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얕게나마 공부하고 있는 중학생입니다. 뭔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

자꾸 질문들이 떠오르는데 질문 내용이 좀 이상합니다.
너무 심한 의심이 들어 배움에 전진이 느립니다.
예를 들어 책을 읽을때

'인이무신 부지기기야'
(제가 읽은 책에서는
인간사회는 신뢰를 근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신뢰받지 못하는 인간은 살아갈 자격이 없다.
다만 한 사럼에게라도 신뢰받는다면 살아갈 자격이 있다. 라고 나왔습니다.나가오 다케시 논어의 말 입니다.)
같은 것을 읽으면

'1. 근거가 뭐지? 로 포문을 열어서

->
살아갈 자격? 그런게 있기는 해?
그걸 누가 부여하는데?
살아가는데에 자격이랄 것이 있어?
자격이란 건 또 뭔데...?
어디서 필요한 자격이야?
인간 사회 안에서 필요한 자격?
세상에서? 아니 우리가 사는 새상이 어차피 인간사회 아니야? 그럼 살아갈 자격이 없으면, 신뢰받지 못하면 스스로 생을 마감해야 해? 자격이 없으면 어떡해?
인간은 스스로 자격을 가질수 없는거야?
인간은 스스로 온전할 수 없어?
온전? 무슨 면에서의 온전함?
아니 애초에 공자가 한 말이라고 다 맞아?
그럼 내가 어떻게 저게 옳고 그른지 판단해?
그렇게 판단하다 내 입맛에 맞는 것만 익혀서 어리석고 오만한 겉멋만 든 인간이 되는거 아니야?
이렇게 그 사람들, 가르치는 스승같은 존재들한테 의문을 품으면 나아갈 수 있기는 해?
그렇다고 마냥 믿어야 해?'

같이 뭔가 이상한...? 질문들이 정말 너무 많이 떠올라서 한 문장 읽는데도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정말 혼란스럽습니다 ..
문장 하나하나 이 말이 근거가 있는지 따지면서
삼천포로 빠지는 것 같기도 하고
너무 문장 하나에 집착해서 숲을 보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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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를 하면 얼핏 굉장히 이상해 보이겠지만, 비판하거나 의문을 제시하기에 앞서서 일단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때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일단 암기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비판은 일정한 역치가 쌓인 이후에 제기될 때에야 생산적일 수 있습니다. 단순히 텍스트에 대해 딴지를 거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아주 시시한 일이죠. 오히려 아무런 주체적인 생각도 없이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사람들이야말로 "왜 내가 그딴 걸 받아들여야 하는데?"라고 무조건 딴지부터 걸고 보기도 하죠. 이런 식의 딴지는 사실 '비판'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습니다. 애초에 '비판(critique)'이라는 말은 대상의 의의와 한계를 정확하게 가려내는 판단을 의미하는 반면, 무조건적인 딴지는 아예 아무런 진지한 생각도 하지 않겠다는 선언에 불과하니까요.

따라서 특정한 텍스트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 텍스트의 가치를 제대로 인지하는 사람만이, 그 텍스트에 대해 유의미한 비판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판을 위해서는 우선 배우려는 태도로 텍스트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핵심 개념들을 숙지하고, 내용의 구조를 파악해서, 이 텍스트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를 먼저 들으려는 태도가 있어야 하는 거죠. 실제로, 대학의 철학과에서 공부를 할 때에도 이런 자세가 필수적입니다. 대학생들조차도 학부 4년 동안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칸트 같은 중요한 철학자들의 핵심 주장과 논증을 '암기'하는 작업에 많은 시간을 들입니다. (심지어 석사와 박사 과정에서까지도 종합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철학사 책 한 권을 달달 외울 정도로 암기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예전에 다른 글들에서 자세히 글을 쓴 적이 있어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람은 대단히 영악한 존재입니다. 모두들 자신이 평균보다는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기본적으로 다른 텍스트가 말한 것을 '일단 까고 보려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릅니다. "내가 왜 그딴 걸 받아들여야 하는데?"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손쉽게 나오는지만 봐도 이 점은 거의 분명하죠. 특히,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태도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더 강하게 발현됩니다. 나름대로 '철학'이라는 비판적 학문을 배웠으니, 기본적인 마인드셋에 타인의 주장에 대해 따져 물어보려는 성향이 장착되어 있는 거죠.

그러다 보니, 무엇인가를 '듣는 일', 그리고 자신이 들은 것의 가치를 '숙고하는 일', 더 나아가 그 가치를 '인정하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이건 인간의 오만한 본성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기 때문에, 이러한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노력과 배움과 수행의 결과인 거죠. 그래서 저는 텍스트를 읽을 때 "그 말의 근거가 뭐야?"라고 먼저 캐묻기보다는, 일단 그 텍스트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듣기 위해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질 것을 추천드립니다. 이 질문이 충분히 누적되고 나면, 비판은 그 이후에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정말로 진지한 태도로 텍스트를 읽어보려 했는데도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 오랫동안 남아 있다면, 그 의문으로부터 나오는 비판이야말로 그 다음의 생산적인 논의를 가능하게 하는 비판이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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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고 계신 겁니다. 오히려 문장을 읽어도 깊이를 따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전 예전에 스피노자 세미나를 들었는데, 스피노자가 쓴 단 한 문장으로 15페이지짜리 기말 페이퍼를 냈었네요. 또 예전에 들었던 한 수업에서는 12 주동안 헤겔의 <정신현상학> 40쪽을 읽었었네요.

다만 연습하시면 좋을 것은, 몰라도 어느 정도는 넘어가고, 한 챕터 등을 읽고 큰 그림을 본 이후에 다시 그 문장으로 돌아오는 것이 더 좋아보입니다. 전체적인 맥락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한 문장을 생각하는 것과, 맥락 없이 그 문장만 들여다보는 것은 다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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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철학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좋은 설명을 해주셨다고 봅니다. 저는 『논어』의 해당 구절을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조금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해당 구절은 「위정」에 있죠. 원문은 "子曰: 人而無信, 不知其可也. 大車無輗, 小車無軏, 其何以行之哉?"입니다. 일단 YOUN님이 말한 것처럼 텍스트를 잘 이해하는 작업이 필요해 보입니다. 텍스트를 잘 이해라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접근 방법이 있을텐데, 『논어』의 경우에는 세 가지 접근법이 먼저 떠오르네요. 첫 번째는 단편적인 구절만 가지고 생각하지 말고 장 전체의 문장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지금 질문자께서는 전체 구절 중 일부만 가지고 여러 가지 비판거리를 찾으셨는데요. 전체 문장 속에서 해당 구절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조금 더 구체화해보는 것입니다. 전체 문장은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겠네요.

"사람이 신의가 없다면 그 가능성을 알 수 없다. 큰 수레에 끌채쐐기가 없고 작은 수레에 멍에막이가 없으면 어떻게 운행하랴?"
(번역은 박성규 역, 91쪽을 인용했습니다.)

위의 번역에서는 '신의'라고 해놨네요. 신의라고 번역해야 할지 신뢰라고 번역해야 할지 여부는 조금 더 고민해야겠지만 최소한 전체 문장에서 신의가 수레의 끌채쐐기와 멍에막이로 비유되고 있다는 전반적인 문장의 구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끌채쐐기와 멍에막이가 뭘까 하고 보니까 박성규 선생은 이렇게 주석을 달아놨네요.

끌채쐐기: 끌채 끝의 멍에를 메는 부분, 수레의 쐐기, 끌채 끝의 가로대를 고정하는 쐐기.
멍에막이: 끌채(큰 수레 양쪽의 길게 나온 두 개의 나무, 그 끝에 멍에를 걺.)

고대 중국의 멍에와 끌채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해설을 읽었을 때 끌채쐐기와 멍에막이가 최소한 수레를 작동할 때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위와 같은 정보를 종합했을 때 신뢰 혹은 신의는 수레의 작동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로 비유된다고 할 수 있겠네요. 즉 수레와 그것의 구성요소의 관계가 인간과 신뢰(혹은 신의)의 관계와 대응하고 있는 것이죠. 일단 여기까지 『논어』의 해당 장을 전반적으로 살펴봤을 때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다음으로 두 번째는 여러 번역이나 주석들을 참조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비로소 나가오 다케시, 하안, 주희, 오규 소라이 등의 학자들의 말을 조금씩 보면서 信의 의미가 무엇일지 생각해볼 수 있겠죠. 아마 질문자께서 한문 원문을 읽기에는 어려울테니 주석보다는 다양한 번역들을 참조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인용하신 나가오 다케시는 '신뢰'라고 했는데, 제가 인용한 박성규는 '신의'라고 했군요. 신뢰와 신의는 같은 말일까요, 아니면 다른 말일까요? 이런 의문을 가지고 한 번 여러 번역서들의 설명들을 살펴보면서 해석을 더 심화시켜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박성규 역에 있는 추가 설명을 한 번 보고, 그냥 옆에 있는 다른 번역서 몇 종을 한 번 인용해보겠습니다.

박성규: 『어류』 사람이 신의가 없으면 말에 진실이 없으니, 어디선들 행세할 수 있겠는가? 집에 있으면 집에서 행세하지 못하고, 마을에 있으면 마을에서 행세하지 못한다. 이것은 '말이 충직하고 신실하지 못하면, 동네에서라도 행세할 수 있겠는가?'(15-6)라는 의미와 같다.

김도련, 논어, 63-64쪽: '信'은 信實함. 사람이 말을 했으면 반드시 실천하는 것을 '信'이라 하고, 말한 것에 하나의 虛도 없이 誠實한 것을 '實'이라 하지만 이 '信'자는 말과 행동 모두를 포괄한다. (중략) 사람의 언행에 있어서도 믿음이 없이 다른 사람과 서로 일을 같이 하게 되면 반드시 도처에서 지장을 초래할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당시의 大車 小車의 중요한 부분을 비유로 하여 '믿음'이야말로 立身行事에 있어 중요한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을호, 한글논어, 23쪽: 수레와 소 - 혹은 말 -은 본시 완전히 딴 것들이다. 이것들이 한데 묶여서 수레를 끌게 하자면 멍에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과도 말하자면 아주 딴 사람들이다. 이들이 한데 어울려 굳게 맺어진 사이가 되자면 信이 멍에의 구실을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信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멍에인 것이다.

위의 해설들은 공히 멍에의 비유에 집중해서 信의 의미와 역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김도련은 말과 행위가 일치하는 것을 信으로 규정하였고, 이을호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준다는 점에서 信의 역할에 초점을 맞춰 설명하고 있군요. 제가 나가오 다케시의 책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두 선생님의 말을 보면 신뢰 혹은 신의를 설명할 때 사람으로서의 자격이라기 보다는 나와 타자의 관계 속에서 신뢰(혹은 신의)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네요.

본문의 질문을 보면 갑자기 "한 사람에게라도 신뢰받는다면 살아갈 자격이 있다."라는 말에서 '자격'이라는 말에 꽂혀서 사유가 전개되고 있네요. 하지만 제가 갖고 있는 몇 종의 번역서만 보더라도 신뢰가 인간의 자격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보다는 신뢰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마 질문자께서 보신 나가오 다케시라는 사람도 위의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정말로 『논어』의 말에 딴지를 걸려면 '살아갈 자격? 그런 게 있기는 해?'라는 질문을 던질 것이 아니라 '신뢰는 어떠한 점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걸까?'라는 질문이 더 문맥에 부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논어』의 다른 구절 속에서 信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 혹은 信에 대한 추가 정보는 없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박성규 역의 추가 설명을 보면 『어류』라고 표시가 된 부분이 있는데요. 이는 주희와 제자들의 문답을 기록한 『주자어류』를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15-6과 지금 이 장의 내용이 같은 맥락이라는 정보가 있네요. 여기서의 15는 『논어』의 15번째 편을 의미하고, 6은 그 편의 여섯 번째 장이라는 뜻입니다. 즉 「위령공」의 제6장을 찾아가보면 되겠네요. 해당 장의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장이 '행실(행세)'를 묻자, 공자가 말하였다. "말이 충직하고 신실하며, 행위가 돈독하고 경건하면, 야만의 나라에서도 행세할 수 있다. 말이 충직·신실하지 못하고, 행동이 성실·경건하지 못하면, 동네에선들 행세할 수 있겠는가? 서 있으면 그런 마음가짐이 앞에 펼쳐지는지 살피고, 수레를 타면 그런 마음가짐이 가로대에 깃들어 있는지 살펴라. 그러면 행세할 수 있다." 자장은 말씀을 허리띠에 적었다.

여기에 보면 수레의 비유가 다시 사용되고 있으며 신실(信)뿐 아니라 다양한 덕목들이 예시되어있네요. 이러한 내용을 다시 읽어서 「위정」의 내용과 비교하고 대조해보면 보다 信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군요. 한편 그 밑에 딸려있는 주희의 주석을 보면 信에 대해서 주희는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알아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질문하신 분은 문장의 일부분, 그 중에서도 몇 가지 단어에만 꽂혀서 트집을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텍스트의 핵심에 접근하는 적절한 방법이 아닌 것 같습니다. 『논어』만 하더라도 ①해당 장의 전체적인 맥락, ②장에 대한 다양한 설명들, ③다른 장과의 연관성 등을 고려해서 내용을 이해해볼 수 있죠. 저는 이러한 접근이 『논어』에만 국한되지 않고 여러 철학 텍스트에도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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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동의합니다. 특히

이 부분은 동의를 합니다. 다만 걸리는 것은

이 부분입니다. 제가 보기에 질문자분은 텍스트를 읽을 때 던져할 질문들을 제대로 하고 계십니다. 물론 저 질문들 중 대다수가 이런 저런 이유로 답이 된다거나, 제대로 된 질문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는 있겠지만, 철학 원전을 읽을 때 저런 질문들을 던지면서 나아가는 것은 꽤나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런 질문들을 던지면서 책을 읽고, 그 다음에 이런 저런 지식을 체득하면서 하나씩 질문을 지워나가고 풀어나갈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철학 독해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바꿔 말하면, 저 질문들을 갖는 것은 철학을 공부해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갖는 게 바람직한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전 이런 질문들을 억압해야한다는 것에 꽤나 반대를 하는 편입니다. 질문들을 하지 않고 읽고 우선 지식 체득에 힘을 써라 -- 와 같은 공부방법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읽어가면서 나쁜 질문이든 좋은 질문이든 해나가고, 그 다음에 하나하나씩 답해나가면서 읽는 것이 바람직한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질문자분이

다라거나,

다라고 하기엔 조금 stretch가 아닌가 싶어요.

그와 별개로, 질문자분은 중학생 분이신데, 너무 나무라는 것보다는 용기를 복돋아주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 같습니다. 중학생분이 저 정도로 하신다는 게 전 놀라울 따름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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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목적은 '질문을 억압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다양한 질문들을 어떻게 추려낼 수 있을까에 대한 하나의 예시를 보여주는 것이 저의 목적이죠.

저는 글쓴이의 질문 리스트를 보니 하나의 질문에서부터 다른 질문으로 연쇄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한 사람에게라도 신뢰받는다면 살아갈 자격이 있다."라는 나가오 다케시의 말에서 "살아갈 자격 그런 게 있기는 해?"로 넘어가고, 그 다음에 "[그 자격을] 누가 부여하는데?" 등으로 넘어가죠. 글쓴이는 『논어』를 해설한 나가오 다케시의 말 중 '삶의 자격'이라는 말에 꽂혀서 다른 질문으로 확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아니 애초에 공자가 한 말이라고 다 맞아?"라는 권위에 대한 의심까지 넘어갑니다. 저는 이런 권위에 대한 의심이 아주 좋은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볼 문제는 "이 게 정말 공자가 한 말인가?"라는 것이죠.

어떤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답을 하기 전에 더 고민해야 할 것은 '이 질문이 적절한 것인가?'를 따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저자는 A를 이야기 했는데 독자는 B라고 이해한 뒤 B를 비판하는 것을 지양하는 것처럼 말이죠. 질문을 마구 던지는 것만큼이나 질문의 적합성을 고민하는 것 역시 철학을 입문하는 단계에서 꼭 지녀야 할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설사 이러한 과정을 통해 도출된 질문이 엉뚱하다 하더라도(철학사에는 이러한 사례가 왕왕 있죠) 저자의 논점을 파악하기 위한 노력 속에서 나오는 질문과 그렇지 않은 질문에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식 체득에 힘을 쓰라고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제 입장을 조금 더 명확하게 설명하자면 '좋은 독자가 되어라'이죠. 저는 좋은 독자가 되는 과정과 질문의 적합성을 따지는 것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양한 질문을 던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좋은 독자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저의 독서 경험상 저자의 생각이 무엇인지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는 자세가 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텍스트를 읽을 때 던져야 할 질문들을 제대로 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습니다.

글쓴이의 질문 중 '살아가는 데에 자격이랄 것이 있어?'는 철학자가 던질만한 좋은 질문입니다만, 이 질문이 『논어』의 좋은 독자로서 나올 질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질문 자체가 제대로 되었더라도 "텍스트를 읽을 때 던져야 할 질문"이라는 조건, 즉 『논어』를 읽을 때 던져야 할 질문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워 보입니다. 예를 들어 위의 글쓴이가 아무 맥락 없이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자격이 있습니까?'라고 올빼미에 질문을 남겼다고 합시다. 그럼 많은 분들께서 '좋은 질문입니다.'라고 하면서 이와 관련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텍스트들을 소개해주실 겁니다. 하지만 글쓴이가 "『논어』에는 신뢰가 없는 인간은 살아갈 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저는 이러한 공자의 주장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묻는다면 저 같은 사람은 '어디에 그런 내용이 있나요? 혹시 구체적인 맥락을 알 수 있을까요?'라고 되묻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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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말했다시피, 저도 @wooya0902 님의 말씀과 동의를 많이 합니다.

특히 이 부분도 동의를 하는데요. 다만 "입문"이란 단어가 조금 걸리네요.

말씀하신 스킬은 학부2-3학년 전공생이 가져야할 태도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중학생에게 요구할 수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부분도 많이 동의를 한다만... 올빼미 역시도 꽤나 수준이 높은 커뮤니티로 보여집니다. 대학원생들도 많이 있고요. 그래서 올빼미 수준에서는 당연히 그렇겠다만... 처음 철학을 접하는 비전공생, 그것도 중학생이 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관문인 것 같습니다 (제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근데 제 중학교 시절 생각해보면 절대 못할 과제들 같네요). 그래서 입문_학부 전공생들에게는 완벽한 조언이라고 생각하지만, 입문_중학생한테는 조금 harsh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물론 "질문자분의 실력이 중학생을 아득하게 넘어섰기 때문에, 학부 수준의 기준을 적용하겠다"와 같은 생각으로 이런 말씀을 하신 거면 말이 되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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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저의 요구 사항이 과도하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지만 제가 말하는 '좋은 독자 되기'가 '타인의 말을 경청하기'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제가 이 조건을 만족해야만 여기에 질문을 남길 수 있다고 강제하는 것이 아님도 알아주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그런 생각을 가졌다면 굳이 다른 번역서를 뒤져가면서 댓글을 작성하지도 않았겠죠.

'좋은 독자 되기'와 '타인의 말을 경청하기'는 굳이 철학자만이 아니라 민주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다 가져야 할 덕목이고, 이는 나이를 불문하고 계속 연습해야 할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도 연습하고 있는 부분이구요. 이러한 연습은 학부에 입학한 대학생 정도 되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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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에서 조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전 중학생은 이런 연습을 하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 중학생에게 요구를 하기에는 조금 과도하다라고 말하고 싶은 거에요. 말씀하신 부분들은 중학생이든, 초등학생이든 연습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초중학생들에게 요구하기에는 조금 어렵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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