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리뷰: 윤유석, 「사용 이론과 회의주의를 넘어서」

…였는데 제대로 된 리뷰이기에 실패했네요. 원래는 이런 걸 예상한 게 아니었는데. 본래는 논문 전반을 다루려고 했지만 결국 특정 문제에 집중했습니다(그렇게만 해도 분량이 터져나왔습니다). 그냥 읽으면서 든 생각, 그리고 최근에 하고 있는 생각의 공개적 정리로 봐 주세요. 쓰는데 도합 몇 시간 정도밖에 안 들인 글이라 정리가 안 되어 있고 오류가 많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윤유석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오스틴, 브랜덤, 크립키, 쿠쉬, 해커, 카벨, 맥도웰의 해석을 둘러보고, 카벨과 맥도웰의 정적주의적 해석이 주석적으로 올바르며 철학적으로 설득력 있다고 주장합니다. 달리 말해, 저자는 오스틴, 브랜덤, 크립키, 쿠쉬, 해커의 해석을 주석적-철학적으로 비판합니다. 이 글은 그 중에서도 크립키와 쿠쉬의 회의주의적 해석에 관한 저자의 비판이 적중했는지를 짚어 보고자 합니다.

먼저, 회의주의적 해석이 주석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은 솔직히 크립키 본인마저도 다소간 인정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명백합니다. 크립키의 해석이 훌륭한 해석이 될 수는 있을지라도, 결코 적절한 주석이 될 수는 없는데, 크립키의 책은 『철학적 탐구』의 구절들을 다룸에 있어 수많은 오류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해당 논문에서 주석적 부적절성을 비판하는 것은 아주 간략하게 제시되지만, 이미 이에 관한 연구들이 몇 천 페이지 분량으로 존재하는 마당에, 논문의 주제와 그 흐름상 이 정도에 그쳐도 충분할 듯 싶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 사안은 넘어가겠습니다.

충분하지 않은 것은 회의주의적 해석이 철학적 관점에서 설득력이 없다는 비판입니다. 저자는 회의주의적 해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회의주의로 해석하는 입장은 진리 조건을 대체하기 위해 ‘언명가능성 조건’이라고 일컬어지는 새로운 화용론적 조건을 구성하고자 한다. 이러한 조건을 찾고자 하는 시도는 사용 이론에 제기되는 대부분의 비판에 동일하게 직면할 수밖에 없다.”

“특별히, 회의주의가 언명가능성 조건을 통해 과연 자신이 제시한 회의적 역설을 해결할 수 있는지는 매우 의문스럽다.”

회의주의적 해석은 언명가능성 조건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 조건은 어떻게 제시되는 걸까요? 회의적 역설을 해결하기 위해 제시됩니다. 회의적 역설에 대한 해결책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회의적 역설이 견지될 수 없음을 입증함으로써 회의주의를 논박하는 직접적 해결책이고, 다른 하나는 회의적 역설을 논박할 수 없음 (즉 우리가 일상 언어를 회의주의로부터 방어하려고 하더라도 방어할 수단이 없음 )을 인정하면서도, 회의주의를 논박하지 않고서도 언어는 적법하게,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음을 보이는 회의적 해결책입니다. 크립키의 해석적 주장은, 비트겐슈타인이 회의적 역설을 온전히 수용하면서도 언어의 적법성을 구제하기 위해 언명가능성 조건을 도입하였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언명가능성 조건의 도입이 새로운 화용론적 조건의 도입에 준하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사용 이론에 제기되는 대부분의 비판에 동일하게 직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언명가능성 조건의 도입이 회의적 역설을 해결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회의주의적 해석을 비판하는 것에 미치지 못하며 , 단지 회의적 해결책이 틀렸다는 말에 불과합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요?

크립키가 비트겐슈타인에게 귀속한 회의적 해결책이 철학적으로 틀렸다는 비판은 다음의 사항들을 밝혀 줍니다.

(i) 크립키의 해석에 따라 이해한 비트겐슈타인은 회의적 역설을 끝내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 (“크립키에 따를 때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한 해결책”이 틀렸으므로)

(ii) (i)에 의하면, (크립키의 해석에 따라 이해한) 비트겐슈타인은 회의적 역설을 수용하면서도, 그것을 우회하여 일상 언어의 적법성을 보이는 데 실패했습니다. 즉, 이렇게 이해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철학적으로 충분히 설득력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

(iii) (ii)에 의하면, 만약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보다 설득력 있는 철학적 입장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크립키의 비트겐슈타인 해석은 최대로 자비로운 해석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항들이 밝혀진다고 해서, 회의주의적 해석에서 제시하는 회의적 역설이 논박되거나 해결되나요? 전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오히려 (ii)에 근거하여 비트겐슈타인이 회의적 역설을 잘 제기했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평가가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자비로운 해석은 아닌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가능한 자비로운 해석의 옵션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ㄱ) 비트겐슈타인이 회의적 해결책으로 다른 설득력 있는 것을 제시했다거나, ㄴ) 비트겐슈타인이 회의적 역설에 관한 직접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거나 ㄷ) 비트겐슈타인이 회의적 역설이 발생하지 않음을 보여줬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여기서 ㄷ)을 제외하고 ㄱ), ㄴ)은 회의주의적 해석의 철학적 요지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합시다. (지금 우리의 문제가 주석적 문제가 아님을 염두에 둡시다.) 즉, 회의주의적 해석 자체를 철학적으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철학적으로 회의적 역설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야만 합니다. 만약 철학적으로 회의적 역설이 애초에 발생하지 않음을 보이지 못한다면 , 저자의 비판에 따른다 하더라도 회의주의적 해석에는 아무런 근본적인 문제가 없습니다 . 그냥 (크립키가 해석한) 비트겐슈타인의 해결책이 틀린 것입니다.

저자는 사용 이론 해석과 회의주의적 해석을 비교하면서, 두 해석이 모두 “언어의 의미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전제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런데 회의적 역설이 언어의 의미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전제한 후에야 발생하나요? 저자는 회의주의적 해석을 “언어의 의미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이 회의적 역설을 통해 무너진다는 주장”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사용 이론 해석자들과 달리, 크립키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언어의 의미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 (예컨대 진리 조건 의미론 등)을 먼저 제시한 뒤 그것이 회의적 역설을 통해 무너진다고, 그래서 그 조건을 언명가능성 조건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 오히려 제가 생각하기에 크립키의 논의에 관한 가장 중립적인 이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의미-구성 사실을 제시하려는 시도는 죄다 실패한다. 그렇게 의미-구성 사실이 존재한다고 할 수 없으면, 의미함-사실조차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고, 그로써 우리는 의미라는 것이 (사실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회의적 역설에 이른다. 의미에 관한 사실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회의적 역설을 수용하면서도, 말의 의미를 어떤 “존재자”나 “사실”에 호소함으로서 성립한다고 보는 대신, 공동체 내에서의 언어실천행위의 역할을 통해 문장의 사용에 관한 정당화 조건(언명가능성 조건)을 수립함으로써 우리의 일상적 언어의 의미와 그 적법성(에 관한 감각)을 구제할 수 있다. 크립키의 논의를 이렇게 이해하면, 회의적 역설은 어떠한 언어 의미의 성립 조건에도 중립적인 방식으로 발생합니다. 만약 회의적 역설이 옳다면, 우리는 언어의 의미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을 찾아야 마땅합니다 . 그냥 내버려두면 회의주의적 결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잖아요? 철학자는 회의주의에 응답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럴 순 없죠. 만약 의미 성립 조건을 찾는 과제가 부적절하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회의적 역설이 애초부터 발생하지 않음을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회의적 역설이 어떤 특정한 의미 성립 조건에 의존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님을 저는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제 주장이 틀렸거나(그리고 이는 이 논문이 성공적으로 보이는 내용이 아닙니다), 적어도 언어의 의미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을 찾고자 하는 시도를 “극복”한다고 해서(이것이 극복인지, 중단 ∙단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회의적 역설이 해결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걸까요. 저자에 따르면, 논문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정적주의적 해석가들은 회의적 역설이 애초부터 발생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카벨은 크립키가 제시하는 역설이 정말로 회의적인지 잘 모르겠다고 털어놓으며, 언명가능성 조건을 통해 언어에서의 일치를 인증하고 성취하려는 시도가 본래의 역설이랍시고 제시된 것보다 훨씬 더 회의적이라고 말합니다. 카벨에게 있어, 우리가 일치한다는 것보다 우리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더 도그마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일치한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사실이 없다는 것은 회의주의자의 발견이라기보다는 회의주의자의 요구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이러한 카벨의 논의가 회의적 역설이 애초부터 발생하지 않음을 보여주나요? (물론 여기서 제 카벨에 대한 요약은 논문에 등장하는 요약과 내용상 다릅니다. 그럼에도 동일한 글에 대한 요약이니까 유의미하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카벨 본인도 언급하지만, CHU에서 카벨의 전략은 크립키의 해석을 직접 논박하는 것이 아니라, 크립키의 해석의 대안을 보여줌으로써, 그 대안과의 비교를 통해 크립키의 해석이 그저 맞을 수 없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카벨은, 회의적 역설이 발생하지 않음을 논증하는 것이 아니라, 회의적 역설이 발생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회의적 역설이 발생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음 정도만 보여줍니다. 이렇게 양쪽의 이해가 모두 가능한 선택지라는 것이 보여지면 이 선택의 가능성이 대체 무엇 때문에 어떻게 열려 있는가 , 그리고 회의적 역설이 발생한다고 이해할 때 우리는 무슨 생각에서 정확히 무엇을 부정하게 되는가를 포착하는 것이 주된 목표인 셈이죠. 그래서 전 크립키에 대한 카벨의 응답이 논박으로서는 실패한다고 봅니다. 나아가 이게 논박으로 의도되지도 않았다고 봅니다. 그럼 왜 카벨은 이 정도에서 만족하는 걸까요? 그건 처음에 카벨이 크립키 비판을 가볍게 할 만한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카벨의 크립키에 대한 비판은 『This New Yet Unapproachable America』에서 처음 짤막하게 등장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냥 가볍게 비판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본격적으로 원고를 준비하다 보니까 이게 한두 군데를 지적한다고 반박을 할 수 있는 그런 해석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크립키의 비트겐슈타인 해석은 카벨에게 있어 주제적으로 등장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CHU에서도, 에머슨적 완벽주의를 구성하는 주제적 과업에 있어서, 일상에서의 일치에 관한 논의를 하기 위해 크립키와 자신의 견해를 대조하는 단계를 거쳤을 뿐입니다. 각설하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카벨은 회의적 역설이 애초부터 발생하지 않음을 논증하는 데 성공한 적이 없는 것은 물론, 그것을 논증하는 걸 시도한 적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카벨의 일차적 목표는 크립키가 제시하는 역설과 그 해결책이 비트겐슈타인의 것이 아님을 보이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는 주석적인 문제의식에 입각했단 뜻이지요. 카벨은 이를 통해, 크립키의 논의가 일상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몰두를 극도로 저평가하고 외면함으로써, 일상을 저평가하고 외면하려는 철학의 맹렬한 욕망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몰두를 크립키의 설명이 외면함을 보여주려 합니다. 카벨의 논의 구도를 정확히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어 재구성하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작업입니다. 그리고 저는 카벨의 논의가 그렇게 재구성되는 것이 그다지 철학적으로 유익하다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솔직히 제가 카벨을 이해하기에는, 크립키가 제시하는 회의적 해결책은 거부하더라도 회의적 역설(이라고 제시되는 내용)을 단순히 잘못되었다고 거부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물론 주석적 논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석적으로는 당연히 아주 틀렸다고 하겠지요.). 아무튼, 이는 논문에 나오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논의를 요하는 사항이라는 점만은 확실합니다.

맥도웰은 회의적 역설이 규칙을 따를 수 있기 위해서는 각각의 단계를 이행할 때마다 해석이 요청된다는 전제에 의존하여 발생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해석이 아닌 규칙에 대한 직접적 파악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이 같은 주장의 결론은, 우리가 특정한 규칙에 대한 해석을 정당화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규칙에 대한 직접적 파악을 통해 언제나 이미 규칙을 잘 적용하고 있으며, 규칙을 해석해야 하는 몇몇 상황을 제외하고서는 규칙의 해석도, 그 해석의 정당화도 요청되지 않습니다. 근데 저는 크립키가 맥도웰이 제시하는 전제를 받아들인 채로 회의적 역설을 제시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맥도웰이 제시하는 전제는, §201에서 제시되는 역설을 주장하는 대화 상대자가 전제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는 크립키가 §201을 오독했다는 주석적 비판은 될 수 있어도, 그 자체로 크립키의 논의가 틀렸음을 보이기에는 부족합니다. 또, 규칙과 규칙의 적용을 분리하는 잘못은 아마 셀라스에 의해 제시되는 규칙 따르기 문제와 관련해서 보다 의미가 있을 듯한데, 과연 이것이 크립키에게도 씌울 수 있는 혐의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201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행위 방식하나의 규칙에 의해 결정될 수 없을 것이라는 역설을 제시합니다. 이것이 문제라면, 여기에 대한 맥도웰의 비판은 그럴듯합니다. 그런데 크립키는 제시하는 역설은, 어떠한 규칙하나의(혹은 유한한) 행위 방식에 의해 결정될 수 없을 것이라는 역설입니다. 비슷해 보이고, 실제로도 어느 정도 비슷한 흐름에서 이뤄지는 논의이지만, 이 특정 구절만 놓고 본다면 그 초점이 완전히 다릅니다. 바로 전 문단인 §200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초점이 잘 드러나는 사례가 나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체스판 위에서 말들을 옮기는 행위들 대신, 소리를 지르거나 발을 구르는 행위들로 바뀐 체스 게임을 하는 원시인들을 상상해봅니다. 우리가 어떤 권리로 이 사람들이 체스를 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 그렇게 말하려면 이 원시인들의 행위를 체스의 한 수로 "해석"해야 하지 않나? 근데 만약 이렇게 해석이 개입한다면, 어떤 행위가 무슨 수인지 맘대로 해석해서 체스 규칙과 일치하도록 맞춰질 수 있지 않나 ?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질문이고, 이것이 역설입니다. 근데 크립키의 영향 때문일까요, 아무도 §201을 제대로 읽는 학자가 없고 죄다 크립키의 후광 아래에서 이 구절을 해석하고 끌어다 씁니다. 근데 크립키는 ‘역설’이라는 표현만 보고 신나서 인용했을 뿐인 거고, §201은 실은 완전 다른 얘기였던 거죠. 사실 꼭 크립키 영향이 아니어도, 특정한 어떤 구절에서의 비트겐슈타인의 문제의식과 그 논의 흐름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전 지구상은커녕 역사상으로 봐도 많지 않다고 주장합니다(저라고 이 주장에서 완전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책이 세상에 나온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들 비트겐슈타인을 재구성하는 데 급급해 활자를 감상할 뿐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201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문제의식과 크립키가 제시하는 회의적 역설은 분명 초점이 다릅니다. 크립키가 제시하는 회의적 역설과 그나마 많이 관련된 『철학적 탐구』의 구절들은, §185, §§206~208, §211, §213, §§217~219 §§240~242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은, 『철학적 탐구』의 어떤어떤 구절들에 호소하는 것으로는 회의적 역설을 정확히 다룰 수 없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은 크립키와 동일한 방식으로 문제를 구성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크립키는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해석을 어느 정도는 염두에 두었는데, 비트겐슈타인을 크립키의 문제의식에 맞게 재구성해야만 그 역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를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많은 분량을 요합니다. 여기선 못 해요. 전 못해요.

우리는 회의적 역설의 도입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크립키는 이상한 회의주의자를 도입해, 내 과거 규칙 따르기에 대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그 회의주의자가 말하는 상황을 가정합니다. 이때 나는 이러한 회의주의자에 맞서 무엇을 제시할 수 있나요? 크립키가 묻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무슨 사실을 댈 수 있나요? 결국 나의 옳음을 방어하기 위해 그것을 구성하는 사실에 호소하는 모든 시도가 실패한다는 것이 크립키의 주장입니다. 그러면 의미 관련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크립키가 제시하는 회의적 역설은, 맥도웰 식으로(즉 §201의 용어법으로) 말하자면, 해석의 사실적 정당화가 근원적인 차원에서는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크립키는 본인의 논의가 인식론적이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건 크립키가 ‘인식론적’이라는 용어를 심리적인 것에 한정해 좁게 써서 그렇다고 봅니다. 내가 현재 규칙 따르기에 관해 확신하거나 의심하거나 이런 문제가 아니라는 뜻에서 이 논의는 인식론적이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에 관해 확실하다고 보장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크립키의 논의는 분명, 회의주의자 앞에서 근거-사실을 제시할 수 있는지의 문제입니다. 이상한 회의주의자가 단지 레토릭에 그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크립키는 분명 의미를 규범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내가 호소하는 사실은 현재의 적용을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적용의 근거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해도 되려나요? 그것이 된다면, 이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는 인식론적인 측면도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회의주의가 충분히 전개된 이후에는 그저 인식론적인 회의주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회의주의적 함축까지 가지며, 이 형이상학적 회의주의적 함축이 보다 핵심적이라는 데 저는 동의합니다.) 그러고 나서 제시되는 회의적 해결책은, 성향에서의 일치 자체가 정당화 조건으로 제시됨으로써 의미가 해명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맥도웰의 주장과 얼마나 다른가요? 맥도웰이 “직접적 파악”을 말하는 곳에서, 크립키는 정당화의 실패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때 정당화 시도는 본인이 직접 요청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이상한 회의주의자라는 타자에 의해 요청됩니다. 그럼 맥도웰은 크립키와 달리 이상한 회의주의자 앞에서도 본인의 “직접적 파악”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말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직접적 파악에는 정당화가 필요 없다고 말하겠지요. 근데 그러면, 정당화를 하려고 하면 실패한다는 거랑, 정당화가 필요 없다, 즉 할 게 없다, 안 해도 된다는 거랑, 얼마나 다른가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공감하지 않는 분들이 보기에는 후자는 전자에 대한 나이브한 독단적 반대처럼 들릴 겁니다. 저는 전자와 후자가 동일한 사태를 가리키며 후자가 보다 나이브한 제시 방식이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크립키는 회의적 해결책에서는 다소 잘못되었을지라도 회의적 역설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는 정말로 탁월했습니다. 이걸 제대로 보일려면 또 엄청 많은 분량이 필요하겠지요. 크립키의 입론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크립키의 논의에만 집중하여 그것을 철저하고 정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말을 해야겠습니다. 맥도웰이 자주 하는 논증 방식, 즉 서로 반대되는 철학적 주장을 딜레마의 양 축으로 놓고 그 둘이 공통으로 전제하는 무언가를 상정한 뒤 그것만 쏙 제거한 제3의 길을 본인이 추구한다는 방식은 정말로 나이브합니다.

맥도웰의 논의 초점은 정확히 무엇인가요?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해석인가요, 크립키에 대한 논박인가요? 제 생각은, 맥도웰은 이걸 엄밀하게 구분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저는 이게 많은 비트겐슈타인 연구자들이 똑같이 범하는 실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저는 이것이 비트겐슈타인 연구자들이 비트겐슈타인의 무지성 추종자로 여겨지는 원인 중 하나라고까지 주장하는 바입니다. 회의주의적 해석가들의 (주석적 주장이 아닌) 철학적 주장은, 회의적 역설이 발생하며 회의적 해결책으로 문제를 타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크립키 본인이 철학적으로 이런 견해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그건 저야 모르죠. 이미 떠나 버린 이상 남은 원고가 없다면 아무도 모를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주석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음은 누구나 동의하리라 믿습니다. 그럼에도 두 가지 문제가 남습니다. 첫째는 회의주의적 해석가들의 주장이 철학적으로 옳은지입니다. 둘째는, 회의주의적 해석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부합하는 해석인지입니다. 전자를 철학적 문제의식, 후자를 해석적 문제의식이라고 하고, 이와 구분되는 세 번째 분류로 주석적 문제의식을 제시하겠습니다. 해석적 문제의식은, 분석철학같이 특정 철학적 문제가 제시되고 그 문제에 대해서 연구자들이 고려할 만한 사례들/이유들과 연구자들이 취할 수 있는 가능한 옵션들이 명시적으로 나열, 분류 가능한 경우에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대개 각 주장의 정교화가 주된 문제가 되거나, 아니면 아예 문제 틀을 뒤엎는 논의를 가져와야 생산성이 생기지요. 그러나, 한 철학적 견해가 있고 그것에 도달하는 알려지지 않은 경로가 여럿 있을 수 있다면, 주석적으로 완전히 틀렸더라도 그 철학에 부합할 수는 있어 보입니다. 회의주의적 해석이 철학적으로 설득력이 없음을 보이려면, a) 철학적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회의주의적 해석가들의 주장이 철학적으로 틀렸음을 보이거나, b) 철학적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이 철학적으로 옳다는 것을 보임과 동시에 해석적 문제의식에 입각해 회의주의적 해석가들의 해석이 이 옳은 철학에 부합하지 않음을 보여야 합니다. 이때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옳음을 완전 다른 주제에 대해서 논증해 놓고, 이 주제에서 해석적 논의를 진행하면 그건 잘못된 것이겠지요. 단일한 주제에 대해서 두 사항을 동시에 밝혀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사실 a)와 b)는 서로 다른 선택지가 아니라 내용상 똑같은 얘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굳이 둘을 구분한 이유는 뒤이은 내용과의 대조를 위해서입니다.) 근데 대부분의 비트겐슈타인 연구자들이 하는 짓은, c) 철학적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이 철학적으로 옳다는 것을 보임과 동시에 주석적 문제의식에 입각해 회의주의적 해석가들이 주석적으로 틀렸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제일 큰 문제가, 철학적 논의영역에 관련된 논증들이 죄다 주석적 논의에 입각한, 즉 비트겐슈타인의 구절들을 따오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지기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암만 같은 주장에 대한 참신한 다른 경로의 논증을 가져온다 한들, 그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책에 쓰인 내용과 다르다면, 비트겐슈타인 연구자들 대다수가 그것에다 대고 주석적으로 틀렸다고 “철학적으로” 공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 비트겐슈타인을 주석적으로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로 글을 마구 써대는 학자들의 책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이 전체적인 논의 지형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 연구자들은 그저 그의 카리스마에 매료되어 어쩌고∙∙∙∙∙∙ 하여 광신도마냥 비트겐슈타인을 추종할 뿐이다”라는 주장에는 분명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아주 밉지는 않습니다. (예전엔 좀 미웠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조심스럽지만 간단하게 말해 보겠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을 정말로 자기 것으로 만들어 그 정수를 제대로 깊이 있게 이해하고 거기서부터 자기 사유를 출발한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주석가란 사람들에게 비트겐슈타인은 종착지입니다. 다른 연구자들에게 비트겐슈타인은 종착지이거나, 제 나름의 종착지를 가는 와중에 보이는 창문 밖 풍경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을 거점으로 삼고 그것으로부터 진전을 추구한 사람은 정말 드문 것 같습니다. 전 크립키가 주석적인 측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아서 주석적으로 터무니없는 헛소리를 많이 했다고 생각하며, 비트겐슈타인을 거점으로 삼은 사람도 전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정수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으며 그로부터 시작해 나아갈 길을 보여 준,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하나라고 진지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이 철학적으로 옳은지에 관해서는 논증하려 시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위에서 주장한 바는, 회의적 역설에 관한 크립키의 해석이 주석적으로 틀렸을지라도 해석적으로 비트겐슈타인에 부합한다는 것입니다. 회의적 해결책은 그것이 사람들의 성향의 일치를 확인 ∙인증을 통해 그제야 비로소 언어가 성취된다는 모델이라는 점에서, 사람들이 삶의 형식에서 이미 일치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해석적으로 부합하지 않지만, 그러한 더밋적인 아이디어만 제거된다면 그래도 나름 비트겐슈타인에 부합하는 것으로 이해될 여지가 있습니다(이러면 과연 그것이 언어 의미의 “조건”이기는 한가 하는 논란은 있겠습니다만, 비트겐슈타인도 §240에서 사람들의 일치가 언어 작동의 토대라고 했습니다.). 그런 한 맥도웰은 부분적으로 틀렸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크립키에 대해서 말입니다.

같은 논지로, 회의주의적 해석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맥도웰의 정적주의를 옹호하는 저자의 논문은 나이브하다고 느껴집니다. 본 논문은 다른 여러 논의의 요약과 함께 맥도웰의 논의를 요약해 반복하고 그것을 옳은 것으로 전시할 뿐입니다. 맥도웰의 정적주의가 철학적으로 옳다는 근거로, 논문은 나머지 해석들은 잘못된 가정을 전제하는 반면, 정적주의는 다른 모든 철학적 입장들의 잘못된 가정만을 폭로한다는 것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크립키가 제시하는 회의적 역설은 다른 무슨 잘못된 가정을 전제해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크립키에 맞서 제시되는 맥도웰의 “직접적 파악”의 정당성이나 해커의 “의미의 한계”의 정당성이나 나이브한 건 매한가지입니다. 문제는 잘못된 가정을 자꾸만 도입하는 해석 vs 잘못된 가정을 폭로하기만 하는 해석, 이렇게 쉽게 도식화될 수 없습니다. 크립키의 비트겐슈타인 해석에 대해 나름 많은 연구를 읽어보았다고 생각하는데, 그간 너무 피상적으로 어설프게 다뤄졌습니다. WRPL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연구자의 심층적인 연구를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제 눈에는 이 논문은 새로운 피상적인 논의를 도입하는 것조차 아니고, 기존의 피상적인 논의를 가볍게 반복하는 듯 보입니다. 물론 본인은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면서, 해낼 열의도 없고 노력도 기울이지 않으면서 남의 성취를 몇 마디 말로 깎아내리는 것은 참으로 못난 심보이겠으나, 이 글의 요지가 평가절하가 아니라 후속 연구의 필요성을 제창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면 다행이라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8개의 좋아요

논문을 진지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전합니다. 쓰신 내용에 대해 하나하나 대답해드리기는 어렵지만, 몇 가지 포인트를 짚고 싶네요.

(1) 무엇이 자비로운 해석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부분에서 다소 오해가 있습니다.

첫째로, (i)과 (ii)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이란 단지 "크립켄슈타인은 회의적 역설을 해결하지 못한다."일 뿐, "크립키는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자비로운 해석을 제시하지 않는다."가 아닙니다. 즉, "실제 비트겐슈타인은 회의적 역설을 해결할 수 있지만, 크립켄슈타인은 실제 비트겐슈타인보다 못하다."가 아닙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분명히 해두고 싶은 점은, 저는 논문에서 "크립키의 비트겐슈타인 해석은 최대로 자비로운 해석이 아닙니다."와 같은 주장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둘째로, 예전에 voiceright님과 논쟁할 때에도 강조한 것이지만, 저는 무엇이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정확한 해석인지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저는 제 해석이 주석적으로 가장 올바른 해석이라고 확신하지만, 저에게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철학적 의의'입니다. 크립키가 비트겐슈타인을 '자비롭게' 해석하는지 해석하지 않는지는 저에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의 해석에 어떤 의의가 있는지가 중요할 뿐입니다.

(2) 크립키의 논의는 중립적이지 않다.

저는 이 부분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의미가 성립하기 위해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 그 해석이 성립하기 위해 다시 '해석의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 그 '해석의 해석'이 성립하기 위해 다시 '해석의 해석의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이 크립키가 받아들이고 있는 가정입니다. (이 점은 해커, 베이커, 브랜덤, 맥도웰 등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크립키를 비판할 때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크립키는 이 가정을 명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명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크립키의 논의가 중립적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크립키가 잘못된 가정을 은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은, 크립키의 회의적 역설이 그만큼 교묘하게 잘못된 철학적 문제에 걸려 들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할 뿐입니다.

(3) 카벨의 주장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카벨에 대해서는 텍스트를 다시 하나하나 살펴보아야 하는 번거로운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에 댓글만으로 다 다룰 수가 없지만, 저는 다음의 구절이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카벨의 관점에서 핵심이라고 봅니다.

만일 한 문화가 자기 자신에 대해 생산한 비판이 철학이라면, 그리고 철학이 본질적으로 이러한 비판을 향한 과거의 노력을 비판함으로써 전개된다면, 비트겐슈타인의 독창성은 도덕주의적이지 않은, 즉, 자신의 주변의 잘못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롭다고 상상하는 비판자를 남겨두지 않는, 그리고 주어진 진술이 거짓 또는 잘못이라고 논증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가 아니라, ​주장을 만든 사람이 그가 의미한 것을 알지 못한다고, 그가 원한 것을 진정으로 말하지 않았다고 보여줌으로써 전개되는 비판의 양태를 발전시켰다는 데 놓여 있다. (S. Cavell, Excursus on Wittgenstein’s Vision of Language”, The New Wittgenstein, eds. Crary A./Read R., London/New York: Routledge, 2000, 26 인용자 강조.)

이 부분을 voiceright님이 어떻게 이해하고 계신지가 궁금합니다. 특별히, 제가 강조 처리한 부분에서 "주장을 만든 사람이 그가 의미한 것을 알지 못"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voiceright님의 해석을 간략히라도 제시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4) 초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회의적 역설이 옳다는 주장은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제가 보기에는, 이 지점부터 voiceright님이 무엇인가를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우선,

이렇게 적으신 것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크립키는 '초사실'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올바르게 지적했습니다. 문제는, 크립키가 '초사실의 부재'를 '회의주의의 승리'로 이해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회의주의를 다시 패배시키기 위해 '언명가능성 조건' 따위를 도입해야 한다고 잘못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5) 침묵주의와 독단주의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의 문제 때문에 voiceright님은 맥도웰의 요지를 놓치고 있습니다. 아래 구절에서 오해가 드러납니다.

초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회의주의의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초사실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서로 다른 각각의 실천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각각 옳다고 받아들여지면 그만입니다. 이것은 문제도 아니고, 역설도 아니고, 단지 자연스러운 상황일 뿐입니다. 아주 단적인 예로, 짜장면과 짬뽕 중에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에 대한 '절대적 법칙'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딱히 ‘중화요리의 역설’ 따위에 빠지지 않는 것과도 동일합니다. 짜장면을 먹든, 짬뽕을 먹든, 아무 상관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나는 단지 이렇게 하고 있다."(PI, §217)라고만 말하면 될 뿐입니다. (즉, "나는 단지 짜장면을 먹고 있다. 내가 짜장면을 먹는데 딱히 '짜장면을 먹어야 하는 절대적 이유'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라고 말하면 될 뿐입니다.)

첨언하자면, voiceright님이 맥도웰을 바라보는 방식에는, 맥도웰에 대한 전형적인 오해의 양상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가령, <맥도웰, 테일러, 퍼트남의 거북했던 하루 >에서 퍼트남이 바로 voiceright님과 같은 방식으로 맥도웰을 읽고 있습니다.) 맥도웰은 "직접적 파악"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단지, 애초에 크립키가 말하는 상황이 '문제'나 '역설'로 받아들여질 필요가 없다고 주장할 뿐입니다. 즉,

(a) "초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크립키의 주장은 전적으로 참입니다. 맥도웰은 이 점을 결코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b) "초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역설에 빠져 있다."

라는 크립키의 주장은 틀렸습니다. 맥도웰은 이 점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저는 조만간 이 문제에 대해서 따로 논문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voiceright님뿐만 아니라, 국내외의 많은 철학자들이 저런 방식으로 맥도웰을 오독해서입니다. 제가 친하게 지내는 대학원 동기 중에서도 맥도웰에 대해 비슷한 문제제기를 한 분이 있어서, 여러 번 논쟁을 하였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예 개별 논문들을 하나하나 겨냥해서 글을 써볼까 계획 중입니다.

8개의 좋아요

대학원 저학년부터 출판을 계속 해야 임용이 쉽다고 들었는데, 그걸 실현하고 계시네요. 존경스럽습니다.

아 삭제하신 건가요? 반박이 설득력있게 들려서 YOUN 님의 재반박이 어떻게 이루어질까 궁금했는데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