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골적으로는 "출신 학부가 교수 임용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냐"라는 질문 같습니다. 글쎄요, 그게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는 답할 수가 없습니다. 불편한 이야기이지만 아마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죠. 학문도 사람이 하는 일이고, 학계는 작은 사회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출신 학부가 임용에 무슨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닙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교수 임용에는 연구 분야, 연구 업적 등 출신 학부 따위보다 훨씬 중요한 요인들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런 유의 질문에 대해서는, 영향이 없는 것도 아니고 무지막지한 것도 아니라는 뻔한 답변밖에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교수 임용 시장, 특히 철학 교수 임용 시장은 학부 학벌 운운하는 것이 무안할 정도로 그냥 처참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철학 연구자가 되려는 사람의 시점에서는 1번과 같은 물음을 던지는 것이 별 의미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일단 고등학생이라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일밖에는 선택지가 없을 테고, 학부에 입학한 후라면 이것을 가지고 고민해 봐야 달라지는 바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러저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철학이 좋으면 하는 거고, 빨리 취업해서 먹고 사는 게 더 좋다면 안 하는 거죠.
2. 말씀대로 열정과 노력도 중요하고, 재능도 어느 정도는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엘리트 천재 상위 0.0001%만 철학자가 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진지하게 직업으로서의 철학에 발을 들인 사람 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철학, 특히 칸트 같은 고전 철학의 경우에는 얼마나 시간을 들여서 텍스트를 꼼꼼히 읽고 관련 해석과 연구들을 잘 파악하고 있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사사했던 선생님들 모두 입을 모아 철학은 엉덩이 제일 오래 붙이고 있는 사람이 이기는 학문이라고 말씀하셨고, 제 경험상으로도 그런 것 같습니다. 철학은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끈기가 있고 성실하지 않으면 잘하기가 아주 힘든 학문 같습니다.
2번의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다음 링크의 글들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 기본적으로는 아주 많이라고 답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방법은 여러 가지 있습니다. TA를 하시거나, 혹은 뛰어난 연구 성과를 내서 장학금을 받으시거나 할 수 있습니다. 박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고, 더구나 박사의 경우에는 학교 밖에도 여러 장학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철학 공부에는 매우 돈이 많이 들지만, 부유한 집 자제들이 아니라도 철학 공부를 많이들 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 중 하나입니다.
4. 본격적으로 철학을 전공해서 그쪽 용어에 익숙하신 게 아닌 이상 어렵다고 느끼는 게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것은 경제학 비전공자가 수식으로 가득한 고급 경제학 이론들을 어렵다고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그런 책들을 고작 한 번 훑어보고서 이해가 잘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이상한 사람이죠(속칭 "도사"들 중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학원은
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이해해보고 싶은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고 봅니다. 학부생 때 『존재와 시간』이나 『순수이성비판』을 떼는 사람은 지구상에 없을 겁니다. 『존재와 시간』, 『논리철학논고』, 『차이와 반복』 같은 책들은 관련 전문 연구자들도 머리 싸매면서 읽는 책이고 매년 이 책들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쏟아지는데, 그런 책들을 "떼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요.
써놓고 보니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결국 결정을 내리시기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질문자께서 얼마나 철학을 좋아하느냐인 것 같네요. 좋아하는 학문이 인기도 많고 전망도 좋으면 좋겠지만, 슬프게도 그렇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본인의 관심과 현실적인 조건들을 잘 저울질하셔서 만족스러운 선택을 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