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주의'라는 명칭을 지나치게 넓은 의미로 사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p에서 q를 추론해낼 수 없다."라고 지적하는 입장들을 모두 '회의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비약입니다. voicerigt님이 '회의주의'라고 하실 때 염두에 두시는 입장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다시 설명해 주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흄의 회의주의가 지금 저희의 대화에서 썩 좋은 사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일반적인 철학사적 해석에 따라, 흄이 자신의 인과에 대한 회의주의를 통해 뉴턴 역학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과학적 지식 자체를 부정하였다고 가정해봅시다. 저는 이런 식의 회의주의야말로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는 전형적인 경우라고 봅니다. 흄은 과학적 지식이 정당화되기 위해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형이상학적 조건' 따위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즉, 흄은
(a) "과학적 지식은 일상적으로는 정당화된다."
라고 말하는 동시에,
(b) "과학적 지식은 형이상학적으로는 정당화되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문제는 과학적 지식을 정당화하는, '일상적이지는 않지만 형이상학적인 조건' 따위가 무엇인지를 흄 본인도 정확히 모른다는 겁니다. 가령,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중력장이 강한 곳에서 빛이 휘어진다는 사실이 관측되기만 하면 정당화됩니다. "빛이 중력장에 따라 휘어진다는 사실이 관측된다."가 바로 상대성 이론이 정당화되기 위한 '조건'입니다. 그런데 흄이 이 조건을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형이상학적 조건'을 다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더 나아가, 그 '형이상학적 조건' 없이는 상대성 이론이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흄은 자신이 정확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셈입니다. 말 그대로, "아인슈타인이 맞긴 맞는데, 어쨌튼 틀렸어!"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선호하는 '모순'의 형태로 정리하자면,
(a') "빛이 중력장에 따라 휘어진다는 사실이 관측된다면, 일반 상대성 이론은 증명된다."
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b') "빛이 중력장에 따라 휘어진다는 사실이 관측되더라도, 일반 상대성 이론은 증명되지 않는다."
라고 주장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voiceright님이 정확히 어떤 문제제기를 위해 회의주의를 계속 거론하시는 것인지 잘 이해하기 힘듭니다. 위에서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나 '프레이저의 종교학'을 예로 들면서 말씀드렸지만, 저는 분명 형이상학도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자각하는 상황에서는 유의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회의주의가 유의미한 맥락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제가 부정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가령, 저는 카뮈식의 부조리 문학에서 등장하는 회의주의를 '무의미하다.'라고 평가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