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은 실용주의자인가? : 힐러리 퍼트남, ⌜실용주의⌟ (2)

로티와 비트겐슈타인

내가 방금(전편 참고) 말한건 리차드 로티와 정말 비슷하게 들릴 수 있다. 사실,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에서 로티는 자신의 생각을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연장선상에서 제시한다. 내가 방금 설명한 아이디어를 로티는 이렇게 본다 : 우리는 다양한 언어 게임을 가지고 있다. 언어게임에서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는 일련의 기준으로 결정된다. 예를 들면, 우리는 특정 언어 게임에서 "안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올바른 방법이 무엇인지 물어볼 수 있고, 민족지리학, 아이디어의 역사 혹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분석을 이용해 그 질문을 탐구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방법들은 언어 게임에서 단어 사용에 대한 특정한 설명이 될 것이다. 로티에 따르면, "특정 관심사에 비해 더 나은" 의미 말고 한 언어 게임이 다른 언어 게임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물론 로티는 우리가 언제나 새로운 언어 게임을 계속 만들어 나갈 것을 동의할 것이다. 적어도 로티는 그렇게 되길 바란다.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에 대한 로티식 해석의 영향력은 오늘날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나에게는 비트겐슈타인의 의미의 명료함 측면에서 꽤 거짓처럼 보인다. 로티가 노만 말콤같은 30년 전 비트겐슈타인 추종자들이 가진 생각과 가깝기는 하지만 말이다. 실은 내가 처음으로 철학을 시작했을때, 내 활동의 많은 부분을 말콤의 관점을 반박하는데 할애했다. 그리고 내 동료인 스탠리 카벨은 그게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이 전혀 아닐지라도, 말콤의 관점을 보여주려 굉장히 애썼다.

기준과 "프로그램"의 대조는 로티식 독해의 핵심이다. ⌜철학과 자연의 거울⌟을 출판한 이후로 로티는 그 책에서 자신이 "정상"담론이라 부르고,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용어인 "언어 게임"이라 부르는게 "알고리즘"이나 "프로그램"에 의해 통제되는 것으로 보았다. 우리가 "정상 담론" 속에 있거나 "같은 언어 게임을 실행"할때, 우리는 머릿속의 프로그램을 따르고 우리는 모두 동의한다. 이게 바로 로티의 풍경이다. 언어 화자들이 오토마타(automata)인 풍경은 굉장히 비트겐슈타인스럽지 않다고 나는 말하고싶다. 내생각에 로티는 언어 게임을 사실상 자동 수행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어떤 이성의 규범적 개념을 형이상학적인 헛소리라고 본다. 예를 들어 내가 더 나은 언어 게임과 더 나쁜 언어 게임이 있고, 인간의 이성이 하나의 능력이 아니라 어떤 언어 게임이 더 좋고 더 나쁜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많은 능력이라 말한다면, 로티는 "퍼트남은 결국 형이상학적인 현실주의자가 되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정말 이성이 (내가 아까 사용한 맥락에서) 한 언어 게임 안에서 말하는데 전혀 필요하지 않다면, 이성이 왜 우리가 때론 언어 게임을 포기하고 새로운 게임을 채택하는지 철학자들이 설명할때만 필요하다면, 이성은 의심스러운 관념이다. 따라서 "정상 담론"의 로티의 풍경은 그의 비-정상이거나 "해석학적인" 담론에 깊게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건, 이런 정상 담론의 풍경이 우리의 삶과 언어를 과장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모든 의미에서 하나의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용어같은걸 만들지 않고도 정말, 정말 자주 그들이 아는 "기준"에서 동의를 이끌어내지 못한다. 예를 들어, 로티와 나는 좋은 신문을 읽는 합리적인 사람들이 베트남에 아직 살아있는 미군 포로는 없다고 믿는다 생각한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일부 사람들은(이해를 돕자면, 베트남 전쟁 동안 실종자로 등재된 군인들의 친척같은 경우) 아직도 베트남에 미군 포로가 있다고 믿는다. 로티는 "객관성"이라는 개념이 이런 경우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할까? 양측이 "다른 언어 게임을 하고 있다"며 베트남에 아직도 미국 전쟁 포로가 있는지 여부에 대해 객관적인 사실이 없다고 말하려나? "베트남에는 미국 전쟁 포로가 없다"라는 문장이 "로티와 내가 하는 언어 게임에서는 진실"이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언어 게임에서는 거짓이며, 그것뿐이라고 말할 것인가? 머릿속 프로그램과 알고리즘의 개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만, 베트남에 아직도 미국 전쟁 포로가 있거나 없다는 관점은 확실히 비트겐슈타인이 믿었던 어떤 것과도 동일시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단순히 (계산 규칙처럼) 규칙을 따르는 문제가 아니며, 규칙이 언어의 "토대"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지적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규칙 자체는 우리가 "자연적 반응"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서 짚고싶은 요점은 다음과 같다 : 언어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모두 같은 것을 빨간색이라 부른다. 그리고 우리는 확실히 빨간색이 어떤 색인지에 이견이 없다. (우리가 "빨간색"이라 부르는 색이 정말로 빨간 색인지에 대한 회의적인 의심은 일관성이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떤 연산이 숫자에 하나를 더하는지에 이견이 없다.(여기서 나는 6광년 전의 숫자나 논리적 가능 세계의 숫자같은게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쓰고 더하는 숫자들을 생각하고 있다). 우리의 실제 일상 생활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경우에, 우리는 숫자에 하나를 더하는 것이 무엇인지, 혹은 숫자에 두 개를 더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견을 갖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2를 더하는 것"이라고 부르는 연산이 정말로 2를 더하는 것인지에 대한 회의적인 의심은 이상하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론"은 아니지만 이해에 대한 특정한 종류의 정신론적 신비주의와 싸우기 위해, "2를 더하라"는 규칙을 만드는 것을 걱정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일찍이 ⌜철학적 탐구⌟에서 이런 사례를 강조했지만, 그는 모든 언어가 계산 규칙같은 규칙에 의해 지배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는 가정은 부주의한 독해다. 비트겐슈타인이 언어가 다 그런 것은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한 구절을 인용한다. 그 맥락은 사람들이 누군가가 감각을 가진 척 하는지 여부에 의견 차이를 가진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철학적 탐구, 제 2부 xi, p.437; 나는 번역을 수정했다):

당신은 전혀 아무것도 이해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분명히 진짜라고 인정하는 것에 누군가가 의문을 품고 있을 때 사람들은 이와 같이 말하지만⏤그러나 우리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가 없다.
감정 표현의 순수함에 대해서 '전문가의' 판단이 존재하는가? 여기에서도 또 '보다 더 나은' 판단을 갖는 인간과 '보다 더 나쁜' 판단을 갖는 인간이 존재한다.
보다 좋게 인간을 아는 사람의 판단으로부터는 대체적으로 보다 올바른 예측이 나온다.
사람들은 인간에 통달한 지식을 배울 수가 있는가? 물론.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배울 수가 있다. 그러나 수업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그때 다른 사람이 그의 교사가 될 수 있는가? 분명히.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적절한 신호를 준다. 여기에서는 '배운다'는 것과 '가르친다'는 것이 그렇게 보인다. 사람이 외우는 것은 그 어떤 기술도 아니다. 사람들은 적절한 판단을 배우는 것이다. 규칙도 있지만 그것들은 체계를 이루지 않고 경험 있는 자만이 이들을 올바르게 이용할 수가 있다. 계산 규칙과는 달리.

여기서 우린 비트겐슈타인이 한 언어 게임 내에서조차 모든 사람이 볼 수 없는 진실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함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모두가 "헤아릴 수 없는 증거"(imponderable evidence)를 인지하는 법을 기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더 잘 말한다. 알고리즘의 실행과 같은 자동수행 언어 게임의 풍경에서 이보다 더 멀리 있는 것은 없다. (일반 지능을 포함해서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최종 분석" 알고리즘을 실행하는 문제인가에 대한 질문은 여기서 무시한다. 그건 아마 "수행 설명" 수준이 아니라 "역량 설명" 수준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질문들이 로티가 하는 일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에 대한 로티의 개념은 언어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동일한 행동을 유도하는 개념이지만, 일반적인 지능이 언어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 사이에 항상 동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언어 게임 내에는 더 낫거나 더 나쁜 성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이 더 낫거나 더 나쁜 언어 게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꽤 분명하다. 예를 들면, 그는 철학자들이 하는 언어 게임을 제약으로 여긴다 : 철학자들은 "그림의 손아귀에 있다". 따라서 그들은 말은 무의미하다. 동시에 그는 다른 종류의 비-철학 언어와 다른 종류의 비-과학 언어 게임, 특히 "원시"인의 언어 게임에 훨씬 더 관대하다. (그는 문맹인들이 단순히 과학 이전이나 사이비 과학 또는 미신의 단계에 있다는 일반적인 서구 진보주의자들의 견해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그가 "맞서려는" 원시 언어 게임과 그가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는 원시 언어 게임들이 일부 있다고 암시한다. 그는 예를 들어 불에 의한 시련을 언급한다.)

이를 종합하면,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로티의 독해는 한 언어 게임이 다른 언어 게임보다 더 나은 것은 없고, 이것, 또는 다른 흥미에 상대적으로 더 나은 것이 있을 뿐이며, 우리는 뉴턴의 물리학이 더 우수하다고 말할 수 없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이 틀렸고 뉴턴의 물리학이 옳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이론들 중 어느 것도 비트겐슈타인으로 읽혀선 안 된다. 나는 로티의 독해가 옳지 않지만, 그럼에도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의 실질적인 특징을 포착한다고 말하고 싶다. 비트겐슈타인은 내가 위에서 칸트의 다원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계승하고 확장한다. 그것은 어떤 하나의 언어 게임도 "진실" 또는 "우리의 일급 개념 체계" 또는 "현실의 궁극적 본성을 약화시키는 시스템"이라고 불릴 배타적인 권리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다. 말하자면 비트겐슈타인은 로티와 콰인의 차이를 갈라놓는다. 그는 콰인에 반대하는 로티에 동의한다. 과학 언어 게임이 진실을 말하는 유일한 언어 게임이며 실재를 묘사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로티와 달리 언어 게임이 더 나은 언어 게임과 더 나쁜 언어 게임이 있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참조

Hilary Putnam, Pragmatism-An Open Question, Blackwell, 1995, 32-38.

  1. 가독성을 위해 원문의 맥락에 따라 문단을 구분하고 글의 목적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괄호로 문단을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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