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nuyhnow님이 퍼트남을 옹호하신 바로 그 논리가 로티를 옹호하기 위해 그대로 다시 쓰일 수 있죠. 솔직히, 저는 로티의 대변자도 아니고, 퍼트남을 특별히 싫어하는 입장도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로 gnuyhnow님을 굳이 집요하게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로티/퍼트남의 관계가 상대주의/합리주의나 반실재론/실재론처럼 너무 단순하게 도식화된 나머지, 로티의 중요한 통찰은 간과되고 퍼트남의 결정적인 착각들은 무비판적으로 옹호되는 경우를 자주 접해서, 몇 가지 요점만 분명하게 하려 합니다.
(1) 상대주의와 반실재론에 대한 로티의 수많은 비판을 무시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로티는 정말 수많은 글들에서 상대주의와 반실재론을 비판합니다. 거의 '레퍼토리'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로티의 글에서는 로티 자신이 옹호하는 실용주의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상대주의나 반실재론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 구구절절하게 설명되어 있죠. 지금 이 댓글에서도 언급된 『실용주의의 결과』 서문에서부터, 퍼트남과의 논쟁에서 쓰인 “Hilary Putnam and the Relativist Menace”나 “Solidarity or Objectivity?” 등은 물론이고, (약간 과장하자면) 로티의 모든 글에서 이 주제와 관련된 논의가 반복적으로 나온다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 요지는 gnuyhnow님이 퍼트남을 옹호하시면서
라고 말씀하신 내용과 동일하죠. 여기서 '퍼트남'이라고 쓰여 있는 부분을 '로티'라고 바꾸면 거의 정확히 로티가 평소에 주장하는 내용이 됩니다. 형이상학적 실재에 대한 퍼트남의 비판은 호의적으로 해석하시면서 로티의 비판은 상대주의나 반실재론인 것처럼 규정하시는 것은 공평하지 않은 거죠.
특정 철학적 입장에 대한 해석이란 기본적으로 자비의 원칙(principle of charity)을 따라야 합니다. 상대편이 주장하고 있는 내용을 최대한 논리적으로 강한 형태로 만들어준 다음, 그 강한 입장을 공격해야 비판의 의의가 있는 거죠. 단순히 로티에게서 "The pragmatist does not think that there is anything like that [reality]."라는 구절을 떼어온 다음 로티를 반실재론자로 규정하고서 비판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사실 그다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규정은 로티가 자신의 입장이 상대주의나 반실재론이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제시했던 수많은 설명들을 모두 무시하고서, 단지 로티의 어구를 통해 (로티 본인은 실제로 어떤 입장이든지 간에) 반실재론을 가리켜보이는 걸 목표로 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만약 gnuyhnow님에게 로티가 단지 반실재론을 겨냥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사학적 명칭' 정도의 의미만을 지닌 철학자라면, (그래서 gnuyhnow님에게는 로티의 입장에 대한 상세한 주석 자체가 큰 흥미거리가 아니라면,) 저는 굳이 gnuyhnow님의 로티 이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희는 철학을 하는 것이지 문헌학을 하는 건 아니니까요. 다만, 적어도 로티를 그렇게 반실재론자로 규정해버리시면 로티의 실용주의에서 정말 많은 부분들을 놓치게 된다는 점은 염두에 두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로티를 전혀 반실재론자로 생각하지 않는 다른 입장들과 소통하실 때 굉장히 장애가 많을 수 있다는 점도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이게 바로 데빗 같은 형이상학자들이 퍼트남을 읽고서도 퍼트남에게서 아무런 중요한 통찰도 얻어가지 못한 채 그를 '반실재론자'라고 비난하는 이유죠.)
(2) 퍼트남은 비트겐슈타인의 대변인인가?
gnuyhnow님은
로티 ↔︎ 후기 비트겐슈타인(=퍼트남)
이라는 구도를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퍼트남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조차도 종종 상대주의로 몰아가곤 하는 철학자입니다. 특히, 퍼트남은 수학이나 논리학에 대한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 비판적이죠. (퍼트남의 입장은 시기에 따라 많이 변하는 데다, 또 제가 퍼트남과 비트겐슈타인의 관계와 관련된 모든 논문을 다 읽어본 것도 아니긴 하지만, 적어도 "Analyticity and Apriority: Beyond Wittgenstein and Quine"라는 논문이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유명합니다.) 퍼트남은 이성의 '초월적' 측면을 옹호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논리학이나 수학조차 사실 인간의 '삶의 형식'에 의존한다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납득할 수가 없던 거죠. 그래서 저는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퍼트남의 이런 비판이 바로
라는 입장에 대한 퍼트남의 비판적 태도에서 나왔다고 봅니다. 언어게임들을 넘어서는 객관성이나 합리성이 있다고 상정하려는 퍼트남의 태도 때문에, 퍼트남은 그런 객관성과 합리성을 거부하는 로티에게 비판적이고, 심지어는 자신이 근거로 삼고 있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에게까지 비판적인 거죠. (물론, 퍼트남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저런 주장을 비트겐슈타인을 통해 옹호하고 싶어하는 것 같지만요.)
더 나아가, 퍼트남은 오히려 이 점에서 (후기 비트겐슈타인보다는) 50년대 이후 분석철학의 대표적인 형이상학자이자 본질주의자인 크립키와 더 가까운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퍼트남이 크립키와 함께 '직접적 지시 이론'을 옹호했다는 사실과 '본질' 개념을 우리 시대 형이상학에 되돌려놓았다는 사실은 굉장히 유명하죠. 물론, 이언 해킹이나 코라 다이아몬드 같은 연구자들은 크립키의 본질주의와 퍼트남의 본질주의 사이의 차이를 다시 구분하고자 하지만, 일반적인 분석철학자들은 크립키와 퍼트남을 하나의 진영 안에 있는 철학자들로 보죠. (당연히, 크립키는 명시적으로 자신의 직접적 지시 이론으로 후기 비트겐슈타인을 공격한 걸로도 유명하고요.)
그래서 저는 퍼트남을 마치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대변인인 것처럼 철학적 진영을 그리시는 것이 그다지 적절하지는 않다고 봅니다. 물론, 퍼트남은 다른 많은 경우에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통찰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퍼트남이 후기 비트겐슈타인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철학자는 결코 아닙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논의를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합리성과 객관성의 근거를 찾고자 하는 인물에 가깝죠. 그래서 바로 이 점 때문에 로티와 부딪히는 거고 로티를 '상대주의자'로 규정하는 거죠.
- 첨언해서, 저는 퍼트남의 철학자 독해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퍼트남은 로티뿐만 아니라 자기 동시대의 다른 철학자들도 다소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아서요. 가령, 저는 퍼트남이 『존재론 없는 윤리학』에서 콰인의 '존재론적 개입' 개념을 잘못 설명했다고 봅니다. 또 퍼트남이 맥도웰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오해했다고 보고요.