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프라센의 과학철학과 종교관에 대한 단상

"법칙이라는 개념은 필연성을 함축합니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그 개념은 왜 사태가 그 방식대로 일어나야만 하는지를 설명하도록 되어있죠. [그런데 저와 같은] 경험주의자들은 말합니다. 사태는 그냥 일어난다고요. 왜 사태가 그 방식대로 일어나야만 하는지 설명하는 것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많이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저에게 반 프라센은 항상 관심이 가는 과학철학자에요. 학부 시절에 지식사회학에 많은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저도 반 프라센처럼 과학적 지식의 성립 과정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을 좋아하고, 경험주의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과학의 필연성이 따로 보장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요.

한 마디로, 과학이란 단지 서로 경쟁하는 여러 가지 이론들 중에 '실용성'이 있는 것들이 살아 남아서 선택된 결과물들이라는 거죠. 과학의 발전 과정에도 일종의 진화론적 자연 선택이 적용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생물종이 특정한 합목적적인 결과를 향해 진화하지 않는 것처럼, 과학적 지식의 체계라는 것도 단지 현재 실용성이 있는 이론들의 집합이라는 거에요. 과학은 실재의 구조나 필연적 법칙 따위와 별로 상관이 없다는 거죠. 이런 반 프라센의 입장은 흔히 '구성적 경험주의'라고 불려요.

그런데 반 프라센이 자연법칙과 종교에 대해 인터뷰한 몇몇 유튜브 영상들을 보니 더욱 호감이 가네요. 반 프라센은 성인이 되어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해요. 과학철학자가 실존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것도 흥미롭고, 과학법칙을 근거로 내세워 종교를 판단하려는 태도가 범주의 오류라고 지적하는 점도 훌륭하고, 종교적 진술과 물리적 진술 사이의 대립이 거짓된 대립이라고 하는 것도 인상적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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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프라센의 종교관은 잘 몰랐는데 재밌네요. 근데 실존주의 영향을 언급한 것도 그렇고, 아마도 반 프라센의 종교관은 결국 일종의 강경한 신앙주의에 봉착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소위

"닥치고 계산이나 해라!"

에 가까운 (물론 구성적 경험론을 과학적 도구주의랑 도매금으로 넘기는 폭언을 퍼붓는건 무척이나 찔립니만 ...) 강경한 경험론적 과학관을 견지하는 동시에 신앙을 함께 조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결국에

불합리하기에 나는 믿는다

비스무리한 종교관을 갖는 것이 최선인듯 하니까요.

종교철학에 대해 아는게 희박하기에 여러분들의 말씀을 듣고 더 배우고 싶습니다만, 이런 신앙주의라는 귀결 자체가 갖는 신학적, 그리고 철학적 의의를 따져보는 것이 곧 반 프라센의 종교관을 헤아리는 것과 함께 가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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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위 영상을 보고 wildbunny 님과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현상의 원인을 따지는 게 과학이고 '원인성'의 개념을 따지는 게 철학이라고 한다면, 국지적 원인도 없는 마당에 전반적 원인이라 일컬어지는 신을 상정하기도 어렵겠죠.

역사적으로 보면, 반 프라센의 입장은 자연의 이해 가능성과 초월 세계의 이해 가능성을 반비례 관계로 이해한 신플라톤주의로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세계가 이해하기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신에 대한 의지가 강해진다는 식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정신학은 신앙주의와 꽤 가까운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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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 같아요! 사실, 제가 강경한 신앙주의자라 반 프라센의 논의에 더 동의가 되는 것 같기도 해요.

그런데 이 ‘신앙주의’라는 용어와 “불합리하기에 나는 믿는다.”라는 표어가 너무 급진적이라, 신앙주의가 본래 의미보다 좀 더 과격하게 들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요. 신앙주의는 결국 종교적 믿음이든 다른 어떤 믿음이든 정당화의 끝에 이르러서는 일종의 ‘선택’과 ‘결단’의 문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입장이잖아요. 그런데

(a) 정당화가 결국 어딘가에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주장 자체는 (물론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긴 해도) 인식론의 아주 고전적인 주장이고,

(b) 이런 입장은 최종적 토대 역할을 하는 믿음을 강하게 신뢰하는 만큼이나 그 믿음이 매우 자의적이라는 사실도 인정하기 때문에,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자기 객관화를 매우 잘 수행하는 입장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신앙주의를 주제로 이런 글을 써본 적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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