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될 수 없는 철학사 이야기: 흄에서 헤겔로(1)

이 글은 아래 논쟁을 배경으로 합니다.

사실 저는 더 이상 추가로 글을 써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미 충분히 많은 이야기들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논쟁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듯하니, 관련된 몇 가지 추가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Mandala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두 가지 방향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은 '용인될 수 없는 철학'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 다음은 잡다한 문제제기들에 대한 '권위주의적' 해명입니다.

용인될 수 없는 철학사

(1) 왜 흄은 썩 좋지 않은 예시인가?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a) 저는 인과 관계를 인상의 다발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 흄의 지적에 그다지 반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날 인과론을 연구하는 철학자들 중에 흄의 저 문제제기 자체에 반대하는 인물이 몇이나 될지 의문스러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voiceright님이 흄을 저의 반대 사례로 제시하였을 때, 애초에 논점이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b) 흄은 해석하기에 따라 회의주의자로도, 실증주의자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논리실증주의의 뿌리가 흄에게서 나왔다고 하는 것도 흔한 해석입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경우에 따라, 어떤 식으로 논의를 전개해야 할지는 크게 달라집니다.

(c) 이런 상황에서 비트겐슈타인 본인조차 흄을 철학적으로 거론한 적이 없습니다. 제 논문에도 나와 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버클리를 "매우 심오한 사상가"라고 평가하는 것과 달리, 흄에 대해서는 살짝 부정적인 뉘앙스만 내비칠 뿐 진지하게 다루지조차 않습니다. 그러니, '흄'이라는 이름만으로 어떤 식의 일반적인 논의를 전개할 수 있을지부터 정해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애초에 '흄'을 거론하는 것부터가 생산적이지 않다고 본 것입니다.

(2) 그래도 한번 흄을 말해보자

그래도 '흄'이라는 이름을 굳이 거론해야 한다면, 철학사의 가장 일반적인 해석을 따라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제가

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흄이 서양 근대철학에서 어떤 위치를 지니고 있었는지에 대해 일반적으로 널리 합의된 해설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칸트'라는, 철학을 공부하면 누구나 한 번쯤 읽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 흄에게 근거해서 자신의 논의를 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들은, 철학과를 졸업한 사람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동의할 만한 아주 일반적인 해설입니다.

(3) 칸트와 이성의 이율배반

칸트가 왜 흄을 문제삼습니까? 인과에 대한 흄의 비판이 단순히 '인과' 비판만으로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칸트는 그 비판이 고전 역학의 체계 전체를 무너뜨리는 비판이라고 보았습니다. 흄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과학적 지식 자체가 무너진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칸트가 했던 작업이 무엇입니까? 바로 영역 구분입니다. voiceright님이 주장하셨던 것처럼, 두 가지 층위를 나누는 것입니다. 인과는 '지성의 개념'에 근거한 질서이기 때문에 '사물 자체'의 세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바로 이렇게 말입니다.

(a) 인과질서는 현상계에서는 성립한다.
(b) 인과질서는 예지계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과 '자유'라는 칸트의 유명한 구분으로도 표현됩니다.

(a') 우리는 현상계에서는 자연이다.
(b') 우리는 예지계에서는 자유이다.

바로 이 기본 아이디어를 통해, 칸트는 순수이성의 이율배반이 해소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성은 세계를 총제적으로 파악하고자 할 때 언제나 '모순'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데, '현상계'와 '예지계'가 구분되면 그 이율배반이 해소된다는 것이 칸트의 입장이었습니다.

(4) 헤겔과 변증법

그런데 바로 이런 식의 구분이 문제를 제대로 해소하지 못한다고 지적한 철학자가 헤겔입니다. 칸트는 세계를 단순히 반토막 내고 있을 뿐, 모순에 대해 아무런 실질적인 해결책이나 해소 방법을 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나'라는 존재는 하나인데, 그럼 '나'는 인과질서에 지배받는 것인가, 받지 않는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현상계의 '나'는 인과질서의 지배에 놓이지만, 예지계의 '나'는 인과질서의 지배에 놓이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은 적절한 대답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가 현상계와 예지계에 분리되어 있지 않으니 말입니다.

다만, 헤겔이 칸트를 칭찬한 부분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세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려는 인간 이성이 언제나 '모순'에 직면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칸트는 이 점을 정확히 지적하였지만, 그 '모순'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를 알지 못해서 세계를 반토막 내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헤겔이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모순'이라는 것은 결코 단번에 해소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사고의 매 단계마다 모순에 직면하기 때문에, 우리는 매 단계마다 모순을 해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모순이 주어지는 각각의 문제 상황이 매번 다른 데다, 한 모순이 극복되면 다른 모순이 다시 주어지는 일들이 우리 사고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기 때문에, 모순은 주어지는 문제마다 매번 다시금 해소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논리가 '변증법'이라고 불립니다.

(4) 용인될 수 없는 철학?

저는 솔직히 이 부분을 읽고서 좀 놀랐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부분은 전혀 '비트겐슈타인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을 신비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난한 러셀과 카르납의 어조 같아 보였습니다. 더 나아가, 데리다의 케임브리지 대학교 명예 철학 박사학위 수여에 대해 극렬하게 반대했던 암스트롱과 콰인의 어조 같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적'을 차치하고서라도,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voiceright님의 철학사적 지식이 상당히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모순'의 문제는 독일 관념론 철학의 중심 주제입니다. 더욱이, '전제 없는 철학'은 헤겔이 표방했던 바이기도 합니다. 헤겔은 그렇다면 '용인될 수 없는' 철학을 하는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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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헤겔이 철학자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비판하나요? 이 단계에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부정이 또 다시 부정되는 지양을 통해 다음 챕터로 넘어가는 것이, 그 철학자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비판인가요?

제가 용인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라고 한 것을, 오류-->무의미로 고쳐서 재진술하겠습니다. 내용이 딱히 달라진 건 아니고 맥락이 바뀌어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철학적 문제"에 도달하기만 해도 그것이 철학자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는 증거가 된다는 사고방식

입니다. 헤겔이, 철학자들이 철학적 문제에 도달하기만 해도 그게 잘못되었다고,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말하나요? 그럼 정신현상학은 감각적 확신 장을 못 넘어갈 것 같은데요. 감각적 확신 자체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채로 제기된 거잖아요. 근데 무의미의 통일로 유의미로 넘어갔더니 알고보니 사실 거기서도 유의미가 아니라 무의미여서 또 통일했더니 또 유의미가 된 줄 알았더니 또 무의미고 ... 전 헤겔이 이런 과정을 거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YOUN님도 헤겔을 이런 식으로 해석할 리는 없겠지요. 근데 YOUN님은 비트겐슈타인 해석에 자꾸 모순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제게는 헤겔의 사상과 YOUN님의 비트겐슈타인 해석이 모순을 강조한다는 겉모습만 비슷해보일 뿐, 충분히 달라 보입니다. 지양이라는 방법은 제가 아는 한 그 자체로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무의미에 호소하지 않고도요. 무의미에 호소할 필요성이 생기는 것은 전적으로 YOUN님이 비트겐슈타인을 해석하면서 모순을 끌어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유사성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헤겔과 비트겐슈타인이 둘 다 설득력 있으며, 둘을 비교해서 유의미한 결과물이 나온다고도 생각합니다. 근데 YOUN님은 모순을 가지고 비트겐슈타인의 "무의미" 개념까지 해설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실패한다고 생각합니다. 모순 문장은 무의미한 게 맞더라도, 모순이 벌어졌다는 그 이유만으로 그 과정이 죄다 무의미하다든지 하는 사고방식을 헤겔이 가지고 있지는 않아 보입니다. 근데 YOUN님은 비트겐슈타인을 모순이라는 툴로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철학자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까지도 주장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독관론의 주요 주제가 모순이라고 해도, 그것이 제 주장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지도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헤겔은 YOUN님과 같이 단순명료한 방식으로 모순을 제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철학이 그렇게 간단하면 헤겔은 왜 그렇게 먼 길을 돌아가는 걸까요? 헤겔은 옛날 사람이니까 그렇다 쳐도, 21세기의 헤겔 연구자들은 대체 왜 그걸 못 보는 걸까요?

그리고 YOUN님을 패러디하자면, 제가 비트겐슈타인적인지 아닌지는 별로 상관 없습니다. YOUN님의 말이 맞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저보고 철학사적 지식이 형편없다고 말해도 전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저 헤겔 잘 모릅니다. 근데 적어도 헤겔을 제멋대로 읽고 안다고 주장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딱 정신현상학 읽어본 만큼만 얘기하려 하며, 제 (헤겔에 관한) 주장이 옳다고 보장하지도 않을 겁니다. 반대로 제 주장 중 하나는, 내용상 시시비비에 관한 주장과 별개로, YOUN님이 "글을 안 읽고 논문을 작성했다"는 것입니다. YOUN님의 해석이 틀렸다 이걸 공격적인 표현으로 말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말 그대로 글을 안 읽었다는 증거가 있다구요. 이건 단순한 비방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저는 이에 관한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The Claim of Reason은 카벨의 작품 전체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주저입니다. 카벨의 글로서 인용한 “Excursus on Wittgenstein’s Vision of Language”는 The Claim of Reason의 2부 7장입니다. 또 인용한 코넌트의 “Stanley Cavell’s Wittgenstein”은 The Claim of Reason(의 주로 2부)에 관한 요약입니다. 카벨의 The Availability of Wittgenstein’s Later Philosophy는 The Claim of Reason의 발단과도 같은 논문입니다. 해당 논문에서의 사유가 발전되어 그대로 들어가 있습니다. The Claim of Reason 이후의 저작들, 예컨대 Conditions Handsome and Unhandsome은 The Claim of Reason에 대한 이해 없이는 제대로 다룰 수 없는 저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건, 맥도웰을 다루면서 Mind and World를 안 읽은 거고, 헤겔을 다루면서 논리의 학을 안 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근데 카벨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도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글을 보고 전 의아했습니다.

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는 비판입니다. 『논리의 학』 전체가 그런 논의입니다. ‘존재’와 ‘무’, ‘실재성’과 ‘부정성’, ‘대타존재’와 ‘즉자존재’ 등이 이분법적으로 나눠지면 의미를 상실한다는 논의입니다. 이 커뮤니티에 제가 아는 헤겔 전공자 분들만 3명 이상 계시니, 제 요약나 주장이 잘못되었으면 바로 지적하시겠죠. (아울러, 제 자신도 헤겔 관련 논문을 쓴 적이 있고 말입니다.)

제가 어디서든지 틀릴 수 있으니 단계를 매겨봤습니다. 참고로 논리의 학은 읽어본 적 없습니다.

(1) 제가 미약하게나마 알고 있는 "지양"이라는 개념은, 외견상 양립불가능한 모순적인 명제들이 그 다음의, 혹은 총체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양립가능한 이항대립으로 보존된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무식하게 말하면, 존재와 무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총체적인 관점에서 순수 존재와 순수 무는 동일합니다.

(2) 근데 YOUN님에 따르면, 어떤 모순에 도달하고 철학자들이 그 모순을 철학적 문제로 여기면, 그 순간 그 철학자는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릅니다.

(3) 그리고 YOUN님이 제시한 "모순"이라는 것은, (일상적으로는) 정당화된다 & (형이상학적으로는) 정당화되지 않는다 입니다. (일단 저는 철학자들이 이 모순을 받아들인다는 생각 자체가 납득이 안 됩니다. 흄과 칸트의 차이는, 흄은 이성과 본성을 극단적으로 구분하고 인과질서의 파악을 비이성적인 것으로 둔 반면, 칸트는 인과율을 이성의 영역으로 복권시켰다는 데 있습니다.)

(4) 그럼 "정당화된다 & 정당화되지 않는다"가 지양되면, 전건, 즉 일상적으로 정당화된다는 사실만 남습니다. YOUN님이 지지하는 침묵주의에 따르면, 이때 일상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후건을 포기하면 됩니다. 이때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부정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정당화된다"의 부정의 부정을 획득하면, 이는 본래의 "정당화된다"의 재생산이지만, 이를 철회나 복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기서 총체적 관점은, "일상적으로 정당화된다(+정당화 안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와 같은 것일까요?

(5) 근데 만약 이 지양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이게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설명을 해내야 합니다. 예컨대 존재와 무를 이분법적으로 파악하면 무의미해진다라고 말할 때, 이는 단순히 존재와 무가 모순이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컨대 존재와 무를 각각 독립적으로 규정하려고 시도할 때, 상호침범하지 않는 방식으로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를 보여주든지 해야 합니다. 이 상호침범은 총체적 관점을 암시하며, 그 총체적 관점에서 볼 때 이 둘은 대립하지만 양립불가능한 그런 것이 아니게 됩니다. 이때 독립적 규정의 불가능성 등은, 구체적으로 바로 그 각각의 개념에 대해서 규정하려는 시도가 뒤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헤겔은 구체적인 문제 하나하나를 단계별로 다루게 되는 것이겠죠.

(6) 그럼 여기서 지양을 통해 위 모순이 무의미함을 보이려면, "형이상학적으로는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규정을 시도해야 합니다. 이것 역시 구체적인 문제를 하나하나 다루는 작업이 요청되겠죠.

(7) 근데 YOUN님은 이 작업이 필요 없으며, 철학자들이 단지 그 모순을 철학적 문제로 여기기만 해도 "사용이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문제가 곧바로 해소되어 끝나는 듯이 말씀하십니다. 명시적으로 필요 없다고 하신 적은 없지만, "문제로 삼는다"는 것이 "사용이 없다"와 왜 직결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헤겔은 이 모순을 존재와 무의 대립을 "철학적 문제"로 삼지 않나요? 문제로 삼아서 규정을 해보니까 이렇게 되더라 그래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잖아요. 물론 지양이 되면 문제로 남지는 않겠죠. 근데 그것이 "지양된다"는 것은, 분명 구체적으로 보여야 합니다. 그게 보여지기 전까지 그건 철학적 문제로 남아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이 "철학적 문제로 여겨지므로 무의미함"을 보이는 것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헤겔이 예컨대, 특정 개념영역에서 지양을 논증하는 데 실패할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그게 단순히 실수가 아니라, 개념상 안 되는 것일지도 모르잖아요. 그건 전체 기획이 어떻다고 해서 보장되는 게 아닙니다. 헤겔이 보여줘야 하는 겁니다. 이게 자동적으로 이뤄진다고 생각한다면, 헤겔이 옳다고 독단적으로 믿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큰 그림의 성공은 디테일의 성공이 보장하는 것입니다.

(8) 이제 비트겐슈타인의 맥락으로 돌아와 보죠. 비트겐슈타인이 무의미라고 말할 때에도, 단지 모순이기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YOUN님도 동의하시겠지요. 그럼 사용이 없는 모순이 무의미하다고 한 것이라고 해 보죠. 근데 사용이 있는 비모순은 의미가 있나요? 이것도 없겠죠. 그렇다면 핵심은 모순이 아니라, 사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9) 그럼 어떤 문장이 사용이 있는지 없는지,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를 보여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국 회의주의자의 목적에 맞게 그가 바라는 대로 탐구를 구성을 했더니 일상언어 속에서 말해야만 하는데, 결국 일상언어 속에서는 말할 것이 없더라, 즉 적합한 의미-모형이 없더라고 설명을 해야 합니다. 이건 분명 "철학자들이 모순을 철학적 문제로 여긴다"만 찝어낸다고 바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며, 바람과 실제의 충돌은 모순조차 아닙니다. 대체 철학자들의 탐구가 어떻게 이루어지며, 그것이 어째서 일상언어에 의존하기를 바라는지, 또 결과적으로 회의주의자가 어쩌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는지"가 보여져야 합니다. 근데 이 모든 게 제대로 보여지려면, 결국 "일상 언어가 어떠하다"는 "보여주기"의 과정이 동반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불가피합니다.

(10) 근데 이걸 보이는 데, 사실 "정당화된다 & 정당화되지 않는다"와 같이 철학자의 입장을 규정하는 것은, 정말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애초에 형이상학자들이 이 정식화를 받아들일 것 같지도 않습니다. 왜냐면 정확히 동일한 정식화가, 모든 형이상학적 시도에 일괄적으로 적용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헤겔 본인조차 저런 식으로 한방에 다 해결해버리지는 않습니다. 헤겔은 각각의 이항대립적 개념에 대해서 그것이 지양되며 발전한다고 주장하겠죠. 그럼 그 각각의 개념을 하나하나 철학적으로 고찰해봐야 합니다. 그래야 지양이 성공하는지를 판가름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문제를 모순으로 정식화해서 지양이라는 방식을 택할 이유가 없습니다. 헤겔은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겠죠. 지양이라는 방법론이 본인이 창안(?)한 것이고, 그는 이항대립을 가지고 체계를 쌓아야 하니까요. 근데 비트겐슈타인은 더더욱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전혀. 어차피 후자를 단독적으로 규정하다 보니 부정되어 전체로서 지양됨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구체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형이상학자의 논리 흐름을 따라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때 "형이상학의 언어"라고 여겼던 것이 결국에는 일상언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이 드러날 테고, 회의주의자는 딜레마에 빠진 뒤,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에까지 이끌리게 되겠지요.

(11) 이러한 과정이 바로 카벨이 하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전 수긍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면, 비트겐슈타인&카벨의 작업과 헤겔의 작업이 구조적 동형성 내지는 유사성을 지니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근데 그건 순전히 "모순"이라는 형식 하에서 후건을 탐구한다는 식으로 빝&카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 모순이라는 정식화가 전혀 없이도, 비트겐슈타인과 카벨은 회의주의자/형이상학자의 논리 구조를 그대로 따라가서 그것이 일상언어의 지평과 독립적이지 않음을 보이고자 합니다. 모순은 정말로 필요가 없습니다.

(12) 그리고 저는 저 "정당화된다 & 정당화되지 않는다"라는 정식화가 철학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든다고 주장했습니다. 헤겔도 이런 식으로 문제를 정식화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헤겔에게는, 지각적 경험에만 머물러 있는 철학자들이 적어도 우스워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지양이라는 것은 결국 개념적 탐구가 요청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니까요. 그래서 헤겔을 읽으면, 흄 같은 사람들이 인상과 관념이라는 개념을 떠올리면서 어디에서 잘못 생각했는지가 저절로 그 경로에서 드러나도록 의도하는 듯 합니다. 반면에 "정당화된다 & 정당화되지 않는다"나 "의미 있다 & 의미 없다"의 모순을 철학자들이 받아들인다는 지적은, 대체 누가 받아들일지 전 모르겠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니까 헤겔은 이항대립적 개념이 지양을 통해 통일된다고 했지, 모순되는 명제가 지양된다고 하진 않은 듯 한데요? 그리고 개념은 무의미할 수가 없는 듯합니다. 원하는 대로 규정이 불가능할 수는 있어도요. 문장은 무의미할 수 있죠. 이건 암튼 좀 헷갈립니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끼어들어보겠습니다. 일단 voiceright님이 감각적 확신을 말씀하시니 정신현상학에 대해 말씀하시는 거라고 전제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헤겔은 이런 과정을 거친다고 생각합니다.

무의미의 통일로 유의미로 넘어갔더니 알고보니 사실 거기서도 유의미가 아니라 무의미여서 또 통일했더니 또 유의미가 된 줄 알았더니 또 무의미고

이걸 계속 반복해서 무의미로 끝나는 것이 정신현상학의 목표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싶지만, 다른 철학자들이 (헤겔이 생각하기에) 틀린 전제들을 내세우며 반대할 거 같으니, 그 전제들이 틀렸다고 증명하는 책입니다 (§74 참조). 결국 정신현상학은 어떻게 보면 틀린 이론만 가득한 책이여야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학부 헤겔 수업에서 장난삼아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한 학기 동안 개고생해서 정신현상학 겨우 읽었는데, 정작 헤겔에 대한 건 아무것도 배우는 게 없다는것이죠. 헤겔이 맞다고 생각하는 걸 배우는 게 아니라, 헤겔이 틀리다고 생각하는 이론들을 배우는 것이니깐요. 결국에 이런 틀린 전제들을 다 정리하고 읽는 게 대논리학입니다 (이게 성공적인지는 말이 많긴 하지만요). 그 책에서 드디어 헤겔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배우는 것이죠. 물론 이 해석과 반대로 읽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굉장히 구식적인 해석이고, 2023년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틀린 건지 무의미한 건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의미한 명제는 틀렸다고 증명할 수 없습니다. 저는 무의미를 강조하고자 저런 표현을 사용한 겁니다.

제가 무의미하단 말을 이해를 잘 못한 걸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이해한 헤겔을 한 번 간략하게 써본 뒤, 그래도 semantic dispute인지 아닌지 한 번 여쭤보겠습니다.

일단,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각각의 다른 전제들을 다룹니다. 예를 들어, "물체들은 immediate하다"라는 전제가 있다고 해봅시다. 하지만 그 전제는 참이 될 수 없습니다. 그 immediate하다고 했던 물체들은 사실 immediate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삼각형은 변이 네 개다"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voiceright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또,

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삼각형의 변은 네 개다"란 용인할 수 있는 사고방식인가요? 또, voiceright님에게 이 문장을 말하는 사람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고 있는 것인가요? 만일 이 두 질문에 "맞다"란 대답을 하신 것이면 제가 이해를 잘못한 거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네, 용인할 수 있습니다. (제가 사상경찰이 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두 번째 질문은, 맥락의존적일 듯합니다.

물체들이 immediate하는 명제가 있고, 다른 한 편으로 immediate하지 않다는 명제가 있다고 해 봅시다.

이 병존은 모순입니다. 그리고 이 상태로는 철학적 문제로 보입니다. 근데 이게 무의미한가요? 나중에 잘못되었다고, 무의미하다고 드러날 수도 있죠. 이게 문제이기 때문에 무의미한가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물체라는 개념에 대한 고찰 이후에, 이게 물체들이 직접적이나 그 직접성도 매개되어 있다, 그러니까 결국 immediate하다는 직관이 보존되면서도 사실 총체로 볼때 물체들은 매개되었다고 하는 게 맞는 것 같거든요. 그럼 이제서야 문제가 해결 혹은 해소된 거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저는 저 문제설정 자체가 모순인데 사용이 없는 모순이어서 무의미하기 때문에 해소되었다고 보진 않습니다. 그럼 "물체"가 무엇인지에 관한 개념적 고찰이 필요가 없거든요. 문제 설정이 무의미하다면 저게 모순이고 사용이 없다는 점만 중요한 겁니다.

다른 한편으로 물체가 무엇인지에 관한 개념적 고찰이 필요하다면, 헤겔이나 다른 철학자들이나 출발점은 똑같은 거 아닐까요? 그럼 다른 철학자들이 문제를 이론적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하면 저 모순에 사용이 없는 거고, 헤겔이 모순을 지양하려고 시도하면 저 모순에 사용이 있나요.

그렇군요. 제가 비트겐슈타인을 잘 몰라서 이런 오해가 생긴 것 같습니다. 혹시 무의미한 문제가 무엇이 있을까요?

여기서 말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무의미한 것의 예시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제가 윗 글을 수정했습니다. 마지막 문단 참조해보세요.

전 모순을 철학적 문제로 생각하면 (철학적 문제로서 여긴다는 것이 사용이 없다는 뜻이므로) 곧바로 무의미해진다는 그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뭐가 그것의 예시가 될 지 모르겠습니다.
(철학적 문제가 아니라면, "수 7과 글자 'ㄱ' 중 누가 더 빠른가?"와 같은 말도 안 되는 무의미한 물음은 있을 것입니다. 근데 이런 물음이 무슨 과정으로 제기될 수 있을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철학적 문제 앞에서 다른 이론철학자나 헤겔이나, 심지어 비트겐슈타인마저도 똑같습니다. 일단 문제가 제기되었으면, 우리가 해결을 못해서 꼼짝 못하고 있더라도 해결하기 전까지는 문제로서 인정되어야 합니다. 예컨대 헤겔의 경우라면 이항대립이 개념적 고찰을 통해 지양된 이후에야 비로소 그것의 무의미함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근데 제가 용인할 수 없는 입장은 우리가 모순 앞에서 해결을 못해서 꼼짝 못하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문제가 무의미해진다는 입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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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군요. 사실 제가 간단히 말하기 위해 명제 형식으로 설명을 했지만, 현재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대논리학은 두 가지 방법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번째는 헤겔의 철학이 judgement, 명제 등의 S is P 형식으로 돌아가고, 이런 형식에 의해 변증법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헤겔의 철학이 pre-judgemental하게 돌아간다는 해석입니다 (프레게의 Sinn과 관련이 있을까요? 저는 어느 정도의 관련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전개시켜보진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헤겔의 대논리학의 시작이 존재와 무 입니다. 첫번째 해석이라면 생각이 존재와 무가 다르다고 명제를 세우고 그것을 문제 삼아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증법이 일어나는 생각 그 자체는 생각을 할 수 있으며,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라고 봐야되겠습니다. 두번째 해석이라면, 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명제들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살아있는 것들이 자라고 신진대사가 있는 것처럼, 식물이 자라나는 것처럼 변증법이 일어난다는 것이죠. 식물이 자라날 때 명제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제3자가 식물의 성장에 대한 명제를 세울 수 있지만, 그 명제들의 유무는 식물의 성장과 관계가 없죠), 변증법에는 명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만일 첫번째 해석을 따른다면 voiceright님의

다라는 해석이 말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해석을 따르게 된다면 voiceright님이 말하는 그런 철학적 문제 앞에서 헤겔은 조금 다른 입장을 취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당연히 원래 논쟁과 거리가 있는 말이지만, 흥미롭다고 생각해 남겨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