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얕게나마 공부하고 있는 중학생입니다. 뭔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얼핏 굉장히 이상해 보이겠지만, 비판하거나 의문을 제시하기에 앞서서 일단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때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일단 암기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비판은 일정한 역치가 쌓인 이후에 제기될 때에야 생산적일 수 있습니다. 단순히 텍스트에 대해 딴지를 거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아주 시시한 일이죠. 오히려 아무런 주체적인 생각도 없이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사람들이야말로 "왜 내가 그딴 걸 받아들여야 하는데?"라고 무조건 딴지부터 걸고 보기도 하죠. 이런 식의 딴지는 사실 '비판'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습니다. 애초에 '비판(critique)'이라는 말은 대상의 의의와 한계를 정확하게 가려내는 판단을 의미하는 반면, 무조건적인 딴지는 아예 아무런 진지한 생각도 하지 않겠다는 선언에 불과하니까요.

따라서 특정한 텍스트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 텍스트의 가치를 제대로 인지하는 사람만이, 그 텍스트에 대해 유의미한 비판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판을 위해서는 우선 배우려는 태도로 텍스트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핵심 개념들을 숙지하고, 내용의 구조를 파악해서, 이 텍스트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를 먼저 들으려는 태도가 있어야 하는 거죠. 실제로, 대학의 철학과에서 공부를 할 때에도 이런 자세가 필수적입니다. 대학생들조차도 학부 4년 동안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칸트 같은 중요한 철학자들의 핵심 주장과 논증을 '암기'하는 작업에 많은 시간을 들입니다. (심지어 석사와 박사 과정에서까지도 종합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철학사 책 한 권을 달달 외울 정도로 암기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예전에 다른 글들에서 자세히 글을 쓴 적이 있어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람은 대단히 영악한 존재입니다. 모두들 자신이 평균보다는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기본적으로 다른 텍스트가 말한 것을 '일단 까고 보려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릅니다. "내가 왜 그딴 걸 받아들여야 하는데?"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손쉽게 나오는지만 봐도 이 점은 거의 분명하죠. 특히,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태도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더 강하게 발현됩니다. 나름대로 '철학'이라는 비판적 학문을 배웠으니, 기본적인 마인드셋에 타인의 주장에 대해 따져 물어보려는 성향이 장착되어 있는 거죠.

그러다 보니, 무엇인가를 '듣는 일', 그리고 자신이 들은 것의 가치를 '숙고하는 일', 더 나아가 그 가치를 '인정하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이건 인간의 오만한 본성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기 때문에, 이러한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노력과 배움과 수행의 결과인 거죠. 그래서 저는 텍스트를 읽을 때 "그 말의 근거가 뭐야?"라고 먼저 캐묻기보다는, 일단 그 텍스트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듣기 위해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질 것을 추천드립니다. 이 질문이 충분히 누적되고 나면, 비판은 그 이후에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정말로 진지한 태도로 텍스트를 읽어보려 했는데도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 오랫동안 남아 있다면, 그 의문으로부터 나오는 비판이야말로 그 다음의 생산적인 논의를 가능하게 하는 비판이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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