소하지 못한다고 지적한 철학자가 헤겔입니다. 칸트는 세계를 단순히 반토막 내고 있을 뿐, 모순에 대해 아무런 실질적인 해결책이나 해소 방법을 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나'라는 존재는 하나인데, 그럼 '나'는 인과질서에 지배받는 것인가, 받지 않는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현상계의 '나'는 인과질서의 지배에 놓이지만, 예지계의 '나'는 인과질서의 지배에 놓이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은 적절한 대답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가 현상계와 예지계에 분리되어 있지 않으니 말입니다.
다만, 헤겔이 칸트를 칭찬한 부분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세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려는 인간 이성이 언제나 '모순'에 직면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칸트는 이 점을 정확히 지적하였지만, 그 '모순'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를 알지 못해서 세계를 반토막 내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헤겔이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모순'이라는 것은 결코 단번에 해소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사고의 매 단계마다 모순에 직면하기 때문에, 우리는 매 단계마다 모순을 해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모순이 주어지는 각각의 문제 상황이 매번 다른 데다, 한 모순이 극복되면 다른 모순이 다시 주어지는 일들이 우리 사고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기 때문에, 모순은 주어지는 문제마다 매번 다시금 해소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논리가 '변증법'이라고 불립니다.
(4) 용인될 수 없는 철학?
저는 솔직히 이 부분을 읽고서 좀 놀랐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부분은 전혀 '비트겐슈타인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을 신비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난한 러셀과 카르납의 어조 같아 보였습니다. 더 나아가, 데리다의 케임브리지 대학교 명예 철학 박사학위 수여에 대해 극렬하게 반대했던 암스트롱과 콰인의 어조 같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적'을 차치하고서라도,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voiceright님의 철학사적 지식이 상당히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모순'의 문제는 독일 관념론 철학의 중심 주제입니다. 더욱이, '전제 없는 철학'은 헤겔이 표방했던 바이기도 합니다. 헤겔은 그렇다면 '용인될 수 없는' 철학을 하는 사람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